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6일
우리는 관리들로부터 이른바 ‘협객’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협객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에게 그들이 가진 부정적인 이야기만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렇게 주관에 오염된 정보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겠으나,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 말고는 ‘협객’이니, ‘녹림당’이니 하는 것에 대해 입을 여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우리에게 해온 여러 가지 말들 중에서 ‘의견’이 배제된, 즉 객관적인 정보만을 어렵사리 주워섬겨서 정리를 해보자면, 그들은 ‘반 라스알게티’적인 정치성향을 가진 인물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즉, ‘부정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들의 정치 성향을 파악했으니, 그들의 행동성향을 파악할 차례였다. 이 역시 관리들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무장투쟁’ 혹은 ‘폭력적 노선’을 방법론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의적’이라는 라스알하게 특유의 민간 설화에서 모티프를 얻어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왔다. 이야깃 속 의적은 부자로부터 재물을 탈취해 그것을 가난한 민초들에게 나누어주는 행동을 해왔는데, ‘녹림당’은 그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물론, 부자라는 대상이 ‘친 라스알게티파’ 즉 ‘긍정파’의 인물들로 치환되긴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행동은 민심을 얻는데도 효과적일 뿐 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긍정파’가 이루어낸 부를 ‘부정한 것’으로 낙인찍는 프레임을 설득력 있게 유포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대외적으로는 긍정파의 목소리가 라스알게티 정가에 주로 울려 퍼지는데 비해, 라스알하게 민중들 사이에서는 부정파의 목소리가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다들 ‘녹림당’에 대한 언급을 피하면서 은연중에 그들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겠지.
어쨌거나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정규군’과의 전투의 방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친 민중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들은, 정규군과 정면대결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럴 이유도 없긴 했다. 백전 무패라는 다소 과장된 명성을 가진 이들과 정면대결을 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는걸. ‘녹림당’은 정규군과 정면대결을 피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라스알게티 지리에 밝다는 장점을 활용해, 매복 + 기습의 방법으로 정규군에 파상공세를 펼쳐왔다. 즉, 기습을 해서 정규군이 허둥지둥 하는 동안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때쯤에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전투는 산중에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마을에서도 이루어졌다. 시가지에서 그들은 민중을 가장하여 정규군에 접근한 뒤에, 폭약을 터트림으로써 피해를 주었다. 정규군이 대응을 하려고 치면, 녹림당원들은 민중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이러한 게릴라식 전술은 정규군으로서는 매우 짜증이 나는 일일 것이다. 누가 적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구분이 안되니 그들의 신경은 언제나 곤두설 수 밖에...... 결국 점령지에서 점령군으로서 그들은 지속적으로 민간인을 대상으로하는 불심검문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민중들의 불만을 사, 결국은 그들이 녹림당에 협조하게 되는 악순환의 일부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규군도 바보는 아니다. 하긴 바보들이었다면, 한낱 도시국가로 시작한 라스알게티가 어떻게 드넓은 대륙을 일통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정규군은 자신들이 인내할 수 있는 데미지를 주는 적이라면 전략적인 인내를 하지만, 선을 넘는다고 판단을 한다면,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해왔다. 그들은 ‘우리’만큼이나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는데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다. 관리들은 그걸 ‘청야전술’이라고 이야기했다. 정규군은 자신들에 대한 테러가 벌어진 횟수를 기준으로 마을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협조분자.’ ‘동요분자’, ‘적대분자’로 말이다. 그리고 이른바 적대분자 중에서 가장 극렬한 마을을 골라, 그 마을을 말 그대로 초토화 시켜버린 것이다. 다시는 그곳에서 인간이 정착할 수 없도록 마을을 불태우는 것은 물론이고 우물에 극약을 살포해버렸다. 경작지에는 소금을 뿌리는 일도 벌였다. 마을을 그렇게 만드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항의에는 폭력으로, 나아가 살인으로 이어지는 대응을 보였다.
이른바 본보기 효과라는 것인데, 내가 ‘라스알하게어’ 대신에 선택했던 ‘교육사회학’에서는 이를 ‘대리학습’으로 정의했다. 자신이 직접 자극과 반응의 연쇄로 학습을 하는 대신, 남이 받는 보상, 혹은 처벌을 관찰함으로써 특정 행동에 대한 대가를 학습한다는 것이다. 결국 녹림당은 서서히 거점으로 삼을 도시들을 하나 둘 잃어갔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는 것’ 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하니까...... 참으로 무식하지만 그런 만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작전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교육사회학’ 강사가 이것에 대해 언급을 했다면, 인간에 대한 그들의 깊은 통찰력에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결국 도시라는 거점을 잃은 그들은 산중에서 투쟁을 이어나갔다. 정규군들의 청야작전은 산중에서는 산중의 상황에 맞게 변형이 되었다. 산을 포위하고, 천천이 정상을 향해 쓸어 올리는 식으로 녹림당을 토벌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포위작전에도 불구하고, 산에 대한 지식이 많은 그들은 어찌어찌 병력을 수습해가면서 포위망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이 닿은 곳은 바로 지리산...... 복잡한 산세를 자랑하지만, 산맥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그곳...... 아마 그들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곳에 도착을 한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6일
로키군의 말을 듣고,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이곳에 도착을 했고, 지금은 한시가 바쁜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음...... 로키군?”
