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의 생김새는 변함이 없었지만 서리가 내뿜는 살기는 금방이라도 커다란 도끼를 집은 수박밭 주인이 내 몸둥아리를 반으로 쪼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리는 거대한 핵폭탄을 맞아 사라진 마을처럼 그 형체를 거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풀조차 자라지 않는 논두렁, 썩어빠져 파리가 날아다니는 수박밭, 그리고 무너진 원두막. 집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정말 사람을 봤다고요?"
혜영이 믿어져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렇다, 라고 밖에 달리 말할 게 없었다. 혜영의 놀란 표정은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마을 깊숙이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길에 수박밭 근처에 있는 나무숲에 가보았다.
"이곳에 무슨 새 같은 게 막 날아 다녔어요."
나무는 잎이 없이 앙상하고 길쭉이 뻗어있었다. 그 수도 거의 부러져 숲의 끝이 보일 정도 였다. 나는 다시 그 상황을 떠올렸다. 거침없이 욕을 하는 수박밭 주인, 나와 희수의 몸을 위협하던 새들, 수박은 결국 사람의 머리. 끔찍했다.
우리는 서리를 빠져나오면서 다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들어올 때는 발견하지 못한 탄피를 발견했다. 언뜻 봐서는 어떤 총의 것인지는 몰라도 혹시 모를까 주머니 속에 넣었다.
"혜영씨, 어때요?"
"제가 저번에 보여드린 자료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요."
"50년 전에 없어져다는?"
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50년전을 말하면 55년이다. 55년에 일어난 일과 이 마을이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서울에 가면 바로 도서관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달 소리를 내는 버스가 불안했는지 가끔 운전기사가 수박밭 주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살인적인 웃으면서 백미러로 통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나를 죽일 수 있는 어떤 무기가 들어 있다. 나는 진저리를 쳤다.
"왜 그래?"
희수가 내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푹 쉬고 싶다."
나는 도서관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잊었다.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그런 거 알아보려면 인터넷이 훨씬 빠르고 편할 테니 굳이 도서관에 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느새 생각이 바뀐 것이다.
달달거리는 버스가 내는 소리가 뚝 멈추었다. 운전기사는 어떤 못된 꼬마가 깔아놓은 못때문에 타이어가 터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를 갈고 있었다. 앞문과 뒷문을 열더니 앞문을 통해 밖으로 급히 나갔다.
"아무래도 타이어가 터졌나 봐."
내가 말했지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희수와 혜영을 보니 모두 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는 피곤한 것 같지 않더니만. 꽤 피곤했구나."
희수와 혜영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졸음이 왔다. 어차피 타이어가 터졌으면 고치는 것도 꽤 오래 걸릴 듯 하니 한동안 잠에 빠져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아함." 하품을 크게 하며 눈을 감았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누군가 커다란 바늘로 눈을 계속 찌르고 있는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꿋꿋이 눈을 감고 잠을 청해봤지만 그럴수록 고통은 심해졌고, 눈 속의 검은 세상이 핏빛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아 반사적으로 눈가죽을 만져봤을 때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바늘이 내 눈 깊숙이 꽂아져 있어 눈이 떠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것을 알고 나니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갈등을 했지만 내 눈에 꽂힌 바늘을 하나씩 빼기로 했다. 하나를 잡고 잡아 아주 살짝 잡아 당겼지만 뽑아지지 않았다. 그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바늘을 잡은 손이 떨림에 바늘이 떨려 내 눈알을 후벼파고 있는 고통을 받아 쉽게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어떤 개새끼가 이딴 짓을 했지? 설마 희수나 혜영이?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젠장! 그 미친 새끼가 분명해. 희수와 혜영도 분명 이럴 거야."
소리를 질려야 하는데 낙지 발이 목구멍에 가득 달라붙은 듯 소리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의 바늘을 쭉 뽑아 내었다. 눈에 구멍이 뻥 뚫린 느낌이 나면서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계속 해서 열 개정도 되는 바늘을 모두 뽑아 냈다. 천천히 눈을 떠 앞이 보이나 확인을 하고 얼른 옆자리에 앉은 희수와 혜영을 봤다. 예상했던 대로 나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희수와 혜영도 목소리가 안 나오는 지 입을 머물거리며 온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구더기가 그러는 것 같았다.
"기, 기다려. 내가 금방 빼줄게."
