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은 눈부시도록 밝고 뜨거운 인도의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조각을 곁들인 장려한 대리석 돔을 역시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받치고 있다. 양곁의 건물도 조금 작기는 하지만 돔형의 지붕을 이고 있고, 건물의 외관은 섣부른 접근을 금하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넓은 베란다나 기둥을 따라 늘어선 꽃들이 다소나마 그런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주고 있다. 줄리는 우아하고 세련되어 긴장감마저 느끼게 하는 궁전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신의 역사로써만 이뤄질 수 있는 예술품 같다. 꽃과 대리석, 주위의 자연경관이 나무랄 데 없이 어울려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메르세데스는 넓은 대리석 계단 앞에 소리도 없이 멈추었다. 흰 목면 셔츠, 붉은 허리 장식띠에 무겁게 보이는 칼을 찬 경비병이 다가와 차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려선 그녀의 눈앞에는 딴 세계가 펼쳐져 있다. 넓디넓은 정원에 갖가지 색깔의 꽃들이 어지럽게 피어 있고, 정원사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다.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기둥은 멀리서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녀의 옆에는 어느새 몸집이 큰 하인이 삼가는 몸가짐으로 대령하고 있었다. 줄리는 한 순간 다른 시대에서 헤매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줄리는 대리석 계단 옆에 있는 청동으로 된 호랑이에 손을 대 보았다. 대문 기둥 위에 자리잡고 있던 것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길고 굵직한 꼬리를 휘감아 올리고 어금니를 드러낸 모습은 금방이라도 포획한 짐승을 찢어발길 듯했다. 줄리는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져 있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이쪽으로 드시죠.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이 커다란 문을 열었다. 대리석 위에서는 높은 소리를 내던 하이힐도 색체가 현란한 융단 위를 걸을 때는 전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검은 기를 띤 마호가니의 벽과 마루, 그리고 계단은 모두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흘렀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하얀 대리석 돔이 펼쳐져 있다. 사방의 벽이 책으로 꽉 찬 넓은 방이었고, 친절하게 보이는 초로의 부인이 줄리를 기다리고 있다. 「코넬 양이시죠? 바라티 미슬라예요. 뉴델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불안이 순식간에 걷혀 버렸다. 흰 머리가 희끗희끗 엿보였고 살이 조금은 쪘지만 젊었을 때는 빼어난 미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줄리는 곧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몸가짐이 좋아졌다. 「정말 잘 오셨어요. 웨스 하딩 씨와는 제 남편이나 저나 상당히 오래전부터 친구였지요.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돼서 기뻐요. 틀림없이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벌써 정신이 없을 정도예요.」 줄리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안락 의자에 앉았다. 「마실 것을 좀 가져 와.」 미슬라 부인은 소리도 없이 나타난 하녀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 전보를 받고서야 오시는 분이 여자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것도 이렇게 젊은 분일 줄이야.」 「저는 스물여덟 살입니다.」 「제 나이 또래의 인도 여성에게는, 여자가 일 때문에 혼자 세계를 뛰어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지요. 하긴 이 나라에도 나라를 위해 큰 일을 맡아 하는 여성이 몇 분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시대의 변화라는 거겠죠? 제 딸도 2년 동안 스위스에서 공부를 했어요.」 「따님이 계셨군요.」 줄리는 이 여주인에 관해 알고 싶어졌다. 「예, 아주 착한 애랍니다. 당신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아직 미혼이기 때문에 여기서 살고 있어요.」 「주인 내외분과 따님, 이렇게 세 분만 사시나요?」 줄리는 실내장식이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줄리. 남편은 돌아가셨어요. 모르셨군요? 웨스가 말하지 않던가요?」 줄리는 놀라서 부인의 복스런 얼굴을 다시 보았다. 왕자가 없다면 나는 누구를 믿고 일을 해야 하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말씀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줄리는 당황하면서 사죄했다. 「하딩 편집장은 어째서 내게 그런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을까...」 혼잣말을 했다. 왕자의 죽음을 자료 파일에 기입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어느 빌어먹을 담당원일까? 줄리는 저주의 욕지거리를 입밖으로는 내지 않고 삼켜 버렸다. 신문도 다른 대형 신문사처럼 회사 안에 커다란 자료실을 갖고 있으며, 온 세계의 뉴스가 거기에 모이는 것이다. 뉴스는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되고, 다시 하나하나 체크된다. 기자가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 맨 처음 모르고(시체 공시소)- 신문사 사람들은 옛날부터 자료실을 그렇게 부른다-로 가서, 그 일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자료실 담당에게 부탁해 뽑아오게 한다. 미슬라 왕자는 공식적으로는 인도 정부의 고관은 아니지만 사실상 거물이기 때문에 파일에 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부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오래 된 이야긴 걸요. 게다가 힌두교에는 윤회사상이 있어서 우린 그것을 믿고 있지요. 