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서림 덕분에 나는 임꺽정과 뜨문뜨문 말문을 트게 되었고, 한 번 말문을 트게되자 임꺽정은 나에게 꽤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임꺽정을 묘사했던 주우의 말인 ‘못생기고 무뚝뚝하지만.’이라는 진술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었다. 각설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는
“그러니까...... 올해가 갑자년이고...... 니가...... 계산을 해블면..... 임자년 쥐띠네잉...... 나넌 임진년 용띠니께..... 그라먼 나가 한참 성이구먼.”
그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라스알하게 사람들이 모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나이’에 대한 감수성이 민감한 편이었고, 그것을 토대로 ‘형’ ‘동생’을 따지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그라믄 나가 성인께 인자부텀은 말 편허게 헐게잉.”
형과 동생이라는 상하관계 속에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운터브룩에 소재를 두고 있는 ‘라스알게티 지부’가 다른 지부들에 비해 유독 상하관계에 더 신경을 쓰는 면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관계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 것인지, 임꺽정은 그 이후로 눈에 띄게 나에 대해서 편하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다.
임꺽정은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인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종이에는 라스알하게의 문자로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이것이 뭐시냐...... 하루의 시작과 끝을...... 적어놓은 일정표여.”
“음..... 스케쥴표라 이거지?”
“잉...... 그려. 외지 표현으로 허면...... 그렇게 할...... 수 있것구먼.”
“꽤나 자세히 적긴 했는데. 문제가 있다. 난 라스알하게 문자는 몰라.”
“음...... 그것이 쪼깐 걸리는구먼. 근디 새로 맹글기는...... 종이가 귀혀서......”
임꺽정은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하자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곤란하기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다면 IATP에서 교육사회학 말고 라스알하게어를 선택할 걸 그랬다. 참...... 별로 쓸 일이 없는 언어라고 생각해서 등한시 했더니...... 이런데서 발목이 잡힐 줄이야.
“뭐 그럼..... 그냥 직접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도 몸으로 배우는 쪽이 더 나은 것 같고.”
“나가 돌봐야 허는 양이 몇 마린 줄은 아냐? 양 돌보는 것이 애덜 돌보는 것보담 훨씬 빡셔...... 아덜은 차라리 말이라도 통허지.”
“그럼 뭘 어쩌려고?”
임꺽정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주억거리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일단 급허게 갈켜 줄 것은 갈켜 줄라니께...... 일단 우덜 문자를...... 배워 볼 텨?”
“배운다고? 당신들 문자를?”
“그려, 뭐 혹시 알어? 난중에....... 써먹을 디가 있을지? 글고, 이 문자가 생각보다 배우기가 쉬울겨. 이 문자를 맹근 양반이...... 총명한 넘은 반나절 전에 깨치고, 아무리 우둔한 새끼라도 사흘이면 깨친다고 말 혔으니께......”
“그거야 만든 사람입장에선 쉬운 거 아니야? 그리고 언어마다 다양한 문자 체계가 있고, 거기에 적응을 했는데, 무작정 쉽다고 하는 것도......”
“복잡헌건 모르겄고, 일단 현실적으로는...... 암튼 배우는 게 날겨. 배우는 짝이 갈키는 짝에 맞추는 것이 더 수월치 않겄냐?”
“.......”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물론 제일 좋기로는 배우는 쪽과 가르치는 쪽이 서로의 입장을 배려해가면서 각자의 배경지식에 접근하는 것을 타협한다면 제일이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배우는 쪽이 가르치는 쪽의 배경지식에 접근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많은 것을 얻어갈 테니까...... 나로선 그 편이 더 이득이 될 것 같긴 했다.
“일단 글자 알켜주는 거는 내일 부텀 허구...... 지금은 시간이...... 그려, 양덜 모타서 외양간에다가 집어넣어야혀.”
“음..... 시간이 좀 이르지 않나? 해도 아직 지려면 먼 거 같은데?”
“산에는 안 살아 봤나 보네잉...... 산은 평지보덤 해가 빨리 져. 긍께 준비를...... 미리미리 혀야 한다니께. 서림이...... 몰어!”
서림은 임꺽정의 명령을 듣자마자 이리저리 내달리더니 산에 방사된 양들을 한 자리로 모았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 양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데도 불구하고 개 한 마리가 모는 대로 고분고분 모이다니 말이다. 뭐..... 개가 양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겁에 질려서라도 그럴법 하긴 하지만, 양들중 어느 누구도 반항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양들의 수를 미루어보면 기적에 가깝긴 했다.
“인자...... 양덜도 모타놨겄다. 외양간에 넣을 것인디...... 근디, 양덜을 무작정 외양간에 집어넣으면 안뒤어...... 쟈덜중에 물을 안묵은 넘덜도 있을거 아녀? 그랴서..... 요러게.”
임꺽정은 돌 위에 던져놓았던 나무작대기를 들었다. 그가 깎아놓은 것인지 아니면 자연의 기묘한 장난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작대기는 ‘이곳이 머리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쪽 끝이 둥글게 휘어있었다.
“양덜을...... 몰고 물가로 델구 가면 뒤야.”
“음...... 그렇군.”
