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 만난 사람들 1부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파란색 수의에 하얀색 수번을 달고 매일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5시까지 이어지는 노동.
양말공장에서 양말도 짜고, 쇼핑백도 만들고, 책상, 탁자도 만들며, 가죽도 만들고,
고추장도 만들고, 상추도 심고, 무도 심고, 벽돌도 만들고...
“그래도 아저씨는 개처럼 두드려 맞지는 않잖아요”
군생활 막내시절에 전날 훈련하다 개맞듯이 두드려 맞고는
정강이에 시퍼런 멍을 달고 수용자에게 위처럼 중얼거렸었다.
수교(병장)를 달고서야 그 말이 얼마나 웃기고 기가 막힌 말이였는지 알고나서
얼굴이 달아올라 미칠 지경이였지만, 당시는 그네들의 생활이 그냥 주는 밥 먹어가며
쉽게 쉽게 일하다가 출소하는 줄만 알았다.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들.
첫 번째 기억나는 그 사람.
막내 주제에 수교(병장)의 근무지에 땜빵 근무를 나간적이 있었다.
초소에 철제 의자가 하나 있었지만, 수교가 아닌지라 뙤양볕에 그대로 나와서서
생산품을 수거하는 트럭이 오면 거울로 차 아래를 훑고 차량 내부를 검사하고,
뭐 형식상의 그런 검문을 하는 역할 이였다.
7월의 정중앙에 있던 2시 근무지였던지라,
정수리에 쏘아대던 자외선은 정말 미칠지경이였으나,
짬도 안되는 것이 그늘 찾아 서 있기라도 하면,
그날 오후 훈련시간에 피바람이 불 것을 뻔히 알기에,
열중쉬엇 자세로 석고상이 되어 하차하는 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살점이 두툼한 한 수용자가 플라스틱 대접에 음료수 한잔을 떠서 가져왔다.
“대원 이거 마셔. 짬 안되니까 가서 쉬지도 못하네”
얼마나 그 공장에서 일한지는 몰라도,
경비교도대원의 생리를 아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내가 해야 할 군생활 이상은
그곳에서 가죽을 털고 찢고 가공했을 것이다.
막내놈이 수용자가 주는 음식물 덥썩 물었다고 한따까리 당할까봐,
그 성의에 감사하는 부처님 미소만 지어주고 다시 가져가라고 손짓했다.
“괜찮아. 형이 그냥 한잔 주는거야. XX도 형이 맨날 과자도 주고 그래”
수용자가 말하는 XX는 우리 분대장이자 내무반장이다.
하늘 같으신 우리 분대장님의 이름을 호제 하는 걸 보니,
친한사이 같기는 했다만,
경비교도대원의 후반기 교육 중에,
그네들의 호의를 잘못 물게되면 코를 끼게되고,
그러게 되면 그 사람들과 옷을 바꿔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 막내는 경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경계는 했지만,
온몸의 수분이 가뭄에 논바닥 마르듯 척박해지고 있어,
어느새 손에는 “축배”사이다를 들이키고 있었지만...
후에 이런저런 근무 이유로 몇 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혹은 목례로 인사를 받아주고 했었다.
그리고 어느날,
야차처럼 서있던 그 겨울, 덜덜 떨며 워커 안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내게,
그 형이란 사람이 와서 말을 걸었다.
“너는 나중에 나가면 절대 음주운전은 하지마라”
친해지게 되면 담배라도 하나 달라고 할까봐 그때까지,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냈었는데,
뜬금없이 자신의 전과를 유추하는 말을 내뱄었다.
사실 대원이건, 간수건, 수용자건 간에 불문율이라면 불문율이였던 것이,
전과를 묻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였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전과를 이야기하는 것에 굉장히 의아했다.
“음주운전도 하지말고, 하게되서 사람을 치게 되거든 절대 도망가지마라”
음주운전 뺑소니... 그 양반의 전과였다. 코코넛쿠기를 오독거리며,
고참의 눈이 없는 구석탱이에 짱박혀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탑차 운전기사였다고 한다. 냉동탑차는 후방이 확보가 안되는데,
겨울에 자기 차 뒤에서 자리깔고 소주에 막걸리를 들이키고,
차를 안전한 곳에 주차하려고 운전대를 잡고 후진하는 찰나,
근처에 있던 꼬마애의 비명소리가 들리더란다.
