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킥. 역시 시골에 오면 수박서리는 기본이지."
"알았으니까 빨랑빨랑 따."
친구와 무전여행을 하면서 잠 잘 곳을 찾다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다. 마을 이름이 '서리'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신나게 깔깔 댔다. 꼭 우리보고 서리를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이곳 사람들에게는 고맙지만 밤새 뱃속을 두드리는 거지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딱 한통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이거 줄기가 질겨서 잘 안 끊어진다. 칼 없어?"
"칼이 어딨어! 그냥 뜯어. 사람 올 것 같단 말야."
"자식! 보채기는."
내가 처음 따봐서 그런지 원래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 질겼다. 손톱을 이용해서 간신히 수박을 품안에 안을 수 있었지만 손톱이 전부 부러진 느낌이 들었다. 수박밭은 정말 만화나 영화에서만 보던 원두막도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던 난 원두막을 볼 기회는 없었다. 우리가 수박을 들고 원두막을 막 지나칠 때 노란불빛이 원두막쪽에 비췄다. 수박밭 주인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우리는 무작정 뛰었다. 불빛은 흔들리면서 꾸준히 우리를 비치고 있었다. 만약 우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 사람들의 눈총을 엄청 받게 될 것이다. 수박 때문에 속도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수박을 버리지는 않았다. 계속 뛰다보니 커다란 나무숲이 보였다. 일부러 그렇게 키우는지 똑같은 종류의 나무가 넓게 퍼져 있었다. 우리는 그쪽으로 가서 한참 들어갔다. 그리고 구부려 앉아서 우리가 달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불빛을 보며 불만을 터트렸다.
"아, 이깟 수박 한통 갖고 끈질기게 쫓아오네."
난 크게 말하지 않았다. 괜히 여깄다고 알릴 필요는 없었다. 수박밭 주인이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도 들렸다. 소리가 가슴팍까지 왔을 때 주인이 무언가 중엉거렸다.
"에이! 개자식들.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낫으로 손모가지를 잘라버릴테다."
그 말이 어찌나 현실적으로 들렸는지 나도 모르게 손목을 어루만졌다. 욕을 실컷 뱉고서야 다른곳으로 갔다. 불빛이 완전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걸음 걷는데 갑자기 검은 물체가 내 몸을 위협했다.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뭐지? 금방 지난간 거 뭐야?"
"뭐가 지나갔다는거야. 빨리 가기나 해. 한참 뛰었더니 목이 되게 마르다. 빨리 가자."
"아, 알았어."
다시 한걸음 걷자 그 검은 물체가 다시 위협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수없이 위협을 했다. 희수도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대처능력이 없었다. 파닥파닥 날개짓하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걸 보니 새같았다. 예전에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가늘고 긴 나무숲에 새들이 꼭대기에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나무도 가늘고 긴 나무였다. 새들은 우리들 주위를 파닥거리며 날아다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포는 더욱 강했다.
"어쩔 수 없어. 빨리 밖으로 뛰어!"
난 희수에서 이렇게 소리치고 밖으로 뛰었다. 별로 안 들어 온 것 같은데 막상 위급한 상황에 처해 나가려니까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기어코 나무숲에서 나왔고 뒤이어 희수도 나왔다. 그래도 내 손에는 수박이 들려져 있었다. 이 수박 때문에 더러운 짓까지 겪고 나니 수박 먹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멀리서 나무숲을 보니 새들은 그 위를 날고 있었다. 더러워진 옷을 보니 짜증이 났다. 방으로 돌아와 수박을 한쪽 구석에 놓고 엎어졌다.
"수박은 좀있다 먹고 일단 잠이나 자야겠다. 오늘 별일 다 겪네."
나는 이렇게 말하고 곯아 떨어졌다. 꿈속에서도 새들이 날 공격하는 꿈을 꿨다. 그런데 끔찍하게도 새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었다. 힘껏 날면서 울부짖고 있었다. 너무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희수도 동시에 일어났다. 한참 악몽에 시달리니 목이 말랐다. 시계를 보니 2시가 조금 안되었다.
"일어났냐? 목도 마른데 수박이나 먹자. 내가 칼 가져올게."
가방에 있는 휴대용칼로는 수박을 자를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 부엌에 있는 식칼로 자를 생각에 부엌으로 갔다. 이 마을의 부엌들은 대부분 가마솥이 있는 옛날 부엌이었다. 너무 어두워서 한참 후에야 칼을 찾을 수 있었다. 칼을 들고 오자 희수는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타박을 했다.
