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주설은 특유의 당당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어젖혔다.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좌우로 오와열을 맞춰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있는 엄청난 수의 점포들의 행렬이었다.
“......흐읍!”
라스알하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인민을 속이고, 프로하기온에서 총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녀였지만,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어버리는 현실의 스케일 앞에서는 완전히 압도되어 신음소리를 토해낼 수 밖에 없었다.
“흐미......”
놀라움, 조금 있어보이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경탄’이라고 하지? 여하튼 이런 종류의 감정은 뜻밖에도 높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봉을 맡은 주설이 무너지자,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던 리겔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눈을 돌려 답답이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두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상태에 매몰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땠냐고? 감정이 없다라고 자평하기엔 내 ‘비정한 마음’의 균열이 제법 커진 모양인지, 나 역시도 초보적이게 나마 감정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앞서의 세 명이 느낀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음...... 이렇게 표현하는 게 더 이해가 쉽겠군.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놀라움을 느낀 지점에 있어서는 세 명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들이 이곳의 압도적인 규모에 놀라움을 느꼈다면, 내가 놀라움을 느낀 이유는 이곳이
“어서 오세요.”
“저기...... 청바지 하나 알아보려고 하는데요.”
“아 그래요? 청바지는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에요. 마음에 드는거 하나 골라보시면 되겠네요.”
일전에 라스알게티 역사와 워터 프런트 역사에서 보았던 풍경과 놀랄 만큼 닮은 동시에 더더욱 놀라울 정도로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게 무슨 개소린가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나름 성심성의껏 묘사를 해본다고 했지만, 내 빈천한 언어구사력 때문에 이해하기가 정말 복잡할 것이다. 그래, 일이 복잡해지면,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쪼개서 생각하는게 상책이겠지? 닮은 동시에 닮지 않았다면, 닮은 구석은 이렇고, 닮지 않은 구석은 저렇다고 설명한다면 이해가 수월해 질 것이라고 믿어보련다.
닮은 구석이라고 한다면, 하드웨어적인 부분, 그러니까 겉껍데기에 해당되는 부분에 해당된다. 라스알게티와 워터프런트의 역사는 이곳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기둥 하나, 타일 하나에도 수학적인 계산이 숨어있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정확한 위치에 배열이 되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입구 겸 출구에는 소지가 용이하면서도, 사치품에 해당되는 것들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배치가 되어있지. 다루는 물건들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앞으로 이어질 쇼핑에 걸리적 거리지 않기 위함일 것이고, 다루는 물건들이 사치품에 해당되는 것은...... 화려한 고급 상품들이 건물의 얼굴에 해당되는 출입구에 놓임으로서, 건물 외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에대한 경외심을 환기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른 구석이라고 한다면, 소프트웨어적인 부분,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 양식에 있었다. 일전에 언급했겠지만, 역사는 그야말로 인간 면빨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개인적인 공간이 극도로 협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일 방향적고 확정적인 안내방송만이 향 연기처럼 떠돌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어서오세요. 어떤걸 알아보러 오셨나요?”
“네, 슬랙스랑 셔츠하나 알아보려고 왔는데.”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슬랙스고, 셔츠는...... 이월상품이 세일항목으로 나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쌍방향적이면서도, 비확정적인 대화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었다. 각각의 대화들은 메타포와 심리전이라는 화장분 속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대화를 듣노라면, 고객과 종업원이 말로 하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백화점은...... 가로 세로로 날카롭게 잘려진 인공의 토양에서, 무질서하고 경계가 모호한 의사소통의 화원이 꾸며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 네 명중에 세 명 즉 절대다수가 생각하는 이곳의 이미지는
“욕망을 주춧돌로 삼고, 부의 벽돌을 쌓아올린 거대한 성이네요.”
