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있으며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확실하게 선보일 영화만도 현재로서 20여편에 달한다. 가장 성공적인 게임 원작 프랜차이즈인 <레지던트 이블3: 익스팅션>은 이미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다. 감독은 <하이랜더> 시리즈 이후 기억 속에서 잊혀진 호주 감독 러셀 멀케이. MTV는 괴물 창조의 대가인 스탠 윈스턴과 손잡고 <레지던트 이블> 스타일의 호러 게임 <서퍼링>을 영화화할 계획이며,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과 <홍번구>의 당계례 감독은 거부의 딸을 괴물들에게서 구하려는 용병들의 활약을 다룬 게임 <피어 이펙트>를 영화화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2008년은 밀리터리 액션 게임팬들의 스크린 나들이 원년이 될 가능성이 짙다. 밀리터리 액션 장르의 대표작인 <레인보우 식스>는 <새벽의 저주>의 잭 스나이더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이며, 또 다른 걸작 밀리터리 액션 게임 <스플린터 셀>과 <메탈 기어 솔리드> 역시 2008년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고전 게임들의 영화화 움직임도 있다. 한국에서는 <악마성 드라큘라>라는 제목으로 80년대 후반부터 잘 알려진 <캐슬바니아>는 <레지던트 이블>과 <모탈 컴뱃>의 폴 W. S. 앤더슨에 의해 스크린에 옮겨질 예정이고,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들> 역시 영화화가 진행 중이다. <사일런트 힐>로 게임팬들의 환심을 얻은 크리스토퍼 강스는 최근 인터뷰에서 일본 전국시대를 무대로 사무라이와 악귀들의 결투를 다룬 3D 액션게임 <귀무자>를 블록버스터로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게임팬과 영화팬들이 동시에 기다릴 만한 프로젝트는 아마도 <헤일로>와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일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게임기 엑스박스의 첨병이었던 SF 액션게임 <헤일로>는 피터 잭슨이 영화화의 총제작지휘를 맡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팬들을 흥분상태로 몰고간 프로젝트다. 하지만 최근 유니버설과 폭스가 1억달러가 넘어서는 제작비 상승을 감당하지 못해 하차하면서 프로젝트는 잠시 허공에 떠 있는 상태. 그간 루머로만 떠돌던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의 영화화는 더이상 지체되지 않을 듯하다.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지옥판이라 할 만한 <아메리칸 맥기의 앨리스>는 정신착란증적인 이야기와 기괴한 비주얼로 소수의 게임광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온 게임. 애초에 감독으로 내정됐던 웨스 크레이븐이 물러나며 프로젝트의 향방에 먹구름이 꼈지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마커스 니스펠 감독이 바통을 물려받고 <미녀와 뱀파이어>의 사라 미셸 겔러가 앨리스 역으로 출연을 확정지으면서 영화화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한국의 온라인 게임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역시 블리자드와 워너브러더스에 의해 영화화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감독 우에 볼은 여전하다. 우에 볼은 지난 3년간 <하우스 오브 더 데드> <얼론 인 더 다크> <블러드 레인> 등 명작 게임의 판권을 구매해 쓰레기 필름 더미로 재창조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며 게임팬들의 원성을 사온 인물. 이미 우에 볼은 제이슨 스타뎀과 버트 레이놀즈 등의 배우를 데리고 롤플레잉 게임 <던전 시즈>를 바탕으로 한 <왕의 이름으로: 던전 시즈 테일>의 촬영을 끝마쳤으며, 현재는 동명 게임을 원작으로 한 <포스탈>을 촬영 중이다. 우에 볼은 “<펄프 픽션>과 <폴링 다운>이 합쳐진 작품이 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밝히고 있지만 ‘우에 볼 안티사이트’(www.uwebollsucks.com, 최근 문을 닫았다)까지 운영하며 제작 중단을 촉구해온 게임팬들의 신뢰는 이미 떠난 지 오래다. 자신의 악명을 잘 알고 있는 우에 볼은 최근 들어 <파 크라이>를 마지막으로 게임에서 손을 떼겠다는 말로 게임팬들을 회유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소시지 만드는 사람이다. 소시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크리스토퍼 강스 감독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우에 볼이 소시지 만들기에 다시 뛰어들지 않으리란 보장은 결코 없는 듯하다.
