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 아마도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나를 '킬러'라고 할 것이다... '킬러'... 생각해보면 '킬러'라는 말은 한마디로 '암살자' 라는 얘기인 데... 우리나라... 아니 외국조차도 그 뜻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나이가 어리거나 철이 덜 든 사람들은 나같은 '킬러'의 직업을 동경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 '킬러'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멀리 삼국시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일제 시대만 해도 그 '킬러'의 명맥은 유구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제시대 때는 나라의 독립 을 위해 일본 놈들을 죽인 분들이셨으니 당연히 영웅이시지만... 나같이 같은 동족을 죽이는, 더군다나 일을 하고 나서 그 댓가로 돈을 받는 사 람들은 무슨 이유에서든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덧붙여 생각할 점은 과연 내가 사람들을 얼마나 죽여왔 나 하는 점이다. 솔직이 얘기하면 난 그리 많은 사람들을 죽인 기억이 없다. 기껏해야 해결사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런 일들을 해왔 으니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그리 크게 대단한 일거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누구한테서 돈을 받아 달라 던가 자기가 보기 싫은 사람을 어디 하나 뿌려뜨려 달라는게 고작이었 으니...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꼭 사람들의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킬러'들이 존재 하기는 한다. 물론 아주 극히 드믄 예이기는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물론 메스컴들이 대다수의 사람들을 잘못 생각하게 만드는 건 사실이지만 때로는 그런 종류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실소를 자아내게 하곤 한다. 굳이 킬러가 두꺼운 털모자에 색안경 을 끼고 우유를 마실 필요는 없다. 또 턱수염이 덥수룩할 필요도 없고 한 여름에 까만 바바리를 입을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 들은 그런 옷차림과 행동을 해야 진정한 '킬러'인 줄 알고 있으니 정말 우습다.
진정한 '킬러'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며 -조금의 억지는 있 지만...- 더나아가 꼭 제거되야 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런 일거리만 맏는 프로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내 경우에 있어서도 이 세상에서 꼭 없어져 야하는, 그래야 이 사회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골라 죽이곤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죽일려고 한다. -사실 사람을 죽 인적은 손가락으로 꼽을까 말까 하니까.-
이런 '킬러'라 하더라도 한가지 지론은 있다. 함부로 일을 맡지 않는다 는 것, 그리고 일을 맡았으면 끝까지 처리를 하고 더나아가 일을 맡는 것은 한번에 한명씩이라는 원칙이 있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작업(?)에 들어 가면 아무리 친한 사람이나 가족에게서 연락이 온다고 해도 절대 만나지 않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일거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약속 장소인 한적한 공원 으로 나갔다.
밤 12시의 공원은 뭔가를 느끼게 한다. 삶에 찌든 사람들 아니면 삶이 너무 즐거워서 미치겠다는 사람들(예를 들어 체면 때문에 어디(?)를 가 지 못하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 거의 대부분인 것이다. 나는 내 고 객이 만나자고 한 공원 정문에서 약속대로 세번째 벤취에 신문 두장을 깔고 담배를 귀에 꽂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분... 이신... 가요?"
컴컴한 나무 뒤에서 얼굴에 하얀 마스크를 한 어떤 남자가 겔겔한 목소 리를 하며 불쑥 튀어 나와 내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분..."
그는 내 옆자리에 털석 주저 앉더니 한숨을 '후'하고 길게 내쉬었다.
"저... 요새는 단속이 심해서... 어서 용건만 말씀하시죠..."
나는 경험에 의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쉽사리 일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다그쳐 물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땅만 쳐다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작업을 하시는데 드는 제반 비용이 얼마나 드는 지는 이미 알고 있습 니다. 저는... 한푼도 깎을 생각도 없구요... 다만..."
조금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일을 할때는 으레 돈에 대한 흥정과 또 암살 방법 등을 의논하는데 꽤 오랜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확실히 죽일 수 있죠?" "그럼요..."
젠장... 엉겹결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확실히'라... 글쎄 내가 확실히 일을 처리한게 몇번이나 되었던가...?
"그러면 믿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5일 후 새벽 5시에 영천역...아세요? 조그만 간이역인데..." "뭐, 찾아보면 되겠죠. 계속 말씀하세요"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날 새벽 5시에 그 역에 도착하는 기차에서 내리는..." "내리는?" "저를... 죽여 주십시오..." "예?"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천천히 하얀 마스크를 벗더니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기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저를 고용하다 니... 요?" "그럴 이유가 있죠... 충분한..."
갑자기 머리 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로 이 남자는 제 정 신이 아니라는 생각과 두번째로도... 역시 이 남자는 미친거라는... 세번째도 역시 말할 것도 없고...
"제 얘기를 들어 보실래요?" "참나... 예, 말씀해 보세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더니 한모금 깊게 빨았다.
"제가 그래도 큰 사업을 했었는데... 얼마전에 부도가 났죠... 뭐, 흔한 얘기지만..." "그래요... IMF라던가... 그것 때문에..." "훗.. 어쨌든... 그런데 저야 뭐 그냥 죽어버려도 상관없는데 가족들이 걱정이 되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 나갈지... 그래서 생각 끝에..."
그뒤는 뻔한 얘기일 것 같았다. 영화 같은데 흔히 나오는 내용으로 생명 보험 같은 것을 먼저 들어 놓고 사고나 뭐 그런 종류로 죽은 것처럼 위 장해... 자기 한 목숨 희생해서 가족의 생계수단을 마련해 준다는...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에서는 내 생각과 비슷한 얘기가 흘러나온 후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결국 그래서... 생각다 못해... 흑... 그러니... 저를 죽여주신다면 더없이 고맙겠구요..." "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죠. 저야 뭐 돈만 받으면 누굴 죽이던지 상관은 없읍니다만..." "생각... 많이 해봤어요. 그런데 이 방법 밖에는... 제발... 꼭 제 말 대로 해주세요... 그날 그 역에는 제가 회사 채무자들과 함께 중요한 볼일로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 그들 앞에서 저를 죽여 주시면... 아마도... 그리고... 되도록이면 사고사처럼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구 요..."