“왜?”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여긴 왜 온 거에요?”
로키군은 급박하니 서둘러야 한다는 자신의 말과는 달리,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진열대에 전시된 사탕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거...... 내가 이상한 거에요?
“라스알하게 출신의 전술 전문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급할수록 빙 돌아서 가라.’라고 말이야.”
“아니, 빙 돌아가는 것도 뭔가 관련성이 있게 빙 돌아가야죠. 지금 지리산으로 가는 거랑, 사탕을 고르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제 푸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꾸 하나 없이 여전히 진열장의 사탕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이거 나보고 답답한 여자라고 종종 말해놓고는....... 정작 자신이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답답하게 밍기적거리는 모습을 보이자면 내가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야, 이거 어때?”
“.......뭐가요?”
“이 사탕 말이야. 괜찮나?”
“아니 사탕이 달면 됐지, 어떻게 해야 사탕이 괜찮을 수가 있는거에요?”
제 지적에 그는 오히려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라고 툴툴거리며 집었던 사탕을 진열장에 집어넣었습니다. 이거 참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뜬금없이 이상한 행동을 할 거면 그에 대해 설명이라도 해줘야 이해라도 하지, 이건 무슨 근본도 없는 마이페이스냔 말이에요. 이전에 로키군이 알고 보면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었는데요, 이젠 그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답답한 건 그에요. 그것도 지독하게 말이죠.
“오늘 안에 출발하긴 하는 거 맞긴 한 거죠?”
“있어봐. 내가 찾는 게 있어야 출발을 하지 뭐.”
“찾는 게 뭔데요?”
“사탕.”
“아니, 그러니까 무슨 사탕 말이에요.”
“초록색인거.”
“아니 초록색 사탕 찾는 건 알죠. 눈이 있다면 당신이 계속 초록색 사탕이 담긴 진열장만 샅샅이 훑고 있으니까요. 제가 하는 말은 어떤 종류의 초록색 사탕을 원하냐 이거에요.”
“........”
“듣고 있어요? 여기 내 말 들어주는 사람이 없나?”
“이봐.”
“무슨 사탕을 찾는거여유? 제가 도와드릴라니께.”
우리의 실랑이가 꽤 커서 영업에 방해가 됐는지, 종업원분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종업원의 말에 로키군은 제 존재에 대해서는 싹 잊어버렸는지 종업원에게 자신이 찾는 사탕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특이한 모양의 사탕은 없나? 동그란 것들만 있어서 말이야.”
“알사탕이니께 동그런거쥬 뭘. 특이한 사탕이면 어떤 모양을 말 하는거유? 세모난거? 아님 뭐 물고기 모양인거?”
“나무 모양이면 좋겠는데.”
“나무라...... 손님 취향이 상당히 신선허시네유.”
“내가 채식주의자라서 말이지.”
근본도 없는 이상한 드립을 치는 동안, 종업원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의자를 딛고서 찬장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진열대에 놓기 위해 쌓아둔 사탕들이 한 가득이었어요. 종업원이 찬장을 뒤지며 로키군이 원하는 모양의 사탕을 찾는동안 저와 로키군은 그가 긍정적인 소식을 가지고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리고.......
“아, 여그 있어유. 이거 영판 안 팔려가지고 폐기헐려구 놔둔 건디 다행히 쓰레기통 들가기 전에 주인을 찾은 거 같네유.”
“음....... 그래 뭐 이정도면 얼추 내가 생각하는 모양하고 비슷한 것 같구먼. 얼마인가?”
“뭐 유통기한도 지나버렸는디 그냥 한 박스 드릴까유?”
“에이,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고하는데 공짜로 받을 수 있나. 소비자 권장가대로 가자고.”
“뭐, 그리 해주시면 우리 사장님은 좋아 허시겄네유. 1봉에 2파운드고, 총 20봉이 들어있으니께, 40파운드 내셔유.”
“그래 고맙다.”
사탕 한 박스를 들고서 좋아라하는 그를 보며, 저는 그가 무슨 정신이라도 나간게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Channel 1. 로키
우리는 사탕을 산 뒤에 종업원에게 ‘지리산’이라는 곳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종업원은 ‘지리산’이라는 단어에 잔금을 치르다 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에게 ‘거긴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그가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녹림당’과 정규군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무대이기 때문이겠지. 나는 종업원에게 산 너머에 있는 마을에 물건을 가져다 주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아아, 손님은 엘타닌에 들를 일이 있으신가부네유. 지가 그짝에 사는디...... 그나저나 지리산은 지금 완전 전쟁터여유. 정규군이 ‘녹림당’넘들 잡는다구 산을 이잡듯이 뒤지고 있으니께...... 거기다가 ‘녹림당’이 보통 놈들이간? 토벌 작전으로 ‘녹림당’넘 들도 많이 죽거나 다쳤다고는 혀두, 정규군들도 엔간이 디져븐다고 안혀유. 그 뭐다냐 산꾼 중에 최씨라고 지법 유명한 이가 있는디 삼 캐러갔다가 쌈에 휘말려가지고 갱신이 살아서 돌아오긴 혔는디 바지가 뭐땀씨 척척한가 혔더니 오줌 지려버렸다니께유.”
