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소설] 불타는 인도 - WAU (12)

슬러 작성일 05.06.23 08:5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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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줄리는 왕자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을 공주에게 알리고, 곧장 뜰에 나가 망고 나무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기분을 가지고 일을 하러 나갈 수는 없다. 머리가 어지러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으니까.
줄리는 완전히 의기소침해졌으나, 그것은 왕자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이끌리는 자기 자신의 탓이었다.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줄리는 일할 기력을 상실했다. 아무리 일을 하려고 노력해도 생각은 자꾸 왕자에게로만 향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에 열중하려고 생각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신이 산만해지기만 한다. 머리에서는 언제나 직업적인 근성을 발휘하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그 냉정한 마음도 왕자 때문에 눈뜬 욕망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프리야의 일도 또한 걱정이다. 왕자를 설득하지 못했다고 말했을 때, 공주는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인도 여자처럼 울며 날뛰지는 않겠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입을 일자로 꼭 다물고 있었다. 귀족적이고 의연한 얼굴과 우아한 태도를 제외한다면 그들 남매는 닮은 데가 없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역시 그들에게는 같은 피가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의지가 강하고 완고한 면을 남매가 똑같이 갖고 있나 보다.
줄리는 일어나서 궁전으로 향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멍청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관 앞 돌층계를 올라가면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다크블루의 포르쉐가 멎는 것이 보였고, 운전석의 사나이가 씩씩하게 차에서 내려 문을 닫는다. 경쾌하게 돌충계를 올라오는 사나이는 왕자보다 젊었으나, 키는 왕자만큼 크지 않았다. 줄리는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콧날이 우뚝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다.
프리야와 나란히 있으면 아주 잘 어울릴 거야.
왕자가 이 사람을 프리야의 배필로 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히 프라카슈 다스는 고전적인 면모를 갖춘 미남자였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남성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야성적인 왕자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냉정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줄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젊은이는 매일매일이 즐거운 듯한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균형잡힌 이 젊은이에게는 왕자가 지닌 우아함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나, 발랄한 면은 충분히 넘쳐흐른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어요.」
줄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줄리 코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프라카슈 다스라고 합니다.」
청년도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소년과 같았다. 그는 이 궁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오늘 여기 온 이유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이상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바쁘실 텐데, 이만 실례하겠어요.」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약속된 시간이 거의 다 됐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줄리는 프라카슈 다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프리야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 것이다. 그가 발산하는 분위기는 꿈 많은 소녀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던져 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프리야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다.
줄리는 왕자에게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누이동생을 위해 있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약혼자를 일찍 궁전에 부른 것도 흔들리고 있는 공주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누이동생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는 공주가 약혼자를 불러들인 오빠를 얼마나 원망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줄리는 천천히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이미 대낮이 가까워져 있었다. 대사관에 가기도 이미 늦었기 때문에 책상에 앉았으나, 역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윽고 복도에서 조용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야와 약혼자의 첫대면이 끝난 모양이다. 원치 않던 손님이 가자 곧 공주가 이리로 오는 것이리라. 틀림없이 프리야는, 오빠가 데려온 약혼자보다 자기가 택한 애인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것을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겠지.
줄리는 공주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에 충고 따위는 하지 말고,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현관 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프라카슈 다스가 돌아간 뒤에도 프리야는 찾아오지 않았다. 줄리는 걱정스런 생각이 들어 밑에 내려가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공주는 없었다.
왕비에게 물었더니, 공주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줄리는 점심을 먹고 그대로 대사관으로 갔다.


저녁때가 다 되어 궁전으로 돌아온 줄리는 화장대 위에 있는 아이보리 빛 봉투를 발견했다. 프리야가 놓고 간 것일까? 줄리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고 손에 들었던 노트를 놓기가 바쁘게 봉투를 집어들었다. 줄리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봉투를 뜯어보니 왕자의 독특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뉴델리에서도 손꼽히는 대실업자가 파티를 여는데, 같이 가자는 초청이었다.
