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

슬러 작성일 05.06.23 08: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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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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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항공의 점보 제트기에서 한 발 나선 줄리 코넬은 확 끼쳐오는 후덥지근한 열기에 한순간 숨이 탁 막혔다. 그녀는 난간을 붙잡고 트랩을 내려가면서 크게 심호흡을 한다.
맞은편 공항 로비에 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다른 승객들과 뒤섞여 아스팔트 활주로를 걸으면서 줄리는 감개무량했다. 미지의 땅을 밟을 때마다 언제나 알 수 없는 기대에 가슴이 부푼다.
정말 멋진 기분이야. 저널리스트가 되기를 정말 잘했어.
줄리는 이국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마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국제도시 뉴델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멀리 점점이 보이는 돔형의 사원, 생경하게 느껴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원주민의 언어.
줄리는 오랜 소망을 이룬 듯한 만족감으로 가슴이 벅찼다. 인파 속에서 금발인 줄리의 아름다움은 한결 돋보였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줄리를 쳐다보는 남자들도 더러 있었다. 이지적이고 활동적인 직업여성답게 깨끗하게 차려입은 하얀색 수트, 자연스럽게 물결치는 금발머리, 짙푸른 눈동자, 거기에다 세련되고 완벽한 몸가짐.
줄리는 백인 여성으로서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기자실에 함께 근무하는 여성 동료들은 그녀를 선망의 눈으로 쳐다보았고, 남성들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숄더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탁 트인 넓은 공항을 걸어가는 줄리의 표정에서는 그녀가 긴장해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없었다. 지금의 줄리로서는 자신이 지극히 위험한 계획을 폭로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온 유능한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신문의 편집장 웨스 하딩이 테러리즘의 심층취재를 제안했을 때 줄리는 놀라지 않았다. 수년 이래로 는 세계적인 시야에 입각한 보도야말로 신문의 사명이라는 방침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는 아무리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기사라도 회사의 방침에 맞지 않는 기사는 제쳐 두었고, 미국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해외의 동향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왔다.
그 결과, 마침내 경제기사는 이, 해외보도는 가 제일이라는 평판을 얻기에 이르렀다. 테러리즘은 의 방침에 더할 나위 없이 들어맞는 소재였다.
이 취재를 맡으라는 명을 받았을 때의 기쁨과 흥분을 줄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기념할 만한 날이었던 것이다!
「하딩 편집장님! 잘못된 취재명령은 아니겠죠?」
줄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틀림없어.」
「틀림없이 제가요? 그런데, 해낼 수 있을는지...」
「세계의 식량문제를 다룬 당신 기사는 아주 훌륭했어. 그것과 똑같이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줄리는 하딩의 책상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지난번 기사는 통계를 조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잖아요.」
「당신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그 기사는 굉장한 화제를 일으켰잖아. 그건 당신이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자료를 훌륭하게 활용했기 때문이야. 그건 그렇고, 이렇게 당신 엉덩이를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슬슬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 뒤 몇 개월 동안, 줄리는 테러리즘 연구를 위해 암흑가에 관한 파일을 뒤지는 일에 몰두했다. 그렇다고 통신사로부터 들어오는 뉴스를 정리해서 기사화하는 일상적인 업무를 게을리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는 동안 테러리즘에 관한 뉴스는 하나도 남김 없이 그녀의 데스크에 모였다. 언짢은 뉴스뿐이었다. 파리에서의 암살사건, 영국에서의 유괴사건,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것은 로마 역의 폭파사건이었다.
일찍이 레닌은 테러리즘의 목적은 상대를 공포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테러에 관한 기사를 써나가는 동안, 공포심이 증대하면서 그녀는 점점 정상적인 감각이 마비되어 가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곤 했었다.
봄베이에 주재하는 비상근 통신원으로부터 어제 전화가 있었다. 세계적인 테러리스트의 집회가 아시아에서 개최된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의 회의가 북인도에서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냉정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하여 편견없는 기사를 쓰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사명이니까.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줄리는 로마의 참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살상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도대체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무차별 살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줄리는 로비의 입구까지 와 있었다. 입구 근처가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누군가가 마중 나와 있을 텐데... 줄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 아무도 마중을 오지 않았다면 이 인파를 뚫고 혼자서 찾아가야 하는데... 이제부터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 왕자에게 신세를 져야 한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리로서는 이번 조사를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기댈 도리밖엔 없다.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통신원의 뉴스 거리로서 활용할 수 있는 정부 요인들과의 인터뷰를 주선해 주는 것도 왕자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줄리의 머릿속에 비행기 안에서 읽었던 미슬라 왕자에 관한 데이터가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면도날과도 같이 예리한 두뇌의 소유자, 독단적이고 보수적인 사람... 이번 취재에 그가 협력해 줄 것인지 아닌지는,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있다.
