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 나의 20대 때 공포 체험 5편

fora 작성일 10.01.22 03: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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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쪽지로 응원과 격려해 주시는 그 분께

 

긴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저도 아주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동질감은 인간에게 따뜻함을 줍니다.

행복이란 말씀 항상 감사합니다. 저는 모든 것에서 오늘도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 보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나 모든 분들 항상 인생행복전도사가 되시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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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추억의 예배실, 귀곡산장처럼 느껴지다.


 

(이 글 바로 전 편에서 예배실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의 기도 부분도 잠깐 언급했었는데, 오해하실 것 같아 이야기하지만 수혜가 왔을 때는 아버지께서는 국외에 계셨습니다. 물론 현재는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께서도 건물 문제로 가끔씩 완공되지 못했던 예배실에서 오랜 시간 기도를 드렸다. 한편 아버지는 여전히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는데,  비록 잦은 사업 실패로 금전적인 여유는 없었지만, 비교적 대인관계가 좋았던지라, 그 와중에도 이 사람 저 사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이 많았다.

 

내 눈에 비친 아버지의 그 시간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을까? 자존심이 강하고 비슷한 연배의 동료나 친구들보다도 훨씬 더 젊고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기도 중 많이 우셨던 것 같다.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건 아직까지도 당시 아버지의 그런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나만의 감정들이겠지만, 당시 내 눈에 비춰진 아버지의 모습들이 안타까워 보였다기 보다는, 아버지가 식사하시건, 주무시건, 화내건, 웃건, 우시건.. 무능력하건....., 아버지가 집에 오랜기간 머물고 계신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왠지 평화롭고 안정된 기분이었다.

 

내게 있어 당시 아버지가 기도하시던 완공되지 못했던 예배실은 꽤나 정겹고 따뜻한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아주 어린 나이였다면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20대 이후 따뜻한 심장이 굳을대로 굳어버린 내게 밖으로 돌아다니기만 하셨던 아버지의 삶은 갈수록 비판적일 수 밖에 없었고, 청소년기 삐딱선을 타는데 결정적이었으며, 언제나 온정적이지 못했지만, 당시 예배실에서의 아버지의 기도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 컷의 흑백사진처럼 간직하고 싶은 모습들 중 하나였다. 완전히 완공되지 못한 예배실.. 안에는 미처 페인트칠도 하지 못해서 회색 그대로의 시멘트 벽과 장판도 깔지 못해 요상한 무늬의 카페트를 대신 깔았던 그 초라했던 예배실은,  비밀스럽게나마 뒤에 숨어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께 마음을 드렸던 그런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또 다시 어떤 계기로인해 외국으로 다시 나가게 된다. 그렇게 사업에 대한 열정을 놓지않고 고령의 나이임에도 계속해서 불태우셨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아버지는 잠시라도 일을 하지 않으시면 금방이라도 폭삭 늙어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그 분의 삶이고, 자신이 존재하는 유일한 낙이며 건강을 유지하는 끈임을 요즘 와선 새삼 깨닫는다. 그렇게 아버지와 완공되지 못했던 당시 예배실은 나만이 간직한 포근했던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이런 포근함과 그리움이 담긴 그 추억의 공간에서 수혜는, 첫날 수혜 어머니를 포함하여, 네 사람의 눈물의 기원이 있던 그 날 이후로 약 50일간을 머물게 된다. 대략 1주일에서 보름 정도를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되는 예배실에서의 숙식...십 수년이 지난 현재 그 날들을 정확히 계산해 내지 못하는 이유는 당시 이 사건들은, 내겐 어떤 부분에선 잊고 싶은 일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선 주로 상담과 하루 4~6번의 기도, 식사 등이 병행되며 이루어졌고, 다만 생리현상이 있을 때는 그녀의 어머니와 여전도사님, 어머니 등이 번갈아가면서 부축을 하고 다시 사택으로 이동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렇게 더디게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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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왜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빨리 보내지 못했느냐고...


물론 비교적 세세하게 수혜가 아프게 된 사연들은 뒤에서 사건이 진행될 때마다 조금씩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이야기 할 것이지만, 그녀는 이미 수 년동안 몇몇 정신 병원과 기도원, 굿, 사찰 등 여기저기 거의 안 걷힌 곳이 없었다.

 

그러면서 상태가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되어 결국 이도저도 못하게 된 두 모녀가 약먹고 동반자살까지 생각했는데, 누가 뭐라고 이야기한건지 모르지만 어쩌다 아주 우연히 이곳 이야기를 듣고 강원도에서 이곳까지 무작정 찾아 온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그런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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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예배실 건물과 내 방은 비교적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사실상 두 건물 사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이 내 방이었고, 게다가 환자가 비교적 젊고 날씬한 여성이었기에 전문가도 아닌 나같은 혈기왕성한 남자가 너무 깊고 잦은 시간 연관되는 모습은 나 스스로도 찜찜했을 뿐만 아니라, 보는이에 따라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런 류의 사건을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기에, 빨리 어떤 식으로건 마무리될거라 착각했었다. 지난 번 혼신을 다해 기원을 드렸던 성과가 아무 것도 없다는 실망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은 시간이 더뎌짐에 따라 내겐 일종의 커다란 스트레스였고, 일 분 일초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바램을 넘어 어느덧 불안의 연속과 가중으로 이어졌다.


