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주운이 미리 말을 해두긴 했지만, 니할이라는 녀석은 정말 다루기 힘들었다. 주운은 녀석이 ‘흑성왕’의 여러 속성중에 ‘파멸’에서 비롯된 거라고 말했지만, 녀석을 겪어본 입장에선 나는 그 말에 별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으윽.....큭......”
“쫌 더 버텨보지 그려? 쪼깐만 더 허믄 신기록 갱신인디?”
녀석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상상력을 필요로 했다. 목도리가 너풀거리는 모양, 그것이 촉수로 변하는 모양, 궤적을 달리해서 상대를 감싸고 찢어발기는 모양...... 내가 새로운 상상을 해나갈수록, 녀석이 신기해하는 것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이 스펀지 같은 녀석은...... 새로운 장난감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또 다른 건 없냐고 묻는 철부지 아이처럼 내게 새로운 지평을 요구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아는 것이다. 그럼 그걸 단호하게 거부하면 되지 않냐고?
“으아악!”
“워후! 신기록이여! 32피트구먼.”
“닥치고......이것 좀 풀어봐!”
“워매! 쫌만 기달려봐.”
상상이 바닥이 나면, 이 녀석은 지독하게 땡깡을 부린다. 이게 철부지 아이도 아니고, 한낱 목도리가 땡깡을 부려봐야 얼마나 부리겠냐고?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내가 처음에 니할을 두고 토사물이라고 묘사를 했다가 당한 꼴을 잊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녀석의 무서움은...... 자신의 동력원이 고갈된다고 해서, 그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게 대관절 무슨 말이냐고? 음..... 사용자에게는 매우 불합리하지만, ‘영리한 토끼는 두 개의 굴을 파놓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녀석은 두 개의 빨대를 마련해 내 목에 꽂고 있었다. 상상력이라는 동력원에 꽂은 빨대가 더 빨아들일게 없으면 녀석은......
“허억! 허억! 허어...... 와 씨......”
“뭘 그런거 가지구 엄살이여? 빨려봐야 5분 어치만 빨렸겄구먼.”
“5분밖에 라고? 니 삶이 5분밖에 남지 않았어도 그런 말이 나올거 같냐?”
내 수명을 갉아먹거든...... 주운이 처음에 내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때는 어떻게 그런걸 알게 되냐고 물었다. 그때 녀석은 ‘고것은 차차 알게 될거여.’라고 대답을 했었지. 이 라스알하게의 퇴역 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직접 경험해보니,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은 굳이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생생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나 말고는 이 녀석과 스킨십을 경험할 사람은 없을 테니 굳이 그 개 같은 기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자면...... 내 몸의 피가 줄줄 새나가는 것 같은 서늘함이 목에서 시작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감게 된다. 처음엔 낯선 서늘함에 전율했다가, 점점 몸이 오그라들었다. 손가락을 굽히고 펴는 것도 어려워지고, 시야가 급격히 좁아진다. 더 심해지면...... 귀가 먹먹해지고 숨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워질 지경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그려두 긍정적으로 생각혀. 니 삶의 5분 팔아가지구 반경 32피트에서는 완전히 무적이 되면 제법 남는 장사 아녀?”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는데, 너 자신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 해본 적이 있기나 하냐?”
“나넌...... 애초에 수명이 깎일 일이 없지. 여서 몇 달 살아봐라...... 상상력이 떨어질 일이 있간디?”
그러면서 그는 손을 휘저어 사상무기를 불러냈다. 그것은 쉭소리를 내며 내게 날아들었다....... 진짜 이 노인장은 휴식이라는 개념은 본체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니할을 전개하는 대신에 몸을 날려 그것을 피했다.
“몇 번 해보더니 는거는...... 요령뿐이구먼.”
“아 쫌 쉬자 우리.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우리’가 언제부터 사람이었어? 그거 싫다구 인간성도 버린 넘이.”
그는 손가락을 틀었고, 사상무기는 땅에 꽂히기 직전에 방향을 틀어 내게 다시 날아왔다. 별 수 없이 그걸 쓸 상황까지 몰아가다니...... 그가 마스터가 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니할을 전개했다. 내목의 목도리가 쭉 하고 늘어나 그것을 감싸 쥐었다.
“고걸로 끝이 아녀!”
“아오 씨!”