꼬마애를 치어 버린 줄 알고 아차 싶어 뒤로 달려가니,
꼬마애는 옆에서 울고 있고 왠 할머니 한분이 차 밑에 들어가 계시는데,
순간 술도 먹었겠다,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도망갈 생각밖에 안들어서,
그냥 도망가 버렸고,
한참 운전하다가 술이 확 깨버리니,
자괴감에 살 수 없어 그냥 그길로 경찰서로 들어가서 자수했다고...
음주운전 뺑소니 등으로 징역을 두자리수 가까이 받았는데,
자수하고 고의성이 없어서 감형 받아서 징역 5년인가 들어왔던 걸로 기억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활하는 내내 즐거운일도 없을 것인데 항상 껄껄거리며 웃고 지내고,
대원들에게 동네 친한 형처럼 와서 말도 건내고
배고픈 막내들에게 과자 부스러기 등 간식도 챙겨주던 그사람.
내가 전역할 때 쯤 징역살이가 6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는데,
아마 별일 없이 잘 지내다 나가서,
음주운전 안하고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싶다.
두 번째 동성로 주먹형.
사회의 악으로 격리당한 사람에게 함부로“형”이라 부르진 않는다.
그런데 그사람은 엄밀히 따져서 “형”이 맞았고,
“형”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사람이였다.
일병휴가를 나와서 집안 제사에 참석했었다.
우리집안은 대대로 굉장히 고지식해서,
상욕도 사전에 있는 욕이 아니면 절대 안하는 사람들이다.
군바리 머리에 얼굴이 숯댕이처럼 그을린 나를 보고 한번에 군인인지 알게된 친척들은,
“제대했나?” 혹은 “언제 제대고?”혹은“휴가 나왔나?”하면서
근무지 등을 물어왔고 당당하게 “교도소에서 근무합니다”라고 하면,
집안에 찬란한 별(집안에 육사 출신이 많습니다)들이 많은데
왜 그런데 가있냐고 타박하시곤 했다.
뭐 군생활 편하게 하고 싶긴 했지만,
그냥 해병대를 지원해서 못갈 지언정 민폐는 주지 말자 라는 생각에
친구 한명 데리고 조용히 입대했었기에 쓴웃음만 지으며 헤헤 거렸다.
그러던 중 내가 교도소에 있다고 했을 때,
유독 얼굴색이 변하는 어르신이 계셨다.
고향인 대구에서 서울 방배동까지 오랜만에 올라오셨다고 하는데,
처음 뵙는 친척이였다.
친척 동생들, 형들하고 방에서 낄낄거리며, 군대썰을 줄줄 풀고 있는데,
그 어르신이 들어와서 나만 불러내 조용히 베란다로 나갔다.
제사 때 피운 향이 굉장히 엄숙하고 조용한 그 밤에,
그것보다 더 심각하고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말을 꺼내는 그 어르신.
“XX 교도소에 있다고 했제?”
“네”
“내가 딸 하나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사실 아들이 거기 들어가있다”
“...”
“뭐 힘든 부탁을 하려고 하는건 아니다. 니보다 일곱 살 많을 텐데, 그냥 만나면
아는체라도 해주고 아버지 어머니 걱정말고 생활 열심히 하고 나오라 캐라“
담배 장초를 끄시며 뒤돌아 나가려는 그 어르신께 조용히 여쭸다.
“무슨일로..”
어렸을 적에 몸이 너무 약해서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시켜놨더니,
갑자기 덩치가 산만해 졌고, 시켜놓은 유도는 안하고 불량배랑 어울려 다니다가
그지경이 됐다고 한다.
내심 굉장히 놀랬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법 없이도 살만한 우리 집안.
서울에 터널을 뚫고 지하철 노선을 변경하고, 댐을 쌓는 등등,
거대한 정치 노선을 지니고 자부심을 강한 이 지체 높은 집안에,
흔히들 말하는 건달이 있다는 것은 어린마음에 굉장히 충격이였다.