웨스 하딩의 육감이 결코 틀린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첫인상을 좋게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로비에 들어선 줄리는 운집해 있는 인파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선 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갖가지 피부색, 원색의 옷, 웃음소리, 외치는 소리가 뒤범벅되어 밀려온다. 그녀는 그 인간집단에 감동을 느낄 정도였다. 바로 그때, 줄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의 얼굴을 그 군중 속에서 찾고 있음을 깨닫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타는 듯한 기억이 그녀의 가슴을 엔다. 소년 같았던 에디의 웃는 얼굴, 그 웃음 띤 얼굴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빛내던 눈동자, 나는 웃음 띤 그 얼굴을 참으로 좋아했었지...
일류 스턴트맨이었던 에디, 영화 촬영이 있을 때마다 함께 로케이션에 나갔기 때문에, 그와 사귀던 4년 동안 줄리는 일의 틈틈이 로케이션 장소를 빠져나가 데이트를 즐겼었다. 그 뒤 벌써 2년 반이나 지났는데도 트랩을 내릴 때마다 에디의 모습을 찾는 버릇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나를 마중나올 수 없어, 영원히... 에디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불과 2주일 뒤, 그는 촬영중 자동차 사고를 당해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며, 언제나 모험에 찬 인생을 살았던 그 사람. 그런 그에게 죽음이 닥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었다.
줄리는 종종 자책하는 일이 있었다. 좀더 빨리 그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더라면 그 사고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이가 생긴다면 스턴트맨은 그만둘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었다. 그러나 2년간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던 페트하우스의 한 방에서 에디로부터 굉장한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받았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에 복받치는 감정이 없었던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 분위기도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했고 또한 나 자신의 마음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는데... 분명코 결혼을 연기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에디는 벌써부터 결혼하기를 원했고, 줄리가 일을 계속하는 것도 찬성했었다.
다만 그녀는 자기 속에 풍부한 여성다움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찾아내주는 남성을 기다린다는 기분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에디는 그런 남성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그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마음을 허락해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됐든, 그녀가 마침내 결혼을 현실의 사실로 생각하기 시작한 지 2주일 뒤, 그는 어이없게도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줄리는 그 쇼크에서 벗어나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려고 고투했지만 그와 함께 지냈던 시간을 기억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를 생각하는 일이 종종 있다. 확실히 그는 꿈에 그리던 백마를 탄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함께 살았던 사람이다.
줄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웬 사내의 이글거리는 검은 두 눈동자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탑승구 주위에 몰려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벽에 기대 서 있는 키가 큰 남성이다. 옆에 있는 다갈색 수트를 입은 키 작은 남자가 과장된 몸짓을 쓰며 그에게 빠른 말로 이야기하고 있다.
키가 큰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나서 이내 줄리에게 다시 시선을 보낸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편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도 스포츠맨처럼 군더더기가 없는 전신에서는 힘이 넘치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딱 벌어진 늠름한 어깨, 조붓한 히프, 힘이 넘치는 팔과 다리. 이 많은 군중 속에서도 그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귀족적이고 단정한 용모, 그 지성적인 표정 뒤에 엄격함과 야성을 감추고 있을 거라고 줄리는 생각했다.
그는 물건을 감정하는 듯한 눈초리로 줄리를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 머리에서 밑으로 향하며,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옷 위를 옮아가고 있다. 남자들의 눈길을 받는 일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줄리는 그의 침착한 태도에 당황하기까지 했고, 자신의 전신을 투시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자 무의식중에 볼을 붉혔다.
돌연 검은 눈동자의 안쪽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환희와 욕망의 불꽃이었다.
순간 줄리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나를 끌고 있어. 정말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사람이야.
줄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줄기 기쁨의 빛이 희미하게 그의 얼굴을 스쳤다.
줄리, 너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눈을 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대로 그의 가슴에라도 뛰어들어 안기려는 거니? 너 정신나갔구나.
그의 눈동자에 포로가 되어, 잠자고 있던 욕망이 눈을 뜬 것일까? 아름답고 섬세하고 이국적인 눈동자다. 가만히 눈을 뜨자, 그 검은 눈동자는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기가 찰 일이군! 내 마음을 이토록 뒤흔들어 놓다니.