아무리 내가 냉혹한(?) '킬러'라고 해도 이런 부탁을 들어 줄 수는 없었다. 세상에 자기가 자기를 죽여달라고 돈까지 주며 부탁하다니...
"그리고 만일 그 자리에서 실패를 하게 되면 여기 제 주소를 적어 드릴테니 이번달 안으로 꼭 저를 죽여 주세요. 이번달 내로 저를 죽여 야 합니다. 꼭..." "선생님, 하지만 이 일은..."
그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을 하기 시작 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 이상한 광경을 누구라도 볼세라 그를 다급히 일으켜 세웠다.
"조... 좋아요. 그러죠... 참나..."
그는 눈물을 훔치더니 억지 웃음을 짓고는 연신 머리를 숙이며 '꼭, 부탁한다.'라는 말을 연발하고는 어두운 공원길을 향해 쓸쓸히 걸어 갔다.
어쨌든 나는 프로다. 비록 그 일이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객과 약속한 이상 프로정신에 입각하여 일을 끝낼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나는 예의 버릇대로 내게 오는 모든 통신 수단과 연락을 끊고 오직 작업을 무사히 끝마치기에 골몰하였다.
그가 원한건 간이역에서 사고사처럼 보이는 것이니 만큼 그에 알맞는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원체 돌아가지 않는 머리라 -그 전 까지는 대체로 칼이나 독약 같은 걸로 간단히 일을 처리했는데...- 기발 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를 쥐어짜고 삼일을 밤샌 후에야 겨우 한가 지 방법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나의 고객과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이 기차에서 내린다고 했으니... 더욱이 새벽의 간이역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결국 그날 내가 강도로 위장해 기차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다가가 칼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하다가... 실수로 나의 고객을 죽이는 방법만이 떠올 랐다.
내가 생각해도 삼일 동안 고심한 것치고는 너무 엉성했지만 날짜가 바 로 내일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그와 약속한 날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그일을 말끔히 처리해 버 려야 하기에 전날밤부터 그 간이역을 맴돌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일이 잘못되면 내가 도망갈 길목까지 파악을 해두며...
드디어 약속 시간인 새벽 5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플랫포옴 벤치에 애써 느긋한척 기대고 앉아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다. 새벽의 싸늘한 바 람이 등에서 느껴질 때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한푼만 보태줍쇼...예~~"
전형적인 거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에 자세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어? 넌...?"
남루한 옷차림의 거지도 내 얼굴을 알아 본 듯 잠시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거지는 꽤나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세상에... 너, 어떻게... 이렇게 까지..."
동창 녀석은 수줍은 듯 미소를 한 번 짓더니 말했다.
"다, 살다보니... 어쩌다 이렇게 됐다. 넌 잘 지냈냐?" "나야...뭐.. 그런데..." "그래... 나보다 형편이 나은 것 같구나. 그럼 한푼만 적선해라."
그때 멀리서 기적 소리가 들리며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 다. 나는 엉겁결에 주머니에서 돈을 잡히는 대로 꺼내 동창녀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기차가 들어오는 쪽으로 갈려는 찰나 동창 녀석이 내팔을 꽉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동창 녀석을 보는 순간 번쩍이며 날카로운 무엇이 새벽 공기 를 가르는 소리가 '휙'하고 들렸다.
"으... 윽!"
배에서부터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다음 순간 그 날카로운 것이 가슴 쪽으로 옮겨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악!!!"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이렇게 서글픈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헐떡이는 내 귀에는 동창 녀석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이... 친구 미안하네... 너에게 의뢰한 고객이 오늘 이 일을 취소 하고 싶다고 나에게 말하더군. 며칠동안 자네에게 별별 연락을 다 했다 는데... 도저히 연락이 안된다고..." "무... 무슨..소리야..."
간신히 힘을 주어 얘기를 하는데 다시 한번 목언저리가 뜨끔해지며 눈앞 으로 나의 붉은 피가 흘러 나오는 것이 보였다.
"너한테 의뢰한 고객이 이젠 죽을 필요가 없어졌다네... 왜냐하면 내가 그의 마누라를 어제 죽여 버렸거든? 그녀도 생명보험에 들어 있었는데... 참... 얘기 안했지? 나, 한때는 잘나가던 '제비'였어... 그래서... 그의 마누라가 언젠가 나와 놀아날때 이런 저런 얘기를 다 하더군. 자신이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죽게 만들테니 자기와 함께 살자고... 며칠전에 그 얘기를 남편... 그러니까... 너의 그 고객에게 했더니 그가 나보고 그녀를 없애 달라고 부탁하더군... 보험금을 반씩 나눠 갖자고 하면서 말이야...." "이... 이런... 젠... 장..."
나의 희미해지는 머리 속으로 동창 녀석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어왔다.
"후. 후. 후. 어쨌든... 너의 고객은 자신을 한달 동안 쫓아다니며 목숨을 노릴 네가 두려워 진거지. 그래서... 내게 너를 없애달라고 웃돈 까지 얹어 주더라고. 훗... 십년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과 이렇게 이별을 하게 될 줄이야. 미안하네... 그나저나 나도 이제는 직업을 바꿔야겠어... 여자나 후려 먹는 '제비'말고 좀 더 근사한 '킬러'로 말이야... 무엇보다 도... 이쪽이 더 짭짤하더라구... 하. 하.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