육체란 정신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거랍니다. 육체는 쇠약해지고 마침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다른 육체에 기탁하여 다시 돌아온답니다. 새로운 생명에 가까이 가는 거지요. 힌두교도는 모두 그렇게 윤회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어요. 사람이 죽는 것은 슬픈 일이긴 해도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아요. 언제까지나 미련 때문에 슬퍼하고 있다가는 영혼이 다음 육체에 옮겨가는 데 지장이 있지 않겠어요? 슬퍼하고만 있는 것은 오히려 돌아가신 분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고맙습니다.」 줄리는 하녀가 내미는 은쟁반에서 차가운 글라스를 집어들었다. 흰 거품이 이는 음료는 산뜻한 단맛이 있고, 바닐라 향기가 나는 청량음료였다. 「그런데, 어째서 하딩 편집장은 왕자님과 인터뷰를 하도록 그토록 강조하셨을까요? 제가 뉴델리에 온 목적엔 왕자님과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건 아마 우리 아들 얘긴가 봐요. 지금은 그 애가 미슬라 왕자로서의 실권을 쥐고 있지요. 늘 바쁜 애랍니다. 지금도 봄베이에 가 있어요. 오늘 돌아올 예정이긴 하지만.」 자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인이 왜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 줄리는 이상했다. 「그렇지만 우리 딸 프리야나 나는 당신을 맞아 대단히 기쁘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웃음을 지으면서 덧붙여 말했다. 「물론 자이도 역시...」 「제가 뭘 기뻐한다고요, 어머니?」 갑자기 들려오는 착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에 두 여인은 놀라서 돌아보았다. 줄리는 낭패스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조용히 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목소리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그 모습은 방의 안쪽에서 보면 성큼 무대에 등장한 주인공처럼 선명했다. 그 모습을 잘못 볼 리가 없다. 공항에서 만났던 그 거만한 사내! 그가 미슬라 왕자였다니! 미슬라 왕자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여성은 할 말을 잃고 망연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흐르는 듯한 유연한 몸놀림은 타고난 스포츠맨을 연상케 했다. 훤칠한 키, 넓은 어깨, 역삼각형의 상반신, 그리고 솟아오른 근육. 걷는 모습은 문기둥의 호랑이를 연상시켰지만, 생명이 있기 때문인지 그가 더 무서웠다. 승마복으로 갈아입은 미슬라 왕자는 한 손에 헬멧을 들고, 겨드랑이에는 승마용 채찍을 끼고 있었다. 왕자의 모습은 이 호화스런 궁전에 잘 어울렸다. 하기야 그의 선조는 대대로 통치자였고, 줄리의 선조들이 문자도 알지 못하던 시대부터 이미 편리하고 세련된 문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테니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행동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이 자리의 상황을 이미 모두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다. 줄리는 동요하고 있는 자신에게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 어깨를 으쓱했다. 억지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마치 주눅 같은 것은 들지도 않았다는 듯이. 여자인 자신이 유능한 저널리스트라는 사실을 남성에게 인정토록 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상대에게 강하게 맞서야 한다는 것쯤은 줄리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이건, 아무리 돈 많은 사람이건, 혹은 권력자이건, 기가 죽지 않고 힘을 인정토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흔히 줄리를 조롱하거나 때로는 애처롭게 여긴다. 남자들은 여성 기자와 절대 씨름판에 같이 서려고 하지 않으며, 여성 기자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일도 없다. 여성의 실력에 남성이 경의를 나타내는 일이라고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 자이!」 먼저 평정을 찾은 미슬라 부인이 말했다. 「빨리 왔구나. 밤이나 되야 올 줄 알았는데. 내 새 친구를 소개하지. 줄리 코넬 양이야. 줄리, 내 아들 미슬라 왕자예요.」 미슬라 왕자는 가볍게 줄리에게 목례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줄리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줄리는 턱을 끌어당겨 똑바로 그 검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프리야의 친군가요?」 왕자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부인이 대답했다. 「물론, 머지 않아 그렇게 될 테지만. 줄리는 잠시 동안 여기서 머물게 돼. 내가 초대한 거야.」 「영광이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왕자는 줄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가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손에 잡히듯이 분명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어쩐지 수상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줄리는 직감할 수 있었다. 「웨스 하딩 씨로부터 전보가 왔었어. 당분간 줄리를 여기서 묵도록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어쩐지 부인은 진짜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왕자가 화를 낼 것이 분명한지 그 말만은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줄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줄리, 당신이 직접 말하는 게 좋겠군요. 그 멋진 일에 대한 이야기를요. 저는 좀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부인은 손을 가볍게 흔들고는 돌아섰다. 부인의 뒷모습을 줄리는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쫓았다. 