답답이의 평가만큼 그들의 집단 사유를 집약적으로 담아내는 말이 없다고 생각하려는데, 주설이 별안간 자신의 한 팔로 양 뺨을 찰싹 때리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녀의 눈은 나로선 재단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여그서 너무 멍을 때려버렸구먼, 싸게 움직이자구유. 여그서 숟가락이라두 하나 얹어볼라믄 남들보단 두세배로 뛰어야 되지 않겄슈?”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는 층별 안내문을 찬찬이 읽어나가더니,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짚어냈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8F, 관리 사무소’였어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와, 당차게 목적지를 짚어낸 것은 좋았지만...... 8층이라는 숫자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높은 건물을 어느세월에 오르나 하고 걱정하던 찰나에, 리겔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요 계단같이 생긴거...... 참말루다가 신기허지 않는가?”
그가 가리킨 계단은...... 아니,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의 형상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계단이라고 합의하는 모양을 그대로 빼다 박기는 했지만, 작동 양태는 사회적 합의를 산산이 부수고 있었거든요. 난간을 짚고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야 하는 일반적인 계단과는 달리, 이 계단은....... 놀라지 마세요. 그저 층계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저절로 위로 올라가더라니까요.
“이걸...... 워쩌케 타는 거여?”
“글씨...... 잘못 탔다가 고대로 자빠지는거 아녀?”
주설과 리겔은 감히 계단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하는 바람에 우리 뒤에서는 벌써 제법 많은 사람들이 층계를 오르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흘끔흘끔 보면서 ‘대체 저 사람들은 안 오르고 뭐하는거지?’하는 반응이었어요.
“저...... 죄송합니다. 먼저 타시겠어요?”
“진작에 비키지 안비키고 뭐했어요?”
제 말에, 하늘거리는 레이스 옷을 입은 여자는 짜증을 내며 계단에 성큼 올라탔습니다. 그녀의 기술은 제법 유려해서, 쉴새없이 올라가는 데도 불구하고 헛디딤 없이 가볍게 계단에 올라탔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는 계단이 올라가거나 말거나, 층계에는 눈길하나 주지 않고 있었다는거에요. 세상에....... 필요가 기능을 만든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저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자동으로 올라가는 이 신기한 계단에 올라탈 수 있었고, 층을 바꿔가면서 몇 번의 연습을 거친 끝에, 아까 그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초보티를 벗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계단에 몸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흐미...... 그냥 계단 하나 새로 파버리지는 사람 골수를 빼묵어버리는 구마잉.”
투덜거리며 층계에서 내려오는 리겔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드디어 8층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층별로 특색있는 상품들이 진열되어있던 여느 층과는 달리, 이 층에서는 단 하나의 거대한 사무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들어가보자고.”
“어이 주사장, 잘 할수...... 있겄냐?”
“잉. 잘 혀야지. 무조건 말여.”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심지어 로키군 마저도 주설의 어께를 두드릴 정도였어요. 우리 모두의 격려에 그녀는 힘을 얻었는지, 입술을 앙다물고 문을 열었습니다.
“뉘시오?”
문을 열자마자 진한 소스냄새가 우리를 향해 훅 끼쳐왔고, 인기척을 느낀 방의 주인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주설씨를 선두로해서, 우리는 문틈으로 고개를 빠꼼이 쳐들고 방 안을 훑어보았습니다.
방 안은 주인의 취향을 철저히 반영하고 있었어요. 감히 짐작컨대 방의 주인은...... 식물을 제법 사랑하는 사람인 모양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마치 라스알하게가 연상되는 초록 물결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거든요. 수녀원 화단에 다양한 식물들을 길렀던 업보인지, 저는 이 방안에 있는 식물들이 제법 낯이 익었습니다. 그 구하기 힘들다는 은방울 꽃에서부터, 소나무 분재와 난초까지...... 이곳은 방이라기 보다는 작은 식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리고 그 식물들의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하얀 손수건으로 라스알하게 난의 이파리를 정성스레 닦고 있었습니다. 탁자 위에는 빈 그릇들이 널부러져, 방의 주인이 풍요로운 식사를 이미 끝마쳤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여그...... 건물 관리사무소 인가유?”
“예 그렇소만.”