임꺽정이 나무작대기를 짚고 길을 나서자, 양들은 그가 짚은 작대기가 이정표라도 되는 듯, 작대기를 따라 열을 지어 걸어갔다. 그가 시범을 보이려는 듯,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양들은 우르르 떼를 지어 오른쪽으로 갔고, 그가 왼편으로 걸어가면 역시 떼를 지어 왼편으로 따라갔다. 그가 원형으로 돌자 어느새 목초지에는 하얀색을 띈 둥근 원이 그려져 있었다. 임꺽정은 내 얼굴을 보더니 씩 하고 웃어 보인 것은 물론이었고.
“......쉽쟈?”
자세히 보니...... 물론 단순히 그의 카리스마만으로 양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 집중력이 무뎌져 대오를 이탈할 것 같은 양들이 있으면, 서림이 귀신같이 나타나 잠재적인 낙오자를 무리 속으로 우겨넣더군. 그렇다고 임꺽정의 양 몰이 실력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개들까지 통제하는 그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것이겠지. 어쨌거나, 임꺽정은 시험운전을 마치고, 양떼를 물가로 데리고 갔다.
“양덜은 생긴거랑은 다르게 취향이 민감혀....... 그래서 같은 물가처럼 보여두 지들 입맛에 맞는 구간이 있어야...... 그걸 캐치해 내는 것이 목동의 실력을 판가름 하는 거의 지표여.”
“음...... 결론은 니가 잘난 놈이다 이거지?”
“눈치는 제법이구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양떼가 물을 먹는 동안, 서림은 제 딴에 높아보이는 돌 위로 올라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임꺽정이 개에게 다가가 손짓을 하자, 개는 득달같이 물가로 가서 목을 축였고, 그 자리에는 임꺽정이 대신 서서 주변을 살폈다.
“양치기를 헐라믄...... 눈이 좋아야 써. 아무래두 야덜을 노리는 새끼덜이 많으니께.”
“맹수가 있다는 건가?”
“잉 그라지...... 오날은 운이 좋아가지고 못봤는디. 이리 떼두 있고, 개호주도 있어야.”
“개호주?”
“범 모르냐? 산주인 말여.”
“음...... 당최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구먼. 아무래도 니들의 언어를 빨리 배우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가 말하는 투와 맥락을 보면, 꽤나 위험한 산짐승인 것 같기는 한데...... 언어가 다르니 이렇게 의사소통에 혼란이 오는 모양이다. 이것만 봐도...... 빨리 그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Channel 2. 아이리스
이봉학씨가 말한 ‘스타일 파악법’은 생각보다 어려운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테스트를 받기 전엔 공연히 긴장을 했지만, 테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는 긴장이 완전히 풀려, 그럭저럭 여유롭게 그것에 임할 수 있었어요. 어떤 테스트였냐고요?
“자...... 인자 드셔두 되야.”
“잘 먹겠습니다.”
라스알하게의 별미중 하나인 떡을 5분 이상 먹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지요.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5분 동안 떡에게서 시선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봉학씨가 가지고 온 떡은 ‘꿀떡’이라는 것으로, 안에 꿀 또는 설탕물로 고명이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암살자’들과 한 달간 살면서, 관리인 아주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것인지라, 그게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미끄러지듯이 흐르는 윤기를 보면, 저도 모르게 군침이 꿀떡꿀떡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저는 끝까지 참아냈습니다. 실은, 그가 하려는 테스트가 어떤 건지 잘 알고 있거든요.
마시멜로 테스트라는게 있습니다. 동기유발과 성취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려는 테스트인데요, 방법은 지금 제가 치렀던 테스트와 동일해요. 다른건...... 소재랄까요? 저는 지금 꿀떡을 앞에 두고 버티고 있지만, 마시멜로 테스트의 피험자들은 마시멜로를 앞에 두고 버텨야 했거든요. 이 테스트를 주창한 이는, 테스트의 결과 대상자를 둘로 나누었다고 해요. 5분을 견딘자, 5분을 견디지 못한 자로요. 그 뒤에 약 30년 정도 추적검사를 했더니, 전자의 경우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한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더군요.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유예하는 능력을 가진 이가, 앞으로의 삶에서도 성취를 거두는 경우가 많다.’라는게 테스트의 결론이었습니다.
문득 의문이 든다면...... 이 테스트는 사냥의 스타일을 아는 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거에요. 뭐..... 사냥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냐는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테스트를 통해선 ‘피험자의 사냥 스타일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내리기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 테스트를 하려는 걸까요? 어쨌거나, 저는 테스트를 통과했고, 저는 꿀떡을 집어 입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으음...... 맛있는데요?”
“일단 샥시는...... 아니, 이젠 통성명이나 하자구유. 지 이름은 아까츰에 야그를 혔구...... 함자가 어찌되유?”
“아 소개가 진짜 많이 늦었네요. 전 아이리스에요.”
“그류? 그라모, 이제부텀은 아이리스라구 헐게유....... 일단 지가 지켜봉께로 아이리스씨는....... 덫 잽이 쪽이 어울리갔슈.”
“덫 잡이요?”
“음...... 이짝 말이라 좀 못 알아듣남? 그짝 말로는...... 아마...... 새퍼라고 할 거유.”
그는 새퍼를 운운하며, 창고에 있는 다양한 형태의 덫을 가리켰습니다. 아아, 그가 말한 것이란 바로, 덫을 이용해 사냥을 하는 스타일이라는 모양인가봐요.