첫 번째 무기를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 번째 사상무기가 내 눈앞까지 날아왔다. 나는 몸을 틀어 그것을 피하는 동시에, 니할의 두 번째 촉수를 전개했다. 두 번째 촉수는 사상무기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필요가 기능을 맨든다구...... 그려두 급하니께 어찌어찌 혀는구먼?”
“하아......하아...... 이래뵈도...... 크로스까지 찍었다고.”
“허기사, 아무리 요즘 애덜이 암만 좆밥이래두 크로스란 자리를...... 고스톱을 혀가지구 딴건 아닐테니께.”
“칭찬...... 맞는 거지?”
“암만....... 근디 말여 걱정이구먼, 요래 체력이 토끼좆만해가지구 난중에 급박한 상황에 닥치믄 지대루 활용헐 수 있겄냐?”
클라우드는 팔짱을 낀 채로 내게 이것저것 잔소리를 해댔지만, 완전히 지쳐버린 내게는 그의 말이 의미를 지닌 언어보다는, 새소리 물소리나 다름없는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는 나의 이런 태도에 대해 비난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삼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류에 휘말리고 난 뒤에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내게 지금의 일들은 가혹한 것이 아닐까 싶다. 프로답지 못하다고 비난해도 상관이 없다. 나는 프로이지, 기계가 아니니까.
“요거 완전히 맛탱이가 갔네잉...... 그려, 다행이 야가 깰 때 까지는 시간이 쪼깐 남았으니께, 쫌만 쉬구 마지막 과제를 해결해 보드라고.”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국궁장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너른 마당에 호랑이와 멧돼지가 그려진 표적이 놓여 있었고, 각종 활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지요.
“아부지는 활은 영...... 젬병이었쥬. 그려두 멀리서 적을 쓰러트린다는 활이라는 무기에는 많은 흥미를 가지고 계셨어라...... 원래 웅족이 활을 지법 잘 다루기도 허구...... 그려서 녹림당에 요로코롬 국궁장이 있을 수 있는 거여유. 웅족 출신 유민들이 지에게두 활을 알려주기도 혔구유.”
주설씨는 설명을 마친뒤에, 거치대에 있던 활을 집어들었습니다. 한쪽 팔이 없는지라, 그녀는 입으로 화살과 시위를 물고서 과녁을 겨냥했습니다. 활시위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녀의 턱에는 굵은 힘줄이 돋아났어요. 그녀가 시위를 놓자 화살이 날아가긴 했지만...... 그녀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멀리 가지는 못하고, 과녁에 한참 못미쳐서 땅에 꽂혔어요.
“요거..... 팔한짝이 없으니께, 실력이 예전만은 못허게 됐네유.”
저는 슬프도록 겸연쩍게 웃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거치대에 걸려있는 다양한 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활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져있었어요. 널빤지를 구부려놓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제가 알고 있는 활의 모습과 흡사한 어른 키만한 장궁도 눈에 띄였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건...... 정말 저걸로 쏴지기나 할까 싶은 작은 활이었습니다.
“아아, 요건...... 각궁이라구 혀유. 소의 뿔로 맹근거쥬. 나무 짝대기루 만든 것 보담 훨씬 탄성이 좋아가지구 멀리 날아간다 안혀유......”
“근데, 이건 어떻게 쏘는거에요? 뭔가...... 그냥 원반같이 생겼는데?”
“아아, 요로코럼 하믄 안되쥬. 요걸...... 요래...... 시위를 매기구....... 요렇게 뒤집으면 되유.”
“아아......”
“아까츰에두 말혔지만 워낙 탄성이 좋아가지구....... 시위를 안매겨버리믄 지가 알아서 말려버려유.”
각궁은 신기하게도 까뒤집듯이 시위를 매기더라구요. 그렇게 시위를 먹이고 나니 제법 그럴 듯 하게 보였습니다. 이런 신기한 물건들을 이봉학씨는 알려주지 않았다니...... 조금은 원망스러워 지려고 하네요. 그런데...... 활들을 살펴보니, 각궁만큼이나 특이해 보이는 활이 하나 눈에 띄였어요. 재질을 보면, 각궁이나 다를바가 없지만 아까의 각궁과는 달리, 이 활은 시위를 매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팽팽하게 펴져있었습니다.
“요건...... ‘쉐다르’라구 허는건디유. 지로서는 왜 이런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지 이해가 안되유. 시위를 안매겨두 펴져있는게 신기허긴 헌디...... 고게 다유. 이 활은 쓸 수가 없걸랑유......”
