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역사는 객관적 역사인가

gubo77 작성일 07.10.19 01: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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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에 '건강과 과학' 이라는 싸이트에서 제가 '픕'이란 아이디로 한번 올렸던 글인데요, 객관적 도구와 객관적 도구의 사용이라는 부분이 역사의 객관성과 주관성과 맞닿은 문제라 그냥 옮깁니다. 새로 글쓰기 귀찮아서.

 

 

 

과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프란츠 파농. 이레 저레 지나가다 한번쯤은 들어보신 이름일 겁니다. 프랑스에서 출생한 유색인종이고 한때 정신분석 의사로 일하다가 병원에서 뛰쳐나와 알제리 해방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입니다. 인터넷에서 조금 퍼오자면,

--아프리카 최대규모인 블리다 정신병원에서 파농은 165명의 유럽인과 200명의 회교도가 수용된 병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파농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토스켈이 고안해 낸 사회적 치료법들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치료과정에서 환자들이 새롭고 민주적인 형태의 집단생활을 발전적으로 영위해 가도록 고심하는데, 그것은 환자가 사회 속에서 새로이 자신의 길을 모색해 갈 수 있는 사회성의 과정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그는 정신치료와 정치교육 사이에 밀접한 연관을 맺어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유럽인 환자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치료방법을 아랍환자에게 적용해 가는 동안 파농은 도저히 극복해낼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치료방법 속에는 환자들이 살아온 사회적 여건이 참작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요요소로서 포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파농이 자신의 실제 경험 속에서 부딪쳤던 모순점들은 정치적 이유로서 밖에는 설명될 수가 없었다. 1956년 라코스트에게 원장직을 사임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미쳐버린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잃게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로 그러한 교차점에 놓여 있던 나는 이 나라 주민들이 느끼는 소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공포에 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정신병리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주위에 대해 낯선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해주려는 의술이라면, 나 자신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즉 자기 나라 안에서 영원한 소외자가 되어버린 아랍인은 완전한 자아상실의 상태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병원을 뛰쳐나오기 전에 그는 절감했던 것이죠. 의술이란 결코 기술의 문제와 메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순수한 최첨단의 기술의 정점에 서 있는듯 보이는 의사도 결국에는 그가 속한 사회속에서 규정지어지는 인간일 뿐이고, 그러한 의술역시도 그 본성은 어떨지 몰라도 그 적용에 있어서는 결코 이런 저런 bias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의 행보에 수긍이 가고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쿠바 혁명의 최전선에 섰던 게바라가 의학도였던 사실도 우연 뿐만은 아닐 것이구요.


90년대 후반에 나왔던 영화잡지 '키노'에'저주받은 100대 걸작' 이라는 기획기사가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영화가 바로 레니 리펜슈탈의 1938년도 작품 '올림피아' 입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담았던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까지도 스포츠 영화의 최고봉이라 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스포츠 중계에 사용되는 카메라 기법의 많은 부분은 바로 이 영화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저주받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스포츠를 통해 나치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죠.(스포츠와 독재. 흔한 소재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치의 지지자였나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단지 멋진 영화를 찍고 싶어했지만 나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던, 멋진 영화를 찍고 싶어했기에 나치의 영향력이 절실했던 예술가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비록 '올림피아'에 나치 전당대회가 담겨 있다 할지라도, 그녀는 단순히 순수한 예술을 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가요? 그녀는 순수한 예술가였기에 '올림피아'를 통해 행했던 나치 찬양은 그녀의 책임 밖에 존재하고 있나요? 개인적으로는 특정인의 사상이나 학술논문을 비판하면서 나이브란 단어로 경멸을 표시하는데 공감하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이렇게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로켓, 그러니까 처음으로 미사일을 만들어낸 과학자가 '인류의 진보를 위해 한걸음을 내딛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때 그 진위여부는 떠나서 욕으로 지나치기가 힘들더군요. 일면 그의 뻔뻔함에 이가 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가 순수하게 인류의 진보를 위한 로켓공학에 매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학자라는 족속이 또 그러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닦친 불행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비난을 스스로 떠안은 그가 위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의술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의술을 행하시는 선생님들 개인이 판단할 문제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자유로울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는 자유로웠을지 몰라도 남들에 의해 친일파라는 딱지를 달고 살아야 했던 서정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자유라는 것 역시도 개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상투적으로 얘기하기도 하니까요.

아래의 리플에서 의술이란 메스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글을 보았을때 섬뜩했던 느낌을 받았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였겠지요. 엘리트 관료주의 혹은 뷰로크래시를 떠올렸던 것도 과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들 자유로우신가요? 의술이란 메스의 문제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기술을 통해 뷰로크래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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