줄리는 고개를 쳐들고 차가운 시선을 그의 시선에 맞추었으나, 그는 주눅드는 기색도 없이 그녀의 시선을 되받았다. 눈길을 피한 것은 오히려 줄리 쪽이었다. 여기는 동양이다. 이런 식으로 남성을 뚫어지게 보는 것은 이곳에서는 노골적인 유혹을 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줄리가 어떻게든 그 곳을 벗어나려고 했을 때, 다갈색 양복을 입은 키 작은 사내가 하던 이야기를 그치고 무심코 줄리 쪽을 돌아보았다. 줄리는 발을 멈추었다.
누구였더라...? 어디에선가 본 사람이야. 그래, 맞아, 미국 정부고문 조 월프 씨야. 일년쯤 전 워싱턴에서 어느 나라 대사관의 리셉션에서 만났던 사람이야. 정식 직함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국제 테러리즘의 전문가인 것은 알고 있다. 이곳에서 이런 중요한 인물을 만나다니 큰 행운이다. 그와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뜻밖의 수확이 되겠지.
이런 절호의 찬스를 빤히 눈앞에 놓고 놓칠 수는 없다. 줄리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손을 내밀며 키 작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월프 씨! 여기서 만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줄리 코넬이에요. 작년에 워싱턴에서 만나뵈었습니다만..,.」
「미스 코넬, 물론 알고 있고 말고요.」
월프는 줄리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월프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의 반짝이는 눈은 이런 여성이라면 알아둬도 나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도에까지 오시는군요. 여기도 테러의 위협이 심각한가요?」
「당신은 언제나 그렇게 다른 사람의 은밀한 대화에 끼여드는 사람이오?」
옆에 선 남자가 기분 나쁘다는 듯 재빠르게 말했다.
빨개진 얼굴로 돌아본 줄리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검은 눈동자의 남자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줄리는 이 남성이 보여 주는 뜻하지 않은 당돌하고 강경한 태도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런 경험은 수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항 한가운데서 은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줄리는 애써 명랑하게 말했다. 이런 곳에서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월프가 인도를 떠날 거라면, 시비를 가릴 것 없이 여기에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월프 씨는 서둘러야 해요. 곧 비행기가 뜨니까.」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야무진 말투로 말했다. 울림 있는 목소리에는 영국식 악센트가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영국인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흥분할 거 뭐 있나, 자이.」
월프가 눈치 빠르게 끼여들었다.
「이 아름다운 미국 여성과 이야기할 시간쯤은 있지 않겠어?」
「몇 분이면 됩니다.」
줄리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띄웠다. 그때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안내방송은 3개 국어로 되풀이되었고, 검은 머리 사내는 줄리에게 등을 돌리며 월프를 껴안듯이 하여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 월프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안됐소. 이 비행기편으로 나는 가야 합니다.」
줄리는 월프를 쫓아갔다. 한두 마디의 말이라도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면 인도에서의 취재 방침을 세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줄리는 조급했지만 검은 머리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어 몹시 난처했다.
그런데 그가 유모차를 밀고 오는 여성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멈춰섰을 때, 옆으로 빠져나가려던 줄리는 뒤에서 오던 사람에게 밀려 그의 넓은 등을 떠밀고 말았다.
그 순간 전신에 전류가 흘러, 그 쇼크로 줄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뒤돌아본 남자의 눈에는 놀람과 뭔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부딪친 것이 줄리임을 확인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뜬다.
「미국 여자들은 모두가 이런 식으로 남자에게 접근해 옵니까?」
「별소리를 다 하시는군요! 당신 같은 건방진 사람에게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어요?」
줄리는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실례하겠어요. 월프 씨에게 할 얘기가 있어서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줄리는 두뇌를 급회전시키며 월프에게 할 질문을 생각했다. 그러나 탑승구로 몰려가는 무리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땐 이미 월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줄리는 실망한 채 사람들이 빠져나간 로비로 돌아왔다. 그 건방진 남자는 어디에 갔을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련이 남은 듯 줄리는 그 야생동물 같은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남성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강렬했던 모양이다.
불과 몇 분 동안의 만남에서 이렇게 강한 인상이 새겨지다니 도무지 나답지가 않아. 마치 순진한 소녀 같잖아...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갔더니, 흰 터번을 머리에 감은 회색 수염의 남자가 다가왔다.
「미스 코넬이십니까?」
그는 망설이듯 입을 열다가 줄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정중하게 자기 소개를 했다.
「저는 미슬라 왕자님을 모시는 운전사로서 구나 신이라고 합니다. 마님의 말씀에 따라 마중 나왔습니다.」
왕자는 나의 마중을 아내에게 떠맡겨 버렸구나.