“쏘지 못하는 활이라.... 확실히 무쓸모하긴 하네요. 그런데 왜 쏠 수가 없는거에요?”
“그게 그리 궁금허믄...... 한번 당겨볼려유?”
저는 주설씨가 알려준 대로 쉐다르에 시위를 매기고, 그것을 당겨보았습니다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도통 시위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 참...... ‘저는 힘없는 일개 시민입니다.’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이 활 앞에서는 사람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겠더라구요. 저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아이고 나죽네......”
“왜 무쓸모 허다구 허는지 알겄쥬? 울 동니에서두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 요거 한 번 땡겨보겄다구 죄다 달라들었는디도...... 미동도 안허더라니께유.”
“꽤나 도도한...... 녀석인 것 같네요.”
“오직허믄 요걸 댕기는 넘은 삼민의 영웅이 될 거라는 전설꺼정 있겄슈.”
“흐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은데요?”
“뭐 그런류의 야그야 어디든 있지 않겄슈? 듣자허니 라스알게티에는 돌땡이에 돌이 박혀있담서유? 고거를 갔다가 뽑으믄 위기에 빠진 라스알게티를 구헐 구국의 영웅이 된다구 말여유. 대륙이 달리 대륙이 아닌디, 고런 신기한 전설을 품고 있는 무기가 라스알게티에만 있겄어유? 여그도 고런 전설을 담은 무기 하나쯤은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겄쥬.”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만...... 저는 ‘이대로 질 수는 없다.’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해서, 좀 더 쉐다르를 살펴보았습니다. 시위를 매기지도 않았는데 펴져있는 각궁...... 아무나 쉽게 당길 수 없는...... 이 ‘기이한 물건’은 저로하여금 ‘보편종교’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던 내용이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보편종교’가 대륙에 공식적인 종교중 하나로 공인이 되고, 나아가 대륙의 국교가 되었을 무렵,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아드님’, ‘어머님’과 관련된 유물들을 수집했다고 해요. ‘아버님’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어떠한 상징물도 만들지 말라고 명하였지만, ‘보편종교’가 자리 잡기 이전에 다양한 구체물 들을 숭배했던 사람들의 습관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나뭇조각을 보며 ‘아드님’이 못 박혔던 십자가였다. 이가 빠진 컵을 보며 ‘아드님’께서 최후의 만찬에 술을 마셨던 잔이다. 라며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가졌던 질병이 나았다는 증언을 했다고 합니다.
일부 비판적인 시각과, 그걸 뒷받침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교수님들은 이러한 성유물의 기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명명하며, 자기암시의 위력에 대해 설명하는 예시로 들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교수님들은 ‘그냥 그런 능력이 있긴 했나보다.’라며 어물쩡 어물쩡 넘어가곤 했었지요. 지성인을 자처하는 그들조차도...... 사람들의 오랜 습관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에는...... 비록 ‘보편종교’에 몸을 담았지만, 맹목적으로 성유물을 숭배할 수는 없었어요. 그건...... 제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저도 수녀라는 입장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그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춰주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는 거지요. 저로서도...... 현실에 완전히 저항할 만한 용기는 없었거든요. 하지만 라스알게티를 벗어난 지금...... 문화권이 완전히 다른 이곳에서, 제가 굳이 ‘성유물’에 대해 숭배하는 척을 하는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금은 비겁할지도 모르고, 나아가 치사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느 성유물들과 마찬가지로 분명 이 ‘쉐다르’라는 물건에도 숨겨진 트릭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걸 뜯어보아도...... 납득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요.
“그냥 그런갑다 혀유...... 뭘 그리 복잡허게 생각혀유.”
Channel 1. 로키
“인자...... 준비 다 되었냐?”
“그래.”
클라우드는 내 대답을 듣고 난 뒤에, 마지막 과제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흙이 잔뜩 묻어있는 인형이었다.
“이걸로...... 뭘 어쩌라고?”
“나가, ‘니할’에 대해서 야그 헐 때 반쯤은 농으로다가...... ‘덕분에 청소엔 그만이지.’라고 혔던거 기억나냐?”
“어. 덕분에 너에 대한 이미지가 하향곡선을 그렸으니까.”
“씨잘데기 없는 소리는 고만 하자고...... 앞서의 훈련으로는 니가 고거를 다루는 힘의 총량을 길렀다믄, 요걸로는 힘의 정확성을 기르게 될거여. 니도 다뤄봐서 알겄지만...... 쟈는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여. 혹여나 재수없게 폭주라도 하믄...... 적군은 물론이구 아군꺼정 몽창 쓸어버릴......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니 말은......”