종업원의 말을 들으며 나는 엘타닌이라는 말을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지리산에서 정규군을 만나게 될 일이 생기면, 그걸 들먹거리면 좋게 놓아줄 것 같았거든. 여하튼 종업원은 수차례 우리를 만류했지만, 우리가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하자 결국 두손 두발을 다 놓고 말았다.
“시상에 이렇게 고집이 씬 양반은 첨보는거 같어. 지는 분명 경고 혔어유. 난중에 모가지에 칼침 들어가도 지를 원망하믄 안되유.”
“거참 괜찮다니까. 이래뵈도 나도 내 한 몸 지킬 정도의 여력은 되.”
“허허 참. 그려유 뭐. 자기 목숨 자기가 알아서 하는거니께 더는 안 말리겄슈. 일단 우리 가게 나와 가지고서 대로변 있쥬? 라스알하게르타로. 거기를 따라 쭉 가다가 서낭당이라고 있어유. 나무에 오색 천이 줄줄이 달린거. 거그 끼고 오른쪽으로 가믄 오솔질이 나오거든. 그짝이 지리산 가는 샛질중 하나요. 딴디로 가도 되긴 혀는디, 그리가 산꾼들이 최근에 뚫은 질이라 ‘녹림당’넘 덜허구 정규군도 잘 모를거유. 거게 질 따라 잘 가블믄 한 이삼일 안에 엘타닌에 갈 수 있을거유.”
나와 답답이는 종업원의 걱정을 등에 짊어지고 가게를 나섰다. 그러고보니, 라스알하게르타로 너머로 거대한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리산’이 아닐까 싶었다. 흠...... 저정도 규모라면 아무렇게나 가도 산에 가는길로 다 연결이 될 거 같기는 한데. 일단 종업원의 말 대로 안전한 루트로 진입을 해 들어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이탈을 해 산을 타다보면 녹림당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얼른 가자. 정규군들이 ‘녹림당’을 토벌하기 전에 그들과 합류해야 되.”
“그런데 종업원분이 안내한대로 갈 생각이에요? 그대로 가면 정규군은 물론이고 ‘녹림당’원까지 만나지 못하고 산을 넘게 될 것 같은데요.”
답답이 녀석...... 브로치껀부터 시작해서 점점 숨겨왔던 총명함을 드러내는 듯 한 발언을 했다. 솔직히 놀라긴 했다. 내가 알던 그 어리버리한 녀석이 맞던가 싶을 정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겠는가. 일단 나는 답답이와 라스알하르게타로를 걸으면서 녀석에게 내가 생각한 바를 이야기해주었다. 답답이는 내 말에 납득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인거 같아요. 일단 다른 루트는 분명히 정규군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을테니 그쪽으로 갔다가는 입산 자체를 못하게 될 수도 있을테니까요. 그런데 로키군이 생각한 대로 간다고 하더라도 ‘녹림당’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당신 같은 사람이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무작정 밀고 들어갈 리도 없을 텐데......”
녀석의 지적은 꽤나 날카로워서, 나는 녀석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녀석이 다시금 수긍을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녀석의 눈은 ‘궁금함’에서 서서히 ‘의구심’으로 뉘앙스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명쾌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어물쩡 어물쩡 걸음을 계속했고, 우리는 마침내 종업원이 이야기한 ‘서낭당’이라는 곳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대답이 없는걸 보니, 아무래도 정말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인거에요?”
녀석의 추궁하는 듯한 발언에 문득 짜증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의 발언에 짜증이 났다기 보다는, 녀석의 추궁에 딱히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한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난 것이다. 생각해야 한다...... 녀석이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을...... 나는 서낭당이라는 나무를 살펴보았다. 나무에는 노란색 종이에 빨간색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형상을 써 놓은 것이 잔뜩 붙어있었고, 정말로 나뭇가지에는 노란색이며 붉은색이며, 파란색 띠가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돌멩이 탑이 옹기종기 서 있기도 했고, 앞의 조그마한 건물에는 향냄새를 풍기는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약간 신비한 분위기....... ‘지금 현재’와는 조금 이질적인 분위기...... 나는 이 조악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것이 분명한 이 나무를 보며 라스알하게인들이 이곳에 꽤나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여긴 일종의 신앙센터와 같은 곳인 모양이군. 라스알게티로 치면 이스터민스터 같은 곳인가?”
“로키군. 어물쩡 어물쩡 말 돌리려고 하지 말구요. 이건 우리의 안전과도 직결된 문제란 말이에요.”
“잠깐....... 우리가 굳이 ‘녹림당’놈들을 찾으러 다닐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이 산을 손바닥 보듯이 하는 놈들 일테니 우리와 만남을 피하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피해 다닐 수 있을 거니까.”
“그렇기야 하겠죠. 그렇다면 더더욱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밀고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에요?”
“그래...... 그렇다면 생각을 반대로 해보자고 우리가 걔들을 찾으러 다니는 대신에 걔들이 우리를 찾아오게 만들자는 거야.”
“그래서 그걸 어떻게 하려구요?”
나는 답답이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서낭당’의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노끈을 잘라내버렸다. 여러개의 끈들이 얼기설기 엉켜있는 바람에 한참이 걸렸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줄을 잘라내다 보니, 종당에는 꽤나 많은 노끈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있어봐.”