줄리는 조금 실망하면서 운전사에게 짐을 맡겼다.
하긴 미슬라 왕자는 인도의 최고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이고, 나는 일개 신문기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서방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신문사의 특파원이라고 해도, 가볍게 취급당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슬라 왕자는 정부의 정식 각료는 아니지만, 수상이나 요인들과는 가까운 친구다. 인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미슬라 왕자가 모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다. 정계에 널리 혈연을 가지고 있고, 두뇌가 명석한 그는 실업계에서도 크게 활약하고 있다.
남인도에 큰 철강공장과 직물공장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도 왕자라는 칭호를 가진 미슬라 집안은 영국의 통치가 끝나고 지방의 각 왕조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전,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던 시대로부터 민중들의 깊은 존경을 받아 왔었고, 그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또한 그 선조는 몇 세기에 걸쳐 자원이 풍부한 북인도 지방을 통치해 왔었다. 금은 보석에 파묻혀 살다시피한 할아버지는 아시아 제일의 부호라고도 소문나 있었으며, 대대로 미슬라 왕가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선망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의 자료에 의하면 왕자는 투지가 왕성한 스포츠맨으로 되어 있었으나, 줄리는 왕자가 지금은 그런 스포츠도 할 수 없는 노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 3년 전 영국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말야.」
하딩 편집장은 말했었다.
「대단한 인물이야. 그런데 사람 응대를 할 줄 모르더군.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아무튼 줄리, 왕자의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해 놓았어. 나는 미슬라 가문의 특별한 친구야. 전보를 보냈더니 바로 초대장을 보내줬어. 그러니 당신은 안전하고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무엇보다 그의 궁전에 있으면, 필요한 정보를 입수하기가 비교적 쉬울 테지. 늘상 정부의 요인들이 그를 찾아가는 모양이고, 왕자 자신도 거대한 정보망을 갖고 있어. 하기야 그것을 당신이 이용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별문제이지만 말야. 아무튼 테러리스트에 관한 이야기에 매달려 보라구. 일요판에 연재할 수 있도록. 충고는 이것으로 끝이지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자면, 미슬라 왕자를 절대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게 좋아. 그는 까다로운 인물이긴 해도, 뭐 당신이라면 잘 해내겠지. 그 점에서는 당신이 제일 적격일 거야. 왕자는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점수를 주는 사람이니까.」
마지막에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덧붙이고 나서 웨스 하딩은 줄리를 내보냈었다.
「미슬라 왕가의 손님입니다.」
운전사의 그 한 마디에 입국수속은 끝났다. 그는 이곳에서 얼굴만 내밀어도 다 통하는 모양이어서, 바쁘게 패스포트에 스탬프를 찍고 있던 세관원은 손을 멈추고 크게 머리를 숙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마담.」
운전사는 사투리가 심한 영어로 말했다. 남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웃음 띤 얼굴과 상냥한 태도가 줄리의 마음에 들었다. 터번을 감고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서북 인도 펀잡 지방의 시크교도임에 틀림없다.
줄리는 인도의 종교에 흥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인도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 하나의 소망이었다. 그 꿈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수화물표를 갖고 계십니까?」
운전사가 물었다.
「짐이 나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립니다. 뒤에 다른 사람에게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공항 건물을 빠져나오자, 밖은 예상한 대로 찌는 듯이 더웠다. 구나 신은 줄리를 메르세데스로 안내하고는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차안은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 있었다.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은 줄리는 새삼스럽게 24시간이 넘는 기나긴 여행을 생각했다.
두통이 있는 것도 그 탓이겠지.
그녀는 아스피린을 먹기 위해 핸드백을 열었다. 차차 마음이 가라앉은 줄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풀과 나무 껍질의 향기... 거기에다 뭔가 모를 이 향기... 사향 같은 남성적인 냄새가 풍겼다.
눈을 뜨자, 운전석에 타려고 하던 구나 신이 누군가 아는 사람을 보았는지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돌아보았더니 흰 수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키가 큰 남자가 공항 로비 입구에 서 있다. 그는 차갑게 표정을 죽이고 있었으나 특별히 기분이 언짢은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멀리서 봐도 남자답고 늠름했다.
어머!
줄리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저 사람은 조 월프와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야.
아까 로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자 얼굴에 피가 몰려 올라왔다. 줄리는 그 남자를 응시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줄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줄리가 타고 있는 메르세데스 쪽을 흘끔 쳐다보고 나서는 자기의 진홍빛 스포츠카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구나 신이 되돌아왔다.