나:

"혹시 저러다가 더 크게 다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저러다가 괜히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목숨 끊고 경찰서에서 찾아오거나 뭐 그런... 에이 뭐 그런 일까지야 벌어지려구.."

 

당시 뉴스를 봐도 신문을 봐도 이런 비슷한 사건들만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어느덧 갈수록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가고 있던 나는 주간에는 학교를 가면서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갈수록 고역이었다. 그 와중에도 제 버릇 남 못준다고 그나마 학업을 조금 더 등안시하게 되었고,  만화방, 영화, 잘 먹지도 못하는 술과 약간의 담배 등으로 시간을 어떤 식으로건 빨리 소비하려 애썼다. 당시에 지금처럼 찜질방이나 모텔방이라도 발달되었다면 아마도 난 거의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 상황들을 지금도 한 편의 그림처럼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 낼 수 있다. 묘지같은 건 언제부턴가 아주 친근하고 우습게 생각했던 놈이었다. 평소라면 한 밤중에도 장난치고 귀신 놀이하고, 텐트치고 놀던 곳이 나에겐 묘지였건만.....그런 식으로 1주일 이었던가? 열흘이었던가? 정확히 며칠 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최대로 시간을 끌고 끌어 계속해서 늦게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내 바램과는 달리 여전히 예배실에서의 강력한 목소리의 기도 소리, 간간히 들리는 괴성과 비명..사람들을 향한 분노에 찬 목소리. 어머니의 찬송가 소리. 귀신들린 자의 어떤 행동(?)들..또한 이를 순간순간 제어하는 사람들의 큰 목소리..이런 것들이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건물 외벽 조명을 받아서 밤하늘 짙푸른 구름과 달빛 사이로 기괴한 음악처럼 사방으로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흡사 한편의 귀곡산장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히치콕의 '사이코'에 나오는 그 집과 회색 빛 분위기의 그 끈적거리는 느낌과도 아주 비슷했다.


지금 이곳이 과연 내 집인지 아니면 어디 시골 구석탱이, 뒤에는 숲이 우거진 스산한 귀곡산장 아니면 가히 전쟁터에 온 것인지. 내가 마치 늑대인간 같은 괴물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착각과, 한 여름 밤임에도 스산한 기운의 밤하늘과 뒤에서는 강한 바람소리와 커다란 도토리 나무들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평소라면 한 밤중에도 장난치고 놀기까지 했던 묘지였건만, 여러 가지 소리들과 짙푸른 구름과 달빛... 난 그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대략 30분에서 1시간을 꼼짝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날 따라 내 눈에 비춰진 그 날밤의 극도로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정경들은 지금도 절대 잊지 못하고 있다.


표현력이 높지 않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아주 조금만 깊게 상상해 보길.. 그 때 나의 그 느낌을..그곳은 더 이상 아버지의 따스한 기억이 느껴지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더 이상 내가 편히 쉴 집, 나만의 공간도 아니었으며, 어느덧 어떻게 해서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픈 지긋지긋하고 스물 거리며, 끈끈한 두려움과 극도의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눈치가 빨랐던 어머니는 최대한 나를 배려해 주셨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한 번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기적적으로 질병에서 치유되신 어머니의 신념과 시각에선 저 사람들을 통해 신의 어떤 감추어진 뜻이 계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을 통해서도 신께 영광을 돌리는 계기가 되고, 교회(건물이 아닌 에클레시아)와 나를 포함한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싶은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셨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제일 힘드셨다.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것이 참 간사한 것이.. 누가 잘해주면 고맙고 나도 잘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더 잘해주길 바라고 괜한 심통을 부린다. 어머니는 나를 최대한 배려하여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교회 음악 테잎을 크게 틀어놓으시거나, 그 더운 여름에도 (당시는 에어컨을 놓을 처지도 못되었다.)창문을 꼭꼭 닫고 그렇게 어렵게 예배를 드리셨지만, 아침엔 항상 따뜻한 밥상을 내 방문 앞에 두고 가셨다.


그러나, 나는 점점 더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으로 과민하게 변해만 갔다. 약 1주일에서 보름 정도 난 그렇게 갈수록 그 사람과 모두의 고통과 눈물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벗어나려 애썼으며, 그렇게 풋내기 어린아이처럼 공포와 혐오감에 휩싸여 나만의 세계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몇 번에 거쳐 아주 이상하리마치 정말 더럽고 역겨운 꿈을 꾸게 된다.

 

 

 

역시 글이 길어져서 다음 편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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