“사냥꾼헌티는 여러 소양이 필요혀유. 체력은 기본이구, 집중력, 인내력 기타 등등 많쥬. 근디 아이리스씨는 나가 봉께로...... 인내력허구, 집중력이 좋네유. 덫으로 사냥허는 이들헌티는...... 그게 질이쥬.”
이봉학씨는 저를 덫을 전시한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까 그가 가리킨 것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덫들이 있었어요. 보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이빨 덫(이라고 제가 임의로 이름을 지은)도 있고, 철사며 노끈을 된 덫도 있었어요. 아까 이봉학씨가 설명했던 통방도 눈에 띄었구요.
“일단 사냥이라는 것은...... 아무래두 산 동물의 목숨을 빼앗는거유. 그러다 보믄...... 아무래도 피를 볼 수 밖에 없을거유. 아무리 간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자부하는 넘들도, 피를 처음 보믄..... 열에 아홉 여덟은 헤까닥 할 수 밖에 없어유. 그러니께......”
“그러니까?”
“일단은, 거부감이 적은 것 부텀...... 조지는 걸루 하쥬. 물괴기 좋아혀유?”
“음...... 네 좋아해요.”
“마침 봄철잉께로, 미꾸라지랑...... 가물치가 슬슬 제철잉께. 그걸로다가 매운탕 얼큰.....허게 묵어보자구유.”
이봉학씨는 여러 가지 덫 들 중에서 몇 가지를 챙겨 저를 데리고 창고를 나갔습니다. 벌써 해가 남쪽을 지나 서쪽 하늘을 향해 천천이 움직이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신 있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를 따라 한참을 걷고나니, 어느새 개울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요거는 통발이라고 허는거유.”
“통발이요?”
“잉...... 흔이 머리 나쁜 넘들을 가리켜가지구, 닭대가리니, 붕어대가리니 하잖아유. 우덜은 바로 물고기의 멍청함을 이용혀서 사냥을 할 것이유.”
“음...... 그래요?”
이봉학씨는 통발을 펼쳐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접혀있어서 그 면모를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그가 펼치고 나니, 통발은 의외로 꽤 컸습니다. 잘 휘는 나무를 뼈대로 삼고, 그 주위를 마 재질의 그물이 감싸고 있었지요. 그물은 조금 조잡해보였지만, 그래도 물고기가 쉽사리 빠져나가지는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거를 물괴기들이 댕기는 곳에다가 설치해두면 끝이유.”
“엥? 너무 쉬운데요?”
“물론 설치만 하믄...... 쉽게 잡지는 못허겄쥬. 기왕 설치헐거, 물괴기들이 많이...... 오라구, 홍보를 혀야겄쥬? 그게 바로 요거유.”
그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꺼낸 것은, 자그마한 옹기 그릇과, 삼베 천 이었습니다. 그가 옹이그릇을 여니, 운터브룩에서 맡았던 익숙한 냄새가 피어올랐어요. 이 구수한 냄새는 바로......
“된장을 쪼깐 퍼서, 이 천에다가 싸면...... 미끼 완성이유.”
“아아,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간단혀서 실망혔슈? 아까 말 혔듯이...... 아무리 똑똑혀도...... 결국은 붕어대가리유. 된장냄새 맡구 기 들어가는 것 까지는 괜찮은디...... 나갈 줄을 모른다니께유.”
이봉학씨는 킬킬 웃으면서, 개울가에 통발을 넣을 곳을 이리저리 뒤졌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는, 물고기가 많이 살 것 같은 맑고 깨끗한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히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진흙탕에 통발을 던져놓았습니다.
“음...... 이런 데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나요?”
“우리 삼민 속담 중엔 그런게 있슈. 너무 맑은 물에는 물괴기가...... 살 수가 없다. 생각 혀 봐유. 물이 맑으면..... 시야가 탁 트이갔쥬? 대신에 눈에도 잘 띌거 아니유.”
“아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그리고 물이 맑은 곳이 눈에 잘 띄기도 하지마는, 그런디는 물괴기가 먹고 살만한 것이 별루 없어유. 그란디는 그냥...... 물 허구 돌밖에 없는거유. 언뜻 보면 암것도 안 살 것 같은 진흙탕에 오히려 더 많은 생명이 깃들여 있는겨.”
그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맑고 깨끗한 물에는 생명이 깃들지 않고, 오히려 더럽고 지저분한 걸 끌어안고 있어야. 거기에 생명이 깃들인다라...... 그리고, 라스알하게 인들은 종종 속담이라는 것을 운운하는데, 아마 그 속담이라는 것은 그들의 경험적으로 습득한 지식을 후대에게 물려주는 하나의 수단이 아닐까 싶어요.
“어쨌든, 요걸 설치해뒀으니, 낼...... 아칙에 다시 돌아와 보면 될거유. 아마 실헌 넘덜이...... ‘언니 왔어?’허구 반길거유.”
Channel 1. 로키
양치기의 일은 양들을 외양간에 집어넣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지. 낮 시간 동안 양치기를 도왔던 개들도 잠을 자야 하기에, 밤이 시작되는 지금부터는 양을 지키는 건 오롯이 양치기들의 몫이 되었거든. 양을 노리는 이리나 곰들은....... 애석하게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을 노린다는 것이 임꺽정의 주장이었다.
“그럼 우리는 도대체 언제 잠을 자는 거냐?”
“틈나는 대루 자야지....... 양 한 마리가 아쉬운 입장에 뭐...... 별 수 있갔냐?”