나는 답답이가 나를 말리기 전에, 돌멩이 탑을 걷어 차버렸다. 그리고 조그마한 건물 안에서 타고 있는 촛불을 꺼버리고, 그곳을 엉망으로 박살내버렸다.
“아니 로키군 잠깐만요. 뭐하는 거에요 대체!”
“몰라서 물어? 여길 박살내고 있잖아. 그리고 음...... 좋아 이걸 챙겨야겠군.”
나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천으로 둘둘 감긴 나뭇가질 잘라서 챙겼다. 이만하면 멀리서도 눈에 잘 띄겠군.
“이곳은 라스알게티의 ‘붉은 공존’처럼 그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 일종의 랜드마크 일거다. 누군가가 그걸 완전히 박살을 내놓는다면, 아마 분기탱천해서라도 범인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할게 분명하겠지.
Channel 2. 아이리스
“휴우...... 로키군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한시라도 빨리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그렇긴 한데......”
발이 부르터서 진짜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례가 드는 바람에 기침을 하느라 뒷말을 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어요.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이 남자의 추진력은 저로서는 따라잡는건 감히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여서, 저는 기침을 하는데도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렸지요. 저는 간신히 손을 뻗어 나무 줄기를 붙잡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만 쉬었다 가도록 하자.”
“하아..... 고마워요.”
저는 자리에 주저앉아 완전히 퍼져버렸고, 로키군은 제 옆에 앉아서 신발을 벗어 자신의 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저도 어느정도 숨을 고른 뒤에 신발을 벗어보았습니다.
“아야!”
“발이 온통 물집 투성인데? 내가 발을 끌고 다니는 식으로 걷지 말랬잖아.”
“그러기가 쉽나요. 온몸이 천근만근인걸요.”
“일단 발 이리 내봐. 치유하기 전에 물집부터 빼야 되겠어.”
로키군은 들고다니던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제 발을 억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뒤에, 건빵주머니에서 간이 반짇고리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바늘이 들어있었지요.
“으으...... 아픈 거 아니죠?”
“니가 발버둥만 안치면 이게 니 발을 찌르는 일은 없을 거다.”
그는 바늘 하나를 꺼내, 그 끝을 자신의 코에 대고 김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소독을 하기 위한 것 같은데..... 그냥 불에 지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무서우면 눈 감아. 괜히 눈뜨고 보다가 움찔하면 진짜로 니 발에 피어싱을 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으으......아야! 아파요!”
“아직 찌르지도 않았어.”
그의 지적에 문득 엄청나게 부끄러워져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제가 이렇게 엄살이 심한 사람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문득 지금의 이 상황에서 이스트 민스터에 적을 둘 적에 빈민들을 위해 의료 사역을 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개중에는 육신의 굶주림 뿐 만 아니라, 마음의 허기에 허덕거리는 이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저희가 손만 대도 새된 비명을 질러대며 아프다고 죽는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는 그이의 아픈 데를 되려 꾹꾹 눌러가며 ‘엄살 좀 그만 피워요.’라며 퉁박을 놓곤 했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선 ‘관종’이라고 소리죽여 비아냥 거렸는데......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분에게 잘 해줄걸 그랬습니다.
“다 됐어. 이제 남은건 니가 알아서 하면 되겠군.”
“벌써요?”
“그럼, 이런 것쯤이야 껌이지.”
저는 그가 더 비아냥거리기 전에 후다닥 발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최대한 빠르게 읊었고, 말끔하게 치유된 발을 얼른 양말 속에 우겨넣었습니다. 제가 발을 치유할 동안, 로키군은 어디서 캐왔는지 길다란 나무뿌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건 뭐에요?”
“칡뿌리라는 건데, 물이 많으니 씹다보면 갈증이 많이 가실거다.”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발이 많이 부었던데, 다음에는 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나도 그걸 깜빡한 것 같군.”
저와 로키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저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건넨 칡뿌리는 간간이 흙맛이 나서 그렇지 비교적 먹을 만 했습니다.
“그나저나 나타날 때가 됐는데도 아직도 보이질 않네요.”
“아마 우릴 지켜보고 있을거다. 우리가 탈이 없는 먹잇감이라는 확신이 설 때 까지 지켜보자는 거겠지.”
“빨리 덮쳐줬으면 좋겠네요. 이 무거운 걸 언제까지 들고 다닐 수도 없구.”
저희는 지금 행상의 행색을 하고 이곳 지리산을 걷고 있습니다. 관리분들의 말이 맞다면, 그들은 산을 다니는 상인들을 털고 다닌다니, 우리가 이렇게 행상 행세를 하고 다닌다면 그쪽에서 알아서 우릴 만나러 올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동안 긴 거리를 누비고 다녔지만, 그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어요. 이거 참.....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꽤나 귀해보이는 물건을 이렇게 단 두 사람이 나르고 있을 뿐인데, 왜 그들은 이런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건드리지 않는 걸까요.
“나무는 군데군데 잘 꺾고 있지?”
“그럼요. 로키군도 그렇게 하고 있죠?”
산의 해는 일찍 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긴 시간을 오랫동안 산에서 마냥 보낼 수도 없는 지라(사람들 말로는 이곳에 호랑이가 산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름의 머리를 굴렸습니다. 바로 일정 거리마다 산의 나뭇가지를 꺾는거에요. 만약 길을 잃어버릴 지라도 되짚어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죠. 물론 나무에 물이 한창 차오르기 시작할 5월이라 가지를 꺾는 데는 겨울에 비해 많은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낯선 지역의 산속에서 길을 잃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저희는 불평불만 하나 없이 열심히 나뭇가지를 꺾었습니다.
