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답답이는 내 말에 생각할 거리가 생겼는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언덕 아래에 펼쳐진 취락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어느 순간부터 녀석을 답답이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녀석과 함께하면서 이 여자가 왜 그런 답답한 모습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녀석은 생각이 많았다.
‘모두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다소 이상론적인 소망이 녀석의 모든 사유와 행동의 기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녀석은 행동을 취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해야 반대급부의 사람에게 최소한의 피해가 갈지 곰곰이 생각을 했고, 그 사유에 결론이 내려지면 여지없이 행동에 옮겼다. 그 말을 반대로 하자면, 답답이는 스스로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즉, 행동력에는 느림이 없었지만, 문제는 사유였다..... 근데 앞서 말한 ‘모두가 다치지 않는다’는 명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행동하는 꼴을 볼 수가 없을 수 밖에...... 예전에 사유와 행동의 관계에 대해서, 프로하기온 출신의 정치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행동하지 않는 정의는 악의 편이다.’라고...... 그 말을 녀석에게 적용한다면, 아마 녀석은 대 마왕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옥에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지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참 아름다운 마을 아니에요?”
“음..... 그렇지. 취락의 배치가 조형적으로 균형이 잡혀있으니까. 덧붙여 마을의 토지도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수많은 사유와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진 거겠지.”
“아마 라스알하게 지역의 다른 마을들도 이곳과 비슷할 거라 생각해요.”
“뭐..... 자세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이런식으로 숲에 둘러 쌓인 폐쇄적인 지역이라면 아마 농업에 기초한 자급자족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네 말이 옳을 가능성이 높겠군.”
“전 이 아름다운 마을이 라스알게티처럼 화마와 폭력에 휩싸이는 것을 막고 싶어요.”
“이건 잘 알지. 라스알하게는 대륙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급자족이 잘 되어있는 지역이야. 다른 속주와 달리 중앙의 속주자치 교부금도 거의 받지 않아. 속주에 대한 재정지원의 부담이 큰 왕도로서는, 그동안 효자 노릇하던 라스알하게마저 화마에 휩쓸리게 된다면 입장이 꽤나 난처해 질 거다.”
“로키군.”
“응.”
“어차피 로트 클라우드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이곳에 좀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여기에서 있다 보면 분명 평화를 모색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음......”
확신에 찬 답답이의 눈을 보니, 그런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글쎄..... 녀석의 확신과는 별개로 내 생각은 달랐다. 1000여년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겨레가, 결코 평화롭다고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통일되었다. 숙고와 토론, 타협을 전제로 하는, 이른바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통합을 해도 마찰을 피할 수 없을 진대,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방법으로 통합을 이룬다면, 그 마찰의 강도는 오죽하겠는가? 뭐...... 언젠가는 평화를 모색하며, 타협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그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라는 강이 가지는 긴 호흡 속에서나 가능할 뿐, 강의 물방울로서 끊임없이 증발하거나 지하에 흡수되는 물 한 방울의 짧은 호흡으로는 그걸 실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지금은 평화를 모색할 때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 그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평화에 대한 모색은, 그 이전시대에 벌어지는 폭력과 대립이 여러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할퀴고 난 뒤에나 오를만한 의제다.
내 말을 들은 답답이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마음으론 동의할 수 없었는지, 말없이 마을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걸 보니, 이 마을을 품은 라스알하게가 화마에 휩쓸리는 것이 안타까워 보이는 모양이다.
“하나만 묻지. 너는 평화를 모색한다고 했는데, 평화롭게 뭘 어쩔 생각이지?”
“네?”
“라스알하게의 인민들은 라스알게티로의 독립을 원하고 있을거다. 그런 이들의 염원이 누적되어 녹림당이란 실재를 입게 된 게 아닐까?”
“그러니까.....”
“너는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롭다는 건 형용사에 불과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명사야. ‘독립’이냐 ‘속박’이냐 라고. 너는 라스알하게의 인민들이 라스알게티에게서 평화롭게 독립하길 원하는 건가 평화롭게 속박되길 원하는 거냐?”
“......”
답답이는 내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또다시 말없이 언덕아래의 취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가 생각에 잠기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내가 옆에서 무슨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자신이 수긍할 때 까지 꿋꿋하게 생각을 이어갈 위인이니까......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무엇이 있든 간에, 녀석은 자신이 결정한 바를 고집스럽게 밀고 갈 것임을 알기에 나는 녀석이 나름의 답을 찾을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로키군 제가 원하는 건......”
Channel 2. 아이리스
“생각해보면 제가 참 많이 건방졌어요.”
“......?”