줄리가 탄 메르세데스가 마침내 자동차들의 흐름 속에 끼여들었을 때는 이미 그의 진홍빛 스포츠카는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윽고 줄리의 눈에 낯선 경치가 창밖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인도의 여러 가지 생활 광경이 마치 낡은 영화를 보고 있듯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소 등에 농기구를 얹고 누더기를 걸친 농부, 말라빠진 젖소를 데리고 젖을 짜러 가는 노파...
그것은 특파원으로 유럽에 가서 보았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차안에서 본 바로는, 사람들의 생활이 상상했던 것보다는 덜했지만 결코 풍요하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남부는 훨씬 더 빈곤하다고 들었는데...
하여튼, 길가를 걷는 사람과 이 메르세데스를 타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엄청나게 큰 간격이 있었다. 줄리는 바로 지금 폭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스러울 게 없을 것처럼 생각됐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빈부의 차이를 취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테러리즘 문제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이 나라처럼 계급 차이가 명확히 눈에 보이는 국가뿐만 아니라, 국민의 대부분이 중산층에 속하는 민주주의 국가까지도 목표로 삼는다.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를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잘못이야, 줄리. 힌두교 국가에서 카스트 제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 이 제도가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도 종교적으로 우리들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배경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어느새 전원 풍경이 사라지고, 차창에는 도시의 교외 풍경이 들어왔다.
소달구지, 사람의 키보다 직경이 끈 바퀴를 실은 마차, 자전거, 보리단을 등에 실은 낙타, 덜거덕거리며 달리는 트럭, 폐차하고도 남을 만한 고물 택시, 스쿠터, 오토바이...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한데 뒤엉켜 달리고 있다.
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줄리는 초조하게 머리를 뒤로 젖혔다. 이렇게 지독한 두통은 에디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때 이래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줄리는 눈을 꼭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는 자동차가 큰길을 벗어나 소란스럽던 거리와는 별세계처럼 느껴지는 길로 들어섰다. 지나는 자동차도 뜸했고, 나지막한 생울타리로 둘러싸인 집들이 여유 있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잔디밭 손질도 잘 되어 있었다.
이곳이 세계 제 2위의 인구를 보유한 나라의 활기 넘치는 수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시골의 별장지대라고 해도 좋을 풍경이었다.
「이 근처에는 각국의 대사관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구나 신은 뒷좌석과 차단해 놓은 유리벽의 문을 열고 말했다.
「왼쪽으로 판시루 마구 거리를 곧장 가면 미국 대사관이 있지요.」
몇 분 뒤에 차는 좌우에 가로수가 있는 길로 들어섰다. 사유지인 모양이었다. 공항에서 오는 길에 본 어떤 담보다도 높은 담, 그 안쪽에 있는 것은 줄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호화롭고 사치스런 풍경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사유지의 긴 도로를 따라 구르고 있었다. 창밖에는 현란한 빛깔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고 석벽을 따라 커다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줄리는 가죽을 입힌 팔걸이 위에 있는 버튼을 눌러 창을 열었다. 가슴 가득히 신선한 공기를 들여마시자 온갖 향기가 코를 찔렀다.
「멋있군요...」
줄리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꽃들이 가득하고.. 잎사귀도 푸르고... 공기도 싱그럽고... 여기가 미슬라 왕자의 저택인가 보죠?」
「그렇습니다. 저 언덕을 넘으면 바로 궁전이 보이죠.」
엔진 소리가 낮아지고 속력이 줄다가 이윽고 차가 정지했다. 터번을 감은 문지기가 뛰어나와서 무겁게 보이는 철문을 활짝 열었다. 라이플을 어깨에 멘 경비병이 대문 기둥 옆에 물러서 있었다. 문지기와 경비병이 운전사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면서 뒷자리에 앉은 줄리에게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어머, 저 호랑이!」
줄리는 양쪽 문 기둥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당당한 청동으로 된 호랑이 상이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개의 상에는 우아함과 야생의 용맹성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 대조적인 아름다움에 줄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줄리는 그 동상을 보면서, 인도는 비폭력 저항의 철학을 낳은 땅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치열한 민족 대립의 땅이기도 한 사실을 떠올렸다.
「저 호랑이는 미슬라 왕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수호신입니다.」
구나 신이 말했다.
「또 한 쌍은 궁전에 있습니다. 미슬라 왕조의 초창기에 왕자의 마음 자세를 구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고개를 넘어서자 커다란 궁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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