남자는 방문객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에 들린 난 이파리를 닦는걸 멈추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서 저 난은 꽤나 중요한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점포 하나 내볼라구 허는디...... 상담 가능하셔유?”
“......?”
Channel 1. 로키
나는 식물을 가꾸는 인간을 솔직히 좋아하지 않는다. 반대로 동물을 가꾸는 사람은 어떻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그냥 사람이 싫은거 아니냐고 한다면...... 변명을 해야겠지. 동물을 기르는 사람과 식물을 기르는 사람 둘중에 어느쪽이 더 싫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고자 한다.
적어도 동물은 즉각적인 피드백이라도 있거든. 식물을 가꾸기를 즐겨하는 이들은, 의사소통은커녕 간단한 몸짓조차 못하는 무념무상의 대상에게 온갖 애정을 쏟아붓는다. 그리고선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곤 하지 ‘정성을 기울이면 그만큼 잘 자란다.’라고 말이다. 아무리 잘 자란다고 한들, 너른 대지에서 적절한 햇볕과 풍부한 강수, 그리고 자신을 뜯어먹거나 짓밟는 동물들의 수난을 겪는 야생초만 하겠는가.
자신에 대한 내 생각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주설에게 ‘저 사람은 왜 나를 저런 식으로 쳐다보는지 모르겠다.’고 툴툴거렸다.
어쨌거나 노인은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어떤 용건을 가지고 왔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아 혼란스러워 했으나, 주설의 ‘점포 하나를 얻고자 한다.’라는 말에 대충 상황 파악이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말투며 행색이며 보아하니 라스알하게 촌것들 같은데, 공연히 잡동사니 같은 걸 꺼내서 서로의 귀중한 시간을 헛되게 만들지 말자고. 어떤걸 팔 셈인가?”
주설은 노인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캐리어를 열어 그 안에 담겨있던 물건을 꺼내어 보였다. 그것은 청록색의 은은한 색채를 띄는 그릇이었다. 이제야 처음으로 보는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리는 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흘긋흘긋 물건을 훔쳐보았다. 청록색 배경을 하늘삼아, 하얀색의 학들이 열을 지어 날고 있는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딱 보아도, 그녀가 프로하기온에서 선보였던 비단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나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주설 이녀석...... 프로하기온 총독에게조차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보인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로하기온에서의 일도 있고 하여, ‘이만하면 저 남자도 껌뻑 넘어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이 노인은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노인의 눈이 가늘게 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는 일체의 감정적인 동요를 암시하는 어떤 신체적 반응도 보이지 않았거든. 한번쯤은 물건을 들고 자세히 살펴볼 법도 했지만, 이 사람은 아예 쳐다도보지 않았다.
“우린 장물 같은 건 취급 안 해.”
“이게 왜 장물이래유?”
오히려 패턴에 말려든 것은 주설 쪽이었다. ‘장물’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그녀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녀의 반응을 본 순간, 나는 일이 텄다는 예감이 들었다. 텄다는게 뭐냐고? 최악의 경우에는 협상이 불발되거나, 아니면 극적으로 성사를 시키더라도 그녀가 요구하는 바를 완전히 관철하기엔 글러먹은 것 같다는 거지 뭐.
협상과는 인연이 없는 내가 그런걸 어떻게 아냐고? 물론 지적대로 협상 쪽은 전공분야가 아니라는건 부인할 수 없지만, 사람과 사람의 심리를 무기 삼는다는 점에서는 ‘의뢰’와 큰 맥락에서 닮은 구석이 많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성공적인 의뢰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패를 상대보다 조금 늦게 내는 꼼수와,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패를 파악하는 눈썰미가 필요하다고.
주설은 적시적소에 패를 내긴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패착은 가위, 바위, 보 중에서 심혈을 기울여 패를 낸 손이 하나라면, 그녀의 상대는 두 개의 손으로 제 2의 패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비겁한 처사라고 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협상이건 의뢰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할 뿐, 수단의 정당성이 중요한건 아니지 않는가. 주설도 자신의 입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봤다고 주장했으니, 노인의 대답을 통해 자신의 협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이 목적을 수정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기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게 왜 장물이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나는 그게 더 의문이구먼.”
