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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의 집은 천장까지 있는 여러 책장속에 빼곡이 박힌 책 때문에 정말 도서관 같았다. 자정이 넘도록 마신 커피가 네 잔이 넘었지만 졸음이 밀려왔다.
"아함."
두꺼운 책을 빠르게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왔다.
"졸리세요?"
"네, 조금요."
"그럼 주무세요."
"어떻게 저 혼자 자요. 더 할 수 있어요."
거짓말이었지만 도움 받는 처지에 혼자 잘 수는 없었다.
"괜찮아요. 저는 어차피 밤을 자주 새니까. 그리고 저도 좀만 하고 잘거에요. 그러니 신경쓰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혜영은 고맙게도 잠을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신의 침실을 내주었지만 차마 그곳에 잘 수 없어 거실 소파에 누웠다. 누워서 찾아본 자료들을 생각해보려 했지만 도저히 자료가 없어 생각 할 수도 없었다. 55년도와 관련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서리와 관련 될 만한 사건은 전혀 없었다. 혜영의 집보다 도서관에 가면 더 많은 것을 찾아 볼 수 있겠지만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문득 혜영의 직업이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혜영의 대한 것은 그저 나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으로 밖에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계음이 길게 나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떠 눈이 부신 적이 거의 없는지라 거실을 가득 채운 아침햇살이 어색했다. 촛점도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채 소리의 행방을 찾아 바라봤다.
"지금 일어났어요?"
"아, 네에."
커피향이 물씬 풍겼다.
"한잔 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어제 하두 마셔서…. 그런데 자료는 찾아봤어요?"
혜영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고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한동안 말없이 나와 혜영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혜영이 마치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이 감탄사를 냈다.
"무당한테 한번 가보는 게 어때요?"
토요미스테리나 괴담의 대한 실제이야기를 방영해주는 프로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던 무당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은 그저 지어낸 이야기나 실제 이야기라도 귀신을 보고 뭐라고 지껄이는 것을 굉장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찬 밥을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혜영의 보채임에 할 수 없이 당장 무당에게 가서 지금까지 있던 일들을 모두 얘기해서 조언을 받아보기로 했다.
"아주 기가 쎈 놈이 붙었구만.."
"네? 무슨 말인지…."
"악귀가 붙었단 말이야! 이 놈이 본심은 악한놈이 아닌데 한이 들었어. 이거 보니 음.. 한두놈이 아니구먼. 아주 오래된 악귀야!"
무당은 왼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딱딱 치면서 어중있게 말했다. 무당은 늙은 노파였는데 어디에서나 무당이라고 하면 모두 믿을 것 같았다. 얼굴은 하얀색 분으로 얼굴의 색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입술도 진한 보라색으로 색을 칠했다. 꼭 금방 죽은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고 나타난 저승사자를 보는 듯 해서 섬뜩했다. 무당의 말에 의문이 생겨 반론을 하려 할 때 무당이 말을 가로채서 먼저 말을 했다.
"그런데… 자네, 친구 말이야. 지금 병원에 있다고 했지?"
"예. 그리 큰 부상은 아니고 다리만 다쳤는데 금방 퇴원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이 귀는 아무에게나 달라 붙지 않아. 우리가 말하는 처녀귀신처럼 한이 맽혀 있단 말이지. 그런데 왜 친구에게 달라 붙었냐 이 말이야."
무당 입가의 주름들이 말을 할 때마다 들썩거렸지만 무당이 내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위협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혜영도 그 마을에 갔지만 희수랑 나처럼 악몽을 꾸거나 이상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난 무당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무슨…?"
"것 참, 답답하네. 그러니까 자네하고 자네 친구가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지 않냐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요."
"어떻게 알어? 엉? 먼 친척일 지. 아니지, 아니야. 먼 친척이지도 않겠어."
무당이 부채를 바닥에 치는 횟수가 계속 늘어갔고 치는 힘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와 희수가 친척이라… 그것도 멀지도 않은 친척. 평소에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은 문제가 무당을 만나서 갑자기 밀어 붙었다. 명절날이 되면 항상 우리가족끼리 명절을 보냈는데 그건 엄마나 아빠가 말하지 않아도 친척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돈 얻을 기회가 없다고 땡깡도 썼는데 지금 이건 너무 뜻밖이다. 그렇다고 무당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럼 저와 희수가 같은 핏줄이라는 말이에요?"
