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답답이는 임꺽정의 옆에서 기도문을 읊었고, 늘 그래왔듯이 임꺽정의 가슴에 난 상처는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어찌나 열심히 기도를 하던지 답답이는 임꺽정이 완전히 회복이 되었음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단순히 이마에 땀이 맺히는 정도를 넘어서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쏟아냈다.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탈수증상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 너무 정신없이 기도에 몰두했었나봐요.”
답답이는 ‘나는 괜찮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싶었는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기도를 하느라 기력을 다써버렸는지 일어서다가 무릎이 풀려 휘청거렸다. 이런 바보 같은 녀석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것 밖에 없었다.
“원래 기도라는게 사람 지치게 만드는 거였나?”
“하하, 글쎄요...... 저도 이렇게 몰두를 해본게 오랜만이라서요. 요즘은 다치는 일도 잘 없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
기도에 방해가 될까봐 묻지는 않았지만, 이젠 임꺽정 놈의 상처도 다 나았겠다, 나는 새/끼 곰을 끌어안은 채 우리 곁에서 멀뚱이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옷매무새만 보면 대관절 뭘 하는 사람인지 짐작도 안가지만...... 뜬금없이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곰 새/끼를 안고 있는걸 보면, 어디서 ‘멍청하다’소리를 남부럽지 않게 듣지 않았을까 싶다.
“아아, 인사하세요. 이분은 이봉학씨이고요. 제...... 사냥 스승님이세요.”
“......사냥? 니가?”
비록 눈이라는 것이 나의 얼굴에 박혀있어, 내 얼굴 자체를 스스로 볼 방법이 없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답답이의 얼굴에 ‘섭섭하다.’라는 뉘앙스가 떠오르는 것으로 보아, 내가 녀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제대로 전달이 된 것 같았다. 사냥이라니, 기회만 되면 ‘옳은 것’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여자가, 다른 생물의 생명을 빼앗는 일을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닥 믿겨지지가 않았거든
“저라고 매일 집에서 틀어박혀 빨래만 하고 있을까요?”
“스승인 내가 이런 말을 하믄...... 객관적이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겄지마는...... 아이리스 양은 제법 훌륭한 사냥꾼이유.”
얼씨구? 제자라고 두둔하는거 보게? 그럼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저 새/끼 곰은 오늘 저녁식사거리라도 되는 건가? 비아냥거릴 수 있는 래퍼토리는 내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이런 드립을 쳐봐.’ ‘이건 어때? 아마 울그락 불그락 해질걸?’이라며 목록 단위로 뽑아주었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내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저 곰 성애자로 보이는 이와 싸우는건 어렵지 않지만, 중간에 낀 답답이로서는 퍽 곤란해 질 것이 분명하니까......
어쨌거나 소개를 받은 참이니 인사를 하는데, 한참 정신을 잃었던 임꺽정이 마침내 정신을 차렸는지 헉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보아하니, 지금 그는 스스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헷갈려하는 것 같아보였다.
“뭐......뭐여?”
“뭐긴 뭐야. 죽다 살아난거지. 생각보다 목숨이 질겨?”
비아냥의 화살을 그에게로 돌렸지만,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살펴보느라 내 말에 대꾸할 정신이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꾹꾹 눌러보더니 마침내 자신의 몸에 상처하나가 없다는걸 깨닫고 더욱더 혼란이 온 듯 했다.
“여그.....뭐여? 천국이여?”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야?”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요?”
“아니 뭐...... 아픈 디는 없이 멀쩡헌디...... 여그가 어디래유?”
그는 우리의 말을 한참동안 듣고 나서야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하긴, 처음 겪어보는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
Channel 2. 아이리스
‘난동을 모두 수습하고나서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로 끝맺어지는 이야기책은, 참으로 순진무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아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시간은 그 이후로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지만...... 활자의 조합이 아닌, 실제 살과 피로 이루어진 우리들로서는, 사건이 대단원을 맞이한 뒤에도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하지요. 뜬금없이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아야, 여짝 털이 삐져 나왔자너....... 똑바로 안깎냐?”
임꺽정이라는 사람이 깨어나고, 우리는 고맙다는 말을 뒤로하고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임꺽정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는 우리에게 ‘껀수를 쳤으면 뒷수습은 해야지?’라는 말과 함께 이가 반쯤 나간 가위를 내밀었고, 우리는 별 수 없이 양털을 깎아야만 했거든요.