게임영화, 성공의 법칙을 발견하다 그로테스크 신천지
[필름 2.0 2006-11-16 18:30] 메일로 보내기 | 프린트
초현실적 이미지 속에 펼쳐진 지옥도의 충격과 공포. 동명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영화화한 <사일런트 힐>은 종래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가뿐히 뛰어넘으며 이 장르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하나의 유령이 할리우드 게임영화 시장을 배회하고 있다. 우베 볼이라는 유령이.” 만듦새가 좋지 않은 게임영화의 출연엔 종종 “우베 볼 때문”이라는 누명 아닌 누명이 따라붙곤 한다. 우베 볼(Uwe Boll) 감독의 이름은 한국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다. <하우스 오브 데드> <블러드레인> <얼론 인 더 다크> <던전시즈> 등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게임소재 영화들을 1년에 한 편씩 양산해내고 있는 “게임영화계의 에드 우드” 우베 볼은, 얼마 전 자신을 비난하는 평론가와 기자들에게 권투시합을 신청한 바 있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유포된 그의 권투시합 중계 동영상을 두고 마이스페이스 닷컴의 한 캐나다 네티즌은 “우베 볼이 이 세상의 (쓸 만한) 게임들을 모조리 영화화해 그 씨를 말려버리기 전에 만국의 영화 노동자들은 결연히 단결해 맞서야 한다”는 덧글을 남겨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케 했다.
우베 볼이 크리스토프 강스의 신작 <사일런트 힐>을 봤다면 “내가 먼저 만들 걸”이라고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저 그런 영화라고 폄하했을까. <사일런트 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베 볼로 말문을 연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사일런트 힐>을 제작한 일본의 코나미(Konami)사는 “우베 볼 같은 감독이 게임에 대한 이해 없이 영화화에 욕심을 품을까봐”라는 재밌는 이유를 들어 영화화 판권을 판매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레지던트 이블>을 제작한 바 있는 명민한 제작자이자 오랜 친구인 사무엘 하디다에게 고무 받은 크리스토프 강스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일런트 힐>을 영화화해야 하는 까닭”에 대한 37분짜리 비디오를 만들어 코나미의 소심한 간부들에게 전달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일런트 힐>이라는 장점 많은 영화를 결코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그리 훌륭하냐고? <사일런트 힐>은 <시민케인>은 아니지만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만큼 소름끼치고 <식스 센스>만큼 영리한 각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만한 파괴적 에너지를 지닌 영화다. 혹자는 이 영화에 대한 로저 에버트의 부정적 견해 “영화라기보다 게임에 가깝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다“를 먼저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사례로 거론되는 <레지던트 이블>에 대해 "<시체들의 새벽>이나 <화성의 유령들>를 참고했지만 <시체들의 새벽>의 좀비만큼 잔인하지도 <화성의 유령들>의 사건들처럼 대단하지도 않다”고 불평했던 전력을 돌이켜보면 그리 귀기울여 들을 만한 지적은 아닌 셈이다. 그의 의견을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오직 단순비교만으로 게임소재 영화의 미덕과 묘미를 전부 설명할 순 없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종래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되풀이해온 몇 가지 취약점들을 뛰어넘으며 대중상업호러영화로 관객과의 접점을 고민하는 데 있어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향후 게임소재 영화를 제작, 연출하려는 사람들은 호러영화로서 드물게 개봉 첫 주 2천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이며 역대 개봉 주 최고의 흥행기록을 거머쥔 <사일런트 힐>을 중요한 연구사례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베 볼은 특히 더 그렇다.