줄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흐르는 듯한 검은 글씨로 쓴 문장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정중한 문장이었고, 조롱하는 투는 전혀 없었다. 또한 단순히 사업상의 권유만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서재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 나를 왕자는 어쩌자고 파티에 초청하는 것일까? 더구나 인도 최고 명문가의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 왕자에게 에스코트받는 명예를 내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왕자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으려면, 가끔 디너파티에 초대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그러나 비서인 해리는 언제나 왕자 혼자 참석한다는 대답을 했다. 즉 왕자는 언제나 혼자서 파티에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자에게 파트너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아무리 유능한 비서라도 왕자의 사생활에까지 끼여들 수는 없을 테니까.
줄리는 어떤 파티인지 모르므로 신중하게 드레스를 선택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다.
그러나저러나 왕자는 어째서 갑자기 나를 파티에 데려가려고 하는 것일까?
줄리는 직업상 빨리 몸단장을 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차차 저널리스트로서의 본능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오늘밤의 파티에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수집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지. 시간을 촉박하게 알려온 것을 보면 이것은 사업상의 파티임에 틀림없어...
줄리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했으나, 꼬박 한 시간이나 걸려 몸치장을 했고, 거울 앞에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그녀의 뺨은 기대에 부풀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저녁 줄리가 선택한 것은 광택이 나는 검정 칵테일 드레스였다. 엄하게 느껴질 정도로 심플하고 직선적이며, 아주 침착한 인상을 주는 드레스였다. 소매는 없고, 어깨주름과 넓은 새틴 벨트만이 악센트가 되어 있었다.
줄리는 이 드레스에 어울리게 새로 산 검정 새틴 하이힐을 신었다. 그리고 가슴에는 진주 한 알. 이브닝 드레스에 곁들일 보석으로는 좀 초라했지만, 그 이상의 목걸이는 경제적으로 무리였다. 백은 진주가 박힌 검정 새틴으로 택했고, 머리는 부드럽게 컬하여 양쪽으로 흘러내리도록 했다. 입술연지는 나무딸기색, 볼연지는 보라, 그리고 오늘밤이 멋진 밤이 되기를 원하면서 향수를 뿌렸다.
공식적인 초대이므로 욕망이 불타오르는 일은 없을 테지.
이런 생각을 하자 다소 기분이 편해져서, 왕자와 동행하는 것이 즐겁기까지 했다. 왕자는 현관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위를 쳐다보니, 낮에 이 둥근 홀에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든 천창(天窓)이 별을 뿌려 놓은 판넬처럼 보였다. 간접조명 때문에 홀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감싸여 있었다. 주위를 압도하듯, 다양한 색깔의 타일 마루에 서 있는 키 큰 왕자의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은 더욱 위엄 있게 보이는군요.」
줄리는 농담삼아 말하려 했으나, 왠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처음 왕자를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온몸에서 지배자다운 강한 힘과 개성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고 싶어 질 것이다.
「메모를 보았군, 줄리.」
왕자는 기쁜 듯 말했다.
「좀더 일찍 알려야 했는데, 오후에 해리가 독촉할 때까지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어. 오늘밤은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그 짧은 메모만 보아도, 오늘밤의 파티가 어떤 것인지 이해한 모양이군.」
왕자는 줄리의 모습을 점검하듯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나갔다.
「초대해 주셔서 기뻐요.」
줄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왕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긴 속눈썹 속에 숨어 있는 푸른 눈동자를 꼭 보아야겠다는 듯이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가 뜨겁게 타고 있었다. 이윽고 줄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 사람은 여자에게 숨쉬는 것조차 잊게 하는 모양이야...
줄리의 몸은 가냘프게 떨고 있었다.
「오늘밤 당신은 더욱 아름답군.」
왕자가 조용히 말했다.
「파티에 온 남자들이 나를 질투할 거야, 틀림없이.」
「어머, 하지만 전 오늘밤만의 파트너잖아요?」
줄리는 웃으면서 말했다. 왕자도 거기 대답하듯 잠시 미소를 띄웠다. 엄한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진상이 밝혀지면 그들도 안도의 한숨을 짓겠지.」
「틀림없이 그들은 기자들처럼 까다로운 질문을 퍼부을 테죠?」
줄리가 어물어물 대꾸했다. 기분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왕자는 아무래도 오늘 아침의 일을 잊으려 하고 있는 듯했다.