“아 성 쫌..... 부려먹는거는 그렇다구 혀두...... 일을 시키면...... 인간적으로 갔다가 가새는 잘 드는 걸루 줘야 하는거 아녀?”
“가심 아프냐? 나넌 그것보담 훨씬...... 더 아팠는디?”
임꺽정이라고 했나요? 그 앞에선 이봉학씨는 이제까지 제게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 앞에서는 그래도 선생님 노릇한다고 많이 어른스러웠는데...... 그 앞에서는 투덜대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하는 것이 그야말로 응석받이 막내동생 같아보였지요, 그 둘의 모습이 바보 같아 웃음이 나오려는걸 꾹 참아야만 했습니다.
“라스알하게 식민사인가 뭔가는 잘 배웠냐?”
제가 그들을 보며 소리죽여 큭큭거리는데, 로키군이 다가왔어요. 처음에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이 있다며, 양떼를 몰고 물가로 가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는데, 임꺽정씨와 이봉학씨가 보이는 만담에 조금은 흥미가 동했나봅니다. 그에게 양들을 이렇게 두고 와도 괜찮은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대신에 양떼를 보고 있는 양치기 개를 턱짓으로 가리켰지요.
“저놈이 나보단 훨씬 더 낫거든.”
“못 보던 사이에 많이 겸손해졌는데요? 개한테 굽히고 들어가다니 말이에요.”
“뭐, 사실이 아니라면 발끈하겠지만, 사실인걸...... 저 녀석이 없으면 양을 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더군.”
“헤에..... 그럼 개만도 못한 로키군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에요?”
“이 자식이......”
그가 세모눈을 치켜뜬걸 보니 더는 놀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는 서둘러 화제를 바꾸어 라스알하게 식민사, 아니..... 삼민의 독립투쟁사에 대해서 제가 들은 바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자 로키군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당혹감이 반반 뒤섞인 묘한 표정이 떠올랐지요.
“그런 기구한 일이 있었구먼.”
“이래서, 양쪽의견을 다 들어봐야 하나봐요. 우리 딴에는 좋다고 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에겐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버리는 것 같아요.”
“식량 증산계획이 제일 충격인걸...... 라스알게티에서는 그걸 기념하는 행사까지 여는 마당인데”
“라스알하게 종단 열차도 만만치 않죠...... 학교에선 라스알하게에게 대륙이 베푼 호의와 관용의 증표라고 가르치잖아요. 식민사가 오래된 프로하기온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말이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저’로 하여금 이겠지요. 엄밀히 말하자면 로키군은 프로하기온 출신이니까요. 워낙 식민사가 오래되어 동화되었지만, 프로하기온의 사정은...... 라스알하게와 하등 다를 바가 없을테지요.
“쩌그......”
“아, 네. 몸은 괜찮지요?”
“그려유...... 겁나게 신기하네유. 그리구...... 감사혀유. 샥시 아니었음 삼도천 진작에 건넜을 텐디......”
“아니에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나가 나.....입 갖고 이런 말을 혀긴 낯이 많이 간지럽지마는....... 라스알게티 치두 나쁜 넘덜만 있는 건 아니었네유.”
Channel 1. 로키
“아이구...... 뭣허러 직접 양을 델구 오고 그려...... 그냥 말만 허믄 우리가 알아서 델구 올건디......”
“아이구.....그런 말씸은 이제 그만 하셔유. 거...... 몸도 성치 않은 분이...... 뭣허러 찬바람 쐴라구 그런디유.”
“우리 임가도 얼렁 장개를 가야 헐틴디 말여...... 나가 3년만 젊었으믄 샥시 찾으러 댕길 건디......”
할머니는 꾸벅 인사를 하는 임꺽정을 흐뭇한 얼굴로 보다가, 우리가 가려는 채비를 하자 이대로는 못 보낸다며 집에서 찬거리를 챙겨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잠깐사이에 보자기에 쌓인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을 보건대, 그녀는 진작부터 임꺽정을 챙겨주기 위해 준비를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지가 뭘 혔다구 이렇게 바리바리 싸주신대유...... 철성이 일 마치구 오믄 그때나 챙겨주지는”
“음마? 니가 언제부터 철성이를 그렇게 챙겨줬다구 그런댜? 갸넌 에미인 나가 알아서 잘 챙겨줄라니께...... 임가 니는 걱정 하덜 말어......”