“그려, 요거에 묻은 흙만 털어내자는거여. 흙은 적이고...... 인형은 아군인거고.”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모든 걸 무로 돌려버리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질산 앰플을 잔뜩 가지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내 기력이나 상상력이 모두 바닥이 나버린다면...... 그건 내가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는 곳에서 닥치는 대로 질산을 뿌려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가장 위험한 적은 통제되지 않는 아군이다.’라는 마스터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인형이야 원도 한도 없이 뽑아낼 수 있으니께...... 한 번 해보드라고.”
나는 니할을 전개했고, 뻗어나온 촉수는 인형을 집어삼켰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그것이 인형을 집어삼키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썼다. 으음..... 이거면 됐나?
“.......”
“.......니 혹시 변태여?”
“아냐,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걸 보고두...... 오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는거여?”
니할이 뱉어낸 것은...... 인형의...... 가슴 부분이었다.
“다시 혀보자고.”
두 번째 시도가 이어졌고, 이번엔 니할이 인형의...... 음...... 그러니까.
“이 정도믄...... 빼박 아녀?”
“좀 닥쳐봐.”
생식..... 아 모르겠다. 다시.
“....... 혹시 퍼즐 좋아 허냐?”
“다시.”
시도는 계속되었고, 인형의 조각은 점점 늘어났다. 주운은 낄낄거리며 인형의 조각들을 가지고 저글링을 해댔고, 그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올라, 나는 끝없이 도전을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휴, 드디어 성공을...... 혔구먼.”
“몇 번째 만이냐?”
“글쎄? 한 30번 넘어가구 나서는 세는 거 포기혔는디?”
“그래...... 횟수가 중요하겠어? 성공했다는게 중요하지.”
먼지하나 없이 보송보송한 인형을 보면서, 나는......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긍정적인 감정이다.
“그려, 자전거두 처음 안 넘어지기 꺼정이 힘들지, 그 이후로는 쭉쭉 나아가는 거니께...... 나가 말은 안혀두 고 감각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혀.”
주운은 이제 자신이 알려줄 것은 모두 알려주었다면서, 앞으로 이 녀석과 함께 잘 헤쳐 나가기를 빌어주었다. 이제 실감이 났다...... 이젠 이 녀석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뭐...... 이제 작별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 같은데, 서비스 같은 거 안 해주냐?”
“서비스? 니할 다루는 거 알려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겨?”
“개같이 시크한 거 보니, 마스터의 친구 맞네.”
“에이, 에이욜프 같은 천것에 비하믄 나야 천사 아녀? 너도 갸를 겪어봐서...... 알지 않냐?”
“천사랑 천것은...... 한 글자 차이지 뭐.”
내 말에 조금은 발끈했는지, 그는 나를 보내려다 말고, 내게 질문을 해보라고 했다. 그 말이 의표를 찔렀던 모양이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자신의 동기가 하샤신의 정점에 서는 걸 지켜보는 건 입맛이 제법 깔깔한 일이었을 거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했었는데...... 그의 행동을 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너도 원정이라는 걸 갔었냐?”
“아니, 원정이라는거는 다음 마스터를 뽑는 일종의 ‘통과의례’인데 그걸 나가 왜 가냐? 니는 그런 것도 몰러?”
“다음...... 마스터?”
“옴마? 에이욜프가 그런것두 야그 안해줬냐? 하기사, 갸가 원정 다녀오구 나서는 쪼깐 이상해지긴 혔지...... 원래는 지가 맡아야 할 거를 나헌티 떠넘겨버렸으니께.”
“....... 좋아,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또 하나 더 물어볼게 있어.”
“그려, 뭔디?”
“여기는 어디지?”
“.......”
내 다음 질문에 그는 말이 없어졌다. 그 시끄럽던 인간이 말수가 적어진 것을 보니...... 나의 또 다른 짐작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여기가 ‘당신’의 꿈이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당신은 이곳에선 전지전능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당신과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찌질해 보일 정도로 한 인물을 챙겼지.”
나는 지금도 우리의 옆에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게 잠을 자고 있는 여자를 가리켜보였다.