나도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 오늘밤은 모든 것을 잊고 마음껏 즐겨야지...
줄리는 왕자와 같이 있으면 늘 긴장해 있었으나, 지금은 왜 그런지 들뜬 기분이었다. 왕자가 수수께끼 같은 눈으로 줄리를 내려다본다.
「남자라면 누구든지 줄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할 거야, 기자뿐만이 아니고.」
왕자는 그녀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한 알의 진주를 살짝 만졌다.
「왜 이것을 달았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이 드레스를 입을 때는 언제나 이것으로 장식해요.」
「아니,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아니야. 단지 그런 드레스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줄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 남의 심정을 잘 아시는군요. 나도 늘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택한 직업은 급료가 많지 않아요. 편집장이 내 진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멋진 기사를 쓰면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예요.」
그의 검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일이 마음에 드나?」
「네, 무척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왕자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들였다.
「진심으로 일을 좋아하고 있어요.」
「운이 좋은 사람이로군.」
왕자는 긴 침묵 끝에 겨우 이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왕자는 미소를 띄우며 줄리의 손을 잡았다. 정장을 한 하인이 육중한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대리석 층계를 내려갔다. 빨간 스포츠카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는 줄리를 조수석에 태우고 자기는 운전석에 올랐다. 오글은 운전사가 딸려 있지 않았는데 줄리는 왕자의 차에 그렇게 단 둘이 탄 것이 기뻤다.
파티는 바야흐로 한창이었다. 화려한 저택에서 오늘밤의 주인공인 레온 칼버트가 기쁜 얼굴을 하고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는 직물공장 주인이자 무역상이기도 한 영국인이었다. 칼버트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대답하여 왕자가 말했다.
「이 숙녀분은 줄리 코넬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마 당신 때문에 자이야프라디슈도 파티에서 사업 이외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군요. 줄리, 그것은 오직 당신의 솜씨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칼버트는 몸짓을 섞어 가면서 말했다.
「알겠어요. 그것은 저한테 맡겨 주세요.」
줄리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칼버트를 보고 첫눈에 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왕자의 친구는 모두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왕자와 나란히 팔짱을 끼고 리빙룸에 들어가는 줄리는 자랑스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크수트의 팔에 가볍게 닿아 있는 곳이 뜨겁게 느껴졌다. 줄리는 자신이 약간 흥분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의 매력에 이끌리는 육체의 반란도 이제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줄리는 흐뭇한 마음에 사로잡혀 얼굴을 붉혔다.
「마실 것을 가져오겠소.」
왕자는 평소와 달리 여유가 있었고 긴장을 풀고 있었다.
「이 집에서는 식사 전에 술마시는 시간이 아주 긴 것이 특징이지.」
「저 먹음직한 오드블이 도망치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을까요?」
줄리가 즐거운 듯 이야기했다. 왕자가 음료수를 가지러 간 사이 칼버트가 다가왔다.
「정말 사나이다운 사람이죠, 자이야프라디슈 미슬라라는 남자는 말예요.」
「언제나 그렇게 풀네임으로 부르시나요?」
줄리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물었다. 오늘밤의 주인공 레온 칼버트는 마치 영국의 지방명사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인데, 어째서 인도에 와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일게 했다.
「그렇지는 않죠.」
칼버트는 일부러 몸을 떨면서 대답했다.