지옥도 사이로 걸어 들어간 소녀
선천적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로즈(라다 미첼)와 크리스토퍼(숀 빈) 부부는 오래 전 기묘한 인연으로 입양한 딸 샤론(조델 퍼랜드)을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기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샤론에게 몽유병 증세가 발견되면서 이 가족의 소박한 행복이 위협받기 시작한다. 샤론의 몽유병은 심각한 수준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고속도로변을 잠옷 바람으로 걷고 있을 정도다. 로즈는 샤론이 몽유병 증세를 겪을 때마다 중얼대는 ‘사일런트 힐’이라는 단어에 실마리가 있을 것으로 보고, 크리스토퍼의 만류를 뿌리친 채 샤론을 데리고 사일런트 힐을 찾아 나선다. 사일런트 힐은 30년 전 일어난 대형화재로 인해 폐허가 된 후 지금은 ‘미국의 유령도시’ 같은 웹사이트에서나 그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의 벽촌 오지마을. 수소문 끝에 드디어 사일런트 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로즈는 갑자기 나타난 눈앞의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만다. 척하면 척이라고, 이쯤 되면 뭔가 심상치 않다. 아니나다를까, 정신을 차린 로즈는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샤론이 사라졌음을 알고 경악한다. 로즈는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지방 경관 시빌(로리 홀든)을 동료삼아 샤론을 찾아 사일런트 힐로 걸어 들어간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잿가루,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함 정도는 문제라고도 할 수도 없다. 난데없이 불길한 사이렌이 울리더니 사일런트 힐의 모습이 통째로 뒤흔들려 녹아내리며 지옥도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척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괴물들이 마치 눅눅한 습기마냥 대기로부터 스며 올라오기 시작한다. 숨이 탁 막힐 듯 정수리를 관통해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드는 공포의 냄새. 도망갈 데도, 방어할 무기도 없다. 놈들이 하나둘 로즈와 시빌의 주위로 차오를 무렵, 크리스토퍼 역시 로즈와 샤론의 자취를 쫓아 사일런트 힐에 도착한다. 그는 사일런트 힐을 잿더미로 몰락시킨 화재와 샤론 사이에 뭔가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30년 전의 사건을 추적해나간다. 이곳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한 가지, 왜 크리스토퍼와 로즈 일행은 똑같이 사일런트 힐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는가.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런 시적인 이유라면 애초 묻지도 않았다.
<환상특급>류의 고전 판타지 TV 시리즈와 오컬트 및 고어영화의 전통을 뒤섞은 이야기 구조. 클라이브 바커 문학의 고약한 악취미를 HR. 기거가 그린 듯 더할 나위 없이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구현해놓은 <사일런트 힐>은 호러 팬들에게는 축복을, 일반 관객들에게는 서스펜스를, 이런 장르에 다소 심드렁한 냉담자들에게까지 깊은 인상을 심어줄 만한 영화다. 게임 모니터를 뛰쳐나온 괴물들의 풍경 너머 펼쳐진 지옥도의 충격과 공포가 롤러코스터처럼 관객을 덮치는 동안, 규범과 질서를 향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영화의 텍스트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청교도 질서에 복수의 칼날을
<사일런트 힐>을 이끄는 주요한 갈등은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과 개인의 대결이다. 여기서 규범은 종교의 형태로 나타나 한층 더 맹목적이고 폭력적인 권력구조를 띠게 되며, 개인의 희생은 호러영화의 장르적 특수성을 빌어 살이 찢기고 얼굴이 타들어가며 유아를 살해하는 강한 수위의 신체훼손을 동반해 구현된다. 여기까지는 현대 호러영화가 일반적으로 고수해온 과격한 표현양식을 감안해볼 때 다소 평범하다 할 만하다. 하지만 잘 만든 게임영화로서의 미덕 이외에 <사일런트 힐>이 갖는 텍스트적 장점은 장르의 전형을 파고들어 뒤집는 가치전복성에 있다. 청교도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력적 제도와 규율이 정상성으로 숭배 받는 사일런트 힐의 사회에서, 모든 갈등을 치유하고 영혼을 달래줄 임무는 공교롭게도 비정상성의 유기체들, 곧 악마와 괴물들에게 맡겨진다. 여기서 사회적 약자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합당한 처우를 받기 위해선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지배자들의 육신을 찢어발겨야 한다. 이 모든 아이러니는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잿빛 불길한 전망에서 비롯된다. <사일런트 힐>은 복수에 관한 절망적 이야기이자 무정부주의를 갈망하는 핏빛 우화다. 신은 부재하고 정의는 강자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편리하게 틀어졌으며 영적 구원 따위는 더욱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하게 망가진 도덕률 위에 거짓 선지자와 자본주의 전사들이 약자를 희롱하는 가운데, 급기야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사회적 강자들을 단죄하는 복수의 이미지는 <크라잉 프리맨>이나 <늑대의 후예들> 같은 크리스토프 강스 감독의 전작들에서도 동일하게 읽히는 맥락이다.