다소 퉁명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임꺽정은 재차 고개를 숙여가며 감사를 표했고, 할머니는 집이 작아져서 더는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며 우리를 보내주었다.
“생각보다 웃어른한테는 잘하는 편이네?”
“나가 아무나한테 잘하간? 잘 해드릴 만한 분 이니께 그런거지...... 이 동니가 인심이 좋어......”
“주우네 집에 틀어박혀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그런 편인거 같군.”
마지막 집까지 다 돌았고, 그 많던 양들도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지금, 이 오솔길에는 나와 임꺽정, 그리고 헥헥거리는 서림뿐이었다. 오후에 그렇게 푸닥거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해가 지하로 내려가면서 그 모든 소란스러움까지 같이 가지고 가, 주변은 호젓하게 조용했다. 검은 하늘의 장막으로 별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야, 니 집에 가면 뭐 허냐?”
“뭐...... 씻고 자겠지?”
“......닭 찌찌 살마냥 퍽퍽하게 사는구마잉.”
“언어유희 수준이 상당히 저급한데? 그러니까 니가 아직까지 여자가 없는 거야.”
“옴마? 각시 있는게 벼슬이여?”
“뭐 그렇게 생각하고 살진 않았는데...... 널 보니 벼슬인 것 같긴 하다.”
임꺽정은 내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는지 괜히 파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림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우리 주위를 껑충거리며 돌았다.
“밥 때두 다 됐는디....... 술 한 잔 할텨?”
“아 전 각시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은데요?”
“새/끼가....... 이대로 집에 가믄 긴긴밤 독수공방 헐 성이 눈에 안 밟히겄냐?”
“원래 사람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며 사는 거야.”
“이...... 씨벌럼이. 말이 안통허네.”
“애초에 너희 말은 할 줄도 몰랐어.”
“아놔...... 이 좆같은 새/끼가.”
임꺽정은 내 말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지? 싸우자는건가?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녀석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 거구의 육신을 가진 이는 팔을 쭉벌리며 나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어......어어? 뭐야? 이거 안놔?”
“넌 오늘 성이랑 죽을 때 까지 술 먹는 겨...... 알았냐?”
“야, 노동계약서엔 이런 조항이 없었다고. 법대로 하자고 법대로!”
“법은...... 니미 뽕이다 이 새/끼야.”
나는 우악스러운 녀석의 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녀석의 완력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해서, 내가 발버둥을 쳐댈수록 녀석은 그 두꺼운 팔에 힘을 더욱 싣었다. 녀석의 팔뚝이 내 갈빗대를 누르는 통에 내의사와 상관없이 내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거 안놔?”
“놓지. 놓을겨. 주막가믄 놓을라니까...... 고만 버둥거려 마.”
우리 둘의 촌극에 서림은 ‘당최 저 둘이서 무슨 짓거리를 하는거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가....... 제 주인이 신이나서 달리는걸 보니 ‘역시나 좋은 일이었어.’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왕왕 짖으며 주인의 뒤를 따라갔다. 에휴...... 난 너무 착해서 탈인 것 같다.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과 임꺽정씨는 양들을 주인집에 보낸다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고, 그들을 보낸 뒤에 저와 이봉학씨는 곰의 시체를 처리하는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거...... 어떻게 할 거에요?”
“글씨유...... 덩치가 워낙 커가지구 우리 둘이서 손질을 허기는...... 쪼깐 그러겄는디유?”
“그럼 이대로 두고 가요?”
“그것두 안 될 일이쥬...... 저렇게 먹잘거 많은 시체를 두고 가믄 즘생들 꼬여유. 이리나 들개새/끼덜이 시체 뜯을라구 왔다가 사람 덜헌티 해꼬치 한다니께유.”
“흐음......”
“질루 좋기로는 전번에 쩌것헌티 했던거 맹키로 뚝딱 고치면 싹인디......”