임꺽정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사이에 모아둔 장작을 가지고 모닥불을 피웠다. 5월이면 완연한 봄이지만, 밤공기는 쌀쌀했다. 녀석이 왜 ‘활’처럼 가죽옷을 뒤집어쓰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거라도 뒤집어쓰지 않는다면, 자다가 입이 돌아갈 판이니......
“어허! 춥구마잉.”
“그럴땐 오히려 덥다덥다 말해야 상대적으로 추위를 덜 느낀다고 하더군.”
“음마? 그런...... 개소리는 어디서 주워들었댜?”
“개소리는 무슨...... 어후! 덥다! 더워!”
임꺽정은 텁수룩한 수염을 씰룩거리며 나를 지켜봤다. 그 투가 내게는 ‘언제까지 그런 개소리를 하는지 지켜보자.’라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더욱 더 동작을 크게 했던 것 같다. 녀석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녀석의 기대와는 달리, 내가 ‘춥다’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자, 임꺽정은 슬슬 심심해졌는지 길게 하품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 그 뭐냐...... 별 좀 보냐?”
“별? 그거야 하늘에 눈만 두면 보이는 거 아닌가?”
“아이고 이...... 화상아.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런 말을 허겄냐? 별자리 말이여. 별자리.”
“별자리......? 그건 딱히 연수에서 배우진 않았는데. 그걸 굳이 알아야 될 필요가 있냐?”
“.......니 별자리가 뭔지는 아냐?”
“아니, 애초에 니 한테서 처음 들었는데?”
“그럼, 이제 쑈하는건 그만 두고, 여그 하날 좀...... 봐바라잉.”
임꺽정은 땅바닥에 드러눕고는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음...... 나보고 저 옆에 드러누우라는 건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들이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깊은 산중에 혼자서 양들을 돌보다보면,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뜨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그런 이타적인 의도는 아니겠지? 생각이 복잡해져, 나는 도저히 그의 옆에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몸을 훑어보았을 때, 어디를 공략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었거든. 공략할 방법이 전무한 상태에서 위험에 몸을 맡기는 것 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 그는 두어번 손을 흔들다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나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 새끼가...... 높바람에 별안간 귀가 먹었나. 까이고 싶냐?”
“난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존중하는 입장이지만,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건 범죄라고 생각한다.”
“......뭐려? 뭔 생각을 혔는지는 몰겄는디, 별자리 설명해 줄라는 거니께 얼렁 와서 앉으라고.”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던가...... 일단 앉긴 하는데, 45cm 이내로 나한테 접근하는 건 금지다. 그 정도 거리엔 주인이 있어서......”
“아 뭐려!”
일단 녀석의 확언을 받아낸 뒤에, 나는 녀석의 옆에 걸터앉았다. 자가 없어서 정확한 거리를 잴 수는 없었지만, 이정도라면 개인적 거리는 어느 정도 확보한 것 같았다. 임꺽정은 내가 자리에 앉자, 모닥불에 짚으로 된 라스알하게 특유의 모자를 엎어두었다. 모자에 열기는 가려졌지만, 그와 더불어 빛도 가려져 불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별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짝으로 해가 뜨니 동쪽이구...... 저짝은 해가 지니 서쪽이갔지? 동쪽을 오른편에, 서쪽을 왼편에 두면 머리가 북쪽이 되야.”
“우리가 누운 쪽이군.”
“그려, 그짝을...... 보믄말여, 유난히 밝은 별 일곱 개가 보일겨. 국자모양으로 된건디...... 쩌거랑, 쩌거, 글고 쩌거..... 요러게 일곱 개 보이냐?”
“음...... 뭐. 한 30보 쯤 양보해서 그렇게 보이는군. 내가 볼 때는 숟가락 같이 생겼지만.”
“그걸 북두칠성이라 혀. 우리 삼민덜은...... 저걸 칠성님이라고 허구.”
“칠성‘님’......? 뭔가 존중의 뉘앙스가 느껴지는군.”
“잉...... 그랄 수 밖에 없지. 칠성님은 죽음을 관장허는 신잉께.”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라......”
“어떤...... 뇌빠진 자석이 죽음의 신에게...... 개기겄냐. 그래서 이짝 동니는 ‘칠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 많어.”
“일종의 뇌물이 되겠군.”
“뭐 그렇다고 헐...... 수 있겠구먼.”
임꺽정은 내 말이 재미있는지 껄껄 웃더니, 북두칠성을 바탕으로 북극성을 찾아주었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북극성은, 다른 별들과 달리 그 위치에 붙박혀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음...... 그럼 저 별을 통해서 방향을 가늠할 수 가 있겠군.”
“잉 그라지....... 그려가꼬, 저 별은 이명이 많으. 붙박이별, 길잡이별이라고도 헌다드만.”
북극성을 찾고난 뒤엔, 그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별자리를 이야기해주었다. 그중에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이야기를 해준 건 목동자리였다.
“쩌..... 별자리에서 질로 밝은 별을 우덜은 대각성......이라고 불러야. 워뗘? 존나게 밝지야?”
“음..... 꽤 밝군. 진짜로 밝아.”
“쩌 별 말구, 또 밝은 별이 하나 있는디...... 그건 겨울철에나 뜨는 별이여. 천랑성이라고. 일단 별 이야그는 난중에 허구, 쩌 별에서 쫌만 떨어진 곳에 아까츰에 야그헌...... 큰곰자리가 있쟈?”