“너는 내게서 저 여자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훈련으로 나를 몰아세웠지만, 나는 한 번도 저 여자를 의식하지 않은 적이 없어. 저 여자는 누굴까, 왜 여기에 있을까, 그리고 왜 잠에서 깨지 못하게 막는 걸까......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이 공간은, 저 여자와 관련이 되어있다고 말이야.”
“....... 쓸데없이 예리한건, 니 애비랑 똑같네잉.”
“그 대답은, 내 말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좆대로 하세유...... 어차피 나가 아니라고 말혀두 니는...... 니가 믿고 싶은 대루 생각할 거 아녀?”
“그래도 형식적으로라도 물어볼 때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뭐......”
주운은 어께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그의 행동에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 뿐......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말해줘두 이해하기가 어렵겄지만...... 언젠가는 니가 올 곳이라는 것 정도로만 혀두자고.”
“언젠가는...... 올 곳이다?”
“그려, 그 때가 오믄....... 너는 선택을 혀야 할거여. 어느짝이든 니 맴에는 안들 거여...... 니 애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날 이후로, 니 애비는 똥 씹은 표정을 풀어본 적이 없드라고.”
“선택을......한다?”
“뭐, 여그까지 하자고. 인자는 더 시간을 끌어봐야. 소용두 없을거 같구...... 인자 일어나서 니 갈길 가야지.”
그는 손을 저어 문을 만들었다. 저 문을 나서면...... 나는 아마 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날 테지.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내 손을 마주잡았다.
“잘 가고, 어떤 길을 가던...... 후회는 허지 마라.”
Channel 2. 아이리스
앞서 오기로 쉐다르를 살펴보았다고 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아서, 활의 끝에서 끝까지 구석구석 살펴보았지만, 저는 결국 이 활에서 아무런 특이사항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로 남겨둬야 아름다운거유.”
“아이씨..... 이대로 놓기는 아쉬운데.”
“그딴 쓸데없는 활때기는 그만 쳐다보구, 댕길 수 있는 걸루 연습이나 혀봐유.”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에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죠. 저는 결국 그녀의 말에 따라서 쉐다르를 거치대로 가지고 갔습니다. 아이고 이런...... 주설씨가 꺼낼 때만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제가 그걸 다시 올려두려고 거치대로 가보니 이거...... 보통 높은 게 아닌데요? 그동안 눈치를 채지 못했었는데, 주설씨의 키가 제법 큰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어디 가서 키 작다는 이야기는 안 듣고 살아왔는데, 주설씨는 평균 이상으로 키가 컸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이렇게 키가 큰데도 전혀 티가 나지 않다니 말이에요.
어쨌거나, 올려두기는 해야 하니, 저는 디딤돌로 쓸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푸른 초원에 덜렁 과녁만 놓여져 있는 이 곳에는 풀만 무성할 뿐, 제게 도움을 줄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까치발이라도 들어야 할 판입니다. 난감하네요. 까치발까지 동원했는데도 닿지 않는다면....... 망신살이 제대로 뻗쳐질 텐데 말입니다.
“도와줘유?”
“아니......에요. 이정도 쯤은 저도 까치발을 들면....... 이익!”
“어이구, 조심혀유!”
기지도 못하는 것이 날려고 들면 사고날 확률이 100%라고 하지요. 오늘만큼은 그 말이 꼭 저를 위해 준비된 것 같습니다. 발뒤꿈치가 욱씬거릴정도로 온 몸을 쭉 뻗어 쉐다르를 거치대에 올려두려고 했지만, 쉐다르는 얄밉게도 제가 원하는 대로 제대로 거치가 되질 않았어요. 주설씨가 제게 도와줄까냐고 물었지만, 오기로 거절을 한게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죠. 결국 저는...... 욱씬거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걸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으앗!”
“괜찮아유?”
“저는 괜찮은데....... 이거 땅에 떨어지면 망가지지 않을.......응?”
“잉?”
저와 주설씨는 순간 멍해졌습니다. 어.....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저는 분명, 잘 거치되지 않는 쉐다르를 올려보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쉐다르가 균형을 잃고 거치대에서 떨어지긴 했어요.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때 저는 완전히 당황해서 팔을 허우적 거렸지만, 본능적으로 그걸 움켜잡아야겠다고 생각을 한 행동이었단 말이에요.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으니, 당연히 떨어트리고 말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거 뭐죠?”