이봉학씨는 제 품안에 안겨있는 새/끼 곰을 가리켰습니다. 물론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건 아니에요. 하지만 임꺽정씨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꽤나 많은 시간을 들여 버리는 바람에 곰의 상태를 살펴보니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새/끼 곰 같은 경우는 상태가 심각했지만 숨은 붙어있었거든요. 아무리 ‘아버님’의 권능을 받은 이적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이 다한 것을 살리는건 불가능합니다. 물론 ‘아드님’께서는 죽었던 친구 ‘라자루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그건 ‘아드님’과 같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에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요.
“솔직히 말하믄...... 쩌것도 문제유. 일단은 경황이 없어가지구 아이리스씨가 살리는 걸 내비 두긴 혔는디...... 저대루 두면 결국 또 죽게 될거/유. 그렇다구 곰 새/끼를 키우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혀봤구......”
이봉학씨의 말을 듣다보니, 제가 조금은 난감한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 속에서의 삶이란 건, 죽음과 공존하는 것이겠죠. 강자로서 약자를 포식한다는 유일한 규칙 속에서 살기에, 사고사든 자연사든 죽음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량한 동정심으로 그 규칙에 개입을 해버린 셈이 되어버렸어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말이에요. 하지만 제 품안의 새/끼 곰은 제 실수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냥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
“얘가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때 까지 돌봐주는 건 안 될까요?”
“길들이기만 헌다면야 못헐거는 아니겄다만...... 식사를 메꿀 수 있을지도 문제쥬. 그라고, 어찌됐든 쩌거를 처리를 혀야허는디...... 눈앞에서 즈그 부모 껍다구 벗기는 것두...... 못 헐 짓 아니에유?”
“.......”
대화를 나눌수록, 이봉학씨의 의도는 명확해졌습니다. 하지만...... 동의하고 싶진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리로는 인정이 되는데, 마음으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어요. 어찌됐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은 것인데, ‘자연의 법칙이 그래’라는 말로 다시 그 기회를 빼앗는다는 건...... 더 큰 잘못이 아닐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 품안의 새/끼 곰은 자면서 꿈을 꾸었는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아등바등 거리는 것이...... 마치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 미안합니다. 이봉학 선생님. 저는 죽일 수 없을 것 같아요.”
“......”
“자연의 법칙이 그럴 수 있죠. 약육강식의 정글이니까. 그래도 간신히 새로 얻은 생명인데,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린 사냥꾼이기 전에 인간이잖아요.”
“......”
“그리고 곰을 키운다는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는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그게 불가능하다고 밝혀진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 때 가서......”
“그 때 가서 처리를 헌다는 말씀이신거쥬? 아이리스씨가 직접...... 할 거라 이거/유?”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려유 그럼...... 일단은 아이리스씨 말맹키로 아무도 안 해본거니께, 불가능하다는 법두 없는거니께 한 번 키워나 봐봅시다.”
“죄송해요...... 그리고 이김에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 말대로 제가 사냥에 소질이 있을지는 몰라도...... 전 사냥꾼은 되지 못할 것 같네요.”
“지두 그렇게 생각혀유...... 뭐 근데 그게 잘못된 건가? 사람이 각자 품성이란 게 있는 건디유 뭘.”
Channel 1. 로키
일전에 라스알하르게타에서도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로 주막이라는 곳은 우리말로 하자면 ‘술집’이었다. 다만 대륙의 일반적인 술집과는 다르게, 이곳은 주류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식사와 숙박 서비스 까지 제공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런 다채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땅거미가 진 지금, 이곳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오매, 임가 벌써 올 때가 되었는가?”
“올 때 됐으니 왔쥬. 여기 국밥에 막걸리 말아주쇼.”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임꺽정이 들어오자 반갑다는 식으로 알은체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는 라스알하게어를 구사하느라 정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맥락상 그렇게 알은체를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본 것이다. 임꺽정은 그런 그녀가 민망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퉁명스레 대꾸하고는 평상에 앉았다.
“이잉..... 서림이두 왔네잉. 그려그려, 이모가 얼렁 가서 뼉다구 몇 개 썰어가지구 올게 기다리구 있어.”
서림역시 그녀와는 구면이었는지 꼬리를 잔망스럽게 흔들며 그녀의 다리를 타려고 했고, 그녀는 그런 서림의 머리통을 몇 번 쓰다듬고는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여그는 다 존디...... 술이 맛대가리가 없어. 그니께 혹시라두 오해는 말어. 내사 서울만 수복하믄 진짜배기루 맛난 술 원없이 먹여줄라니께.”
