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에이 뭐 사람이 살다보믄 실패도 경험하고...... 그런거지 뭐.”
“......”
주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짐짓 기지개를 켰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하게나마 ‘실망’의 잔영이 덧씌워져있었다. 언 듯 보면 지나칠 수도 있었겠지만...... 내 눈은 지나치게 좋았고, 아직은 거짓을 담기엔 내 감정의 그릇은 턱없이 작았다.
“실망하게 만들어 미안하군.”
“아녀. 큰 뜻을 가심팍에 담고있는 나겉은 대장부(婦)가 고런 좁쌀만한 시련에 눈 하나 끔뻑할 거 같어? 요 길이 아니믄...... 딴 길을 찾으면 되지.”
주설은 괜시리 밝게 말하며 내 어께를 탕탕 두드렸지만, 내 가슴에 진득하니 달라붙은 자괴감은 떨어 지려다가도 그 반동으로 더욱 찌득하게 내 가슴에 엉겨 붙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혀끝이 씁쓸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내 짐작은 완전히 틀렸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보관소에서도 ‘유품’의 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생각하믄 간단한겨. 고런데다 유품을 떡 하니 놔두는건...... 너무 뻔하제. 어디 딴데다 뒀지 싶다.”
“...... 그런걸까?”
“그려. 니가 들쑤시고 댕긴게 따지고 보믄 아무 소득이 없는 것도 아녀. 적어도 오늘로서 알게 된 거 아녀. 쩌짝엔 유품이 없다는거. 아 고마워유.”
“그러고보니, 그쪽 일은 어떻게 됐냐?”
내 질문에 주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이제야 기운을 차리는 구나.’라는 표정으로 종업원이 건넨 커피를 마시면서 자신이 알샤인과 있었던 일에 대해서 소상히 털어놓았다. 긴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알샤인은 우리의 자작극을 간파하지 못했고, PBRC의 범법행위가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믿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상사에게 보고를 했고, 상사는 알샤인에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The Cloud’를 밀착 경호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다가...... 수비대쪽 빨대는 안즉 안 꺾였다는 거제.”
“......”
“요런거는 칭찬 혀도 되는디.......”
“그래 뭐 잘했다. 근데...... 언제부터 우리를 밀착경호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냐?”
“안 그려도......”
주설은 'The Cloud'가 있는 곳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진즉 가서 대기 타고 있을 걸?”
“대기타고 있다고?”
“잉. 즈그 상사 만나구 와서는 얼렁 가서 경호하고 있겄다고 하고 핑 가버리던디?”
“공무원 치고는 상당히 성실한데?”
“내 말이.”
Channel 2. 아이리스
“그냥 저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평소 하시던 대로 일 하시면 됩니다.”
“아. 예. 그렇게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와 리겔은 서로를 끔뻑끔뻑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툭 터놓고 이야기 해보자구요. 얼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저희 공간에 와서 경호랍시고 떡 버티고 있는데...... 저희 같은 일반인들은 이 상황을 의식을 안 할래야 안할 수가 없지 않겠어요?
그가 들이닥치기 전만 하더라도, 저와 리겔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작은 시비로 으르렁대고 있었어요. 그래요..... 뭐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제가 먼저 시비를 걸긴 했어요. 그래도 이정도면 제가 리겔에게 평소 하는 그런 귀여운 수준의 것이었다구요. 리겔도 역시나 평소 보여 왔던 수준의 대응을 했고, 우리는 타석에 선 타자마냥 루틴을 해 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루틴이 페이즈 2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저 두꺼운 서류가방을 든 저 남자가 들이닥쳤던 겁니다.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지만, 그 순간 저와 리겔은 하마터면 서로를 껴안고 비명을 지를 뻔 했다니까요.
“.....”
“.....”
“.....”
죽음 같은...... 아니, 차라리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어색한 침묵에 짓눌려 우리 둘은 함부로 눈알도 굴리지 못하고 굳어있었어요.
“아니, 이게 뭔일이여 대체.”
“그러게 말이야.”
“이 상황은 뭔가...... 주사장 작품인거 같긴 헌디, 뭣헌다구 주인공이 안 나타난다냐?”
“야..... 좀 조용히 말해. 듣겠어.”