제 말에, 로키군은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밑밥을 까는 거지?’하는 불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하하, 그가 이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걸 보면, 제가 로키군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만큼이나, 그 역시 저를 알아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생각해보면, 로키군은..... 툴툴거리긴 하지만, 제가 부린 고집을 다 받아주긴 했지요.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라는 말을 들어주기 위해 저를 운터브룩으로 데리고 왔죠. 또, 제가 ‘비정한 마음’에 대해 다가갈 때도 말리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지부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묵인해주었고요. 그리고...... 기어코 제가 ‘비정한 마음’에 대해 알게 되고, 그로인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저를 버리는 대신 자신의 식구인 ‘암살자’들을 등지고 저와 함께 프로하기온으로 도망치기까지 했잖아요.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도 많은걸 포기하고 여기까지 온 거에요. 이쯤 되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밑밥을 깔아대는지 궁금해 할 텐데요......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이번에도 저는 로키군을 곤란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라스알하게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제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강요한 거나 다름이 없잖아요. 나한테는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는데 말이죠.”
“그래. 중요한건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거지.”
“프로하기온의 마사다 반란 기억하죠? 저는 근현대사 수업 시간에 그 사건에 대해 배우면서 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기억나요. ‘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지만, 그 사건 이후에 프로하기온인들이 당한 처우를 생각하면 자유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우리 라스알게티는 반란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을 고수하니까요. 근데 그거 알아요? 라스알게티에서도 마사다 반란을 지지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거?”
“.......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네. 우드로 글래드스턴이라는 사람이에요. 당시 초선의원이었죠. 그는 프로하기온 파병 동의안을 반대하기 위해서 긴 시간동안 연설을 했다고 해요. 그의 연설은 해당 회기의 마지막 안건이었던 파병동의안 채택을 무산시킬 정도로 길어서. 주변 의원들이 끌어내리지 않았다면 연설만 하느라 회기가 종료될 뻔 했다고 해요. 의원들 사이에선 그의 행동이 사략 해적선과 같은 도의 없는 행동이라고 해서, 필리버스터라고 빈정거리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니까요.”
“그런 인물이 라스알게티에 있을 줄은 몰랐군.”
“그 사람이 한 연설의 요지는 그거에요. 각 민족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국가가 어디에 귀속될 것인지, 어떤 형태의 정치적인 구조를 가질지, 어떤 종교나 경제 체제를 가질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거에요. 즉, 이러한 선택에 타 민족의 간섭이나 개입을 허용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거겠죠.”
“지금 같은 시대엔 미.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데.”
“결국 파병동의안이 통과가 됐고, 실제로 그의 주장과 반대되는 세상이 열렸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전혀 반대되는 세상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켰고, 결국 기어코 그는 수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이상을 주어진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하게 됐죠. 그게, 속주 자치제에요.”
“음...... 뉴스로 본거 같긴 하지만, 자세히 읽지는 않았어.”
“뭐...... 이름만 들어봐도, 어느 정도 속주에게 자치권을 준다는 거겠죠? 꽤 괜찮은 제도였고, 사람들의 호응도 샀어요. 근데 그게...... 실패로 돌아가게 되요. 1년 전에 암살당했거든요.”
“.......”
“저는 시대에 너무 앞서나갔다고,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저는 마사다 반란과, 글래드스턴의 암살을 보면서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선생님의 그 말을 제 가슴속에 품게 되었던 걸지도 몰라요...... ‘자유는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라는 거...... 그런데 당신 말을 듣고 나니, 제가 진정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요.”
“아, 그만.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 같아. 그건 하지 말자. 우린 그치들이 라스알하게를 태워먹든 찜 쪄먹든 우리 알바가 아니라고.”
“로키군...... 미안해요. 나 진짜 어색한 말 하는 거 알아요. 라스알게티 출신이 이런 말 하는 거 진짜 어색한거겠죠...... 근데, 외면하고 눈 돌리는 건 제 성격에 안 맞는 거 같아요. 우리...... 도와줘요. 대신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감시하자구요.”
제 말에 로키군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넌 정말 망할 년이야.”
Channel 1. 로키
내가 일전에 억하심정으로 답답이에게 ‘망할 년’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 직면해보니...... 내가 매우 성급하게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답답이는 망할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망할 년이라는 표현은
“손님들 헌티 풀 때기만 대접해 드리는 것이 쪼깐 미안허지만...... 라스알하게 식단이 몸에 좋아유. 백세 도시 라스알하게...... 알쥬? 그게 다...... 음식덕분에 생긴 명성이유.”
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놓은 주우의 부인에게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말대로 식탁에는 라스알하게식 식단이 차려져 있었다. 그게 망할 년이라는 표현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냐고? 라스알하게 식단이야. 운터브룩에있을 때 관리인 아주머니가 많이 차려줬기 때문에 익숙하다. 그럼 익숙한 거 먹으니까 좋은 거 아니냐고? 음 굳이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자면, 관리인 아주머니가 반찬 투정을 부리는 우리에게 각각의 음식들이 가진 좋은 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해주었다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요것은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 ‘요거는 몸의 원기를 북돋는다.’ 등등..... 하지만 아주머니가 가장 강조했던 것은
‘사람은 본디 잘 묵고, 잘 싸는 게 질이유. 그 혹시나 똥 때리는 걸로 고민 있으면 말혀유. 요거 묵으면 바로 화장실 달려갈겨.’