「당신도 그 사람의 풀네임을 한 번쯤은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해서 그랬죠. 칭호까지 빠짐없이 말하자면 아마 30분은 걸릴 것입니다.」
「칭호가 있나요? 왕자 말고도...」
「아니, 지금은 왕자의 칭호뿐이죠. 정세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붙었을 뻔한 칭호를 말한 겁니다. 예컨대 나 , 또는 나 등 여러 가지가 있죠.」
「혹시 그것은 칼버트 씨 당신의 창작이 아닌가요?」
「글쎄요...」
칼버트는 그녀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하지만, 고전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내가 한 말의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이는 정말 사내답습니다.」
줄리도 칼버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왕자는 정말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여겨지고 또 존경을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고 할 때 그런 칭호에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아직 젊지만 자신의 힘으로 현재의 지위와 재산을 쌓아올린 사람입니다. 나는 그의 노력을 잘 알고 있죠. 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자이는 나와 같은 직물공 장뿐만 아니라, 철강공장도 경영하고 있어요.」
「하지만 왕자님에게는 유산이 있지 않겠어요?」
줄리가 의문을 제기했다. 칼버트는 줄리의 오해를 나무라듯 말을 했다.
「천만에요. 그는 선왕으로부터 아무 것도 상속받은 것이 없어요. 인도 정부가 각지 의 왕으로부터 영토를 사들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대부분의 옛 인도 귀족들은 현재 빈곤에 허덕이고 있죠. 그러나 자이는...그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새로운 세대의 질서에 잘 순응하여 근대사회에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귀족 중의 하나죠. 줄리, 이것은 인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부모한테 받은 유산을 늘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고 살기 위해 땅과 골동품 등을 조금씩 팔아 치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이는 전자에 속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라면 아메리카 인디언 속에 들어가도 성공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추장이 되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요!」
「동감이에요.」
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옳으니까요. 옳은 말만 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드레스는 정말 아름답군요.」
칼버트는 빙그레 웃고 새로운 손님을 맞으러 그 자리를 떴다.
「무척 재미가 있는 모양이군. 도대체 레온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지?」
왕자가 양손에 글라스를 들고 돌아와 있었다.
「사실은 당신 이야기를 했어요.」
줄리가 글라스를 받아들면서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군.」
왕자는 몸을 앞으로 쑥 내밀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가 뭐라고 말했지? 내가 줄리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안달이 나 있다고 말하지는 않던가?」
「아뇨.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어요.」
그녀는 미소지었다.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야.」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밤은 기니까요.」
「아침까지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는걸. 주위에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이 지금처럼 지겨우리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어.」
왕자의 얼굴도 웃고 있었다.
「어머, 그래요?」
줄리가 얼른 맞장구쳤다.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는걸요.」
왕자는 머리를 흔들며 껄껄 웃었다.
「그렇다면 저쪽으로 갈까? 사람들을 소개해 주지.」
왕자는 줄리의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왕자와 줄리 커플은 그날 밤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줄리는 자기들에게 쏟아지는 찬탄의 눈길을 기분좋게 받아들이고, 그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품위가 있었고 대화도 재미있었다.
비록 하룻밤만이라도 일에 대한 것을 잊고, 뜻이 통하는 사람들과 떠들어대면 건강에도 좋겠지.
뉴스룸의 동료들과 어울린 것을 제외한다면, 사업과 관계없는 사람들하고 스스럼없이 대화한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왕자는 유감없이 매력을 발휘했다. 줄리는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와 같이 있으면 자기까지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 이렇게 즐거운 밤을 보내기란 난생 처음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차려지고 디너가 시작된 것은 퍽이나 늦어서였다. 그리고 왕자가 하인에게 차를 준비시켜 달라고 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즐거웠소?」
왕자의 스포츠카는 차의 왕래가 거의 없는 도로를 날을 듯이 질주했다.
「아주 훌륭했어요.」
줄리는 만족감을 한껏 느끼며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열어젖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서늘한 밤바람이 그녀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뉴델리의 더위에는 언제까지나 익숙해질 수 없었지만, 밤바람만은 기분이 좋았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분이 좋군.」
왕자는 이렇게 말했을 뿐, 궁전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전의 철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왕자가 겨우 입을 열었다.