"나도 확신은 못해.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둘은 같은 핏줄이야. 그럴 수밖에 없어. 으흠..."
길게 혀를 차다가 혜영을 보고 부채를 딱 멈추었고 한동안 뚫어지게 혜영을 쳐다봤다. 오히려 내가 민망 할 정도로 쳐다보았는데 한참 그렇게 보다가 말을 했다.
"이 아가씬 누구야!"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에요. 서리에 대해 관심도 있다며..."
"아가씨에게는 무슨 일 일어난 거 없어?"
"없어요."
"자네에게 묻지 않았어!"
무당은 나에게 화를 내며 내 입을 막고 혜영을 계속 주시하면서 혜영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혜영은 당황스러운지 쉽게 대답을 하지 않고 머물고 있다가 힘겹게 "네, 없어요." 라고 말을 했다.
"나를 그 마을에 데려가주지 않겠어? 한번 보고 싶네."
"꼭 안될 건 없지만. 제가 그곳에 가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겨서요."
무당도 서리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부터 무당이라는 직업이 이런 곳에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지금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늙어빠진 이 무당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또 악몽을 꾸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당의 답은 너무 뜻밖이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가 나를 데려가면 되겠구먼."
"네?"
혜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왜? 안돼?"
"저 혼자서요……?"
혜영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늙고 무서운 말만 하는 무당과 단 둘이 지옥의 마을에 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거절 하지는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거… 참 뜸들이구만."
"알…았어요. 그럼 내일 가요."
"크크."
결국 허락을 한 혜영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내가 끔찍한 악몽을 꾸더라도 선뜻 나섰어야 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 혜영이 내심 미안했다. 무당은 기분 나쁜 웃음을 내면서 누런 이가 가득 보이도록 했다. 무당집에서 나오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몇 번이고 혜영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나의 말이 들리지 않은 듯 계속 턱을 괴고 있었다.
"내일 수시로 전화해요. 그 늙은 무당이 혜영씨에게 무슨 짓을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설마요. 그럼 저 갈게요."
혜영이 내릴 역이 나오자 일어서면서 말했다. 혜영이 내리자 지하철 안은 나 혼자 뿐이었다. 지금이 막 퇴근시간인데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수상하고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지하철에 켜진 불들이 전기가 없는 지 밝지 않고 약간 흐려져 있었다. 그러다 안내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려 나왔다.
[다음에 역은, 다음, 역은… 내리실…다음…]
스피커가 고장난 게 아니라면 난 지금 그 악귀라는 놈에게 목숨이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철컹-철컹 철로를 달리는 지하철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느낌이 났다. 1초에 열번도 넘게 철컹거리는 것 같았다.
"젠장! 무슨 일이야."
[칙- 다음 역은 서리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입니다.]
스피커는 주둥이를 내밀며 내게 말했다. 꼭 내가 그 말에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창 밖으로는 어두운 화면만 가득하다가 화약 냄새가 나더니 붉게 불이 들었다. 열기가 모두 내가 타고 있는 차로 들어 100도도 넘는 한증막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
꿈이다. 온 몸이 땀으로 가득 젖어 있어서 꿈속에 한증막이 아직도 생생하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나에게 빨리 나가라고 보채었다. 종점이면 내가 내릴 역에서 한참이 지나온 셈이다. 내가 지금 혜영을 걱정하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게 분명하다. 출구로 나와 깜깜한 밤이 되어 있는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쩌다가 그딴 게 걸려서."
종점에서 보니 집에서 볼 수 없던 별들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택시가 찾으며 계속 걷다가 내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떡좀 사주세요. 모두 해서 이천원에 드려요."
내가 왜 못 봤을까, 바로 밑에 광주리에 한 아름 떡을 담고 희미하게 말을 하고 있는 할머니가 있다는 것을. 나는 순간 병원에서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희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할머니에게 한 말은 매우 엉뚱한 것이었다.
"이 떡을 모두 이천원에 파신다고요? 떡도 맛있겠네요. 제가 사드릴게요."
"고마우. 고마우, 고마우."
할머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나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