건강한 배변활동이었거든. 지금 내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은 거의 백이면 백...... 관리인 아주머니가 변비에 좋다고 말했던 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거든. 우연치고는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히게 한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었을까? 이거 참.....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작태가 아닌가 싶다.
“여행하고 그러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인담서유? 그럴 때 측간 가는 거 까지 드물어 봐유..... 바로 변비 되는 거요. 어차피...... 여그에 꽤 있어야 할 거 같은디. 여서 쌀 수 있을 때...... 푹푹 싸는 게...... 질이유.”
부창부수라고 주우도 껄껄 웃으며 자신의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이 인간들이...... 참자. 이 사람들이 느긋하니까 이렇게 나오는거지, 성격이 급했다면 아마 당장이라도 브로치를 내놓으라고 내 배에 칼을 들이밀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요 로키군......큽. 얼른 먹......큽 고 일 봐야죠.”
답답이도 이들의 허술한 연극이 우스웠지만 내 눈치가 보였는지 웃음을 애써 참아가며 내게 음식을 권했다. 정말 이들의 정성에 보답하는 차원에서라도 진짜 브로치를 삼켜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다.
“이봐 주우.”
“잉. 보자마자 신호......라도 오는거여유?”
“모두가 좋자고 하는 의도인 건 알겠는데, 티가 너무 나게 굴면 그게 호의로 안 보인다고...... 니가 원하는 게 이거 아니야?”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녀석의 앞에서 브로치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그와 부인의 눈이 똥그래졌다.
“이게 뭐셔? 분명 뒤꽂이는 샘켰다구 혔는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고. 그 큰 쇠붙이를 그냥 삼키면 내장이 남아날 것 같아? 내가 삼켰던 건 사탕가게에서 팔던 사탕이었다,”
내 말에 답답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웃었다. 어찌나 격렬하게 웃던지 녀석은 일순간 균형을 잃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할 정도였지. 그녀가 웃든지 말든지 주우내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나는 그들 앞에 브로치를 내려놓았다.
“뭐여 그럼...... 굳이 이걸 묵을 필요는 없었는디..... 말을...... 허지 그랬슈.”
“말이야 하려고 했지. 받을 걸 받고 말이야. 근데 너의 아비가 저렇게 몸져누워있을지 누가 알았겠냐.”
“일단 뭐...... 고맙게 받을게유.”
녀석이 브로치를 챙겨가기 전에, 나는 브로치에 손을 뻗어 내 쪽으로 슬쩍 당겼다.
“뭐하는 겨?”
“나도 꽤나 뻘짓을 한 거 같은데, 그냥은 주기 그렇지 않나? 조건이 있다.”
“아부지 깨나시믄...... 당연히 주겄쥬. 일단 당신도 울 아부지헌티...... 뭘 원하는지도 모르지 않소?”
“받을 거 받는 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 하나 더 있다.”
나는 말을 꺼내기 앞서 답답이를 살펴봤다. 답답이는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하고자하는 그 혁명인가 나발인가 하는거 말이야...... 그거 우리도 좀 도울 수 있는게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잉? 당신덜이요.....? 당신덜이 왜유?”
“나도 딱히 당신들이 라스알하게를 지지든 볶든 상관은 없는 주의였는데, 내 파트너 쪽에서 오지랖이 좀 넓어야 말이지. 당신들이 하려는 일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아이고 각시가 지법 맘 씀씀이가 따땃......하네유. 외지인이 이렇게 마음써주는 게...... 흔한 일은 아닐틴디..... 알겄슈. 우덜도 최대한으로 민간인헌티 피해 안 가게...... 잘 할게유.”
“아니 아니,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네. 우리도 그 혁명인가 뭔가 하는데 참여하겠다 이거다.”
“......”
내 말을 끝으로, 주우는 말이 없어졌다. 이 녀석도 답답이처럼 자신이 수긍하는 결론이 나기 전에는 복지부동하는 쪽의 인간인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손에 들었던 식기를 내려놓고 우리 둘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외견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자였는지, 천천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별다른 감정의 징후 없이, 내게서 눈을 떼고 답답이를 찬찬이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답답이는 눈을 피할까 말까 무던히 고민을 한 듯 했지만, 결국 그녀도 꿋꿋하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응시했다.
“하아...... 어렵네유 어려워. 아무리 찬찬이 살펴본다고 헌들...... 나가 무당도 아닌디...... 당신덜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어찌 알겄슈...... 물론 지금 우리 꼬라지에 고양이 손이든...... 개 손이든...... 안 가리고 몽창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마는, 함부로 덥썩 받기에도...... 그런기, 나가...... 당신 덜을 고작 오늘 츰으로 본 것이 단디, 믿었다가 통수...... 맞으면 워쩌켜유.”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 브로치에는 아마 높은 확률로 니가 추구하고자 하는 계획의 적기가 적혀있겠지.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여나 기간이 넉넉하다면 일단 그 기간동안 우리를 지켜보는게 어쩌겠어? 물론 그 전에 주운이 깨어난다면 우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가......”