그리고 많이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아 이 징그러운 호기심...
부대에 복귀하자마자, 몰래 근무지에 있는 네트워크에 로그인했다.
그리고 그 친척형의 이름을 검색했더니,
4공장에서 노역중이며, 전과는 폭력 이였다.
자의든 타의든 사람을 때려서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좋건 나쁘건,
사람을 그냥 때려서는 교도소까지 들어오게 될 정도면,
분명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런사람이 있으려니 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핏줄이 무엇인지...
저녁에 자려고 누워도,
순찰근무로 그 공장옆을 지나쳐도,
그 사람이 너무 궁금해 지는 것이였다.
그리고..
당시 또다시 땜빵근무로 보일러실에서 약 3개월 근무하는 그 기간동안,
나는 보일러실의 근무를 핑계삼아 4공장 수용자 목욕시간을 기다렸다.
겨울에는 일주일에 한번이였던가 목욕시간이 공장별로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에는 지나치게 깔끔한 교도소 내의 규율에 따라,
해당 공장의 수용자들이 단체로 목욕을 하게 되어 있어,
보일러실 옆으로 지나가는 수용자들의 수번을 찬찬히 훑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동안 그 수용자들을 관찰하던 어느날,
수용자들을 인솔하던 덩치좋은 사람과 마주쳤다.
수번 1085번!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어르신의 이름(그형의 아버지)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음 목소리로 불렀다.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불러지자,
그 인솔자가 눈에 불을키고 양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오며,
"당신 누군데 우리 아부지 이름을 아능교"
하며 당장 멱살을 뽑아버릴 기세로 쏘아댔다.
"제 이름은 000 입니다"
같은 돌림자를 썼기 때문에,
친척인줄 한번에 알아 듣는 눈치 였으며,
주위에 수용자가 많으니 인솔자로서 그들을 먼저 다 들여보내놓고 다시 다가왔다.
"형네 아버지가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반갑다! 나는 OO0다"
건달의 패기로 악수를 권하는데,
그 손두께가 내가 여태 잡아보지 못한 코끼리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형이라는 사람의 손에 굉장히 온기가 있었고,
사회의 어둠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나보다 나이가 7살 많았다.
출소는 6개월 정도 남았고,
계산해보니 내가 수교를 달고 2개월 정도 지난 후가 되는 듯 했다.
건달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우두머리의 떼인 돈을 받으러 갔다가,
경찰한테 잡혀 폭력전과로 집행유예를 받았는데,
그 돈을 다시 받으러 갔다가 또 잡혀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인상은 그냥 곰한마리 보는 것 같았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온몸에 문신하나 없이 눈빛이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서,
그가 속한 조직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고,
주위에서 그 형이라는 사람에게 깎듯이 인사했기 때문에,
나에게 뭔가 해코지 할 사람,
흔히들 말하는 양치기 소년의 기운이 풀풀나는
그런 사람 같지 않아 보였지만,
교도소를 지키는 대원의 입장으로는 그냥 범죄자 혹은 수용자 였기 때문에
양 어깨에 힘을 바짝주고 있었다.
교도대원의 규율상, 지인이 그 소에 있을 경우 자진 신고하여,
행여나 발생할 불미스러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했어야 하나,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양아치처럼 나에게 엉겨 붙어서 담배달라고 졸라대거나,
코나 끼워서 협박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그냥 그 신고기간을 늦추고 있었다.
교도소안에서 수용자 혼자 돌아다닐수 없다.
단 10미터를 가더라도 옆에는 대원이든 공무원이든 같이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찾아오진 못했지만,
가끔 찾아오거나 그 밑에 있는 사람이 보일러실 근처로 갈일이 생기면,
과자 부스레기는 음료수라도 한사발 주고 가곤 했다.
그리고 어느날,
다 뜯어진 국방생 브레브맨을 입고 습기가 굉장히 많은 보일러실 내부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수동 보일러 벨브를 돌리는 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그 형은,
다 헤진 그 런닝이 안되보였는지,
다음날 자신이 입지 않던 나시티 하나를 보냈다.