쉐다르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제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요. 매달려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그 매달린 형태가 상당히 어색했습니다. 활을 거치해둔다고 시위를 풀었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활의 끝과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정상이겠죠? 그런데 지금 이 활은...... 활 몸이 아닌...... 그러니까, 시위가 있어야 할 곳으로 제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정리를 해보자면, 마치 투명한 실이 있는 것처럼, 쉐다르는 공중에 동동 떠있었다는 이야기라는거에요.
“그르게유...... 요게 가능은 헌건가?”
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팔을 좌우로 흔들어보였고, 그에 따라서 쉐다르도 제 팔을 따라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제가 팔을 빙빙 돌리자, 쉐다르도 팔의 궤적을 따라 빙빙 돌아갔어요.
“헐!”
저와 주설씨는 서로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제야 이 물건이 가진 비밀을 푼 셈이었거든요. 쉐다르, 그러니까 시위를 매지 않아도 똑바로 펴져 자신의 형태를 유지했던 이 기이한 활은, 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은 실로 이미 시위 매겨져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설씨는 저보다 더 큰 흥분에 휩싸여, 제게서 활을 채가더니,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허공을 더듬었습니다.
“느껴져요?”
“잉, 여그 있었구먼, 이게 쉐다르의 시위였슈! 쩌...... 쩌그에 화살이 있거든유? 그거 하나만 내와줘봐유.”
저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활을 잡은 뒤에, 화살과 시위를 입에 물고 당겨보았습니다. 이거 뜻하지 않게, 라스알하게인들 사이에서 전해져내려오는 전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에요. 저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잉......? 이게.......잘.......”
“다시 한 번 더 해봐요.”
“기둘려봐유...... 그러니께 시위가..... 그려 요거구, 여따가 살을 매서...... 이잉? 왜...... 안 되는 거여?”
그녀의 시도는 계속되었고, 시도가 이어질수록, 그리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갈수록...... 저와 그녀를 휩쓸었던 가슴속의 흥분은 서서히 가라앉고...... 지하에 숨었던 실망감이라는 얄미운 녀석이, 고개를 빠꼼이 내밀어 저희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참, 시위를 찾았는데, 당길 수가 없다니. 이래서는 전설이고 나발이고 확인할 길이 없어져버린 셈이잖아요. 이제까지 이 쉐다르에 도전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정답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고지를 눈앞에 두고 길이 끊어져 버린 걸 알아차린 것 같았습니다.
“뭐가 문제인걸까요?”
“글씨유...... 허 참 이거 답답허네...... 시위를 찾았는디 당길수가 웂음 요게 뭔 소용이래유......”
그녀는 허탈한 얼굴로 빈 시위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런데.
“쉬익!”
진공 파이프로 공기가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저와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그런 소리를 낼만한건 찾을수가 없었어요.
“뭐...... 뭐죠?”
“글게유? 나......나넌 요걸 댕긴거 밖에 없는디.”
그녀는 미심쩍은 얼굴로 다시 한 번 빈 시위를 입에 물었고, 그와 동시에 쉭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었습니다. 저와 그녀는....... 다시 한 번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의 생각은 일치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뭔가가 있다’고 말이죠.
“기둘려 봐유......”
“네.”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빈 시위를 입에 물었습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산들바람처럼 잔잔했지만, 그녀가 시위를 당기면 당길수록 점점 더 강해졌지요. 이 와중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그 바람은 쉐다르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기가 쉐다르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어요.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나부껴 그녀의 눈을 찔렀지만,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으면 찡그렸지 독하다 싶을 정도로 시위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바람은 국궁장 마당에 있던 초지의 풀들이 흔들었고, 코가 답답해지도록 흙먼지가 날려댔습니다. 뿌연 흙먼지는 바람을 타고 대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활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이거...... 어떻게 멈춰요?”
“으뜨크긴 믈 으뜨크으...... 으즈드믄 믐츨스드 읍쓰으 느그 느을르느끄...... 을른 브크으.”
그녀는 과녁을 향해 활을 틀었고, 저는 혹시나 있을 사태에서 피하기 위해 얼른 그녀의 뒤로 섰습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그녀의 이마에는 땀에 젖은 앞머리가 나부꼈습니다. 그녀의 눈이 상당히 매서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주설씨는 마침내 물고 있던 시위를 놓았습니다.
“쾅!”