.......라고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근질근질해졌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답답이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과, 이마에 깊게 파인 3개의 주름은, 나에게 ‘어디 한번 끝까지 말해보시지?’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으음, 그래 메시지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고 싶지만,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이 있으니, 니들이 하는 혁명이라는 것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도움을 줄 생각이다.”
“......흠.”
주우는 우리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의 부인이 ‘아이구 뭔 식사자리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야그들을 해댄대유. 묵고 살자구 하는 일인디, 묵을 때 만큼은 양껏 들어유.’라고 말하며 식기에 밥을 푹푹 푸는 걸 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일......단 우리 임자가 하는 말도 맞으니께,..... 밥 묵고...... 찬찬이 생각해 보쥬. 사안이 사안인디...... 지 혼자서 결정하기도 뭣허지 않겄슈?”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 주변에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오래전부터 전해진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지역성’에 대한 우스개소리 인데요. 대표적인 이야기는 이겁니다. ‘라스알게티 가서는 눈 감지 말고, 프로하기온 가서 지갑 꺼내지 말고, 라스알하게 가서 입을 열지 말라,’라는 말이 그거에요.
저는 이런류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은 사람들의 선입견에 기대는 질낮은 언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발언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여그는 방음도 잘 된께로 두 분 주무시는데 불편함은 없을거여유. 좋은 밤 보내시구 낼 뵈유.”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차를 마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 수많은 시간동안 주우에게 우리가 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가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는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기미만 보이면 허허 웃으며 다른 화제로 말 머리를 돌려버렸습니다. 쫓고 쫓기는 자의 치열한 머리싸움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지만, 결국 우리는 패배에 직면하게 되었죠. 주우는 득의연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문을 닫고 가버렸습니다.
“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닌데요?”
“이래서 라스알하게 놈들 앞에선 입을 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로키군도 주우에게 완전히 질려버렸는지 기지개를 쭉 피며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저도 로키군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에 있어서는 완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그건 바로 ‘주우는 절대 우리를 끼워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거에요.
아마 로키군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제가 부리는 고집에 장단을 맞춰주려는 것이었을 뿐, 그는 애초부터 ‘반란’에 발을 담글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제 앞에서 ‘안 될 모양이다.’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래저래 배려심이 많은 남자입니다.
“쉽지가 않네요.”
“.......”
“그래도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직접 참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천장을 보던 로키군은, 계속되는 제 혼잣말에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을 했는지 결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너에겐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주우는 자신의 입장에서 해야 할 적절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당연했을 거야. 이 자리에 오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배신과 좌절을 마주 했을 테니까...... 지금으로선 우리는 언제 자신의 등 뒤를 노릴지 모르는 놈들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저런류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경험 외엔 잘 믿지 않거든. 그는 내색을 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아마 우리를 계속해서 주시할거야. 스스로가 납득할 때 까지 말이지. 물론 나로서는 그가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 모든 일이 끝나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야.”
로키군의 솔직한 말에 저는 더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마 로키군은 주우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 때 로키군과 주우는...... 추구하는 바는 조금 다르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비슷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타인에게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삶....... 사느냐 죽느냐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도그마를 강요받으며 살아왔겠지요.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으로선 상당히 고단한 삶이었을 거에요.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의 삶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로키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어께에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너는 그냥 네가 했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다. 생각해봐. 너는 반년 전만하더라도 ‘우리’와 함께 생활을 했었어. 그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너는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그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서 스카웃 제의까지 받게 되었잖아?”
“하하, 칭찬인거 맞죠? 그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알아요?”
“뭐...... 당시엔 나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어. 네 녀석이 그렇게 적응력이 좋은 인물인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이래서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 건가 보다.”
로키군은 그때를 생각하다가 킬킬거리며 웃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져서 함께 따라서 웃었어요.
“로키군은 생각보다 유식한 거 같아요.”
“생각보다?”
“뭐, 하는 일 가지고 사람평가하면 안 좋은 건 알지만, 당신 하는 일이 워낙...... 그랬잖아요.”
“너도 어떻게 보면 지독한 모순덩어리야. ‘~해서는 안 되는 건 알지만......’ 이라고 해놓고, 독설이란 독설은 다 하는 거 알아?”
“에이, 칭찬의 의도로 하는 거잖아요. 일부만 보고 전체를 매도하진 맙시다. 근데 그런 유식한 말들은 어디에서 따로 배우는 거에요?”
“음...... 굳이 따지자면 따로 배우는 게 맞긴 해. IATP라고, 통과의례를 거친 요원들이 발령지로 배속되기 전에 요원으로서 기본 소양에 대해 배우는 연수가 있거든.”