「잠시 걷지 않겠소? 차는 이대로 두어도 괜찮아.」
줄리는 살며시 왕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밤에는 끝까지 사업 이야기는 않고 즐기자는 것인가? 줄리는 혼자 생각했다. 그는 칼버트의 집에서도 사업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줄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여 주었기 때문에 줄리는 생전 처음 남으로부터 소중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네, 좋아요.」
줄리는 크게 머리를 끄덕이며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풀 위만 걸었으면 해요. 하이힐을 벗고 맨발이 되고 싶거든요.」
왕자가 화사한 줄리의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여성의 신발을 볼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마치 걸어서는 안되게끔 디자인되어 있는 듯해서.」
「그건 남성이 디자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줄리는 샌들의 끈을 풀었다.
「자기가 신는다면 이렇게 디자인하지는 않을 테죠.」
왕자는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그는 줄리의 손을 잡아내려 준 뒤 경비병에게 힌두어로 무어라 말했다. 경비병은 차를 가리키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부드러운 풀 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밤중의 하늘에는 별이 무수히 빛나고, 만월에 가까운 달이 떠 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 큰 팜파스 풀이 밤바람에 휘날려, 타조의 깃털마냥 나부끼고 있었다. 줄리는 한 손에 샌들을 들고, 다른 손은 왕자의 손에 잡힌 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인기척에 놀라 퍼득이는 새를 쫓기도 하고, 향기로운 꽃이 어디 있는지 찾기도 하면서 넓은 궁전의 뜰을 거닐었다.
「줄리의 약혼자였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없을까?」
갑자기 왕자가 말했다.
「결혼하기 직전까지 갔었다면서?」
줄리는 걸음을 멈추고 왕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쇼카 호텔에서 식사를 한 날, 프리야에게 할리우드에 대한 것을 질문받고 에디 이야기를 했는데, 언젠가는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그 질문이 나오자 망설이게 되는 것이었다. 에디에 관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 것인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던가... 무슨 일이 있었소?」
왕자는 격려하듯 줄리의 손을 꼭 잡았다.
「이야기하기가 괴롭겠지 ?」
착잡한 마음을 헤아려 주는 것이 고마워 줄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요. 직업이 영화의 스턴트맨이었어요. 최고의 스턴트맨이었죠.」
어찌된 일인지 이야기가 계속 꼬리를 물고 나왔다. 줄리는 에디에 대한 것을 깡그리 이야기해 버렸다. 마치 댐이 붕괴되어 홍수가 지듯이...
오랫동안 뚜껑을 닫아 두었던 슬픔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마음의 정리가 이미 끝난 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그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줄리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깨닫게 되었다. 슬픔에서 재기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왕자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귀만 기울이고 있었다. 슬픔을 잊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모양이다. 줄리는 오랫동안 마음을 억제하고 있었으나, 왕자가 보여 주는 동정과 이해에 힘을 얻어 에디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때 당신이 취한 행동은 정당했다고 생각해, 줄리.」
왕자는 줄리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줄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니까.」
왕자는 말을 끊었다.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줄리는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게는 다행이었어...」
그는 겨우 말을 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줄리를 만날 수 있어서.」
두 사람은 각각 자기 나름의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기만 했다. 줄리는 기쁜 마음으로 황홀해 있었고 그녀의 의식은 주위의 어둠에 싸여 옆에서 같이 걷는 사람에게만 향해져 있었다.
왕자는 길이 갈라진 곳에 이르자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윽고 나직한 관목이 자란 곳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눈처럼 흰 꽃을 하나 손으로 잡았다.
「냄새를 맡아 봐.」
줄리는 흙 위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고 나서 그를 쳐다보았는데 왕자의 정연한 얼굴이 달빛을 받아 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이 사람의 아름다움에 견줄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줄리는 갑자기 눈앞에 황홀한 정경이 전개되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 줄리.」
왕자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을 애써 떨쳐 버리듯이 말했다.
「밤이슬에 젖은 풀을 밟고 있으면 발이 시려질 거야.」
줄리는 왕자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그리고 왕자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자,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어. 꽤 시간이 지난 모양이야.」
두 사람은 잠자코 궁전으로 향했다. 줄리는 왕자의 옆구리에 꼭 붙어 걸었다. 지금은 그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듯이 생각되었다. 도어맨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육중한 문을 열어 주었다.