“아니 뭐...... 난 별로 술을 즐기지 않으니까. 크게 상관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 하는게 참 웃긴 일이긴 하지만, 먹으러 와서 음식 욕 하는 건 그렇지 않나?”
“...... 뭐 어뗘? 사실인디.”
라고 제법 센척은 해댔지만, 가게 주인이 국밥과 막걸리를 내오자, 그는 아까의 말이 무색하도록 게걸스럽게 음식을 퍼먹어댔다. 참...... 언행 불일치의 적절한 예시를 이렇게 찾나 싶다. 임꺽정은 국밥을 한 그릇 비우고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주인에게 빈 그릇을 내밀며 한그릇 더 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부외자인 나로서는 낯선 장면이었지만, 주인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는지, 빈 그릇을 받아서 미리 준비해둔 새로운 국밥을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 많이 묵어야 심도 쓰지 않겄어?”
“난 아무 말도 안했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의 행동을 되돌이켜 보았는지...... 겸연쩍은 듯 고개를 으쓱했다. 뭐 그래...... 사람은 자기 멋에 사는거 아니겠는가.
“서울이라는데는...... 라스알하르게타를 말하는건가?”
“잉..... 순 우리말이라 못 알아 들을 수도 있었을 것인디...... 그래두 눈치는 있는 편이네.”
“뭐 눈치라면 눈치겠지만, 이 지역에서 중심되는 도시가 라스알하르게타 뿐이니 그럴 수 밖에...... 그런데 말이다.”
“잉. 말혀.”
“그걸 되찾고 나선 뭘 할 생각이지?”
“......? 되찾으면 우덜 세상이지 뭘 더 갈거 있남?”
“......”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할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는 얼굴로 나를 보는 이 남자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이 남자는...... 라스알게티의 군세가 몽땅 라스알하게에 주둔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라스알하게가 비교적 최근에 합병된 곳인지라 다른 속주에 비해 규모가 큰 부대가 주둔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라스알게티 군의 전부는 아니다. 라스알게티 군의 공식적인 편제는 육군만 총 39개 사단에 이른다. 군단으로 따지면 13개 군단이 있는 셈이지. 말이 복잡하게 갈거같아 사단급으로만 이야기를 축소하자면, 접경국가인 사다크비아와의 국경을 지키는 22개의 사단과 속주에 주둔하고 있는 17개의 향토사단이 그것인데, 라스알하게의 경우에는 8군단의 2개의 사단이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그 사단의 병력마저도 전방의 사단과 순환근무를 통해 인력을 수급함으로써 정규군에 준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쨌거나, 라스알게티의 공식 군의 규모에 비한다면 일부에 불과한 게 사실이다.
나는 이 순진한 남자의 생각을 사실관계를 통해 와장창 부숴주고 싶었지만...... 그래, 뭐 나야 답답이의 고집대로만 해주면 그만이니. 이 사람이 죽든 말든 엄밀히 말하면 내 알바는 아니긴 했다. 어쨌거나, 이 남자만 그랬으면 좋겠지만..... 만약 그것이 라스알하게의 주민들에게 만연한 생각이라면, 아마 그들은 꼴랑 2개의 향토사단을 격파한 뒤에 최악의 경우에는 나머지 37개의 사단과 전면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지도 모른다. 뭐..... 그전에 죄다 박살이 나겠지만.
“니 말대로 이른바 혁명이란게 끝나면 모든게 다 정리될거 같냐?”
“......뭔소리여?”
하아...... 이번 일을 통해, 나도 모르고 살던 나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나는...... 오지랖이 넓은 편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알고있는 바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통한 가상적인 시나리오에 대해 녀석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 최대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그의 표정은 예상대로 똥 씹은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럼 니 말언...... 혁명이 끝나도 완전히 끝나는게 아니라 이거여?”
“끝이 나긴...... 아마 그때부터 시작일걸? 라스알게티는 타국민을 복속시킨 적은 있어도, 독립시켜준 적은 없어. 한번 독립을 인정하는 순간, 도미노처럼 너도나도 들고 일어날 테니까...... 그런 딱딱한 녀석들 앞에서 니들이 독립을 말하면 그걸 내버려 둘거 같아?”