“아아 그래요? IATP라는게 일종의 교육과정인가보네요?”
“개별 요원 훈련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건데, 인문교양이나, 자연과학, 그리고 현장실습을 아우르지. 길기도 꽤 길어. 입소부터 수료까지 1년 정도 걸리면 엘리트소릴 들을 정도거든. 성적에 따라서 배속지가 달라지기 때문에 다들 치열하게 공부하는 편이야.”
“로키군은 몇 등정도 했어요?”
“나야 뭐...... 구체적인 등수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연수생 시절 엘리트 소리 좀 들었지. 라스알게티로 배속된 거 보면 모르겠어?”
“그래서 거기에서 뭘 배웠는데요?”
“현장실습은 필수교과고, 나머지는 선택과목이야. 총 세 개의 커리큘럼을 선택할 수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사회성이 조금 결여되 있어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거든. 인문교양 쪽은 ‘인간학’과 ‘교육사회학’을 선택했고, 자연과학 쪽은 ‘화학’을 선택했어.”
IATP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그는 퍽 즐거워 보였습니다. 아마 그때의 기억이 그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추억이었던 모양이에요.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7일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분명 답답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노독이 꽤나 쌓여있었던 모양이다. 스트레칭이라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팔 한쪽이 너무 저려왔다. 왜 그런고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답답이가 내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고 있었다.
“....... 모르겠다.”
굳이 녀석을 깨워가며 스트레칭을 할 것 까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의 기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라스알하게의 건축양식은 꽤나 특이해보였다. 라스알게티나 프로하기온의 건축물들은 천장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그 벽 너머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이 건물은 천장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기둥이 가로 누워있고, 그걸 작은 기둥들이 엇갈려가며 떠받들고 있었다. 저 거대한 기둥이 왜 누워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추측컨대 작은 기둥들이 서로를 받칠 수 있는 기준점이 되어주는게 아닐까 싶었다.
무슨 연유로 천장의 구성을 공개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래도..... 건물 전체가 조금 높아져 보여서 탁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 역설적이지...... 라스알하게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의뭉스러운 놈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들이 사는 집은 자신의 속내를 기탄없이 드러내니 말이다.
“음...... 몇 시에요?”
“글쎄, 그냥 아침이란 건 확실해.”
내 말에 답답이는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기지개를 쭉 폈다. 팔다리가 쭉쭉 하늘을 향해 치솟으면서, 녀석의 얼굴에는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아..... 답답이는 이런 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모양이다. 내가 녀석을 지켜보는 중에도 녀석은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해서 기지개를 켜다가...... 온몸을 쭉 편채로 바들바들 떨다가 툭하고 무너졌다.
“잘 잤어요?”
“팔이 좀 저리긴 한데.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잘 잔편이지.”
“히히. 고마워요. 덕분에 잘 잤네?”
답답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보았다. 녀석의 입에서 ‘와 정말 예뻐요!’라는 탄성이 터져나오는걸 보면, 라스알하게가 녀석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나는 답답이가 라스알하게의 경치에 빠져있을 동안 이불을 개고 스트레칭을 했다.
“와 정말 잘 잤다. 오랜만에 푹 잔 거 같지 않아요?”
“여독이 심했나보다. 그리고 여기 공기가 좋은 것도 있고.”
“진짜루...... 프로하기온은 매일 모래먼지 섞인 공기를 마셔야 했는데, 여긴 그런게 없잖아요. 그냥 숨을 쉬어도 폐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요, 와...... 여기서 쭉 살았음 좋겠다.”
답답이는 싱긋 웃으며,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집어들었다. 이젠 내가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 차례인가 보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밖에 나가니, 주우가 마당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반토막이 난 나무토막들이 이리저리 널려있었고, 그는 비지땀을 흘려가며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잘 잤슈?”
“뭐...... 손님 대접이 나쁘진 않더군.”
“이 사람이 정말...... 말 그런식으로 밖에 못해요? 네. 주우씨. 진짜 여긴 천국인거 같아요. 공기도 맑고, 풍경도 아름답고......”
뒤늦게 따라온 답답이는 내 옆구리를 세게 꼬집고는, 주우에게 서글서글하게 다가가 이곳의 경치와 생활 요건에 대한 찬사의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요즘들어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유독 나한테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붙임성이 뚝뚝 떨어지는 답답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껄껄 웃으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뭐 지야 딴 동니는 안 가봐서 잘 몰겄는디,..... 외지인들 야그 들어보믄 뭐...... 여그 맨치로 사람 살기 딱 좋은 동니도 없다는거 같기두 허구......”
“그런거 같아요. 라스알게티와 프로하기온 모두 살아봤는데, 모두 여기만큼 환경 좋은 쪽은 아니었거든요.”