“어이! 이봐요. 거기 스톱!”
익숙한 중앙어 억양이 들려 그쪽을 보니, 군인 두 명이 저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근방을 순찰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들을 무시했다가는 공연한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희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예. 엘타닌 쪽으로 물건을 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여긴 군사 작전 지역입니다. 당분간 이곳으로 출입하는 걸 금지한다고 분명 공문이 게시가 되었을 텐데요?”
“예, 저희는 라스알게티에서 라스알하게로 온지 얼마 되질 않아서, 그쪽의 문자에 대해서는 영판 까막눈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라스알게티에서 오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저도 라스알게티 출신이거든요. 이곳에서 고향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군인은 저희의 말투를 들으며 반가웠는지 반색을 하며 저희에게 악수를 권했습니다.
Channel 1. 로키
군인은 타지에서 자신의 고향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웠는지 우리에게 쉴 새 없이 라스알게티의 소식을 물었다. 뭐.....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그곳을 떠나온 지 넉 달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코 최신 소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우린 나름대로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했고 그것이 3년 가까이 타지에서 보내는 그에게는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려가며 경청했고, 특히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에 휘말려 붉은 공존이 불타버렸다는 소식에서는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어렸을 적에 우리 할아버지와 그 앞에서 도시락을 먹었었는데...... 그때 할아버지도 그러셨거든요. ‘나도 너 만할 때 내 할아버지와 여기서 도시락을 먹었었단다. 너도 네 손자와 그렇게 할 거지?’라고요.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군요.”
“비극적인 일이에요. 많은 사람도 죽거나 다치고, 붉은 공존도 불타버리고...... 모든 게 예전 같지 않아졌어요.”
그 말을 하는 답답이도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눈을 닦았다. 라스알게티인들에게 붉은 공존이 가지는 의미가 각별한 만큼, 그것을 잃은 것에 따른 상실감이 꽤 클 것이다.
“그나저나 신문 보니까 최근에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진다던데요?”
“아아, ‘가면 살인마’ 말이죠? 저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는 이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벌써 석 달 사이에 9명이나 죽었대요. 평균 열흘에 한 명꼴로 죽어나간 셈이지요.”
“정말 큰일이군요. 얼른 잡아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가족에게 편지 하셨어요? 걱정 많이 되실 텐데......”
“편지를 보내서 답장이 오긴 했는데, 의외로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동생 말로는 죽어나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부패 스캔들’에 연관되어있다고 하더군요. 뭐 저희 가족이야 돈도 없고 빽도 없는 평범한 서민이니 부패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걸요. 제 동생도 공무원이긴 하지만, 녀석은 그런 건 꿈도 못 꿀 겁쟁이이구요.”
“아아, 동생분이 공무원인가보네요? 어디서 근무하고 있습니까?”
“경시청이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뜬금없이 경찰을 한다 하길래 안 그래도 비리비리한 녀석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턱하니 붙습디다. 근데 워낙 백면서생이라 걱정이에요. 범죄자 잡다가 얻어맞지나 않을지 말이죠. 그래도 워낙 공부만 하던 융통성 없는 놈이라, 아마 뇌물을 가져다 줘도 쳐다도 안 볼걸요? 그러니 범죄자에게 두들겨 맞을지언정 적어도 ‘가면 살인마’한테 당할 일은 없겠죠 뭐.”
동생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군인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니, 말로는 ‘걱정이라는 둥’ ‘융통성이 없다는 둥’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쏟아냈지만, 으쓱 올라간 어께라든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가라든지, 잔뜩 올라간 입꼬리 등 그가 뿌려대는 무의식적인 반응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는 자신의 동생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긴, ‘경찰’이라고 칭해지는 내근직은 군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선호 받는 모양이니......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을 진대, 자신의 피붙이가 그 힘든 경쟁을 뚫고 내근직에 입성을 했다는 건 꽤나 자랑스러워할 만 한 건 분명하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너무 여러분들을 붙잡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어디까지 가신다고 하셨죠?”
“엘타닌 쪽이에요.”
“그쪽으로 가는 길엔 저희처럼 작전을 앞두고 녹림당 놈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초병들이 많이 깔려있을 겁니다. 물론 대부분은 저처럼 호의적인 입장일거라고 믿어 의심치는 않지만, 다들 라스알게티 소식에 굶주려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럼 이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초병과 만났을 때, 이걸 보여주면 아마 그들도 순순히 비켜줄 거에요.”
군인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출입증을 적고, 사인을 했다.
“감사합니다. 엘타닌에서 물건을 다 팔고난 뒤에 라스알게티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혹시 동생 분을 만나면 안부를 전해드리도록 할게요. 혹시 동생분하고 당신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습니까?”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제 이름은 미르파크이고. 제 동생은 알샤......”