“그려두 라스알게티 넘덜이 39개 사단을 모조리 몰고 오지는 않겄지......”
“그래, 아마 그럴테지. 그러는 순간 사다크비아에서 얼씨구나 하고 쳐들어 올 테니까. 아까 말한 건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야기 한거고...... 최상으로 따져도 너네는 아마 4개 사단과 맞서 싸워야 할 거다. 제 8군단의 나머지 사단병력과, 이곳과 인접한 알데라민의 제 4군단병력이 출동 하겠지.”
“그럼 우덜이..... 그 4개 사단을 몽땅 쳐죽여 버리면......”
“그럼 니들이 원하는대로 독립이 되겠지. 그런데, 그 인원이 약 80,000명은 될거다. 아무리 알데라민이 평화로운데라 제 4군단 놈들이 하바리라고 놀림 받는다고 하더라도, 정규군은 정규군이야. 전쟁에 이골난 살육기계들 80,000명이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뭐 나야, 답답이 고집대로 너네들이 혁명을 성공하는 거만 지켜보고 빠지면 그만이지만...... 너네는 너네가 갈 상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할거 같으니 말이야. 녀석들의 창 아래에 쓰러지면 아마 곰한테 뜯겨 죽는게 차라리 좋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
임꺽정은 한참을 생각하고 난뒤에...... 내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것도 주우는 알고 있갔지?”
“그러길 바래.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도 갖추고 있기를 바래야지.”
Channel 2. 아이리스
자식이 보는 앞에서 어미의 가죽을 벗기는 건 심하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고, 우리는 결국 어미 곰을 묻어주기로 했습니다. 이봉학씨는 ‘거 웅담이라는 것이 꽤나 비싼 약재인디......’라며 아쉬워했지만, 제 품안에 안겨있는 새/끼 곰을 보고는 두말 않고 열심히 구덩이를 파더군요. 이봉학씨만 작업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죠. 저는 새/끼 곰을 바닥에 뉘이고나서, 손을 걷어부치고 그의 작업을 도왔습니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 쫄쫄 굶느라 비교적 가볍다고 하지만, 객관적으로 곰은 무거웠고...... 우리는 한참동안 씨름을 한 끝에 간신히 곰을 구덩이에 밀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어휴...... 진짜 힘든데요?”
“그러게유..... 내사 여적껏 즘생덜 해체는 혀봤어두 성한채루 묻는건 첨이라......”
한참 씨름을 한 끝에 거대한 봉분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각자 땀을 닦으며 서로의 공적을 치하했습니다. 새/끼 곰은 겨울철 내내 그렇게 잠을 자고도 부족했는지, 우리가 그렇게 고생을 하는 동안 한번도 깨질 않구 계속해서 잠을 자고 있었지요. 저런 모습 때문에...... 사람이 곰 하면 ‘미련하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나저나...... 길고 긴 여행 끝에 결국은 공쳤네요.”
“뭐...... 사냥이란 것이 늘상 성공만 하란 법이 있겄슈? 글고 오늘 같은 날언 몸 안다치구 성하게 끝난 거이 다행 아녀유?”
“그러게요. 진짜...... 세상에 곰이라니. 뭐 이런 날이 있나 싶어요.”
하늘을 보니, 해는 벌써 져버리고, 하늘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었습니다. 워낙 빛이 밝은터라 우리 발 아래는 달그림자가 드리울 정도였어요. 와 참...... 하늘이...... 하늘의 진풍경에 홀려 있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빛을 받으며 경외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 두 사람이 오늘 한 생명에게 몹쓸 짓을 한 것에 대해 말이에요. 만약 제가 달이었다면...... 그 두 사람에게는 빛을 비춰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으응? 아, 깼구나.”
옷자락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쪽을 보니, 새/끼 곰이 잠에서 깨어났는지 제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폭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저는 새/끼 곰을 안아들었습니다.
“곰은...... 뭘 먹죠?”
“음...... 일단 상식적으로 보믄 괴길 먹겄쥬? 아아, 맞네 그러고 봉께, 접때 사냥 나갔다가 곰을 본 적이 있는디, 갸가...... 썩은 나무에 매달린 버섯두 묵구 그랬슈.”