답답이와 주우가 떠드는 동안, 나는 널려있던 나무토막들을 살펴봤다. 모든 나무토막들의 절단면이 깔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요령을 터득한게 아니라면 엄청난 완력으로 나무를 쪼갠 거겠지...... 하나를 보면 열은 안다고, 그가 녹림당의 리더가 된 것이 단순히 로트 클라우드와의 혈연관계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낭구 팬거를 뭐...... 그리..... 신기허다구 보고 있슈?”
“나무가 정말 깔끔하게 잘린거 같아서 말이야. 마치 기계로 잘라낸 것 같군.”
“여짝에 기계가 어디..... 있겄슈? 다 요령이유..... 요러게 나무를...... 슬쩍 찍어가지고 질을 낸 담에......”
그는 도끼를 나무에 슬쩍 찍어서 박히도록 한 다음 그걸 높이 들어올렸다.
“허리에 심을..... 슬쩍 싣어가지고...... 요래..... 찍어부리면....... 워뗘? 깔꼼하쥬?”
도끼날이 나무 조직을 파고드는 소리가 나더니, 깔끔하게 나무토막이 반동강이 났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깔끔하게 나무를 잘라내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말대로 힘이 별로 들이지 않은 것 같았거든.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군.”
“뭐..... 별거 아녀유. 모르는 넘덜이야....... 밤에 쓸 심꺼정 쏟아 붓고, 담날에 마누라 헌티...... 깨죽도 못 얻어먹지마는. 한 며칠 허믄...... 이밥에 괴깃국이 한상 턱허니 차려져 있는거는 일도 아니유.”
“이이가...... 아침 벽두부텀 씨잘떼기 없는 소릴 허구 앉았네,..... 식사 채려놨어유. 얼렁 와유.”
우리가 주우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주우의 부인이 우리를 불렀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7일
식탁에 놓여있는 요리들을 보노라니,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읽는다는건, 작가와 독자가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에요. 요리 앞에 책 이야기를 한다는게 참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책은 매개에 불과한 거니까...... 책을 요리라는 걸로 치환을 해도 이상할 건 없겠죠. 좀 더 자연스럽게 바꿔볼까요? 제 식대로 말이에요. ‘요리를 먹는다는 건, 요리를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이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게요.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제가 이런 말을 한다는게 주우의 부인이 요리를 통해 우리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텐데요. 맞아요...... 뭐, 본인은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을 진 몰라도, 어제 저녁에 먹었던 음식을 생각한다면, 저는 지금 제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들을 통해 주우의 부인이 저희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던졌다고 생각해요. 그 메시지란 바로..... ‘어제 저녁에 차린건 예고편이었어.’라고 할까요?
“우와...... 이게 다 뭐람.”
“손님들 왔잖아유....... 그래서 오랜만에 심 좀 써본거겠쥬.”
“이이는 뭔 말을 그렇게 혀유? 갑자기 손님오셨는디 경황이 없어서 새론 못 채리구, 평소 먹던대루 혀봤어유. 더 좋게 대접혔어야 혔는디......먄혀유.”
그녀는 주억거리며 ‘평소 먹던 대로’라는 표현에 유독 강조를 했지만, 별로 믿음이 가진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저렇게 만은 양의 음식을 먹다보면 금방 비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거든요. 양도 양이었지만, 어느 것부터 손을 대야할지 고민일 정도로 음식들 하나하나가 모두 맛깔나보였습니다. 뭐 어느 걸 먹을지 고민이 든다면..... 다 먹죠 뭐.
“오매, 우리 각시는 참 맛깔나게두 묵네.”
“진짜 맛있어요. 이건 이름이 뭐에요?”
“잉...... 그거슨 게장이라 혀. 아따 외지서...... 와가지구 매운거는...... 잘...... 못 묵을 줄 알았는디. 복시럽게 잘 묵네...... 짐치도 좀 묵을텨?”
주우의 아내는 제 모습이 퍽 좋아보였는지, 두 팔을 걷어 부치면서 직접 손으로 배추 김치를 쭉쭉 찢어서 제 밥그릇에 올려주었습니다. 아아 김치..... 참 오랜만에 먹어봐요. 운터브룩을 나서면서 먹을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먹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뭐라고 부르면 되겄소?”
“로키라고 불러. 저 여자는 아이리스고.”
“그 뭐냐...... 자네 말이여. 아무리 여행 중이라고 허드래두...... 각시를 너무 굶긴거 아녀?”
“나름 호의호식했어. 우리 상황에 알맞게.”
“그려? 나가 여태껏..... 살다 살다...... 요로코롬 사람이 음식을...... 게눈 감추듯이 먹는 모습은 첨 보는디?”
주우는 껄껄 웃으면서, 제게 ‘아이고 샥시, 밥은 넉넉항께 눈치 보덜 말구 더 달라고 혀유,’라고 말하곤 제게 물 한잔 떠 주었습니다. 하하..... 참 저도 제가 이렇게 식탐이 심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저는 밥을 두 번 더 받아서 먹었답니다.