"쟁반이 없는데.. 그냥 하지 뭐… 나중에 걸레로 닦으면 되니까."
희수는 수박을 가운데 놓고 칼로 수박에 흠집을 냈다. 껍질이 어찌나 단단한지 웬만한 힘가지고는 도저히 자르지 못했다.
"이 수박은 줄기도 엄청 안 끊어지더니만 껍질도 엄청 단단하네. 단단하니까 맛은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쉽게 잘라졌다.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잘라져서 시소처럼 왔다갔다 하는 수박을 보니 깜짝 놀랐다. 빨갛게 먹을 수 있는 부분은 딱 반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흰색부분이었다.
"무슨 수박이 이러냐… 아직 다 익었나? 이런거 어떻게 먹어."
"어떻게 먹긴!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 반은 먹을 수 있는 부분이잖아. 내가 잘 발라 줄테니 넌 앉아서 먹기만 하면 돼."
희수는 내가 들고 있던 칼을 뺏더니 솜씨좋게 빨간색 부분을 잘 발라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잘랐다. 수박은 생각보다 달고 맛있었다. 물도 많았다.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희수가 분위기를 깨는 말을 했다.
"아까 나무숲에 있을 때 수박밭 주인이 한 말 기억나?"
"어, 그런데 왜."
"그 말 진짜일까?"
"진짜든, 가짜든 우리가 한 줄도 모를텐데 어떻게 하냐! 잔소리 말고 수박이나 먹어."
"낮에 우리랑 처음 만난 할아버지가 한 말 기억 안나?"
그러고보니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한 할아버지와 대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하루 묵을 수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잘 수 있는 곳이야 많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젊은이들이구먼. 여기는 워낙 촌이라 젊은애들은 다 떠나고 다 늙은이뿐이지."
소름이 돋았다.
"어떡해! 지금이라도 말할까?"
"야! 설마 수박좀 훔쳐먹었다고 죽이기야 하겠냐. 뭐라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면 되지."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수박 한통 아니, 반통을 전부 먹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아까보다 더 심한 악몽을 꾸었다. 안개가 빽빽하게 낀 거리에 내가 걷고 있었다. 안개는 피로 만든 안개여서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꿈속에서 냄새를 맡았는지 모르겠지만 목구멍까지 타오르는 피비린내였다. 나는 이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했다. 멀리서 살려달라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금 뭔가 벌어지고 있는게 분명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희수는 내 몸을 흔들며 날 깨웠다.
"왜? 벌써 깨우고 난리야!"
"그만 자고 이것좀 봐. 어제 우리가 먹었던 수박이……"
몸을 일으켜 수박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우리가 밤에 먹었던 수박껍질이 아닌 사람의 머리가 반이 갈라진 체 핏물이 방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이게 뭐야! 왜 이런게 여기 있어?"
"모르겠어. 나도 금방 일어났는데… 어제 우리가 먹은게 수박이 아닌가봐."
"그럴 리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제 분명히, 분명히. 젠장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먹은 것이 수박이라는 것이다. 수박일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달고 맛있었는데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의 머리를 먹으면서 달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빨리 짐 챙겨. 이곳을 벗어나야해. 얼른!"
"어떻게 하려고…"
"닥치고 빨리 짐이나 챙겨. 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단 말야. 빨리 챙겨."
우리는 그렇게 급하게 집 밖으로 나왔다. 집 밖으로 나온 난 크게 놀랐다. 애초부터 많지 않았던 집들이 폭삭 내려앉아 그 형체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밤새 잤던 집도 몇 십년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처럼 거미줄이 집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을을 빠져나오다가 나무숲이 있는 곳을 봤는데 나뭇잎은 전혀 없이 그 위로 까마귀떼가 날고 있었다. 그 앞 수박밭은 황폐지고 원두막은 무너져 있었다. 이런곳에 단 1초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을 입구에는 서리라고 쓰여있는 나무로 만든 간판이 너덜너덜거린 채 막대기에 걸려 있었다. 여행은 일단 포기하고 미친 듯이 집에 가는 차를 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2>
희수와도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누군가 만나거나 밖에 나가면 귀신들이 날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수박을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 목구멍속에 뭔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났다.
"상훈아, 너 요즘 왜 그래? 여행도 빨리 갔다 오더니 얘가 왜 그래?"
