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원과 심리전의 병행
한국군의 작전이 성공한 것은 앞에 말한 중대전술기지 운용을 비롯한 3대전술과
대민사업, 심리전을 효과적으로 병행하였기 때문이다. 주민과 베트콩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적의 활동 근거를 봉쇄하는데 주력하였고 전장병이 심리전 요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대민활동과 심리전을 전개하여 주민들과의 유대가 잘 이루어져
베트콩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어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주월 한국군의 각급 지휘관들은 채명신 사령관의 방침에 따라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사람의 양민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 동조자들을 포섭하여 정부를 믿고 지지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여
대민지원과 심리전을 끈질기게 펴나갔다.
대민지원과 심리전은 건설사업과 병행하여 주로 비둘기부대에서 주력해 왔지만
전투부대가 증파된 후에도 계속해서 전투부대나 비전투부대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베트남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심어주었다.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지켜보던 베트남 국민도
정부의 평정사업을 돕기 위하여 한국군이 피땀을 흘려가며 일하는 것을 보고
그들도 차츰 진의를 깨닫게 되고 시일이 갈수록 베트남 각지에서 한국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한국군은 우선 같은 피부색을 가진 동양인이고 생활풍습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베트남인과의 융합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주요 건설사업 이외에 한국군은 자매결연, 경로회 조직, 운동경기, 영화상영,
어머니 잔치, 농촌 일손돕기, 의료지원, 구호사업, 태권도 지도, 종교행사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대민 봉사활동을 성의있게 펼쳐나갔다.
이러한 활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널리 알려지게 되자 한국군 주둔지역에서는
베트콩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차츰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한국군을 믿고
친정부성향으로 돌아가 촌락재건사업이 차츰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국군의 이와 같은 대민사업과 심리전의 성과는 급속하게 전파되어 외국기자들의
취재가 빈번해졌다. 영국의 선데이 포스트지는 한국군의 활동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만약에 한국군이 보다 일찍이 베트남전에 파병되었더라면 베트남은 이미 평정되었을
것이다.”라고 격찬하였다.
한국군의 전술책임지역은 베트남 총면적의 25분의 1을 차지하는 약 700㎢에 달하며
베트남의 동맥인 국도 1번도로만도 400km로서 우리나라의 서울과 부산간 거리와
맞먹는다. 한국군 지역에는 120만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것은 베트남 총인구의
13분의 1로서 한국군과 끊을수 없는 유대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