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 가시라고 글 한번 적어봅니다. ^^;
"바가지 심한 마누라와 함께 살다 지쳐버린
착한 남편들이여,
말 안 듣고, 성질 못된 마누라는
목에 밧줄을 걸어 시장으로 데리고 나가라."
1696년 경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이혼풍습일 텐데... 한 마디로 살다가 더 이상 같이 살기 싫어지면 법원에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목에 밧줄을 걸고 시장에 나가 내다 파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8세기 영국에서, 아마도 시골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죠.. @_@
원래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아니 오로지 남성만이 인간이었고, 여성이나 아이나 그 인간에 속한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더구나 전근대 사회에서 결혼이란 곧 계약이었죠. 당사자인 남성과 그 주변의 사람들과, 그리고 당사자인 여성의 주변과, 당연히 여성의 입장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여성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개나 고양이가 계약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계약의 객체일 뿐 주체가 될 수 없었으니..
한마디로 매매혼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히 협의와 협상을 통해 거래조건을 정하고 그렇게 조건이 정해지고 나면 계약에 따라 여성은 그 소유권이 남성인 아버지에게서 또다른 남성인 남편에게로 넘어가는. 물론 이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인 만족을 제공하고, 후손을 낳아주며, 집안일도 하는 수단으로서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문학작품을 보더라도 곧잘 보이는 것이,
"돈을 더 모으면 아내를 사 올 수 있을 것이다."
라거나,
"돈이 충분하니 아이를 많이 나을 수 있는 암소처럼 엉덩이가 큰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라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대략의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져. 아내를 얻는 조건은 돈이고, 돈만 있으면 일 잘하고, 아이도 잘 낳고, 말 잘듣고 순종적인 훌륭한 아내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상할 것입니다. 지금의 감각으로 그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니까..그러나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연애결혼이라는 자체가 개인이 발견된 근대에 들어서나 나타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결혼을 한다? 그런 거 없었어요.
서로 좋아해서 결혼해 부부가 된다? 그런 건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답니다. 물론 사랑을 하니까 서로 만나고 사귀고 섹스도 할 수 있었겠지만 결혼은 어디까지나 계약,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계약으로서, 특히 여성이 배제된 남성과 그 주변인의 거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귀족이나 하층민이나 예외가 아니었죠.
이처럼 여성이란 당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결혼이라는 것도 친정아버지로부터 남편에게로, 인간인 남성 사이에서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여성에게 있어 자기권리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모든 권리는 남성에게 있었습니다. 때리든 욕을 하든, 심지어 부정을 저지르거나 했을 경우 남편에 의해 여성이 살해되는 일마저 비일비재하게 있었죠--;이도 당연하게 여겨진 것은 여성은 인간이 아니고 남성의 소유물이었으니까. 하물며 내다 파는 정도야...
그런데다 지금도 그런 부분이 적잖이 남아 있지만, 당시에도 여성이 - 특히 남성으로부터 내몰린 여성이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편에게 쫓겨난 여자라는 딱지까지 붙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란 값싼 날품팔이로 연명하거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경우에도 살 길이 막막해 매춘부로 전락한 경우가 적지 않은데, 하물며 사회적인 인식까지 좋지 않은 이혼녀임에야... 따라서 결국 그동안 같이 살았던 정 때문에라도 더 이상 함께 살기가 싫어진 아내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능력 있는 남자를 찾아주는 것이었으니, 나름대로 인도적인 이유였다 할 수 있겠습니다. -.-;
이 모든 요인들이 합쳐져서 아내를 팔아먹는 개탄스러운 못된 관습이 생기게 된 것인데... 물론 이런 관습이 얼마나 폭넓게 퍼져 있었는지는 사실 확실치 않습니다. 워낙 공식적으로 공공연히 내세울만한 일은 아닌데다, 주로 무지한 농민이나 빈민들 사이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것이다 보니. 다만 여러 문서나 기록 등에서 밝혀진 바로 부인매매는 노예나 소경매와 흡사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죠.
당시 아내를 어떻게 사고 팔았는가를 묘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목에 밧줄을 걸고 시장으로 끌고 나와 가축 전시장에 매어 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에게 아내의 가치를 칭찬하며 경매를 붙이면 사람들은 그에 응해 아내의 가치를 흥정합니다. 만일 단 한 사람만 관심을 보이게 되면 그때는 되는 대로 일단 명목상의 값을 불러야 했죠. 보통 5실링의 돈과 맥주 한 병 정도가 적정가격이었다고 하는데, 가격흥정이 끝나면 그때 매매증서를 작성하고 서로간의 거래를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아래의 매매증서를 작성하여 거래내용을 확정하죠.