흙먼지와 풀을 머금은 바람의 살은 시위를 떠나자마자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더니 그대로 과녁에 꽂혔....... 아니, 꽃혔다는 표현은 제가 본 광경을 묘사하기엔 턱없이 모자라겠지요. 그래요 그런 단어로는 그 화살의 기세를 묘사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음...... 어떤 단어를 써야 할까요? 그래! 그게 좋겠네요. 다시 갈게요. 주설씨가 만들어낸 바람의 살은, 시위를 떠나자마자 엄청난 기세로 날아가더니, 우리 앞에 있던 과녁 일대를 산산조각을 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화살이 날아갈 때의 반작용으로 몸이 이리저리 휘청거려 정신이 없었는데, 쾅하는 소리가 난 직후에는 과녁의 파편들이 이리저리 날아왔습니다. 저는 재빠르게 ‘왕의 기도문’를 읊으며 방어막을 만들어냈고, 다행이 저희 둘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한 때 과녁이 있었던 곳의 흔적을 보며 묘한 전율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녀가 말했던 전설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셈이었으니까요.
Channel 1. 로키
1624년 6월 9일
“허억!”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한 상승감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 눈에는, 온 방을 가로지르는 굵은 서까래가 들어왔다.
“으으...... 온몸이 찌뿌둥하구먼.”
얼마나 잠을 잤는지는 짐작이 되지 않았지만, 확실한건 오랜만에 몸을 쓰지 않던 탓에,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질러댔다. 내 자신을 되돌아 볼 때, 엄살이 심한 편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몸이 이렇게 뻣뻣하게 굳을 정도라면 제법 오랜 시간을 잠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몸이 어느정도 풀린 뒤에, 나는 조심스럽게 목을 만져보았다. 내 목에는...... 익숙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단순히 꿈속의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니할의 존재를 확인한 뒤에, 나는 내 옆에 누워있는 주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보았을 때처럼 혼곤한 잠속에 빠져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맞다면...... 그 꿈의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그는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업이자...... 숙명이니까.
나는 한때 ‘아버지’의 동료이자, 니할을 전해준 스승에 대한 예의로서, 니할을 전개해 그의 수염을 깎아주었다. 니할도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그의 수염을 조심스럽게 살라먹었다. 아니 어쩌면, 니할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로 정성스레 수염을 깎아주는 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많은 연습을 거쳤다곤 해도 솔직히 ‘실수’로 그의 턱을 날려버릴 위험성이 없지 않을 수도 있건만, 녀석은 내가 컨트롤 하는 것 이상으로 수염을 정교하게 깎았거든.
“뭐...... 건강하쇼.”
어쨌거나, 마지막 수염 숱을 날린뒤에 나는 멀끔한 주운을 뒤로하고, 그의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면 누가 먼저 나를 반겨줄까? 답답이일까? 만약 답답이라면 오랜만에 돌아온 나를 어떤 식으로 반겨 줄까?라는 나름 즐거운 상상을 하며 방문을 열어젖혔지만, 내가 꿈속의 세상을 헤맬동안, 밖은 밖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자기들끼리 동분서주 돌아다니느라 내가 주운의 방을 나왔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이거 참...... 이런 기분을 ‘섭섭하다.’라고 하는 건가?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름 ‘소박’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충족되지 못하니, 목안이 깔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인기척을 낼 타이밍을 재기 위해, 나는 일개미들의 행렬에 몸을 맡겼다.
누군가는 소리를 치며 아랫사람들을 닦달했고, 그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듯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다지 질서정연해 보이지는 않은 움직임들이었다. 그래도 그 속에는 나름의 흐름이 있었고, 그 흐름을 찾아 몇차례 어께를 부딪친 뒤에야 비로소 폭풍의 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전설속의 무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거 생각했던 것 이상인데요?”
“글게유. 이쯤 되면 이걸 ‘활’이라고 칭허기두 민망할 지경이유.”
폭풍의 눈에는 답답이와 주설이 있었다. 활을 들고 있는 주설의 얼굴은.......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밝아 보였다.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와 함께 쉐다르의 위력에 전율하고 있는 동안, 주우씨를 비롯한 ‘무릉’의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몰려왔습니다. 얼굴은 제각각이었지만, 표정은 마치 풀빵처럼 똑같았어요. ‘놀라움’, 그리고 ‘두려움’같은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왐마 이게 뭔 일이여?”
“폭탄이라두 터진겨?”
“오매매 쩌짝은 완전 박살이 나버렸슈!”