“음...... 그러게,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데?”
“우덜 목동은...... 쩌 별자리를 보믄서, 저런 큰 곰으로부텀 양덜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이렇게 밤을 새는거여.”
“실제로 곰을 본 적은 있나?”
“잉..... 잊어버릴 때쯤이면, 나타나는 게 곰 새끼여. 봄 곰은 겨울철에 자빠져 잠자느라 쫄쫄 굶어가지고 숭악헌디 비실비실허구, 가을 곰은 겨울잠 잘 채비혀느라 존나게 탐욕시러운디 하도 처먹어서 뒤뚱거리제.”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 남자의 허세제. 말은 이리 혀두, 앞발에 스쳐도...... 그대로 삼도천 건너는겨.”
킬킬 웃는 녀석을 보며, 녀석의 삶이 나와 조금이나마 닮은 구석이 있다는 걸 느꼈다. 녀석의 삶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타자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 녀석의 삶이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녀석은 자신의 소유를 지키는데 목적이 있다면, 나는 타인의 소유를 빼앗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겠지. 주우가 의도를 하고 나를 임꺽정에게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녀석과 대화를 하면서 그런걸 느꼈다....... 그랬다.
Channel 2. 아이리스
이봉학씨와 통발을 놓고 오면서, 그는 창고로 가기 전에 잠깐 들를 곳이 있다면서 저를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음..... 사냥꾼이 산에 간다는 건, 뭔가 사냥과 관련된 이유로 가는 것이겠죠? 저는 능숙하게 산을 오르는 이봉학씨의 뒤를 따르면서, 그가 어떤 이유로 가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오르기 심들쥬?”
“아니 뭐...... 괜찮아요. 선생님이 오르는 길을 따라서 가는거니까, 눈짐작으로 선생님이 잡았던 곳을 그대로 잡거나, 선생님이 발을 디딘 곳을 그대로 디디면 되니까요.”
“옴마?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디유? 산 좀 타셨......나봐?”
“하하, 제 어머니의 친구분이 산에 사셨거든요. 종종 상담할게 있을 때 마다 찾아뵀는데, 그때 했던 가락이 있었나 봐요.”
이봉학씨의 칭찬을 듣다보니, 제가 처음에 그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독한 오해를 했었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사냥’이라는 단어와는 알타이르와 베가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와 어울리다보니, 이렇게 칭찬을 들을 정도로 ‘사냥’이라는 것과 가까워 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우가 아무런 생각 없이 저를 이봉학씨와 만나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녹림당’의 리더가 그냥 된 것은 아닌 모양이에요.
“여그부텀은 동물들이 댕기는 곳이니께...... 가급적이면 나뭇가지를 만지거나 소리를 내는건 조심하셔유...... 즘생들이란 워낙 경계심이...... 강한 넘덜이라 자그마한 인기척이라도 느끼면...... 바로 째버리니께.”
“네. 알겠습니다.”
이봉학씨는 그 말을 끝으로, 거의 엉금엉금 기다시피하며 조심스럽게 산을 올랐습니다. 사람 좋은 말만 해대던 그도, 이 구역에 오고나니 확연히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감았는지 떴는지 모호했던 그의 눈이 이젠 안광을 내며 번뜩였고, 이젠 숨조차도 조심스럽게 들이마시고 내쉬었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변화가 사뭇 진지해보이는 바람에 저 역시도 그를 따라서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며 그의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어요.
“아 그리고 하나 더...... 아이리스씨는 내 뒤를 따라 오믄서, 발자국을...... 설설 긁어서 지우도록 혀유. 발자국도...... 동물헌티는 낯선 흔적잉께유.”
“......네.”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봉학씨는 저를 배려한다고 발을 느리게 떼었지만, 걸음을 걸으랴, 흔적을 지우랴 일이 보통 많은게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저를 믿는 만큼 일을 맡긴 것이 분명했기에, 저는 불만을 터뜨리거나, 흔적을 지우는걸 게으르게 할 수는 없었어요. 저야 그에게서 배우고 떠나면 그만일지 몰라도, 그는 이곳에 남아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제 작은 실수가 그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일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뭐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제가 모든 흔적을 남김없이 지웠다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몇 번 손바닥으로 바닥을 긁어나가다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손에는 진흙이 묻어나고, 돌에 긁혔는지 아스라한 통증이 느껴졌거든요.
“자..... 인자 일어서두 되유.”
“다 온거에요?”
“잉...... 봐봐유.”
우리의 은밀한 걸음은 어느 자그마한 나무 앞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는 가슴속에서부터 앓는 소리를 끓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저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무에는......
“와...... 이거 봉학씨가 잡은거에요?”
“잉. 그런 셈이쥬.”
나무에는 다람쥐가 스네어에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스네어는 올가미라고 생각하면 되요. 그는 자그마한 다람쥐를 유인하기 위해, 다람쥐가 나무에 오르기 쉽도록 각목을 옆에 비스듬하게 세워놓았어요. 그 각목에 스네어를 설치한 것이죠. 스네어는 낚싯줄처럼 얇고 투명한 끈으로 되어있어, 다람쥐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람쥐는 나무 옆에 세워진 각목을 보며 ‘이거면 나무를 쉽게 오를 수 있겠군.’하며 얼씨구나 하고 각목을 오르다 스네어에 걸린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아직 숨통이 안끊어졌네...... 끊어볼려유?”