방에 처박혀 잘 나오지도 않자 엄마는 걱정이 됐나 보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여행하다가 들렸던 마을에서 귀신에 홀려 이렇게 됐다고 말해야 하는지. 과연 그걸 믿어 줄련지.
"엄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정말 거짓말이 아니니까. 내가 희수랑 여행하면서 잠 잘 곳을 얻으려고 어떤 마을에 들어갔어. 그러니까 거기서 수박을 훔쳤는데 그게 사람 얼굴이 되었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집들이 다 무너져 있어서……"
"뭐라고 그러는거야? 차근차근 말해야 이 엄마가 무슨 얘기인지 듣지."
"아! 그러니까 그 마을이 귀신에 홀렸다고. 나 너무 무서워. 귀신들이 날 죽일거야. 어떡해. 나 정말 그거 수박이었어."
"얘가 정말 이상하네. 피곤해서 그래. 어서 방에 가서 푹 쉬어. 엄마가 저녁에 너 좋아하는 전복죽 사다줄게."
역시 믿지 않는다. 나같아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방안에 들어가서 오지도 않는 잠을 일부러 찾았다. 방에는 오래된 탁자시계가 있었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시계다. 워낙 오래되서 시간이 잘 맞지는 않지만 애착이 가는 시계다. 책상 위에는 6인치짜리 텔레비전이 있다. 흑백에다가 채널도 한 개밖에 안나와서 이용하지는 않는 텔레비전이다. 이제 깨달았는데 내 방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다. 일제시대의 우표도 있고 엄마의 초등학교 교과서도 있다. 언제부터 이런 물건들이 내 방에 놓였는지 모른다.
저녁에 전복죽은 생각보다 맛있지 않아서 몇숟갈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문득 이 얘기를 인터넷에 올리면 누군가 이것의 대해 알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길로 바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인터넷커뮤티니에 들어가 거짓없이 솔직히 글을 올렸다. 강원도에 위치한 '서리' 라는 마을에 대해 검색도 해봤다. 그러나 제대로 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서리라는 마을에 대한 정보만 찾는다면 해결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런 자료나 글을 올리때면 그 순간만은 공포에서 벗어났다. 오랜만에 희수에게도 전화해서 자료를 찾아보라고 얘기 해주기도 했다. 그러던 며칠이 지나고 나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상훈씨 전화가 맞나요?"
"네, 그런데 누구시죠?"
"전 최혜영이라고 합니다. 이상훈씨와 뭔가 대화하고 싶어서 이렇게 전화했습니다. 일단 만어디서 만나죠. 장소는 상훈씨가 정해주세요."
나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여자였고 다짜고짜 대화를 하자며 만나자고 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고 주위에 아는 여자도 별로 없어서 나에게 이런 장난 칠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제가 그쪽이 누군지 알고 만나요."
"인터넷에 서리에 대해 올리셨죠? 그것에 대해 얘기 하고 싶군요. 물론 거절하시진 않겠지요? 그럼 내일 만날까요?"
"지금 당장 만납시다. 어디든 갈테니 편한 장소를 말해주세요."
마음이 급했다. 약속장소를 받고 밖으로 나가면서 희수에게 전화를 해서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아무래도 희수도 나와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을테니까…….
<3>
혜영이라는 여자는 약속장소에 미리 나와있었다. 희수도 곧 약속장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서로 간단히 인사하고 내가 말을 먼저 꺼냈다.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아셨죠?"
"개인정보를 통해 봤어요. 그건 그렇고 사리에서 겪은 일이 정말이신가요? 제가 옛날에 사리라는 마을에 대해 책에서 찾아봤거든요. 아주 짤막하게 나와있어서……."
"예, 정말입니다. 가족들한테 말해봤는데 믿어주지를 않았어요.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네요."
혜영은 내게 글이 적혀 있는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사리의 대한 내용이예요. 글의 내용이 별로 안되서 이해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사연이 있는 마을이죠. 자세한 것은 더 조사해보면 나오겠지만 일단 뭔가 있는 마을에는 확실해요."
종이에는 사리라는 마을이 50년대 이전에 없어졌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희수에게 종이를 넘겨줬다.
"어떻게 50년이 되기도 전에 없어진 마을의 자료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거죠? 아니, 이거 정말 헷갈리네요. 귀신들의 마을이라는 말인가요?"
난 혜영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녀도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보다도 왜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지 그게 더 궁금했다.