「저 사람은 밤새도록 자지 않나요?」
줄리가 하이힐을 신으면서 가만히 물었다.
「교대로 경비를 하고 있지.」
왕자는 줄리의 질문이 우스웠던지 가볍게 웃는다.
「24시간 동안 계속 일을 하도록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어머, 저 사람은 경비원인가요?」
「음. 그들은 무기를 감추고 있어.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도어맨이라 할 수 있지.」
왕자는 소름끼치는 말을 태연히 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두 사람은 원형 홀 중앙에서 마주섰다. 왕자는 줄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작은 얼굴을 들여다본다.
「오늘밤은 정말 즐거웠소. 고마워, 줄리.」
왕자가 가만히 입술을 가져왔다. 미풍과도 같은 입맞춤이 끝나자, 그는 사무실이 있는 왼쪽 복도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돌아서서 가볍게 한 손을 들었다.
「그럼, 내일 다시...」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드디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정열의 폭풍에 휩쓸림이 없이, 왕자와 즐거운 한때를 보낸 것이다. 잘 자라는 키스를 했을 때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그러데도 줄리는 가벼운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 아쉬운 것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스칸다라가 손보아 준 침대에 미끄러져 들어갔을 때, 줄리는 문득 운명의 아이러니를 깨달았다.
왕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는데 줄리는 정열에 빠지지 않은 것을 기뻐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좀더 격렬하게 요구해 오지 않은 왕자가 원망스러웠다.
잠이 든 것은 무척 늦은 시간이었으나, 이튿날에는 일찍 눈을 떴다. 동백꽃을 꽂으러 온 스칸다라가 줄리의 이브닝드레스를 들고 자세히 바라본다.
「어제 저녁 이것을 입었었나요?」
줄리가 깬 것을 보고 그녀가 머뭇머뭇 영어로 물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네, 그래요.」
줄리는 하녀의 반응이 우스워 조용히 웃었다.
「서양의 옷은 인도의 사리와 아주 다르죠?」
「네, 이렇게 옷감이 적게 드니까요.」
스칸다라는 실크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고 손질을 한다.
「하지만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요. 어느 옷이건 그 나름으로 장점이 있어요.」
줄리는 환하게 비쳐 드는 햇빛을 즐기기라도 하듯 베개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저... 선물이 와 있는데요.」
스칸다라는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나서 사이드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은제 물주전자와 꽃병 옆에 검정 우단으로 싸인 상자가 놓여 있었다.
「언제 온 거죠?」
줄리는 검은 상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아마 30분쯤 되었을 거예요. 모닝티와 같이 갖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누가?」
줄리는 이때 비로소 하녀가 흥분해서 눈을 빛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벨도 누르기 전에 그녀가 들어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해리가 가져왔어요. 그러니까 아마 왕자님의 명령일 거예요.」
스칸다라는 왕자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며 대답했다.
「어머, 그래요?」
줄리는 가슴의 고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스칸다라, 미슬라 부인께서는 이미 아침식사를 끝내셨나요?」
「아직입니다. 지금쯤 식당에 계시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나도 그리 가겠어요. 그러니까 아침식사를 미리 가져 올 필요는 없어요.」
「차는 어떻게 할까요?」
소녀는 아직도 테이블에 시선을 보낸 채 물었다.
「차를 마시겠어요. 그것이 끝나면 물러가도 좋아요.」
스칸다라가 나간 뒤에도 줄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검은 상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자를 손에 들고 뚜껑을 연 줄리의 입에서 큰 탄성이 나왔다. 빨간 새틴 헝겊 위에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석줄로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하나 따로 목걸이를 삼아도 손색이 없으리라.
줄리는 이렇게 멋지게 디자인된 목걸이를 아직 본 일이 없었다. 줄리는 목걸이를 들어보았다. 햇빛을 받자 보석에서 무수한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보석상자에 작은 카드가 들어 있었다. 눈에 익은 왕자의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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