“으윽...... 그건 아직.”
“알아유. 지가 말혔잖아유 한 걸음 한 걸음 찬찬이 가보자구..... 게다가 여그는 지 아지트랑도 멀어서, 지금 죽여버리면 도착헐 때 쯤에는 고기를 쓸 수가 없어유.”
그는 스네어를 연결한 줄을 끊어 다람쥐를 확보하고, 남은 실에 자신이 가지고온 여분의 스네어를 연결했습니다. 그 뒤에 다람쥐를 잡을 동력원을 다시 원상복구했지요. 동력원이라고해서 뭔가 거창한 걸 생각할 지도 모르겠는데요. 그건 사실 별것 없었습니다. 실의 끝에 있는 나뭇가지를 휘어서 나무 옹이 속에 집어넣은 게 다였습니다.
“올가미의 원리는 간단혀유. 대상이 그걸 톡 건드리면, 바로 쑥.....허구 조일 수 있도록 하는거유. 라스알게티처럼 기계장치가 있다면...... 좋겄지만, 즘생덜 다니는 산에다가 그딴 짓을...... 허면 바로 의심허겄쥬? 그래서 요러게...... 나무를 휘어놓는거유. 다람쥐가 저걸 건들믄, 휘어놨던 나뭇가지가 펴지면서...... 다람쥐를 꼼짝 못허게 묶는거쥬.”
“아아......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간단헌게 최고쥬.”
이봉학씨와 스네어를 복구한 뒤에, 저희는 왔던 길을 되짚어 산을 내려갔습니다. 물론 그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저희가 왔던 흔적을 지우는 건 잊지 않았지요. 그가 허리춤을 펼 때쯤, 뒤를 돌아보니, 이곳에 사람이 지나갔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발자국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지요. 새삼 저라는 사람이 얼마나 꼼꼼한 인물인지 자찬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다람쥐는 어떻게 처리를 하는 건가요?”
“뭐 조지는거야 어렵지 않쥬. 목뼈를 꺾으면 바로 골로 가니께유...... 단, 앞서두 말했듯이 일찍 죽여 버리면, 괴기가 상혀유. 원래 동물들이 죽으면 내장부터 부패허니께.......”
“아아, 그래서 집에 도착 할 때 쯤 처리를 하는거에요?”
“잉..... 그리고 다람쥐는 크기에서두 알겄지만 별루 먹잘건 없슈...... 그래도 휴대성이 좋아서, 보존식으로 가공을 혀유.”
“음...... 이를테면 훈제를 한다는 건가요?”
“옴마? 훈제도 아요?”
“그럼요. 제가 살림을 몇 년을 했는데.”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18일
산에 틀어박힌 지도 벌써 열흘이 다됐다. 그래도 임꺽정은 생각보다 막 되먹은 녀석은 아니었던지라, 5일에 한 번은 마을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도 천성이 양치기였던지라, 그 많은 양떼를 놓고 갈 수가 없었는지, 양들을 몰고 왔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 방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난 처음에 네가 이 많은 양들을 죄다 데리고 간다고 할 때, 네가 정신 나간 놈인 줄 알았다.”
“이잉...... 그래서 느가 맨 첨에 내려갈 띠 나럴 그렇게 쳐다봤구먼?”
“내 얼굴이 뭐. 남들은 날 보면 아무런 표정이 없다고 하는데?”
“그래두...... 뭐 자세히 뜯어보면 쪼깐...... 달라지는 것이 있던디?”
임꺽정은 허허 웃으며 지팡이로 ‘청석’을 두드렸다. 내가 녀석을 정신나간 놈으로 본 이유는 간단했다. 산에 오르기전에 마을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상식적으로 이 많은 수의 양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거든. 양들에게 있어서 최적의 입지는 풀을 뜯을만한 초지와 그에 인접한 물가가 있는 곳이었다. 많은 양의 물을 요구하는 논농사를 짓는 ‘청산’에 저 많은 양들을 데리고 간다면, 양과 벼가 물을 놓고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 분명했다. 특히 지금과 같이 모내기를 하는 시기에는 더욱 그러할테지. 그런 상황에서 물을 빼앗을게 분명한 양을 데리고 간다면, 그 마을에 거주하는 농부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하지만 내 판단은 아주 간단한 사실 하나로 반박이 되었으니, 그건......
“그러면, 너는 네 소유의 양은 한 마리도 없는거냐?”
“에이 뭔 소리여......? 나가 양을 친 것이....... 몇 년인디 내 수중에 양 한 마리도 없겄냐?”
양을 관리하는 권리와, 양에 대한 소유권은 명백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의 역할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양을 받아, 그걸 관리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경제적인 보상을 받아가면서 하는 것이겠지. 관리를 잘 해서 양이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돈을 받겠지만, 잘못 관리해 자칫 양이 죽거나 다치게 된다면 그는 양을 관리하고도 오히려 양 값을 물어주어야 하는 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나왔던 것이겠지. 그에게 있어서, 나를 만나는 그 순간은 문자 그대로 ‘피를 말리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럼 양들을 주인에게 돌려주면 오늘 일은 끝나는 건가?”
“음...... 오늘은 아녀. 점번에는 그랐는디, 이번에는 주인헌티 돌려주기 전에 한나 해야 할 일이 있어야.”
“아 그래? 뭘 하는건데?”
“간단은 헌디...... 빡신 일이여.”