“고기랑 버섯이라...... 그러니까 사람처럼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고 하나봐요?”
“뭐...... 그럴지도 몰겄슈. 지야 뭐 사냥은 해봤어두 뭘 키워본 적은 없어가지구.......”
저는 시험삼아서 주머니속에 넣어둔 육포를 꺼내 곰의 입에 대어보았습니다. 새/끼 곰은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이내 입에 물고 야무지게 씹어먹더라구요. 하하 참...... 그 모습이 공갈 젖꼭지를 빠는 아이 같아 보였습니다.
“하하 귀엽지 않아요?”
“글게유...... 뭐 멕이는 문제만 해결되믄 상관은 없겠다만. 걱정은 되네유. 저 쪼깐한 넘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인디...... 그때는 하루에 얼마를 처묵으려나.”
“어른이 될 때쯤엔 자연 속에 놓아줘야죠. 그땐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거고요...... 아아, 벌써 다 먹었어? 어쩌지? 육포는 아까 준 게 다인데......”
“음..... 일단 녀석두 녀석이지마는....... 우덜두 식사는 혀야쥬? 워낙에 이리 휘둘리구 저리 휘둘리느라 정신 없어가지구 여적지 생각을 못혔는디...... 우덜 오널은 한 끼도 지대루 못챙겨 먹었슈.”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로 우리는 오늘 제대로 된 끼니를 한끼도 챙기지 못했다는걸 깨달았어요.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더니......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마자 배가 쓰린 듯이 고파왔습니다. 긴장이 무너져 내리더니 몸도 와르르 무너진 셈이지요.
“여적꺼진 우리가 채집한 걸루 자급자족은 혔다구 하지만, 오늘같이 공친 날은 어쩔 수 없쥬. 주막 가서 국밥 한 그릇 혀유.”
Channel 1. 로키
임꺽정은 내 말을 몇 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듣고 나서야 비로소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졌고, 그만큼 내게 질문하는 횟수도 점점 늘어났다. 나는 이놈의 오지랖 때문에 내가 아는 한 최대한의 정보를 그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루 니 말대로 되버리면....... 좆된거 아녀?”
“아마 높은 확률로 그럴거다.”
“하......”
눈치 빠른 서림은 주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걸 눈치챘는지, 주인장이 준 갈빗대를 들고 슬금슬금 구석으로 가서 소리를 죽여가며 고기를 뜯었다. 저거...... 겉으로만 사족보행을 하지 내용물은 개가 아닌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희의 지도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 같은 조직원들이 이런 안일한 생각이 만연해 있다면 둘 중에 하나겠지. 일부러 정보를 제공하지 않던가....... 아니면 정말 너희 수뇌부도 이런 사실을 간과하고 있거나. 전자라면 뭔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후자라면...... 아까 니 말대로 되겠지.”
“나넌......”
임꺽정은 술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서 그대로 입속에 우겨넣고는 빈 잔을 탁자에 놓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성제덜을 잃는 꼴은 못봐야.”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는 입장으로서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는 알 것 같다.”
“주우 이 새/끼랑 담판을 지어봐야것어...... 그 새/끼 대그빡에 뭐가 들어가있는지...... 그놈 입으로 확인을 혀봐야 쓰겄구먼.”
“가급적이면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거다. 앞으로 진공작전이 2주 남짓 남았으니까. 이대로 허송세월을 하고나면 그 때 이후로는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가 없어질 테니까.”
“어......? 두 분 여기서 식사하고 있었네요?”
임꺽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 답답이와 이봉학이 주막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 둘을 보자마자 황급히 흥분한 기색을 감추고는 내게 ‘이 일언 우리 둘만 알고 있자고.’라고 속삭였다. 거 참...... 둔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런 약삭빠른 면도 가지고 있었네? 어쨌거나 임꺽정은 이전의 느긋하고도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가, 그 둘을 맞이했다......만 저 일행에 뭔가 이상한 것이 끼어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너...... 이건 뭐냐?”
“예? 아...... 얘요? ‘아버님’의 선물이죠 뭐.”
