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가 있습니다. 아침 9시에 개장해서 손님을 받고 저녁 9시에 문을 닫습니다. 개장 이후에는 더이상 사람들의 출입이
불가능하고 외부에서 돈을 조달할 수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카지노가 지니고 있는 돈의 총량은 개장때나 폐점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카지노가 소유하고 있던 돈과 손님들이
가지고 들어온 돈의 양으로 딱 결정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각각의 손님들은 개장때와 폐장때 서로 다른 액수의 돈을 지니
게 되죠.
여기서 시장경제학과 맑스경제학의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합니다.
시장경제학은 이 카지노의 가치는 단지 카지노에 있는 돈의 양 뿐만이 아니라 카지노에서 발생하는 모든 서비스 자체가 모두
카지노의 가치라고 얘기합니다. 카지노의 청소부는 카지노의 돈의 양을 늘리지 못했지만, 서비스를 했기때문에 돈을 나누어
받죠. 카지노 내부에 있는 고리업자도 카지노 전체의 돈의 양을 더이상 늘리지는 못했지만, 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에 돈을
나누어 받습니다. 따라서 폐장때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 카지노의 가치증대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맑스는 이 카지노의 가치는 단지 카지노에 존재하는 돈의 총 양뿐이라고 합니다. 청소를 하거나 경비를 서거나 고리
업을 하거나 간에 카지노에 존재하는 돈의 양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사람들이 가지고 들어온 돈에 기생할
뿐인 것이죠.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바로 시장경제학에서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가격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일
단 거래가 되어 '가격'이 매겨진 것은 모두 '가치'가 있다고 전재합니다. 물론 시장경제학에서도 교환가치니 사용가치니 하면
서 여러 가치를 들먹이지만, 이는 모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격이란 놈이 왜 그 가격이 되었을까를 사후적으로 껴맞추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맑스는 가격에 집중하는 대신 가치에 집중합니다. 이 물건의 가격이 얼마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 물건에는 '노동 몇
단위가 투입된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맑스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에는 관심이 없고 물건의 가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명품가방과 싸구려 가방을 비교해 보면,
명품가방은 천원, 싸구려는 백원이지만 둘의 물건의 질은 완전히 동일하고 둘의 공급량도 동일하다고 했을때, 맑스는 둘의 가
치는 동일하다고 얘기합니다. 동일한 품질이라면 동일한 노동이 투입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장경제학자들은 일단 둘의 가격이 다르기 때문에 둘의 가치가 다르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껴맞추
기 위해 여러가시 설명을 시작합니다. 브랜드 가치가 있다는 둥 하면서 말이죠(갯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계효용의 개념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아담스미스의 역설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결국 이 시장에서는 가치라는 것
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숫자로 표현되는 가격만이 중요한 것이죠.
다른 예를 들어보면,
어떤 부자가 가난한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돈을 주고 땅을 파게 했습니다.
다음에 여자들에게 땅을 다시 매꾸게 하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남자들에게 땅을 파게하고 여자들에게 매꾸게 하고.
...
그럼 이 마을에 '가치가 증대' 되었나요? 가치는 여전히 그대로죠.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으니. 하지만 마을은 풍성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돈이 많아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장에서는 서비스가 돈을 받고 거래되었기 때문에 이 행위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
각합니다. (그 마을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죠. 자신들이 풍성해진 만큼 부자는 가난해 졌다는 사실을 말이죠. 아무 가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남의 몫을 빼앗아 먹은 겁니다.)
이제 다시 카지노 얘기로 돌아가서요,
맑스의 견해에 따르면 카지노에서 의미있는 사람들은 개장할때 돈을 들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돈을 들고 들어
왔기 때문에 카지노에 돈이 많아졌고, 카지노의 가치가 증대되었기 때문이죠. 돈도 안들고 오고 돈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카지노에 불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서 의미있는 사람들은 폐장할때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는 것은 이들이 열심히 일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속임수로 돈을 땄던, 살인청부로 돈을 벌었건, 악질 고리대금업을 했건
간에 돈을 많이 벌었다는 얘기는 많은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의미고, 가치를 증대시켰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이기는편 우리
편?'
이렇게 맑스는 시장경제학자들이 생각하지 않는 가치(아담스미스부터 한계효용 학파를 거쳐 마샬에 이르는 가치이론의 전개
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가치이론이 아니라,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을 사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합
니다. 그래서 슘펨터, 카샬 같은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가치는 무슨 가치냐. 가치 생각 안해도 시장에서 결정되는 함수적
가격만으로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아예 선언해 버리기도 하죠.)를 탐구했습니다. 맑스는 '노동가치설'을 주장했으니 카지
노에 돈을 들고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노동으로 가치를 늘린 사람'이 의미있다고 생각했죠.
어떤게 맞는거 같으세요? 가치가 무한히 증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가격으로 표상되는 숫자 자체는 무한히
증식될 수 있겠지만, 가치란 결국 '궁극적으로 자연에서 취한 것 뿐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연에서 자원을 직접 채취
하는 사람보다, 단순히 숫자만을 늘려주는 금융서비스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건 아주 웃기는 짓이라고도 생각하죠. 또 결국
가치라는 것은 자연에서 오는 것 뿐이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결국 경제문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우리 옛날얘기에도 이 문제를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바로 두명의 술장수 이야기죠. 길을 가다 만난 두명의 술장수
가 서로의 술을 번갈아 가며 한잔씩 팔아주었습니다. 둘다 장사는 아주 잘 했죠. 하지만 둘은 한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시장경
제가 자리잡지도 못했던 그 옛날에(음....창작시대는 모르겠습니다. 이후일수도 있고) 벌써 이런 시장경제의 근본적 모순을 꼬
집는 이야기가 존재했다니 놀라우시죠?
처음에 기획했던 가치에 대한 논쟁을 모두 쓰려니 내용도 어려워지고 양도 무지하게 늘어나 버리네요. 그래서 모두 잘라버리
고 예시 위주로 갔습니다. 따라서 딴지와 질문 모두에 성실히 답하기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