밥을 다 먹고나니 이제 좀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겨 식탁을 보니...... 음..... 제가 많은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탁은 유독 제가 앉았던 주변에만 그릇이 깨끗하게 비어있었거든요. 그래도 제 모습을 밉게 보질 않는다는걸 느낀게, 주우나, 주우의 부인이나 턱을 괴고 제가 먹는 모습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거든요. 그래도..... 민망한 것은 변하지 않아서, 저는 후다닥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달려갔답니다.
“아유 괜잖어유....... 씨끄는건 지가 할랑께,..... 어여 일덜 봐유.”
“그래, 그릇만 놓고 이리로 와.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길 해봐야지.”
Channel 1. 로키
마스터는 내가 ‘통과의례’를 받기 이전, ‘우리’끼리의 용어로 ‘햇병아리’시절에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돈을 빌려줄 때는 앉아서 빌려주지만, 돈을 받을 때는 무릎 꿇고 받아야 한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으려고 해도, 상대는 이리저리 말머리를 돌려대며 도통 빚 이야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게 지금 현 상황에 우리가 처한 큰 문제다.
주우의 경우도 다를바가 없어서, ‘이야기’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행인 점이 있다면, 라스알하게인 남성 특유의 헤어스타일인 ‘상투’라는 것 덕분에, 녀석의 얄미운 머리채를 잡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갑자기 무슨 헤어스타일 이야기냐고? 이런 간단한 메타포도 이해를 하지 못하다니, 당신은 진정 머저리인가?
“어이구...... 시간이 벌써 요리 되었네. 나넌 일이 많아가지구...... 그럼 실례 좀 헐게유.”
“음...... 그런식으로 나온다? 우린 뭐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서 여기에 뭉그적거리고 있는 걸로 보이나?”
“일 많은걸 어찌혀유.”
“그럼 뭐......”
나는 브로치를 꺼내 그의 눈 앞에 대고 흔들었다.
“이게 필요 없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되는건가?”
“사람이 너무...... 극단적으로 나오는거 아녀?”
“니가 그렇게 피해대면. 우리로선 그렇게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거 아냐. 할 말 있어? 있으면 앉고.”
“......지기럴.”
주우는 결국 자신이 도망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얄밉다 싶을 정도로 서글서글했던 그의 눈에 약이 바짝 올라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녀석이 화를 벌컥 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우리 정리라는 걸 쫌 해보자구유...... 당신덜이 원하는 것이......”
“간단해, 우리도 너네 ‘삼민 혁명’인가 나발인가에 참가하겠다는 것이다.”
“기왕이면 평화적인 방법으로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
주우는 답답이가 말한 ‘평화’라는 단어에 쿡 하고 실소를 조금씩 흘리다가, 결국 얼굴을 잔뜩 구겨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주우의 태도에 답답이는 어리둥절해서 ‘저사람 왜 저래요?’라고 내게 속삭였다. 답답이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주우가 왜 저렇게 웃는지 알 것 같았다. 주우는 답답이가 어리둥절해 하거나 말거나 한참을 웃더니 결국 얼굴이 시뻘개져서 꺽꺽거리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샥시가 두 번이나 요런 말을 허는거 보믄...... 샥시도 진심이구먼유...... 좋아유. 내가 그동안은 샥시가 뭔 말을 혀두 요 말은 안할라구 혔는디......나도 속 션이 야그 할게유. 이보 샥시..... 혁명이라는 단어에..... 평화적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을거 같으요?”
“아니 그건.....”
“우덜들이...... 라스알게티 놈들 헌티...... ‘인자 집으로 가라.’라고 하믄, 라스알게티 놈덜이 갔다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자리 비켜드릴게유.’허구 나간대유? 그럴꺼믄 애초에 이짝으로 쳐들어오질..... 않았겄쥬.”
“그러니까......”
“먄헌디유. 우덜도 그러고, 라스알게티 저 넘 들도 피를 엔간치 흘렸슈. 그게...... 뭔 말인지 아요? 이제 우리 사이엔...... 악밖에 안 남았다는 거요. 선택지는 딱 둘이요. 우덜이 싹다 디지든가! 쟈들이 싹다 디지든가!”
답답이는 주우의 말을 중단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증오가 넘실거렸다. 그는 탁자를 탕탕 두드려가며 자신의 열변을 이어갔고, 답답이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라스알게티 넘덜한테 무너지구 나서....., 우덜도 많은 생각을 혔슈, 그중에는 ‘우덜이 쟈들헌티 무너진 거는 우리의 실력이 모질라서 그런것도 없지 않아 있으니께, 쟈들헌티 독립헐러믄 우덜두...... 배워야 한다구. 쟈들에게서 배울 건 배우자.’라고 하는 넘덜도 있었슈. 그렇게 쟈들헌티 간넘덜이...... 지금 뭐허고 있는지 아쇼? 아조 앞장을 서가지구 우리 삼민덜 등골을 빼묵고 있슈...... 저 이 씨벌럼들이...... 동족의 피를...... 말이여 피를! 빨아 묵고 있다...... 이거여.”