삐뚤거리는 글씨로 어울리지 않게 편지까지 써서
"군생활 힘들제. 니 옷 보니까 안쓰러워서 하나 보낸다"면서 ...
물론 받지 않았다.
내가 공과 사가 그렇게 확실한 놈도 아니고,
인생 유드리 없이 빡빡하게 사는 놈도 아니지만,
겁은 많아서 함부로 그런거 받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그길로 돌려 보냈지만,
그래도 동생이라고 챙겨주는 친척이라는 핏줄은,
잇김이 풀풀 날리는 그 겨울 날씨에 따뜻하게 가슴에 스며들었었다.
보일러병 마지막 주차에 그 형을 만났다.
그날도 목욕을 하러 온 모양이였다.
둘이서 그냥 시덥잖은 농담 주고 받다가 말을 꺼낸다.
"내가 니 친척이고, 애도 착한거 같아서 미리 말한다"
"뭘요?"
"내가 니한테 담배 하나 달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나 때문에 니가 잘못되는게 싫어서다"
"감사합니다"
교도소는 담배에대해서 굉장히 민감하다.
아니 대원들한테는 그 담배란 놈 때문에 수용자들에게 코가 끼어서,
다른 교도소에서는 정말로 수용자에게 본의아니게 담배를 팔게되버려,
징역을 살게 되는 것도 들은적이 있었다.
나도 사실 그 부분이 가장 걱정 되었다.
이 형님 안쓰러워서 담배라도 한대 피게 해주고 싶은데,
앞날 조지게 되는게 순식간이 되버리기 때문에,
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였다.
"형 나 오늘 보일러실 마지막 날인데 형 이 시계나 가져가요"
휴가나와서 사온 2만원짜리 싸구려 메탈시계.
형은 내가 시계 필요한지 어찌 알아냐벼 덥석 받아갔고,
그 이후 그 형이 나가는 날 까지 형을 만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 막사에 올라와서 자진 신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6개월 후,
밤 12시 ~2시 근무 시간.
소대장에게 말해서 그 근무 시간에 교도소의 정문 근무를 서게 됐다.
12시즈음 되자 시커먼 차들이 서너대가 주욱 들어와서
바지통이 유난히 좁은 검고 갈색 양복을 입은 건달아저씨들이
서로서로 담배를 꼬나물고 정문쪽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야 서울에서 그쪽 업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도 못했기 때문에,
마냥 신기했는데, 왠지 기다리는 모습들이 친근하게 느껴져서,
"00형 좀있음 나온데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초등학생 선생님한테 숙제검사 받듯 쪼르르 내앞으로 뛰어와
"형님이 말씀하신 동생분잉교?"
"형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슴니더"
이러면서 악수를 청한다.
같이 근무서던 공무원도, 후임도 바짝 얼어 있는데,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외정문 기둥을 잡고 킥킥 거렸다.
그리고 새벽 두시쯤 건달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외정문을 나온 그 형은,
십수명의 각잡힌 인사를 받고는,
"00야 담배 하나만 줘봐라"
하며 내 군팔 담배를 얻어 피며 비틀거리고는,
"아 뒤지는 줄 알았네"
하며 아우디 차량을 타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후 2개월 뒤,
근무지에서 근무서고 있는데, 무전이 하나 왔다.
평일날 면회를 왔단다.
면회실에 가보니 그 형이 촌스러운 건달 유니폼을 입고
담배를 뻑뻑 펴대며 과자를 한보따리 사놓고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내가 들어서자 갈비뼈 등뼈에 붙을 정도로 포옹을 해주시고는
1000만원짜리 시계 샀다고, 18살짜리 여자애랑 사귄다고,
자랑을 있는데로 늘여놓고,
만원짜리 수십장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니 나올때 연락 꼭 해라 내가 양복 한벌 해줄께 꼭 해라 꼭 해라 꼭해라
연발 하고는 손 흔들며 집으로 가버렸다.
물론, 전역하고 연락하진 않았다.
평범한 대학생이 연락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세계의 사람 같았고,
결정적으로 그 형의 전화번호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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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좀 길었습니다;;
그냥 썰이라서 심심할 때 읽어 보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