나는 혜영앞에 가서 바늘을 잡아 뺐다. 혜영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내가 세계쯤 뺐을 때 혜영의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듯 겁이 났다. 계속 꿈틀거리던 혜영은 벌써 몸이 축 처져 있었다. 그때 탕탕탕-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봐서 그 소리의 이유를 살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운전기사가 뒷문을 통해 올라와서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일어나! 다 왔어."
희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 허우적 됐다.
"꿈이었구나. 너무 기분 나쁜 꿈이었어."
"니가 요즘 너무 허약해져서 그래. 좀 마음 좋게 생각하라고."
"응. 고맙다. 그런데 혜영씨는?"
내가 이렇게 묻고 주변을 살폈을 때 믿어지지 힘들만큼 빠른 시간이 나도 모른 체 흘러왔었다. 철컹철컹- 철도를 달리는 지하철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와 방향이 다르잖아. 아까 헤어졌지."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말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희수에게 인사를 하고 문 앞에 섰다. 어둠이 지나고 불이 켜져 있는 역에 도착하고 문이 슥 열렸다. 왠지 아까 꾸었던 꿈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꼭 희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희수는 나를 향해 손짓 한번하고 고개를 숙였다. 희수도 꽤 피곤한가 보다. 꿈속에처럼.
집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단골 포장마차에 들려 소주를 시켜 마셨다. 내가 이곳에 다닌지도 고등학교부터 다녔으니 꽤 오래 되었다. 그때는 야자를 끝마치고 배고픔에 떡볶이랑 튀김을 범벅해서 먹곤 했었다. 튀김을 한, 두개 덤을 주던 아주머니는 어느 새 늙어 있었다. 소주병을 모두 비우고 한 병 더 마실까 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 잠에 빠졌다. 아까와 같은 끔찍한 꿈은 꾸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다가 엄마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옅은 잠이라 아까부터 엄마가 나를 깨우려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 눈을 감고 싶었다. 엄마는 전화소리가 들린 후에 나를 깨우고 시작하고 있다. 아마도 전화가 나와 관련된 것일 것이며 웬만하면 좀 있다가 전화하라고 할 엄마가 나를 이리도 급히 흔들어 깨우는 걸 보니 분명 급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눈을 뜨기 싫었다. 그러나 엄마가 어떤 한 말이 나를 눈뜨게 만들었다.
"희수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곧바로 희수가 있는 병원으로 갔다. 운전을 배워두지 않은 게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택시는 또 더럽게 잡히지 않아서 병원쪽 방향으로 뛰어가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다행히 희수는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었다.
"놀랬잖어.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다리에 붕대를 둘둘 감고 받침대에 올리고 있는 희수에게 따지듯 말했다.
"어제 지하철에서 내리고…."
얼굴에 타박상 때문에 시원하게 말을 하지 못했지만 끝끝내 내게 들려준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역 입구에 나오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떡같은 거 팔고 있더라고. 맛은 없어 보였는데 워낙 불쌍해 보여서 사줬어. 무지개떡이 그나마 맛있어 보여 그걸 사고 있을 때 차가 날 친 거야. 다리가 부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겠고 허리를 들어 할머니를 찾았는데 온데간데없었어."
"차는? 널 친 그 차 주인은 어딨는거야?"
"뺑소니야."
"번호는 봤지? 번호가 뭐야?"
"못 봤어. 그때는 너무……."
"미쳤냐? 왜 그걸 못 봐? 아, 미친 새끼! 그딴 새끼들은 잡아서 콩밥좀 먹어야 한다고. 다 죽여 버려야해. 개자식들."
"너 왜 그래? 난 괜찮으니까 괜히 흥분하지마."
너무 흥분해버린 탓을 희수에게 돌린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지만 괜히 희수가 미워졌다. 혜영도 어떻게 알았는 지 병원에 찾아왔다. 혜영도 매우 놀랐다며 급하게 왔다고 말했다. 혜영과 휴게실로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말을 나눴다.
"아무래도 서리 때문에 이러는 게 확실해요. 뭔가부터 이상하잖아요."
"저도 계속 찜찜하네요."
"희수가 본 할머니가 귀신이라면 확실해요. 서리에 대해 빨리 알아봐야겠어요. 도와주실 거죠?"
"물론이죠."
커피는 빨리 식었다. 나는 희수가 있는 병실로 가서 몸관리 잘 하라고 말하고 혜영과 병원을 나왔다. 벌써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도서관에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고 혜영의 집에서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