"상훈씨와 희수씨가 그런일을 당했다는 것에 흥미를 두고 있어요. 물론 당한 것이 즐겁다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사라진 마을에 들어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거요. 조만간 서리에 같이 가봐요. 전 어딘지 잘 모르거든요."
흥쾌히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 끔찍한 마을에 다시 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 같이 들렸다. 그 자리에서는 말하지 않고 집에가서 생각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고 집에 왔다. 약속장소에 집과 거리가 멀어서 밤 늦게 집에 초인종을 눌렀다. 그런데 현관앞에 서면 켜지는 불이 안 켜졌다. 고장이라고 생각하면 단순하지만 이것조차 공포가 엄습해왔다. 문이 열리면서 흉악하게 생긴 악마가 나왔다.
"이 바퀴벌레같은 새끼야. 얼른 너의 심장을 내놓아라. 너의 머릿통을 잘근잘근 씹기전에 따뜻한 심장을 내놓으란 말이다."
난 뒷걸음질을 쳤다. 대리석바닥에서 썩은내가 풍기는 손이 불쑥 튀어나와 내 발목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엉덩방아를 찍고 비명을 질렸다. 살려줘.
"상훈아! 상훈아! 너 왜 그래? 얘가 기절했나봐. 여보! 어쩜 좋아. 상훈아!"
희미하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난 어둠속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4>
정신이 돌아와서 엄마를 가장 먼저 찾았다. 내가 얼마나 기절하고 있었나 알아봐야 했다. 엄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까 약간 놀란듯 했다.
"엄마!"
"일어났구나. 엄마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 지 알기나 해?"
"그건 그렇고. 나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 나한테 전화 온 거는?"
"두시간쯤 정도 된거 같은데.. 전화 온 것도 없었어. 어여 가서 쉬어."
무언가 이상했지만 쉽게 그걸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방 안에 들어가서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얼른 마음속에 엉킨 끈을 풀고 싶었다. 분명히 어딘가 이상한 곳이 있었다. 계속 생각을 하다가 가위로 끈을 끊어 버렸다. 내가 그 혜영과 만나서 집으로 왔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두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날이 밝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심장은 주체 할 수 없도록 뛰었다. 문을 약간 열고 엄마를 봤다. 엄마는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있었다. 뇌리가 스쳤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는 아들이 기절하면 병원에 신고부터 할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기절을 했는데도 방 안에 옮겨 놓았다는 것은…, 온몸이 저려왔다. 장미가시가 나를 둘러싸고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거실에 있는 여자가 우리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진 것은 눈을 마주쳤을 때였다. 연쇄살인마의 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자의 눈에서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을 마주쳤을 때 알 수 없는 본능으로 뒷걸음질 쳤다. 여자는 내 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문을 잠그고 기대었다. 잠시 후 잠긴 문고리가 전부 돌아가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얘야, 문좀 열어줄래? 엄마가 너 열좀 있나 보려고 그래. 얼른, 응?"
"아니야! 당신은 엄마가 아니야. 누구지? 꺼져!"
"무슨 소리야! 나는 너의 엄마가 맞다. 당장 이 문을 열거라. 안 그러면 엄마 정말 화나."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문고리는 부숴질 듯 흔들렸다. 내 방에 찾을 수 있는 무기는 없었다. 계속 흔들리는 문고리가 순간 멈췄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듯 뛰는것이 느껴지는데 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방이 흔들렸다. 매우 거칠게!
그것은 꿈이었다. 아빠는 나를 업고 택시를 잡고 있었다. 슬며시 눈을 떠서 옆에서 다급하고 흥분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를 봤다. 안심이 되었다. 갑자기 살갗이 찢어진 귀신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 지나갈 택시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길에 나가서 차가 오는지 수없이 살폈다.
"아빠. 나 정신차렸어. 그냥 집에 가자."
어떻게 그렇게 긴 말을 해냈는 지 신기했다. 기력이 없어 아빠 등에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5>
다음 날 혜영과 희수를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가지 말라는 엄마를 달래놓고 온 것이라 더욱이 화가 났다. 서리라는 마을이 어떤 마을이던간에 나를 왜 이리도 괴롭하는 지 몰랐다. 버스를 타고 서리를 가는 도중 창문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을 입구에 서니 착찹한 마음이었다. 서리라고 어설프게 한글로 써있는 팻말이 이젠 아예 땅에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