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먹을 각오하고 쓰는 민족사학 비판(6) - 왕과 황제

백승길 작성일 07.01.25 06: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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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이 범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우가 한가지 있습니다. 이른바 주류 사학을 사대주의라 비난하면서도 그들이 오히려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이번엔 그러한 민족사학의 어긋난 사대주의를 말해볼까요?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이 있지요. 한 나라의 역사를 서술할 때는 그 나라가 처해있었던 상황과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특수성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언어 문제지요. 특히나 언어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혹은 알고 있는 언어로 번역을 해서 보아야하는 만큼 그 미묘한 차이는 심각한 오해까지 불러올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왕과 황제, 군주 이들 셋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스리는 영토의 차이? 그냥 지위의 차이? 사실, 이들 세 용어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적어도 역사 속에서 사용되는 ‘용어’로써는 전혀 차이가 없지요. ‘용어’가 아닌 고유명사로써는 많은 차이가 존재할 수 있지만, ‘한 나라를 지배하는 자’라는 정의로 구분지을 수 있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러시아의 ‘차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독일의 ‘카이저’, 그리스, 비잔티움의 ‘바실레우스’, 영어권의 ‘킹’, ‘엠퍼러’, 이슬람의 ‘술탄’,‘칼리프’ 일본의 ‘덴노(천황)’, 신라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등... 이러한 다양한 왕호는 때로는 왕, 때로는 황제, 때로는 군주 등등 다양하게 번역됩니다. 그러나 이들을 왕, 황제, 군주로 번역해야 한다는 특별한 규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황과 주관에 따라 왕이 되기도, 황제가 되기도 하지요. 이슬람권의 술탄, 칼리프는 아예 번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수한 지배자이기 때문이죠. 일본의 쇼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예를 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나라, 특히 민족사학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고구려가 이러한 언어유희 속에서 농락당하고 있기 때문이죠.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민족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왕’들을 ‘제’로 승격(?)시켜 버렸습니다. 그것이 승격인지도 논해야 할 문제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의 왕을 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스스로 사대주의의 늪에 빠져든 것입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명백하게 군주의 칭호를 서열 매겨 규정짓고 있죠. 군, 백, 후, 공, 왕, 제의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칭호의 서열은 어디까지나 중화라는 문화권에서나 통용되는 서열입니다. 그렇다면, 저 민족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중화에 맞서 싸운 위대한 제국이라 소리높여 주장하면서 중화 문화권에 복속되어있었다는 증거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죠. ‘광개토대왕? 너무 격이 떨어져. 광개토대제로 하자!’ 음... 격을 따지다가 사대주의의 늪으로 빠져든 셈이죠.

위에서도 말했지만, 언어라는 것은 그 나라의 특수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고구려에서 왕이라 칭했다 한들 그 실질적인 형상이 ‘제국’이면 그 군주 역시 ‘황제’인 것이죠. 고구려는 ‘우리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며 왕(또는 태왕)을 칭한 것이며, 언어의 특수성으로 우리는 저 ‘태왕’을 위대한 칭호로 받아들여 뽐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우매한 민족사학자는 스스로 사대주의의 늪에 빠져 우리 고유의 칭호 ‘태왕’을 버리고 ‘황제’로 오역(?)해버린 것이지요.

이것 외에도 민족사학이 우리나라 짱!!을 외치면서 오히려 우리나라의 품격을 높인답시고 중화의 법도를 따라버린 경우는 많습니다. 고조선의 단군을 단제로 승격시킨 경우도 그중 하나지요. 고조선의 ‘단군’이 왕호인지 아니면 고조선의 군주중 하나를 일컫는 고유인명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민족사학들이 말하는 대로 그것이 왕호라면, 역시나 그들은 품격을 높인답시고 고조선의 군주를 중화의 황제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됩니다. 왜 그들은 순수한 눈으로 역사를 보지 못할까요? 오로지 높게, 위대하게를 추구하다가 스스로 늪에 빠져드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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