저번과 달리, 그는 마을을 관통하는 물가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임꺽정은 서림을 시켜 양들을 정렬한 뒤에, 한 마리 한 마리 살펴보며 양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양을 분류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기준으로 양을 분류하는지 추측을 해보았다. 음...... 그렇군, 양털을 기준으로 분류를 하는 모양이다. 편의상 두 개로 나뉘어진 양떼를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어본다면, A그룹의 양은 털들이 보기 싫을 정도로 자라있었다. 반대로 B그룹의 양들은 털의 길이가 준수한 편이었지. 그는 나에게 B그룹의 양들을 맡겼다. 나는 양들을 보며 임꺽정에게 받은 양들 앞에서 지팡이를 두 번 두드렸고, 그 구령에 따라 B그룹의 양떼들이 내 뒤를 따라 물가로 갔다.
양들에게 물을 먹이며, 나는 임꺽정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봇짐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가방에서 솜씨 없는 대장장이가 대충 만든 것 같은 커다란 가위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서림에게 양들을 정렬시키고 나서, 한 마리 한 마리 양들을 데리고 나와 직접 털을 깎았다. 겁 많은 양이라면 임꺽정의 손에 들린 그 무식하게 큰 가위를 보며 겁에 질릴 법도 하지만, 그의 손이 워낙 우악스러웠던지라,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우뚝 서서 임꺽정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깎은 털들은 어떻게 하는 건가? 네가 가지는 건가?”
“반은 맞고...... 반은 아녀. 반은 내가 챙기고, 반은...... 주인 몫으로 냉겨 놓는겨.”
“그럼 덜 깎는건가?”
“아따...... 왜 이리 사람이 무식한 거여. 반만 짜르는건...... 어느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냐?”
“거 사람이 궁금해서 물어보면 곱게 답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부아가 치밀어 그의 말에 퉁을 놓자, 녀석은 그게 즐거웠는지 껄껄 웃어 제꼈다. 이거 참...... 토라 이후로 이렇게 캐릭터를 좆같이 잡은 녀석은 처음 본다. 토라년은 ‘이게 다 오빠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명분으로 내게 온갖 간섭질을 하며 나를 괴롭히더니, 임꺽정놈은 ‘넌 왜 이리 무식하냐.’라며 나를 괴롭힌다. 물론 차이는 있다. 내가 반박을 할 때면, 토라년은 되지도 않을 정색질을 한다면, 임꺽정놈은 껄껄 웃어 재낀다. 어느 쪽이든...... 내 기분이 더러워진다는 데에선 일맥상통하긴 한다만......
“이것이 다...... 노하우여. 양털을 깎으면, 반은 내 봇짐에 채워넣구, 반은 요러게....... 쟁여놓고 양 모가지에...... 걸어놓으면 되는거여.”
“애초에 그렇게 말을 하면 됐잖아. 너는 왜 내가 말을 할 때 마다 사설을 붙이냐.”
“그편이 더 재미있지 않냐? 쪼크여 쪼크.”
“조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더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나는 임꺽정에게는 신경을 끄고 물을 먹고 있는 양들을 살피기로 했다. 지켜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참...... 얌전한 놈들이다. 내가 임꺽정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 같으니까, 죄다 내 눈치를 본다고 물을 삼키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양들 중 가장 어린놈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었고, 녀석은 내가 괜찮다고 하는 의사표현을 알아들었는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가장 약하고 어린놈이 안심하고 물을 마시니, 나머지 놈들도 그걸 따라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가정불화에 대한 자기 고백성 에세이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모들이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은 자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싸우는 부모 앞에 끼어들어 ‘자기가 잘못했다고..... 앞으로 잘 할 테니 싸움을 멈춰 달라.’라고 호소를 한다고 한다. 물론, 자녀의 양육문제로 싸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그런다고 하니...... 참으로 미성숙한 일이지? 교육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아이의 행동의 기저에는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라는 자기중심성이 깔려있다고 한다던데...... 상식적으로 이해는 잘 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이라면 대부분 이기적인 행동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아이의 호소에는 이기적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데 말이지.
어쨌거나, 양들의 이런 무력하고 순진무구한 행동양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런 행태를 보다보면 심박수가 느려지면서, 마음에 걸렸던 부하가 해소되는 기분이 든다. 참 신기한 일이지? 그냥 동물의 어리석은 모습을 볼 뿐인데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18일
이른 아침...... 새의 지저귐과 더불어 느릿느릿 기지개를 켜는 숲속에서..... 저는 덤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이유로 그런데에 숨기고 있냐고요? 이거...... 설명을 더 해서 제 몰골까지 묘사를 한다면, 궁금증은 더욱 심해질 것 같네요. 제 얼굴에는 검은색, 녹색, 갈색의 도료로 살색한점 없이 덮여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름모를 야생초로 온몸을 뒤덮은 채였거든요. 저는 이봉학씨가 시키는 대로,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숨을 내뱉는 대신, 한번에 들이마시고 내 쉴 것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나누어 쉬었습니다.
“......”
“......”