그러나 무정하게도 문은 찰카닥 소리를 내며 닫혔고 이내 무거운 침묵이 서재를 내리눌렀다. 퍼뜩 정신이 들어 쳐다보니 미슬라 왕자는 난로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앞에서 등을 이쪽으로 돌리고 서 있었다. 두터운 융단에 발소리가 흡수되어 그가 그쪽으로 가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테이블 위에는 크리스털 티캔터(식탁용의 마개 있는 유리병)가 늘어서 있고, 딸그락딸그락 얼음이 부딪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는 뭔가 마실 것을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잔, 어떻소?」 「아닙니다. 고맙습니다만...」 줄리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마 두통 때문일 거야.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미슬라 왕자는 등을 돌린 채 음료를 만들고 있다. 곧 이리로 오겠지. 그러나 나는 손님이 아니야, 취재하러 온 기자야. 한시 바삐 인도에 온 목적을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는 걸까? 그가 무슨 일로 왔냐는 말 대신 환영한다고 기꺼이 응대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야. 어쩌면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나에게 지나치게 잘 대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남성들은 언제나 나에게 친절했으니까. 걱정 할 것 없어, 해야 할 말을 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침묵은 계속되었고, 줄리의 눈은 왕자의 등에서 헤매고 있었다. 나이는 30살쯤일까? 다리는 보드라운 가죽으로 된 승마용 부츠에 싸여 있지만, 발달한 근육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줄리는 깜짝 놀랐다. 때와 장소를 생각한다면 환영할 만한 반응일 수가 없었다. 그 기분을 감추기 위해 줄리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책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몸이 휘청거려 손으로 책장을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바람에 줄리는 마침내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어디 편찮소?」 등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도무지 줄리의 몸을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것 같지가 않은 딱딱한 목소리였다. 이 사람 앞에서 기죽은 표정을 짓는 것은 금물이야. 줄리는 얼른 책장에서 떨어져 섰다. 이 사람은 남의 약함을 동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줄리는 미슬라 왕자를 향해 돌아섰다. 「괜찮아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줄리는 어떻게 해서든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왕자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빤히 줄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줄리의 얼굴에서 몸으로 옮겨갔다. 그리고는 줄리 쪽으로 손을 뻗치려고 하다가 생각을 바꾼 듯 글라스를 입에 갖다댔다. 「공항에서 나를 만난 일을 잊었소?」 줄리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보고 왕자는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군.」 「비행기에서 막 내려서 그런 모양입니다. 미국에서...」 목소리가 온 방에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고, 줄리는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딘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왠지 몸이 평소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는다. 「당신은 봄베이에서 그 때 도착하셨던 모양이군요?」 줄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조 월프 씨와 함께 가셨던가 보죠?」 왕자는 한 손에 글라스를 든 채 내내 서 있었다. 줄리는 황급히 핸드백을 열고 수첩을 찾았다. 질문을 해야지... 그러나 머리가 너무 아팠다. 줄리는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왕자의 지위도, 더구나 그가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는 붙임성 있게 멋대로 지껄여대는 흔한 정치가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다. 공항... 인도에 온 목적... 그러나 줄리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그의 말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엄격하고 냉랭한 목소리였다. 왕자는 화를 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자 몸이 떨렸다. 안온하고 기분좋게 느껴졌던 이 방도 지금은 싸늘하게 느껴졌다. 줄리는 속이 언짢아져서 다시 비틀거리며 책장에 몸을 기댔다. 전혀 웃음을 보이지 않는 저 눈동자가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진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줄리는 멍하게 그런 것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줄리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힘찬 팔이 줄리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무쇠 같은 팔이었다. 그 팔 속에 안겨 있는 사이 줄리는 서서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사향 냄새가 풍기고 사내 냄새가 물씬 났지만 싫지는 않았다. 귓전에선 왕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규칙적이고 힘있는 고동 소리가 울린다. 「춥소?」 줄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묘한 기분에 젖어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깥은 그렇게 따뜻했는데... 「더위를 먹은 모양이오. 긴 여행에 지쳐 있는데다가 갑자기 더위를 만나서 그런 것 같소. 저항력을 잃은 거요.」 