"나 존 오스본은 내 마누라 메리 오스본을 1 파운드를 받고 윌리암 서전에게 판매하는 데 동의한다.
앞으로 마누라에 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며 이에 대한 증표로 여기 서명하는 바이다.
1815 년 1월 3일 메이드스톤에서 존 오스본"
이와 같은 매매증서까지 작성하고 나면 이제 모든 권리는 구매자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받고 나면 구매자는 새로이 자신의 아내가 된 여자의 목에서 밧줄을 풀어주고는 집으로 데려가기 전에 시장을 돌며 끌고다님으로써 그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시켰죠. 한 마디로 "이 여자는 정당하게 내가 돈 주고 구입한 내 여자이니 앞으로 그리 알기 바랍니다."라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던것.
다음은 브리스톨에서 발행된 1823 년 5월 29일자의 한 신문에 실린 당시의 매매상황에 대한 기록입니다.
"요즈음 우리 고향의 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보기 싫은 장면이 세인트 토마스 시장에서 또 한번 연출되었다.
로즈메리에 사는 존 내쉬라는 한 가축상(이름값도 못하는)이 자기 마누라를 밧줄에 묶어 끌고 시장에 나타났다. 뒤에는 구경꾼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벨야드 맞은편까지 오자 그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부인을 경매에 붙이겠다고 선언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그 부인이 현재의 남편 손에 있는 게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나와 6 페니라는 후한 값을 불렀다! 판매인 남편은 또 다른 입찰자를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아내의 가치를 칭찬하고 착한 성품을 자랑해도 1 페니도 더 맣은 액수를 내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남편은, 마누라를 다시 데려가느니 그 젊은이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지만 젊은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곧 거래를 후회하며 이 부인을 다시 경매에 붙였는데, 9 페니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자 즉시 이를 받아들이고 부인을 넘겨버렸다.
부인은 이 두번째 거래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도망을 치고 말았으나 결국 구입자가 다시 붙잡아와서 자신의 재산임을 주장하였다. 부인은 이 거래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치안판사의 명령으로 기각되었다. 원래 남편 내쉬는 분노한 군중들은 피해 급히 도망쳤다."
1814년 2월 26일 "스테이트맨"이라는 신문에 실린 또다른 부인매매에 대한 기록입니다.
"노팅검에 사는 링커라는 한 용감한 군신의 아들은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비록 요조숙녀는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로잡을 힘이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툰이라는 한 민병대원의 아내가 그가 정복한 여성들 명단에 추가되었다.
마침 휴가를 받아 노팅검에 와 있던 툰은 마누라의 부정을 의심하게 되어 그녀를 경매를 통해 처분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기왕이면 이를 통해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얻고 싶었다.
남편에게 짐만 되었던 부인은 토요일 저녁 돼지 시장에서 판매됐으며 처음 경매 가격은 3 펜스 였다. 그러나 아무런 응찰자도 없자 고귀한 군신의 아들 링커가 기꺼이 값을 6 펜스로 후하게 올려 불렀으며 결국 부인은 목에 밧줄이 걸린 채 그에게 인도되었다. 수많은 구경꾼들은 이 사랑스러운 전리품이 그녀를 사랑하는 구입자의 손 안으로 념겨지는 것을 아무런 질투의 감정 없이 지켜보았다."
심지어 아내를 팔기 위해 신문광고를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896년 신문에 난 광고에요.