출입증을 건네주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려다가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눈이 휘둥그래졌다. 나는 무언가가 있다 싶어, 얼른 답답이의 머리를 잡아 함께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뒤통수로 뜨겁고 끈적끈적한 감촉을 내는 액체가 후두둑 쏟아졌다.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다고, 고개를 든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벌어진 입에 화살이 푹 박혀있었던 군인의 참담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동료는 이마에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 만큼이나 동료도 충분히 빠르지 못했고, 실력의 부재를 틀어막을 운도 그다지 이었던 모양이었다. 짐작컨대 녹림당의 기습이라는 생각에, 우선 군인이 건넸던 출입증을 챙기려는 순간, 내 등 뒤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동작 그만. 그 손모가지 날아가 버리기 전에 거게서 손 띠어.”
“......”
Channel 2. 아이리스
저희를 공격했던 것은 다름 아닌 녹림당의 단원들이었습니다. 화살 두발로 두 명의 군인을 제압한 그들의 모습은 피에 굶주린 야수로 착각할 정도로 살기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습니다.
“보소. 이제 다 끝났으니 싸게 나와유.”
단원의 말에 언제부터 숨어있었는지 덤불속에서 한 명, 두 명 불쑥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의 의복에는 어찌나 풀들이 많이 꽂혀있었는지, 언 듯 봐서는 사람인지 덤불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어요. 그중의 리더로 보이는 이가 로키군의 손에 들려있던 출입증을 확 채갔습니다.
“휴. 덕분에 출입증을 구했구먼. 고맙게 됐어유.”
“저......저기.”
“일단 이야기는 난중에 허구...... 잠깐 실례.”
대장이 눈짓을 하자, 녹림당원 둘이 군인의 머리채를 잡아 그 목을 칼로 잘라내 버렸습니다. 한때 저희를 보고 반가워하며 고향의 소식을 묻던 그 군인은 이제 고향의 가족 소식을 영영 들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그들은 자신의 손에 피가 묻자 액땜을 하려는 듯 침을 퉤퉤 뱉고는 아무렇게나 그 손을 덤불에 쓱쓱 문질러 닦았습니다. 비일상적인 행동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눈치는 까셨겄다마는, 우덜들이 지켜보고 있었슈. 근디 말이어유, 우덜들 갔다가 ‘습격혀라. 습격혀.’라고 살랑살랑 꼬라지를 존나게 흔들어 제끼드만, 그래서가지구 요거 잘못 먹고 체하는 거 아닌가 혀서 묵직허니 지켜봤드만...... 요런 기회를 우리 가심팍에 팍 꽂아줄라고 그랬는갑소?”
“.......”
“일단 챙겨준 음식은 맛나게 잘 묵었으니, 뒷 마무리를 갔다가 혀야지.”
그들은 우리의 목에 잔뜩 녹이 슬어 이가 듬성듬성 빠진 칼을 들이댔습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 우릴 도와준 것은 부정을 할 수가 없는 사실이니께 은혜 갚는 셈 치고 최대한으로 갔다가 안 아프게 보내 줄게유.”
“기다려. 우린 니가 짐작한대로 너희가 우리를 습격하길 기다린 건 사실이다. 그럼 최소한 왜 그랬는지는 물어봐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긴 하지만서두....... 굳이 우리가 그걸 궁금해 해야 이유가 있나유?”
칼을 우리의 목에 대고 위협적으로 놀리는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니 돋아났던 소름이 마치 여드름이 톡 터지듯이 감정이 확 끓어올라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것 같아요. 마음만 같아서는 그의 손을 쳐내고 그 얼굴에 시원하게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로키군은 제가 그걸 행동에 옮기기 전에 손을 꽉 움켜잡았습니다. 그 손이 제게 ‘일단은 나를 믿고 가만히 있어줘.’라고 말하는 것 같아. 저는 심호흡을 하며 화를 달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있으니까, 이유를 들먹거린 거 아니겠나?”
로키군은 품안에서 브로치를 꺼내 그들 눈앞에 흔들었습니다. 로키군의 작전은 꽤나 잘 먹혀들었는지, 그걸 본 당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습니다.
“이.....이거 어서 났어유?”
“이젠 좀 궁금증이 좀 생긴 모양이지?”
“아오 쫌 새살 떨지 말고 얼렁 말혀유!”
느긋하고 축축 늘어지는 말투를 구사하던 라스알하게 출신의 녹림당원은 로키군의 너스레에 벌컥 화를 내며 그에게 칼을 더 가까이 들이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고, 저도 불안감에 그를 쳐다봤지만 로키군은 이 모든 분위기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심지어는 자신의 목을 누르는 칼날을 톡톡 두드리는 대담한 행동까지 보였답니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비정한 마음’의 지배하에 놓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가지고 사람이 죽기나 하겠어?”
“썰리는지 안 썰리는지 한번 내기 혀볼텨? 나넌 썰리는데 걸어볼랑께, 니넌 안 썰리는디다가 걸어 보등가.”
“있어봐. 있어봐. 이거 원 이렇게 살기를 뿜어대는데 무서워서 입이나 뗄 수 있겠냐?”
로키군은 칼날을 손가락으로 밀어낸 뒤에, 운을 떼려는 듯 헛기침을 하며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녹림당원들은 로키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려는 것인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로키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며, 정월의 운터브룩에서 보았던 라스알하게의 민속놀이가 떠올랐습니다. 높게 솟은 두 장대 사이에 줄을 묶고 그 위로 줄을 타는 묘기를 보이던 광대놀음 말이에요.