하지만 <사일런트 힐>의 각본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근거가 단순히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에 달려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일런트 힐>이 동명의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사실이다. 게임영화가 게임의 스토리를 단순히 답습하는 데 그쳤거나, 혹은 거꾸로 게임의 지명도를 이용하려 할 뿐 실제 게임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 어떤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는지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보고 들은 바 있다. 굳이 <슈퍼마리오>와 <스트리트 파이터>, <하우스 오브 더 데드>같이 재앙에 가까운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펄프 픽션>의 원안을 쓰고 <킬링 조이>를 연출한 바 있는 로저 에버리의 명민한 각본은 <사일런트 힐>을 어느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창조적 텍스트로 완성시킨다. 그는 공공연한 히트작인 게임의 세계관과 캐릭터들을 빌려와 펼쳐놓고 독창적인 이야기 변용을 통해 게임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게임의 명성에서 얻을 수 있는 아우라 중 취할 것은 취하되 하나의 독립된 콘텐츠로서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다. <사일런트 힐>이 보여주는 게임영화로서의 획기적인 가능성에 대해선 이외에도 할 말이 많다. 우리는 <사일런트 힐>과 기존 영화들과의 차이점을 통해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의 성공법칙을 가늠해볼 수 있다.
게임소재 영화, 이렇게 성공한다
새로운 영역에서 영화 소재를 찾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만화가 영감의 원천이라면 게임은 좀 더 실질적인 기획의 보고다. 매우 오래 전부터 게임을 영화화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던 것도, 유독 스토리상의 완결성을 중요시하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들이 주로 영화화돼온 것도 비슷한 단계를 거쳐 기획되는 게임과 영화의 매체 유사성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벤치마킹 모델 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숱한 실패사례만을 추가해나갔다. 본격 게임영화 시대의 개막을 열었던 록키 모튼, 이나벨 얀켈 연출의 <슈퍼 마리오>(1993) 이후 많은 작품들이 원작 게임의 팬덤 층과 일반 관객들을 아울러 만족시키기는커녕, 영화로서 최소한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채 명멸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 모든 혼돈을 한순간에 정리한 폴 앤더슨의 <레지던트 이블>(2004)은 “원작을 뛰어넘으려 하지 말고, 하나의 팬픽을 완성해나가는 기분으로 임해야 한다”는 제작자 사무엘 하디드의 원칙에 입각, 본래 충실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었던 원작에 새로운 캐릭터와 음모론을 가미한 이야기의 줄기, 화려한 액션 신을 추가해 완성됐다. 사무엘 하디드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사일런트 힐>은 <레지던트 이블>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미덕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몇 가지 부분에서 더 나은 고민의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사일런트 힐>에 이르러 명확해진 게임영화의 성공법칙은 적절한 이야기 변용, 비주얼에 대한 고민, 인력구성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이야기다. 성공적인 게임영화는 팬들에게 기시감과 새로움의 미덕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당신이 눈치 빠른 게임 팬이라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사일런트 힐>은 게임의 스토리를 무턱대고 답습하거나 원작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일런트 힐 1’의 기본 스토리에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교체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함으로써 악의 주체를 교묘하게 변형시키며, 정치사회적 은유를 실어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원작과 동일한 사건 동기와 시빌, 달리아 같은 원년 캐릭터를 등장시켜 게임 팬들을 만족시키는 한편, 모성에 입각한 신파 코드를 동력으로 액션 활극이었던 원작과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영화를 독해하는 데 있어 원작 게임의 플레이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오히려 게임의 골수팬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스토리가 일종의 맥거핀으로 작용하면서 등장인물과 사건이 얽히고설키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은 영화의 텍스트를 좀 더 농밀하고 단단하게 보충해주지만, 그 자체를 들어 영화 전체를 어림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소 헐거운 듯 모호한 스토리텔링도 <사일런트 힐>의 주된 전략이다. 설명이 부족한 맥락과 관계의 전후 사정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토론의 유희를 즐기게끔 이끈다. 예를 들어 이제 막 상영관을 나선 당신은 크리스토퍼와 로즈가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나, 그에 대한 합리적 각주를 발견하기 위해 논의할 수 있다. 샤론과 사일런트 힐의 관계가 30년이라는 물리적 시간 차이를 감안할 때도 설명이 가능한지 따위의 지엽적인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구멍 뚫린 내러티브는 만듦새가 좋지 않은 영화 속에서 발견되지만, 영리한 영화의 각본은 의도적으로 설명을 배제함으로써 관객에게 더 많은 판단과 결정의 권리를 떠맡기기 마련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때, <사일런트 힐>은 여실히 후자 쪽에 속하는 작품이다.