활이 아무리 강력해도 불은 내지 않았기에, 물 양동이를 들고 온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양동이를 내려놓았고 대신 합판과 연장을 들고 온 이들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들은 리더를 중심으로 피해상황을 빠르게 점검하고, 합판과 공구를 이용해 잔해들을 치우고 고쳐나가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많아서 금방 끝이 날 것 같았지만, 주설씨가 부숴놓은 것이 워낙 컸던 지라, 고치는데는 한참이 걸렸지요.
“동상아, 괜잖냐?”
“잉 나야 괜잔치....... 그나저나 오빠가 음청 놀랐나 보구먼.”
“고걸 말이라구 혀? 방금까지만 혀두 장로덜허구 차후 대책에 대한걸 야그 허구 있었는디 갑자기 여서 지자포 터지는 소리가 나가지구 다들 혼비백산 혔지.”
그의 말에 주설씨는 멋쩍어 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달래던 주우씨는 주설씨의 손에 들려있던 쉐다르를 발견했습니다.
“음마? 요거...... 쉐다르 아녀?”
“잉 그류.”
“설마...... 고걸 니가 댕긴거여?”
“.......그렇게 되얐네.”
주설씨의 대답에 대한 주우씨의 반응을 보니, 그녀가 ‘쉐다르’를 당긴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대사건이긴 한 모양입니다. 뭐...... 잔해밖에 남지 않은 과녁들만 봐도 대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긴 하지만 말이에요.
“한숨 잘 자고 일어났더니, 상당히 재미있는 일을 벌여놓았구먼.”
“.......어? 로키군! 일어났어요?”
“보다시피. 그리고......”
로키군은 잔해를 가리키며 주설씨에게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저거...... 네가 한 일이라는데. 아마 그 활로 쏜 모양이지?”
“잉 그류.”
“어째 그 물건...... 니 아비가 내게 건넨 것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
Channel 0. Finale
1624년 6월 10일
라스알하르게타 역의 광장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많은 인파들로 북적였지만 오늘의 경우는 평소와는 조금은 뉘앙스가 달랐다. 개미가 개미굴을 지나가듯이 무질서한 외견 속에 질서를 품은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한 가운데가 빈 입방체, 손가락을 끼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고리 한가운데에, 세 개의 작은 점이 있었다.
은발머리를 한 남자 하나와, 흑발머리를 한 여자 둘. 0과 1의 조합같이 보이는 이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이 잔뜩 부어있었고, 특히 오른쪽의 여자는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은발머리의 남자는 끙 하는 소리를 내며 수그렸던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앞에는 자신을 향해 증오가 서린 살기를 내뿜는 인의 장막이 펼쳐져 있었다.
“죄인들은 들으라.”
“.......”
인의 장막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라스알하게의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민족을 배신하고, 그 고혈을 쥐어짜 부정한 부를 축재한 죄인 주설과, 그 부역자인 로기와 아이리수에게 사형의 엄벌을 처하더라도 부족함이 있으나, 혁명의 날이 밝았고, 이전 총독을 효수한 이후, 불필요한 살생을 주권 법령에 의거 금하는 바, 특별히 장 10대에, 재산 몰수로 대신하는 바이다. 죄인들은 자신의 죄가 가벼워서 이러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지양하고 사해의 화평을 추구하는 민족의 성심과 아량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고, 이에 사의를 표하라.”
“.......”
은발머리의 남자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흑발의 여자는....... 입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그러모은뒤, 관복을 입은 남자에게 뱉었다.
“감사? 좆까는 소리허구 있네! 누구 좋으라구 내 재산을 빼앗아 간다는거여? 장사치헌티 재산을 뺏으믄 뭐가 남는디!”
그녀의 말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의 장막에서 야유와 쓰레기가 날아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꽤나 손맵시가 매운 이도 있었는지, 몇몇 쓰레기는 그녀의 이마에 정통으로 꽂혔다. 그바람에 그녀의 고개가 푹하고 꺾였다.
“포졸들은 죄인에게 장을 가하라.”
남자의 명령에 그를 호위하고 있던 병사 몇몇이 세 사람들을 형틀에 묶었다. 은발머리의 남자와, 다른 여자는 순순히 묶였지만, 나머지 한명은 달랐다. 그녀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고, 그녀를 형틀에 묶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여자 한 명이 장정 셋을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그녀도 형틀에 묶여 장을 맞았다. 장을 맞으면서 앞서 묶인 두 사람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지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다.
셋은 그뒤에 프로하기온 행 열차에 태워져, 라스알하게에서 쫓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