광대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오로지 쥘부채 하나만을 손에 쥔 채로 줄 위에서 신묘한 묘기를 보였지요. 그 까불거리는 모습이 익살스럽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하여, 탄식섞인 웃음을 짓다가..... 별안간 균형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허우적거렸었지요. 그때 저는 혹시나 광대가 줄에서 떨어지는가 해서 잔득 가슴을 움켜쥐었었는데...... 광대는 관객들의 탄성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났고, 이어서 터진 환호를 고개숙여 받았었지요. 지금 우리의 상황이...... 바로 그 천 길 낭떠러지를 아래에 두고서 외줄을 타는 광대의 모습과 겹쳐보였습니다.
“이건 말이지......”
마침내 로키군은 입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브로치의 출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브로치를 입안에 집어넣더니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매우 맛이 없어.”
“뭐......뭐여! 이게 뭐하는 짓이여!”
“그래도 생각보다 잘 삼켜지는 걸? 목에 걸릴 줄 알고 걱정했는데.”
그의 돌발행동에 녹림당원들은 반쯤 이성을 잃고 그의 멱살을 잡고 ‘죽여 버리겠다!’라며 바락바락 소리 질러댔지만, 로키군은 천연덕스럽게 껄껄 웃었습니다. 하...... 정말 그의 담력은 제가 생각하든 그 이상이었던 것 같아요. 새삼 이런 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치는 내 자신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브로치, 그리고 그걸 얻은 경로는 인질이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 내 목과 몸통을 분리하는 순간, 그걸로 모든 게 끝난다는 것만 알려주지.”
“저 이 씨펄럼이!! 얼릉 안 뱉어?”
“못 뱉지. 아니 안 뱉지. 니들한테 이 브로치가 매우 중요한 물건인 걸 뻔히 알았는데 순순히 돌려줄 수 있겠냐? 자, 우리를 니네 아지트로 안내해라. 니들 같은 떨거지 말고, 니들 대장한테 볼일이 있으니까.”
Channel 1. 로키
녹림당에게 끌려가면서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얼른 안 나오고 뭐혀? 팍 씨!”
거칠고...... 그리고 영리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이제껏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지껄여온 이야기들을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대충 눈치를 챘겠지만, 내가 방점을 둔 것은 ‘거칠다.’라는 형용사가 아닌 ‘영리하다.’라는 형용사였다. 그들의 본산은 지리산이 아니었다. 왜냐면 우리는 지금 막 지리산을 넘어서 다른 산으로 넘어왔거든.
내가 그들에게 쌍욕을 얻어먹어 가면서, 그리고 그들의 발길질에 무릎이 푹 꺾여가면서도 굳이 걸음을 미적거린 이유는, 그들이 만든 위대한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였다. 뭐 ‘위대한 유산’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가져다 대긴 했지만, 본질은 엄청나게 긴 땅굴이었다. 그들의 땅굴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덤불속에 그 입구를 두고 있었다. 나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갑자기 사람이 땅으로 꺼졌을 거라고 착각을 했을지도 모를 지경이니 그 위장의 교묘함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런 교묘하게 위장된 입구를 지나 땅굴로 들어간 우리는 그 규모에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끝이 어디인지 짐작도 되지 않을 거대한 통로가 펼쳐져 있었고, 그 통로를 따라 횃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타오르며 길을 밝히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많은 양의 횃불을 이런 폐쇄된 장소에서 태운다면 그 안의 산소가 순식간에 바닥이 날 텐데 말이다.
내가 제기한 의문점은 천장을 보니 순식간에 풀렸다. 분명 지하 깊숙한 곳일텐데도 불구하고, 천장에 티끌만큼이나마 햇볓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녹림당원들에게 몇 번씩이나 조인트를 까여가며 천장을 살펴보았다. 아아, 그들은 환기를 위해 천장에 아주 조그마한 구멍을 여러개 뚫어놓은 것이다. 천장의 구멍은 꽤나 영리한 아이디어였다. 공기의 교환을 통해 신선한 산소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 뿐 만아니라, 구멍을 통해 물을 확보할 수도 있거든. 이런 식이라면 장기적인 농성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입구가 발각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이들의 땅굴을 보며 감탄을 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출구로 나왔다. 그곳의 식생은 지리산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랐고, 이를 통해 나는 그들이 전혀 다른 산으로 우릴 안내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영리한 녀석들이야 이 녀석들.”
“네......? 왜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지리산이 아니거든. 전혀 다른 산이야.”
답답이는 내 말을 듣고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물론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설명을 해 줄 수 있었겠지만, 알다시피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그녀에게 ‘그냥 그런게 있어.’라고 둘러댈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영리한 놈들이다. 적들에게 ‘우리가 지리산에 있다.’라는 메시지를 던져놓음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지리산으로 집중시켜놓고, 자신들은 전혀 다른 산에서 자유롭게 운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릴라 전술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판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리적 정보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지리적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까지 나아간 것이다.
녹림당원들은 자신들의 병영, 그중에서도 지도자 급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막사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갔다.
“주우님, 지리산서 수상한 놈들을 잡아왔어라.”
“아 그려? 나가 볼 적에는 걍 외국인 상인처럼 보이는디? 워떤 점이 수상한거셔?”
