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헤 님의 글에 대한 반박글(1)

백승길 작성일 07.12.28 01: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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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신라는 503년까지 국호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제는 538년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도 국호를 확정하지 못한 건가요?

 

(심심해서 해본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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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국호문제로 본 동신라서신라

 

우리는 백제와 고구려의 국호가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두 나라의 국호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확립되었습니다.


백제의 경우, 초기에 십제(十濟)에서 백제(百濟)로 바꾸었음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지’에는 伯濟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의 사서에는 高句驪, 高句麗, 句驪, 句麗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高句麗로 확정됩니다. 장수왕 대에 이르면 구려라는 표현은 완전히 사라지고 高麗라는 표현이 새롭게 등장하죠.


중국의 변방에 있던 수많은 부족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흉노는 험윤, 훈육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나며, 사실 수많은 북방 이민족들의 이름은 그들 고유의 명칭을 중국 측에서 멋대로 음차해서 적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유연, 돌궐, 토번 등등.


이러한 이름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원래의 각 국가 혹은 부족의 고유 명칭을 '한자 발음을 따서 적는 과정'(음차音借)에서 다양한 별칭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략 구려와 발음이 비슷했을 고구려는 비슷한 발음을 가진 句驪, 句麗로 불리웠고, 신라 역시 ‘서라’나 ‘사라’ 정도 되는 발음을 다양한 한자로 음차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자 음차는 국가의 통치 체계가 잡히고 한자 문화가 성숙하게 되면 스스로 좋은 뜻을 가진 국명으로 골라 결정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경우를 보면 뜻이 좋지 않은 ‘검을 驪’자를 버리고 큰 의미가 없는 ‘글귀 句’자를 빼버리고 ‘높을 高’와 ‘고울 麗’자로 국호를 정립하죠. (장수왕 때의 일) 일본의 경우에도, ‘야마토’의 음차 중에서 의미가 가장 좋은 ‘日本’을 골라서 국호를 확립합니다. (문무왕 때의 일)


즉, 신라는 503년까지 국호를 확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503년에서야 좋은 뜻을 가진 국호를 골라잡을 만큼의 문화적 역량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신라가 두개라는 헛소리가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막간극 - 심심해서 해보는 꼬투리 잡기

 

중국의 25사인"위서"에는

위시(魏時:220~265년)에는 신로(新盧),

송시(宋時:420~479년)에는 신라(新羅) 또는 사라(斯羅)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위서(魏書)에는 저런 말 따위 전혀 적혀있지 않습니다. 저 기록이 나오는 것은 양서(梁書)입니다. 역시 역사왜곡의 대가 쿠투넷 답네요. 물론 한자 해석도 엉터리임은 말할 필요도 없죠.


魏時曰新盧,  => 위나라 때(時)는 이르기를 신로라 하였다.


한자를 잘 알아서 위시(魏時)라고 썼을까요? 그럴 바에는 왈(曰)자도 그대로 써놓을 일이지. 쯧쯧. 물론 저기에 적힌 위나라 때라는 연도도 금시초문. 아마도 저 ‘魏’를 삼국시대 조비가 세운 위나라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요. 정작 위나라 때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신로가 아니라 사로(斯盧)라고 적혀 있거든요. 魏라는 나라는 삼국시대 말고도 여럿이 등장합니다.

저기서 말하는 위나라 때가 삼국시대인지 북조의 위인지는 현재 추정이 어렵겠죠. 저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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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장법사가 신라에 돌아왔을 때 왕의 이름이 다르다


이것은 지금 삼국유사를 일일이 해석하기 귀찮아서 일단 패쓰. (해석본을 잃어버려서스리..)


3. 3번은 없네요?? 어디다 빼먹었어요??


4. 진평왕에 대한 대수가 틀리다.


역시나 사료 왜곡.


傳世三十   => 전하여 30세(世)


30世라고 되어 있습니다. 는 명백하게 다른 표현이죠. 는 왕위가 이어져온 순번에도 사용되지만, 는 부자관계가 이어져온 순번에 주로 적용되거든요. 즉, 저기서 말하는 30세라는 것은 진평왕이 30대 왕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진평왕의 선대 부자관계가 30세라는 소리죠. 뭐, 그래봤자 역시나 틀린 기록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삼국지에는 고구려 태조왕과 신대왕의 관계가 부자관계로 적혀 있는가 하면(삼국사기에서는 형제관계), 후한서에는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이 나란히 조부, 부,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중국측 기록에서 왕위나 세대를 삼국사기와 다르게 기록한 경우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정도면 저 기록이 오기라고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지 않을까요?


이렇게 얌전한 증빙자료를 첨부해서 생색좀 내고 나서 내심 하고 싶은 말을 꺼내자면,


진평왕이 30세던 26대던 간에 그게 어떻게 동신라, 서신라의 근거가 되는 것인가요?? 대체 어떻게 둘이 연결될 수 있죠? 뭐, 쿠투넷에서 그걸 어떻게 연결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드헤 님이 써놓은 글은 단순히 기록에 대한 딴지일 뿐, 그것이 어떻게 동신라, 서신라의 근거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거든요???


흠.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5~6 綿에 대해서.


이런 한자를 전혀 해석할 줄 모르는 쿠투넷 같으니라고. 으휴 열불터져.


고대 사서에 적혀 있는 綿목화가 아닙니다. 목화를 뜻하는 면은 ‘棉’. 전혀 다른 글자가 존재하고 있거든요???