“이 와중에 또 시비 터네...... 진짜 오늘 잔디 깔고 눕고 잡냐?”
우리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 대려다가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한 시선에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답답한 면이 있더라도 그거 하나는 알아요. 저 사람에게 이상한 인상을 남겨서 좋을 일은 없다는 것 말이에요.
“깔끔하게 다 치워놨냐? 옴맘마! 벌써 오셨어유?”
“아, 네. 안녕하세요.”
주설씨가 기세좋게 문을 열다가, 알 샤인씨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뻔 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건넸지요.
Channel 1. 로키
1624년 8월 13일
알 샤인의 등장은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결과적으로 우리 필그림들에게 일정정도의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위에 작은 나뭇잎이 떨어진 것과 같았다. 외계의 물건이 닫힌 계에 떨어지자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동심원 모양으로 파문이 퍼져나갔지만, 그것이 벽을 만나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제2 제 3의 파문과 간섭을 일으켰고, 그것은 결국 패턴화 하기 어려운 불규칙적인 파형을 그려갔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파형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수면아래 깊숙한 수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에 그닥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웠으나, 이 소집단에서는 외계에서 비롯된 변화에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 없을 수는 없었다.
“크.....”
리겔은 얼굴을 부셔버릴 것 같은 기세로 찡그리며 입가를 닦았다. 퇴근 후의 맥주가 그의 식도를 제법 거칠게 긁어내려가는 모양이었다.
“이 맛 때문에 산다.”
“인정.”
평소엔 그의 말에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던 그녀였지만, 리겔의 명제는 이제까지의 관계를 덮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리적이었다. 나 역시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톡 쏘는 감각은 내 목근육을 위 아래로 수축-이완하게 만들었다.
“댁도 한잔 혀. 인자 일도 끝났는디.”
“죄송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무래도 경호일이란게 근무시간이 모호하거든요.”
알 샤인은 서류가방을 가리키며 나름 공손하게 공손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결국 주인을 잃은 잔과, 그걸 움켜쥔 외로운 손은 허공을 몇 차례 돌다가 테이블에 어정쩡한 착륙을 했다. 그는 다른 의미로 입가를 닦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따 공과 사가 뚜렷한 것이...... 프로하기온 사람이 확실허요.”
“그럼요. 우리가 어떤 민족인데요.”
죽이 척척맞는 둘의 모습을 보는 답답이의 얼굴에는 ‘뭐라는 거야?’라는 다소 반항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하긴 나도 지금 저 둘의 모습이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기생오래비라는 둥, 저래 빼짝 꼴은 놈한테 어떻게 목숨을 맡기냐는 둥, 불신에 불신을 거듭하던 인간이, 프로하기온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에 완전히 달라져버리다니 말이다. 나와 답답이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리겔은 껄껄 웃으며 알 샤인의 등을 탕탕 두드렸다. 그의 대답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라제. 나를 보믄 알겄다마는 프로하기온 사람은 균형감각이라는 걸 빼면 산송장 아니겄는가?”
“진짜 뭐라는거야?”
답답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리겔에게 면박을 주었지만, 리겔은 그녀의 말 따위는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소리정도밖에 안된다는 투였다. 그는 혼자 흥에 겨워 술과 안주를 더 시켜댔다. 답답이는 그 모습에 경악해 주설을 바라봤다. 주설의 반응은...... 실로 간단했다.
“냅둬유. 지가 알아서 계산 허겄쥬.”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8월 13일
“어우씨...... 어우씨...... 어우씨......나...... 싼!!”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마치 오늘만 살 것 같이 술을 퍼마시던 리겔은 다급한 얼굴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가버렸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노라니...... 맥주를 마시면 소변이 마려워진다는 오래된 리빙 포인트를 새삼스럽게 곱씹게 되는 것 같아요.
“미안하게 됐습니다. 우리 동료가 추태를 보였군요.”
“아닙니다. 저라도 오랜만에 동향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것 같아요...... 저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말이죠.”
알샤인씨는 빙긋 웃으면서 리겔을 감싸주는 것인지 오히려 비난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 어쩜 저리 위트가 있을까 싶어요. 얼굴만 열심히 일하는 줄 알았지,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 할 줄이야. 대륙이 넓은 데는 다 마땅한 이유가 있다니까요.