줄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넓은 가슴에 안긴 채, 줄리의 몸속엔 기분좋은 온기가 번져가고 있었다. 마음이 푹 놓이는 것 같았다. 「잠시 이렇게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요. 오늘은 시원한 곳에서 쉬는 게 좋겠소. 그런데 지금은 체온이 내려가 있기 때문에 따뜻하게 하는 편이 좋아요.」 왕자가 타이르듯 말했다. 「이렇게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소.」 그는 뭔가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줄리는 살짝 그의 넓은 가슴을 밀었다. 「이제 괜찮아요.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냉정해야 할 캐리어 우먼이 실신하다니... 아무튼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정신을 잃었었나요?」 「완전히.」 왕자가 대답했다. 「단, 내 팔에 안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는 가정에서 말이오.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는 얘기요.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달리 생각할 수가 없지 않소? 어머니도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가 거북하셨던 것 같은데.」 줄리의 짙은 푸른색 눈동자에 띠고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줄리는 왕자의 팔 속에서 몸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얘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해두겠어요.」 줄리는 실례되지 않도록 왕자의 품에서 벗어나 복장을 고쳤다. 미슬라 왕자는 우아한 모습으로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실례했소. 그렇게 해주시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더위 탓이라고 하셨으면 좋았을 걸 그러셨어요.」 줄리는 무서운 눈으로 왕자를 노려보았다. 「오늘 처음 만나봤으니까, 그쪽이 역시 자연스럽고 고상한 생각이 아닐까요?」 그때 미슬라 부인이 서재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선 그녀는 잠시 눈에 웃음을 띤 채 두 사람을 번갈아보고 있다가 기쁜 듯이 입을 열었다. 「프리야에게 당신의 얘기를 했더니 그 애도 매우 기뻐했어요.」 그리고 나서 왕자에게 물었다. 「줄리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니? 신문기자의 일에 대해서...」 「신문기자라고요?」 왕자는 휙 시선을 줄리에게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빛을 띠고 있던 검은 눈동자가 이제는 사나운 빛으로 바뀌어 의심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다. 「아뇨, 아무 얘기도 못 들었어요. 이 사람이 신문기잔가요?」 「그래, 그래서 여기에 오신 거란다.」 부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알잖니, 너도. 친구인 웨스 하딩씨 말이다. 미국 신문사의.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줄리는 그분 밑에서 일하고 있어. 언젠가 그분의 편지에 분명히 네가 영국의 대학에 가 있을 때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생각나는군요.」 왕자는 탐색하듯이 줄리를 응시하고 있다가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신문기자들은 얘기를 듣고 싶다면서 늘 찾아오지만 그들의 기사가 사실대로 쓰인 것을 본 기억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줄리는 파란눈에 노여움을 담고 왕자를 노려보았다. 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힘껏 갈겨 주고 싶었다. 이 사람은 내가 기사를 쉽게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실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오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나를 초조하게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여성 경멸 때문일까? 「그래, 네 말이 옳다고 생각해. 그러나 줄리는 그런 기사를 쓰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란다.」 부인이 끼여들었다. 「웨스가 전보로 설명해 주었는데 줄리는 어떤 중요한 캠페인의 스탭이래. 일찍부터 이 일에 관계해 왔다고 하더라. 줄리가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나?」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니오, 아직 아무 것도 못 들었어요.」 왕자는 내뱉듯이 말하고 두 여성의 곁을 떠나 사이드테이블에 가서 승마용 채찍을 집어든다. 「그러니까 일 때문에 여기에 오셨군.」 「그래, 물론 그렇단다.」 미슬라 부인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틀림없이 줄리는 뛰어난 기자라고 생각해.」 그녀는 상냥한 눈길로 줄리를 보았다. 「네, 물론 그럴 테지요.」 미슬라 왕자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 「자, 줄리. 따라와요.」 왕자가 나가자 부인이 말했다. 「당신 방을 준비시켜 놓았어요. 틀림없이 마음에 들 거예요.」 줄리는 멀어져가는 왕자의 커다란 등에 대고 저주의 말을 퍼붓고 싶었으나 꾹 참고 부인의 뒤를 따라갔다. 「잘 됐어요.」 부인은 혼잣말처럼 한 마디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당신의 계획을 듣고 자이가 화나 내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 애는 신문이나 잡지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그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매스컴으로부터의 전화는 절대로 받지 말도록 나나 프리야에게 당부했어요. 믿기 어려우시죠? 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기자들은 모두 친절한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그 양반들은 사교란의 기사 때문에 우리 생활을 알고 싶은 것일 테죠... 하긴 요즘은 별로 나들이를 안하니까 알려 줄 일도 없어요.」 줄리는 애가 탔다. 기대했던 미슬라 왕자가 하필이면 지독한 매스컴 혐오자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