막사에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쩌넘덜이 우덜 뒤꽂이를 가지고 있었어유.”
“뒤꽂이?”
젊은 남자는 아마 브로치를 의미하는 라스알하게어를 듣더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반응으로 보아, 내가 브로치를 삼킨 것은 신의 한수가 아니었을까 자평해볼 수 있는 대목이군.
“그거 챙겨 왔는가?”
“아 그게.......”
“삼켰어.”
“뭐......셔?”
“삼켰다고. 왜? 불만이라도 있나?”
이젠 내가 끼어들 상황이라고 생각이 되어, 녹림당원이 망설이는 동안 도전적으로 한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와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 말에 그의 얼굴이......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는 것이 꽤나 볼만했다.
Channel 2. 아이리스
“삼켰다고...... 왜? 불만이라도 있나?”
로키군의 도발에 ‘주우’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은 저대로 놔두면 펑하고 터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붉으락푸르락해졌습니다. 그의 주먹이 꽉 쥐어진 것이, 금방이라도 로키군을 후려칠 것 같이 불안했어요. 저는 그가 로키군을 칠 것을 대비해서 남들이 듣지 못하게 조그맣게 기도문을 읊어 내려갔었습니다. 그런데......
“왐마 요거 참...... 물건인디?”
주우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어요. 이마며 눈가며, 입가며 주름이 지다못해 얼굴이 구겨지듯이 말이에요. 예전에 운터브룩에서 암살자들과 어울리던 시절, 관리인 아주머니로부터 ‘파안대소’라는 말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요. 얼굴이 부서지도록 크게 웃는 웃음이라는 뜻이라는데요, 그 말을 들은 지 반 년 가까이 돼서야 그 정확한 용례를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본께 우리랑 접촉을 허고 싶어서 그런 대담한 짓거리를 갔다가 헌 것 같은디 말이여. 아주...... 영리해. 화가 대구빡 끝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로 말여.”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
“근디 사람이 상호간에 관계라는 거를 설정을 헐러믄 말여, 때로는 주기도 허고 받기도 허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겄어? 우덜이 라스알게티 넘들 맨키로 니모 빤딱허니 정없이 사는건 아니지만 서두, 그건 동서고금, 지역불문하고 일종의.......진리지라고 할 수 있을거셔.”
“그러니 브로치...... 아니 니들말로 뒷걸이를 어디서 주웠는지 이야기를 하라?”
“뒷걸이가 아니라 뒤꽂이요.”
“그래, 뒤꽂이...... 사실 별건 아니야. 우린 니들과 접점을 찾고 있었고, 방법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동안 우리가 기르는 고양이가 까치에게서 그걸 뺏어왔거든.”
“흠...... 그럼, 그거를 갔다가 사람헌티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
주우는 눈을 치켜뜨며 로키군을 노려보았지만, 저는 기도문을 읊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눈빛에서는 분노나, 증오의 감정 대신 오히려 책을 읽는 것 같이 행간을 찬찬이 살펴보는 것 같은 차분함이 묻어있었거든요.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로키군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고....... 대그빡 깨져나가겠네. 그럼 일이 어떻게 되얐는지 알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는 건디......”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습니다. 그가 머리를 긁어대는 통에 머리에서 살비듬이 툭툭 튀어나왔지만, 수녀원에서 사역을 하면서 이보다 더한 것을 봐왔던 지라 딱히 큰 거부감이 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달라진 분위기와 행간사이로 제가 나설 구멍이 보인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우리가 아는 대답은 했고, 당신도 우리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걸 느꼈을 테니, 당신차례에요. 우리도 주었으니, 이젠 당신이 줄 차례입니다.”
“.......”
“우린 당신들을 찾고 있었어요. 일단 정규군이 당신들을 지리산에 몰아넣고 산을 둘러싸며 총 공격을 해올거에요. 우린 당신들에게 총 공격이 있기 전에 도망치라고 말하려고 왔어요 그리고......”
“말 짤라묵어서 미안헌디, 여긴 지리산이 아녀유.”
“......네?”
“여긴 청산이라는 곳이어라. 설명하자믄 길긴 헌디, 간추려서 말허자믄 넘덜은 우리를 지리산에 몰아넣고 조져버릴라구 한다는건 이미 알고 있어유. 근디 우리덜은 삼국의 명산을 잇는 통로를 맹글어 놨걸랑. 갸덜이 지리산서 삽질허는 동안 우리덜은 옛저녁에 청산으로 내뺏쥬.”
“아아.......”
로키군이 지하 땅굴을 지나오면서 했던 ‘이곳은 지리산이 아니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주우의 말을 들으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잠깐 낭패감이 들긴 했지만....... 우리가 진정 그들에게 말하려고 하는건, 그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주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대비를 하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그럼 두 번째 용건을 이야기 할게요. 우린 레딕 클라우드...... 그러니까 당신들 언어로 ‘주운’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당신들 단체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당신들을 찾아온 거에요.”
“허허...... 그려유?”
“주운이라는 사람...... 알아요?”
제 질문에, 주우는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촉이란 촉은 모두 끌어모아 그가 짓는 웃음이 어떤 의미를 숨기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뭐랄까요......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에서
“잘 찾아오시긴 혔는디...... 만나 뵙기는 쪼깐 힘들 거 같은디유?”
깊은 쓴 맛이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