저와 주설이 이 남자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로키군은 저만치 떨어져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너희와 엮이고 싶지 않다.’라는 느낌이 물씬 풍겨오는 것 같았어요.
“로키군 왜 혼자 술만 마시고 그래요. 같이 이야기도 하면서.”
“넌 그만 마시고.”
“네?”
“참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프로하기온 출신이라지만 어느 정도 차별이 있었을 텐데. 용케도 여기까지 잘 올라왔으니까요.”
“아...... 과찬이십니다. 제가 능력이 좋아서 온건 아니고요. 그게......”
“그게?”
알샤인씨는 자신의 말에 세 사람의 여섯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걸 깨닫자, 퍽 민망해 졌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손사래를 쳤어요.
“형님 덕분이에요.”
“형님......덕분? 무슨 말이에요?”
“형님도 저와 마찬가지로 기사단이거든요. 기사단을 선발할 때, 가족이 근무를 하고 있는 경우엔 가산점이 붙어요. 그 덕분에 내근직으로 배치도 됐어요. 형님은 원래 1군단 소속이었는데..... 최근에 8군단으로 차출됐어요. 라스알하게가 심상치 않다보니..... 여기저기서 많이 차출해가나 보더라구요.”
그 말을 듣노라니, 몇 달 전 녹림당을 유인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한 군인이 떠올랐습니다. 그에게도 내근직인 동생이 있다고 했었는데...... 아니겠죠. 아닐거에요.
“자주까진 아니더라도 편지를 주고받긴 했는데.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나 보더라구요. 요즘은 편지 한통도 없네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어딘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을겁니다.”
로키군은 그의 말을 뚝 자르며 그에게 물 잔을 건네주었습니다. 알샤인씨는 그를 위로하려는 로키군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씩 웃으며 그와 잔을 부딪쳤어요.
“그러기를 바래야겠죠?”
Channel 1. 로키
늘 그렇듯이 답답이는 술에 잔뜩 취해버렸지만, 그녀를 부축하면서 녀석의 경동맥을 슬쩍 눌러 조용히 만들었다. 나의 재치 있는 대처 덕분에 답답이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리겔이고 주설이고 다들 얼굴이 시뻘개져있었다.
“내일 운터브룩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 맞어...... 한 열시......쯤에 보기로 혔는디......”
나는 답답이를 그리고 알샤인은 주설을 들쳐매고 그녀들을 침실에 대려다 주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리겔은 끔뻑끔뻑 바라만 보다가...... 그대로 응접실에서 뻗어버렸다.
“리겔씨는 어디다가 뉘여야 되죠?”
“됐어요. 찬데서 입이 돌아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무튼.”
수비대의 사람에겐 좋게 보여 나쁠 일은 없기에, 나는 사교적인 얼굴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을 네밀었다.
“첫날부터 고생이 많았습니다. 내일 뵙죠.”
알 샤인은 내가 네민 손을 보며 머뭇거리다가...... 뭐가 웃긴지 쿡 하고 웃어보였다. 나로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가 취한 동작은 그가 웃으라고 했다기 보다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라는 사교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었는데...... 이런 동작을 사용할 맥락이 아니었던 걸까? 알샤인은 내 얼굴을 보더니 무에 그리 웃긴지 더 크게 웃어제꼈다. 손을 내민 나로선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민망했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는 숨을 쉬기가 곤란해졌는지 꺽꺽거리며 가슴을 탕탕 두드릴 정도였다. 나도 몰랐던 나의 적성을 발견한 건 좋은 일임은 분명하지만...... 기분이 더없이 더러워졌다.
“이야 세상 참 많이 좋아졌네요?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무슨 소리죠?”
“아니에요. 뭐...... 그런 게 있습니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경호를 맡은 분이 경호대상자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있다면, 과연 경호원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맞는 말이에요. 맞는 말이긴 한데......”
알 샤인은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긴 했지만...... 이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는 끝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가 만난 첫 날이기도 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이야기 해봐야 서로 얼굴만 붉히게 될 것 같으니 나중에 필요한 시점이 되면 꼭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 주신다면 그 믿음을 철저한 경호로 보답해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허 참.”