‘무명’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면직물을 일컫는 말이죠. 무명옷, 무명천 같은 말 들어봤겠죠? 그러나 이 무명은 사실 중국어에서 음차되어 들어온 말입니다. 중국어에서의 무명은 바로 木綿. 나무 면, 즉, ‘木’화에서 나오는 綿 이라는 뜻이죠. 중국에서조차 본래의 綿과 목화에서 나오는 綿을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했었는데, 어떻게 저 면을 문익점이 가지고 들어온 면과 혼동할 수 있을까요??


고대 사서에서 나오는 綿은 문익점이 가져온 면과 전혀 다른 말입니다. ‘천공개물’이라는 책이 있죠. 중국 명나라 때 송응성이라는 사람이 만든 일종의 고대기술백과사전으로 여기에는 면(綿)이 목화와 다르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링크를 참고하시죠.


http://orumi.egloos.com/214110  => 초록불님의 블로그


7. 웃기지도 않는 표.


일단 다른거 다 살펴보고 총체적으로 봅시다. 패쓰.


8. 만주원류고???


일전에 드헤 님이 스스로 GG를 쳤던 초록불님의 ‘한국사미스터리60 반박문’ 7번에 아주 상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http://orumi.egloos.com/1779098   => 초록불님의 블로그


근거라면서요?? 나름대로 생각해서 가져온 근거라면서요??? 그런데 자기가 읽고 반박된 내용조차 확인 안하고 그낭 읊어내는 겁니까??


9. 9번도 없네요??


10. 이건 뭐죠??? 헷갈리게 항목만 늘리지 마요. 쳇.


11. 신라의 제왕 역대에 대한 기록


참고사항을 먼저.


이놈의 부분 역시 그냥 딴지걸기일 뿐, 이따위 딴지와 동신라, 서신라는 전혀 연관이 없어요. 대체 이런 것을 보고 대륙신라, 반도신라의 두개 국가를 연상하는 두뇌구조가 더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나마 딴지걸기도 하나같이 역사서를 오독하거나 왜곡해서 만들어내는 것들일 뿐.


아무튼,


첫째 부분.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원년에는 이렇게 나와 있죠.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菟", 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논하여 말하기를, 신라왕으로 칭한 이가 거서간이 하나, 차차웅이 하나, 이사금이 열 여섯, 마립간이 넷이다. 신라 말의 명유(名儒)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지을 때 모두 무슨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사서로 오히려 초나라 말의 곡어토, 흉노말의 탱리고도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함에 있어 그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최치원은 거서간, 차차웅 등이 천박한 방언이라고 해서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왕호가 틀리긴 뭐가 틀려요??? 우습기 그지 없구만.


둘째 부분.


잠시 막말 한번 하겠습니다.


이건 뭐지? 이 아름다운 바보들은??? 시호가 뭔지 모르는 거야?? 유식한 척 하느라 제왕호니 지껄이면서 시호가 뭔지도 몰라??? 니들이 쓴 諱자가 무슨 뜻인지나 알고 쓴거니??? ‘피할 휘’자 잖아. 왜 이름을 피할 諱라고 불렀겠어??? 왕 이름을 찍찍 불러댔던 수준의 국가에서 왕 이름은 귀한 거니까 쓰지 말고 시호를 붙여 쓰는 수준의 국가로 올라선 거잖아. 정말 니들은 공부를 하기는 하는거니???


크흠...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지증왕, 법흥왕 무렵에 이르면 신라는 문화 및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되어 왕호를 확립하고, 국호도 정했으며, ‘시호법’도 쓰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왕 이름을 찍찍 불러댔는데, 이제 이 무렵에 이르면 왕권도 강화되고 하니까 위대하신 왕의 이름은 쓰지 말자고 시호를 만들었던 거죠.



셋째 부분.


이게 왜 납득하기 어려운걸까요?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초기 왕성도 바뀌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백제의 초기 왕성도 두개가 아니었을지 의심하고 있죠.


고구려의 경우, 주몽 이후 유리왕의 아들들부터 이상하게도 이름에 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도 이름의 첫머리에 떡하니 붙어있죠. 그런데 저 ‘해’자는 부여 왕족의 성입니다. 즉, 초기 고구려의 왕족은 해씨였다는 것이죠. 대체적으로 태조왕 무렵에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존재하죠.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본래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 역시 왕계보를 살펴보면 고이왕계와 초고왕계의 두개의 계보를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두개의 계보가 병립하였던 두개의 왕가로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고대 왕권이 미약했던 시절에는 왕가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이기도 했습니다. 대체 이게 왜 이상한 것이 될까요?


게다가, 신라에서 3성이 왕위를 서로 이어가는 데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생판 남에게 왕위를 내주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게 적혀 있습니다. 탈해왕은 남해왕의 사위이며, 미추왕도 조분왕의 사위이죠. 신라에는 여자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는 사실은 3명이나 되는 여왕이 존재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즉, 3성이 왕위를 사이좋게 나누어 해먹었을 가능성도 기록상으로는 너무너무너무 자연스럽게 설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 여기까지 적고 나니 내일 출근을 위해서 자야할 시간이군요.


7번의 웃기지도 않는 표에 대한 총체적인 찢어발김은 차회로 미뤄야 겠습니다. 어차피 이정도만 해도 드헤 님은 GG칠거 같은데.... 아무튼 이정도로 일단 마치도록 하죠.

 

에고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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