덤불 너머에는 작은 초지가 있었고, 그 위로 토끼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에요. 태생부터 겁이 많은 이 동물들은 풀을 먹든 물을 마시든 뭘 하든 모두가 하나 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순번을 정해 경계를 섰어요. 이 역시도 이봉학씨가 말하는 대로였어요. 경계를 서는 토끼는 가슴을 쭉 펴고 곧추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 이곳저곳을 이리저리 보는 것이 아니라, A라는 장소를 찬찬이 살핀뒤에, B라는 장소를 정해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어요. 그렇다고 바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A와 B의 교집합이 되는 장소를 설정하고, 그것을 서서히 늘려가면서 순찰을 하는 거에요. 이렇게 방비가 삼엄한데 어떻게 할거냐고요?
저는 토끼들이 풀을 뜯는 초지 너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서 있었지요. 그곳의 있는 구멍이 우리가 파악한 토끼굴의 입구가 있지요. 저는 큰 줄기에서 시선을 옮겨, 가지를 향해 눈을 돌렸습니다. 그곳엔 이봉학씨가 손을 흔들고 있었지요. 저는 그의 손을 향해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는 차원에서 검지와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동그라미를 만들어보였지요.
그가 저를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였습니다. 신호에요. 저는 그의 신호에 따라, 꽁꽁 싼 거즈를 풀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리의 똥이 들어있었어요. 저는 그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손부채로 부쳤습니다. 이봉학씨의 말대로라면 단 세 번, 세 번이며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
토끼의 후각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민감하다더니...... 세 번째 손부채를 부칠 것도 없이, 경계를 서는 토끼가 앞발로 바닥을 긁었습니다. 그 행동에 토끼들은 풀을 뜯는 것을 멈추고, 서서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습니다. 토끼들의 시선이 이러저리 떠돌다가 제가 숨어있는 덤불 근처로 서서히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가지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손가락은 이제 2개가 되었습니다. 역시 두 번째 신호에요. 저는 신호를 따라 손에 쥐고 있던 줄을 천천이 당겼습니다. 줄들은 토끼굴의 반대편에 있는 장치를 흔들었어요. 물론 도르레에 솜을 감았기 때문에 줄 자체에는 소리가 나진 않았어요. 저에게는 장치에서 나는 소리도 들리진 않았지만, 청각이 민감한 토끼들에게는 꽤나 큰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토끼들이 경계 태세를 취했어요. 여기까진 이봉학씨가 알려준 시나리오 대로입니다. 저는 다시 한 번 가지를 쳐다봤습니다.
이봉학씨는 손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젠 마지막이에요. 하지만 저는 아까완 달리, 바로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너무 부끄러웠거든요. 이 몰골을 가지고...... 그걸 해야 한다는 게...... 비록 말 못하는 동물이고, 그 미적감각이 인간의 것과는 분명 다르겠지만...... 제가 망설이는 사이에, 그의 손은 더욱 빠르게 왔다 갔다 했습니다. 하아.....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뭐. 저는 결국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어!......어.....어흐으응......”
“!!!!”
자리에 벌떡 일어나, 토끼들을 향해 손을 들며 저는 호랑이가 내는 소리를 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어흥이라니, 스물 네 살 먹은 처녀한테 어흥이라는 말을 하도록 만들다니...... 저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한편으로...... 제 얼굴에 도료를 빈틈없이 칠해서 다행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어요. 아마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따면..... 토끼들은 걷잡을 수 없이 빨개진 제 모습을 여과 없이 봤을 거란 말이에요.
어쨌거나, 작전은 성공을 해서, 토끼들은 갑자기 나타난 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풀밭에서 진동한동 내달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정쩡한 자세로 이봉학씨를 쳐다봤지만...... 이봉학씨의 시선은 제게 닿지 않았어요. 그의 온 신경은 그의 손에 달린 줄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캑!!!”
무연중에 누군가가 목을 잡아채서 나는 캑캑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손에 들린 줄이 이리저리 뇌까려졌습니다. 덤불속에서 그 너머가 보이진 않았지만, 가지위의 이봉학씨의 얼굴은 똑똑히 잘 보였습니다. 그의 얼굴은 아까의 긴장감이 모두 날아 가버린...... 문자 그대로 ‘통쾌한’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되얐슈!”
“됐어요?”
저는 그가 있는 나무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그의 말대로 토끼 한 마리가 줄에 발이 묶여 오도카니 서 있었지요.
“잘 혔슈! 옴마 인자는....... 덫 놓는 거는 도가 텄네유.”
“고맙습니다.”
“고맙긴유...... 알겄지만, 지야 본대루만 야그 허잖아유.”
그는 흐뭇한 얼굴로 토끼의 뒷목을 잡고, 제게 토끼를 건네주었어요. 이봉학씨가 알려준 대로, 저는 토끼의 귀를 잡아챘습니다. 토끼는 귀를 잡히자 그대로 딱 굳어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요. 토끼는 제 품에 안겨 바들바들 떨었지요. 아마 열흘 전의 저라면...... 토끼의 귀여운 모습에 얼이 빠져 ‘죽이는건 하지말자.’라고 이야기를 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열흘 전이고...... 지금의 저는 제 팔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성취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제 이 토끼를 어쩔 셈이에요? 손질하는건 이미 배웠잖아요.”
“뭐..... 직접 혀보라구 하고 싶은 것두 있긴 헌디..... 아이리스씨 손 맵시 보믄 굳이 혀 보라고 헐 것도 없어 보이구...... 쪼깐 욕심나는디, 그거나 한 번 혀볼려유?”
“어떤거요?”
“돈 놓고 돈 묵는거랑 비슷하쥬...... 미끼 놓구 더 큰 거 잡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