포장지는 예의발라 보였지만, 결국은 통보였다. 이래서 공무원 놈들하고 어울리면 재미가 없다니까. 매뉴얼대로 움직이니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거든. 녀석은 어떤 말을 해도 입을 열 생각은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나도 입이 달려있으니, 반쯤 화풀이 하는 마음으로 궁시렁거릴 권리쯤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술기운으로 눅진해진 머리 속을 탈탈 털어, 언어의 파편들을 그러모았다. 녀석의 빈정이 상할만한 단어를 찾아야만 했다.
“내근직 기사단은 몇 년 근무하다가 정치권으로 넘어가곤 하던데, 혹시나 선거에 출마하실 일이 있으면 꼭 좀 연락해 주시죠. 제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Channel 2. 아이리스
머리가......
“어라? 벌써 깼어유?”
“으윽..... 나 얼마나 자고 있었어요?”
깨질 듯이 아파왔습니다. 목에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어 쓸어내리니 잔영같던 따끔거리는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왜 제 목에 상처가 난 걸까요?
“곯아 떨어진지는 얼마 안됐구, 로키랑 알샤인씨가 업어둔 것 같구먼유. 지도 깬지는 얼마 안되서 상황이 좀......”
“아아......”
일단은 몸도 머리도 노곤노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겨울잠에서 이제 막 깨어난 뱀처럼 뭉그적거리면서 몸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힘을 그러모았답니다. 한참을 뭉그적 거리고난 뒤에야 간신히 허리를 곧추세울 수 있는 힘 정도는 모인 것 같았어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주설씨가 뭐 하고 있나 살펴보니, 그녀는 서류뭉치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사업 구상중인 거에요?”
“그런 셈이쥬. 암만혀두 전번의 일두 있고 혀서, 진지하게 고민을 혀야 하는 건가 싶네유.”
“백화점 건 말하는거죠?”
“잉......”
주설씨는 대화를 나누어도 고민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짜증났는지 펜 꼬리를 질겅질겅 씹어댔습니다. 약간 무리한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주설씨는 어렸을 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지 않았을까 해요. 나이를 먹고 사회적인 입지가 생기다보니 손톱을 직접 물어뜯는 것은 그만 두었지만, 그 대용품으로 펜을 선택한 것일지도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주설씨는 한숨을 내쉬며 서류뭉치를 옆으로 치우더군요. 그리고는 제 쪽으로 돌아앉았습니다. 서류뭉치에서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사람에게서 답을 찾고자 하나봅니다.
“중용이 선이라는데...... 쉽지가 않네유.”
“어렵죠. 만용과 비겁 사이에 용기가 있고, 낭비와 인색 사이에 후덕이 있고, 아첨과 퉁명 사이에 친절이 있는걸요. 양 극단 사이의 회색지대를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회색지대라...... 나가 아는 거랑은 쪼깐 다르네유. 우리는 이렇게 배웠거든요. 길을 가다가 아이와 어른이 동시에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면, 손을 흔들면서 고개를 숙이는건 ‘중간’이요, 아이에게는 손을 흔들고, 어른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건 중용이라.”
“음...... 확실히 제가 아는 중용이라는 조금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긴 하네요. 뭐랄까...... 제가 알고 있던 중용이 수동적이고 협소하다면...... 주설씨가 알고 있는 중용은 능동적이고 광범위한 것 같아요.”
“알면 뭐한데유...... 아는 거랑 행동하는 것을 맞추는게 이리 어려운 것을...... PBRC의 방해를 받으면 사업체의 발족에 차질이 생기겄다만, 외려 PBRC의 방해가 없다면 기사단쪽의 유물 소지자를 찾기가 어려워지잖아유.”
“음.....”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과연 제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주설씨가, 제가 알던 그 주설씨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 모습도 주설씨가 가진 여러 스펙트럼중 하나일 지도 몰라요. 잔뜩 겁에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련한 소녀...... 그녀의 빛나던 그리고 영특하던 모습의 이면에 이런 모습을 품고 있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게 매달리는 걸지도......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께가 무거워져가네요. 그 주설씨가 내게 기댄다는 것이 말이에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뭘 어떻게유?”
“PBRC의 방해를 받으면 사업체의 발족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PBRC의 방해를 받으면 유물 소지자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PBRC의 방해가 없다면 사업체를 순조롭게 발족할 수 있을거에요.”
“....... 리스크를 관리하자. 이거쥬?”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