“.......”
“우린 말여...... 라스알게티 넘덜도 넘덜이지만...... 동족 팔아 배 채우는 넘덜은...... 가만 못 둬유. 혁명이 끝나면 폭력이 없을거 같쥬? 아녀...... 부역자 넘덜 모가지를 다 짤라가지구 설라무네...... 라스알하르게타 앞에 걸어 둘겨. 한넘도 안남기구 말여.”
Channel 2. 아이리스
말을 마친 주우는 격한 감정을 달래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제가 얼마나 안일하게 이 일에 접근을 하려 들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우라는 사람의 서글서글한 모습만 보느라 10년이라는 시간동안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을지, 그리고 그 길에는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희생됐을지.......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그들에게 ‘평화로운 혁명’이라는건...... 단어의 무의미한 나열로 보였겠지요. 저는 로키군을 바라봤습니다만, 로키군은 주우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제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제게 ‘되지도 않는 일에 더는 힘을 쓰지 말자.’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미안했어요. 우리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잘난 듯이 ‘평화’라는 단어를 운운했던거 같아요.”
“알았음 됐슈.”
“근데, 몰라서 실수를 저지른 거였다면...... 알면 되지 않겠어요?”
“뭔 소리요?”
“제가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평화를 운운한 게 문제라고 치자고요...... 그럼 반대로, 당신 말만 듣고 포기한다면, 그것 역시 당신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멋대로 선택한 거와 다를 바가 없는 거 아니겠어요?”
“.......”
제 말에 로키군과 주우는 말 없이 제가 한 말을 곱씹었습니다. 그들은 제 말에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론 제 말에 동의를 하진 않는...... 애매한 상황이었어요. 여기에서 그들의 마음에 변화를 주려면..... 저는 좀 더 과감한 판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어떤 판단을 해야 하나고요?
“어......어? 뭐야?”
“이거 받아요.”
“야, 뭐하는 거야?”
“.......”
“어차피 우린 여기에 적혀있는 글자가 뭔지도 몰라요. 우리에겐 필요없는 물건이지만, 당신에겐 정말로 필요한 물건이겠죠. 받아요.”
“어...... 뭐냐...... 그류. 잘 받을게유.”
“우린 이제 남은 패가 없어요. 이걸로 당신은 우릴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도 무방하다구요. 이걸 당신에게 주는 이유는, 당신이 그만큼 우리에게 신뢰를 보여주었으면 하는게 있어서 그런거에요. 이봐요 주우 당신.”
“잉..... 말 허슈.”
“지금 내가 ‘평화로운 혁명’을 운운한건 잘못했어요. 거기 적혀져 있는 혁명의 날자가 며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간동안...... 여기에서 당신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줄 순 있나요? 그편이 더 나을걸요? 만약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문서를 주고 난 다음, 이곳을 나가서 라스알하르게타 관청에 당신들을 고발할 지도 모르잖아요.”
“건 틀린 말이 아니긴 헌디...... 나가 당신들을 여기서 싹다...... 죽여 버리는 가짓수도 있지 않어유?”
주우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건넌 다리에요. 뒤를 돌아보는건 의미가 없습니다. 앞을 바라보고, 손을 뻗어 잡아내야만 해요.
“그럴수도 있겠지만...... 괜찮겠어요? 여기 나와 로키군은 호락호락하게 죽어줄까요? 당신들은 진짜 적인 라스알하게를 공격하기 전에 싸워줄 사람 한명 한명이 소중할 텐데요?”
제 말에 로키군은 주우 몰래 저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그의 표정은....... 뭐랄까 매우 묘해보였어요. 아마 그로서는 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 낯설어 보였을 거에요. 뭐...... 저 스스로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몇 달 전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본다면, ‘이거 껍데기만 똑같지 전혀 다른 사람 같은데?’라고 생각했을 지도 몰라요. 맞아요. 저는 바뀌었습니다. 그게 긍정적으로 바뀐 건지, 부정적으로 바뀐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제 액션에 주우는 물론이고 로키군도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는 거에요.
“.......끙.”
주우는 제 말에 더는 반박을 못하겠는지 그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로키군은 그의 눈을 피해..... 제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습니다. 하하...... 그에게 칭찬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 둘이서 은밀하게 서로를 격려하는 동안, 주우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결국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했습니다. 뭐 이야기 하는 내용은 결국......
“일단...... 잘 들었어유....... 그려, 샥시가 맞는 말 혔슈. 근디...... 지두 입장은 있어유. 지 혼자서 띡허구 결정할 이야근 아녀유. 그럼...... 오늘 회의에 가서 성제들헌티 당신 덜 입장을 전하겄슈. 처우는...... 그 이후에 결정하는 게 워뗘유?”
타협의 탈을 쓴 백기투항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