“정말 몰르니께 요러게 묻는거 아니겄어유? 라스알게티 치덜은 입 하나에 말 두개를 담는갑쥬?”
이런...... 그녀는 새로운 목적마저 제대로 달성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Channel 2. 아이리스
노인과 주설씨가 일으키는 갈등의 정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입을 열면 열수록 강하게 치달아 몇 번이나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게 주식이라면 참 좋을텐데 말이에요. 입을 열 때 마다 상한가의 천장을 가뿐하게 터치를 해대니 말입니다. 참으로 불편한 상황이기 그지없었지만, 이른바 ‘주설주’를 구입한 우리 셋으로서는 이 지독한 상황을 피할수도, 말릴수도 없는 애매한 처지에 놓여있었지요. 주설씨가 마지막으로 내지른
“어디 말 한번 혀봐유. 넘은 쌔가 빠지게 고상혀서 들어온 물건을 덮어놓고 장물이라고 말한 이유를 말여유.”
이 말은 둘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고, 이후에 노인이 주설씨의 말에 어떤 대답을 꺼내느냐에 따라서, 이어질 국면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느냐가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노인을 향해 쏟아졌어요. 노인은 대답대신, 탁자에 널부러진 그릇들을 차곡차곡 모아 한 곳에 몰아넣었습니다. 의외의 행동에 주설씨는 ‘거봐 어차피 근거없는 헛소리였다니까?’라는 투로 우리를 의기양양하게 돌아보았어요.
여기까지만 보면, 주설씨의 승리는 반을 넘어 거의 확실시 되는 듯 했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행동은, 불리함을 모면하기 위해 공연히 딴청을 부린 것이 아니었어요. 그의 행동은....... 철저하게
“이거 한번 보지 그래?”
계산된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까 탁자위에 그릇이 놓여있다고 말했었는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탁자위에는 신문지가 덮여있었습니다. 아마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탁자위에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깔아두었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닥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었는데요, 노인의 행동은 바로 그 신문을 우리의 눈앞에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릇이 떠난 빈 자리를 작은 글씨가 빼곡이 적혀있는 신문기사가 대신했습니다. 노인은 손으로 신문지 한쪽을 쿡 찔러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요. 신문의 제목을 읽은 저와 로키군 그리고 주설씨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으로 난리가 난 곳에서 도자기를 들여와?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았어?”
“어......”
기사의 제목은 ‘반란의 화마에 타오르는 라스알하게, 혼돈속의 남동부.’이었어요. 주설씨는 당황해서 예의고 뭐고 할 것 없이 신문을 집어 들어 기사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기사문을 읽어내려가는 눈이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그녀의 얼굴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습니다. 비록 기사문을 함께 읽을 수는 없었지만...... 어떤 내용인지를 짐작하는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녹림당’이 생각해왔던 최상의 시나리오가, 종언을 맞게 된 셈이지요.
“난 딱히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말이야...... 내 가게가 굳이 구설수에 휘말리는건 원하지 않아.”
“어...... 혁명이 일어난 건 알겄는디...... 상품은 프로하기온에 보관하구 있어유. 물량이 달리는건 걱정하지 않으셔두......”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그녀도 그리고 나머지 필그림들도 아차 싶었지만, 다행이 노인은 그걸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을 짱박아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란이 장기화 되면 결국 그것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겠나? 향후 수급 계획은 어떻게 되지?”
“그것은......”
주설씨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녀가 하고자 마음만 먹으면 물량을 확보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은밀하게 주우씨에게 연락만 하면 될 테니까요.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녀의 사업은......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입으로 프로하기온의 총독을 움직인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입은....... 그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 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일을 원만하게 잘 처리하던 모습만 봐왔던 우리였던지라......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솔직히 말해 충격이었습니다.
“손님 가신다. 살펴 드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