"나의 부인 제인 헤블런드를 5실링에 판매합니다. 튼튼한 체격에 신체도 매우 건강합니다. 씨도 잘 뿌리고 수확도 잘하며, 쟁기도 잘 잡고 소도 잘 몹니다. 건장한 사내 몇 명의 몫은 할 것입니다. 고집이 좀 세지만 적절히 잘 다루기만 하면 토끼처럼 순하게 부릴 수 있습니다. 가끔 잘 지켜보지 않으면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남편이 감당하기가 다소 힘들기에 팔려고 내놓은 것입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광고제작업자에게 문의하십시오
특기사항: 그녀의 옷가지 전부를 함께 제공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랜 관습이었던 만큼 빈민이나 농민 말고도 부유한 시민계급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부인매매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이러한 부인매매를 옹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스웨들린코트라는 교구의 위원회에서는 남편이 도망간 부인을 1플로린을 받고 시장에 내다팔도록 허락하고 있기도 했었습니다. 하긴 부인매매를 금지하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경찰과 판사들마저도 뿌리깊은 관습에는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으니..;;
"판매 현장에 경찰관을 보낸 진짜 목적은 물론 그런 창피한 거래를 중단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인 목적은 시장의 평화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런 거래가 벌어지면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며 질서를 파괴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내가 거래를 중지시키거나 방해할 권리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람들 사이에 있어왔던 관습이기 때문에 이를 법으로 막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어느 치안판사의 독백처럼 하루아침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오랜 관습이라 하루아침에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고 파는 이러한 부인매매의 관습은 특히 영국에서 19세기 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장 1887년 7월 13일 셰필드에 사는 에이브러험 부스로이드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인 클라라를 5실링에 팔아버렸다는 기록이 있었고, 1885년 영국은 16세 이하의 소녀를 매매하거나 납치해서 윤락 행위를 시키는 일을 방지하는 법을 제정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16세 이상의 여성에 대해서는 매매가 가능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아내를 감금하는 것이 불법이 된 것은 20세기를 9년 앞둔 1891년의 일이었다.
물론 부인매매가 유럽만의 전통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은 역시 19세기에 있었던 베트남에서의 부인매매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람은 4 년 전 쌀 한 푸대를 훔친 죄로 송치됐던 사람인데, 늘 그렇듯 판결 내용은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열두 달쯤 지나자 그는 모범적인 감옥생활 덕택에 부인과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에게는 두 살에서 여섯 살에 이르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다. 두 명은 딸이고 한 명은 아들이었다.
그러나 가족을 다시 만난 지 여섯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여섯 살 난 자신의 큰딸을 현금 5 만원, 즉 약 13 달러를 받고 팔아버렸다. 다시 여섯 달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막내딸을 현금 2 만원, 즉 약 5 달러를 받고 다시 팔아버렸다. 일 년이 지난 후 마지막 남은 아들은 현금 17,000원, 즉 4 달러 조금 넘는 헐값에 팔았다. 이제는 부인마저 팔아치울 요량이었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한 27세 가량의 코친차이나 여자였다. 남편이 10 년 전에 코친차이나의 관례를 따라 돈을 주고 사서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가 팔려 나가는 날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녀는 비통하게 울고 있었으며 남편이 말을 붙이자 혐오하듯 외면해 버렸다. 나는 그녀가 너무 불쌍했다. 현재의 처지보다도, 그전에 자녀들과 헤어질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제 그녀 자신이 팔리는 날이 온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팔려야만 했던 걸까? 남편이란 작자의 부족한 생필품을 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나았다. 이 작자는 아편을 사려는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내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자 이제 이야기를 끝맺자. 이 불쌍한 여인은 아주 험상궃어 보이는 남자 세 명에게 인도되었다. 그중 한 명이 남편이 서명한 서류와 판매증서를 받았다. 그들은 여자의 옷가지 꾸러미도 인수했다. 끝으로 판매 대금을 치룬 뒤 그들은 여자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녀의 몸값은 현금 8 만원, 즉 20 달러 정도였다."
하긴 우리나라에도 있지 않던가요. 도박빚으로 마누라를 팔고, 딸을 팔고, 김동인의 소설 "감자"도 남자의 무능으로 여성을 매춘으로 내모는 이야기였죠. 그나마 한국에서는 천륜의 사상 때문에 그렇게 마누라를 팔고 나면 상종 못할 말종으로 매장되고 말았지만... 그나마 그것이 그렇지도 않게 된 것이 일제강점기던가? 하긴 19세기 말 영국에서도 여전히 아내를 사고팔고 있었으니 이 또한 근대화라면 근대화겠지만... 이를테면 식민지근대화론이랄까요?
아무튼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이야기입니다. 내 어머니, 내 누이, 귀엽기만 한 내 조카들... 그들이 저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과연 어떠했을까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 끔찍한 이야기로부터 많은 여성들을 구해낸 이들이 또한 당시의 부조리와 모순에 항거하고 저항한 이들일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일생을, 자신의 명예를 바쳐가며 작은 권리를, 너무나도 당연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 여성만이 아니라 그 여성을 가족으로 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일인거 같습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보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마저 수단으로 도구로 인식하는 작자들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저기 어디들보다는 한참 나으니까..아직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나마라도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인듯.. 남자인 나역시도. 정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