검은 털뭉치 같은 형상을 띄고 있는 그 물체는..... 답답이의 곁에 동그란 껌딱지 마냥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가...... 답답이가 평상에 걸터앉자, 고개를 쓱 들어 탁자위의 음식을 향해 고개를 킁킁거렸다. 뭐야...... 이 괴상한 피조물은 설마......
“야! 뭐야 이거! 곰이잖아?”
“...... 뭐 그렇게 됐네요.”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이걸 끌고 와?”
“그럼 어떻게 해요...... 어미도 잃고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됐는데요. 저희 때문에 천애 고아가 되었는데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요?”
아이고 세상에...... 요 몇 달 동안 ‘답답이’라는 별명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똘똘한 모습을 보여 주길래 이젠 그런 별명으로 부르는건 그만둬야하나 싶었더니, 역시 귀신은 속여도 출신성분은 못 속이나보다. 세상에 인가에 곰을 데리고 오다니 제정신인가? 아니 이쯤 되면 이봉학이라는 사람도 문제가 크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제자가 저런 멍청한 행동을 하면 말려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말리지는 못할망정 저런 멍청한 행동에 동조를 하다니......
이런 생각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는지, 임꺽정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손님의 존재에 화들짝 놀라 날뛰는 바람에 앉은뱅이 탁자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엎어져버렸다. 우리의 난장판에도 불구하고 이 미련한 피조물은...... 이 모든 일이 자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자각은 하지도 않고 답답이에게서 내려와 평상에 널부러진 국밥 국물을 정신없이 핥아먹어댔다.
“옴맘마! 임가 지금 뭣 허는...... 히익! 뭐여 이거!”
주인장 역시 깜짝 손님에게 걸맞는 화끈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손에 쥔 쟁반을 놓쳐버렸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국밥그릇이 성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깨어졌다. 그 와중에 이 멍청한 피조물은 새로운 음식이 추가됐단 것에 좋다고 달려들더니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우걱우걱 처먹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처음의 소동이 끝나고 나서...... 주막에는 찢겨진 넝마조각 같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모두들...... 경계에 찬 눈으로 곰을 안고있는 저를 바라보았죠.
“그거...... 절대루 놓으면 안돼유. 알았슈?”
“네 그럴게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새/끼 곰은 자신으로 비롯된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천진스럽게 제 손을 핥아 대었지요. 그 축축하고 부드려운 혀가 제 손을 간질이는 감각이 참기 어려웠지만, 제가 혹시라도 움찔하는 날에는 어떤 나비효과가 찾아올지 모를 것 같아서 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답니다.
“그나저나...... 둘이서 술 놓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었어요?”
“뭐...... 쟤들에게 높은 확률로 찾아올 어두운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로키군의 말에는 냉소가 뚝뚝 묻어났지만, 임꺽정씨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그의 투박한 손에 들린 사발을 연신 들이켰어요.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울화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어두운 미래요?”
“그래. 그 잘난 혁명인가 뭔가가 성공적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제 시작일 뿐이란 거 말이야.”
로키군은 했던 이야기를 또 반복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고 라스알하게의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 찾아올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습니다. 음..... 저로서는 군대의 편제에 대한 건 잘 알지 못하지만, 대충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라스알하게의 사람들은 혁명 동안 싸웠던 군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정규군과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로키군의 말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확실히...... 그들에게 놓여질 미래가 그닥 밝아보이지 않은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겠는데요?”
“어쩔 수 없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에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니까.”
“......”
“그리고, 난 너에게도 확언을 받아야겠군. 너는 분명 라스알하게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 까지만 돕는다고 했어. 그 이후의 일에는 개입하지 말자. 우리도 우리의 스케줄이 있으니. 그 이상은 사치다.”
“......네 알았어요.”
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제가 라스알하게의 혁명이 성공할 때 까지 사람들이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돕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 건 사실이에요. 제가 ‘혁명이 성공할 때 까지.’라는 표현을 한 건,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라스알하게 사람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아마 그건 지금 우울한 얼굴로 술을 마시는 임꺽정씨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결말은 정말 동화책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던 걸까요?
“그라믄...... 혁명이 끝난 이후에, 우덜은 우째야 할랑가유?”
이 무겁게 침잠하는 분위기에 돌을 던진 이봉학씨의 질문에, 로키군은...... 대답을 하기 전에 술로 목을 축였습니다. 그리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