두 번째는 비주얼이다. 성공적인 게임영화는 원작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풍경들을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재현하는데, 이는 팬덤 층의 기시감 획득에 큰 영향을 끼친다. <블레이드> 시리즈의 프로덕션디자이너 캐롤 스피어는 107개의 세트와 정교한 CG를 통해 원작의 분위기를 십분 살린 지옥도를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1970년대 실제 존재했던 사일런트 힐, 현재의 사일런트 힐, 잿더미로 쌓여 있는 사일런트 힐, 괴물들이 출몰하는 사일런트 힐,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네 가지 세계가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구별된다. 더불어 <사일런트 힐>에 등장하는 괴물 크리쳐들은 원작이 아닌 게임 ‘사일런트 힐 2’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영화의 분위기에 더 어울린다는 이유로 채택된 이들 크리쳐 캐릭터들은, <사일런트 힐>이 무조건적인 원작의 재현보다 독립된 콘텐츠로서의 완성도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면도칼을 들고 다니는 어둠의 간호사들(원작에서는 파이프를 들고 다닌다)과 거대한 삼각두를 가지고 있는 ‘레드 피라미드’의 등장은 반가움과 함께 공포를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효과적인 연출, 제작진의 인력구성에 대한 조명 없이 앞서 설명한 모든 미덕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크리스토프 강스의 효과적인 연출과 로저 에버리의 솜씨 좋은 시나리오, 사무엘 하디드의 경험에 근거한 제작지휘가 없었다면 이 재미있는 영화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크라잉 프리맨> 때 일본 원작만화를 영화화해본 경력을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프 강스는 영화광 출신으로 잘 알려진 감독이기도 하다. 사무엘 하디드(<레지던트 이블>을 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디드는 B무비 전문제작자로 통했다)와 크리스토프 강스의 인연은 일찍이 1982년 파리영화축제에서부터 시작됐다. 크레딧에 등장하지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제작에 참여했던 <이블데드>(샘 레이미, 1981)의 상영차 파리에 머물고 있던 사무엘 하디드는 일곱 살 터울의 열혈 영화청년 크리스토프 강스를 만나 “호러의 이름으로 대동단결하자”며 의기투합한다. 이후 그들은 브라이언 유즈나, 가네코 슈스케, 크리스토프 강스가 공동 연출한 다국적 옴니버스 호러영화 <공포의 이블데드>(원제 <네크로노미콘>)와 <크라잉 프리맨> <늑대의 후예들>을 모두 함께 작업하며 인연을 이어갔다. <사일런트 힐>을 만드는 데 있어 <크라잉 프리맨>에서 함께 작업한 바 있는 로저 에버리와의 동업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자 연출가이면서 동시에 공공연한 게임광인 로저 에버리는 크리스토프 강스, 사무엘 하디드와 작당해 변두리 호프집에서 싸구려 맥주를 들이키며 <사일런트 힐>의 가장 기초적인 제작단계서부터 함께했다. ‘사일런트 힐 2’를 인생 최고의 게임으로 꼽는다는 에버리의 각본이 훌륭하지 않기란 우베 볼의 차기작에서 360도 회전 저속촬영 총격 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게임영화의 새로운 이정표
만화를 영화로 옮기는 일, 게임을 영화로 옮기는 일,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일 모두 대단히 많은 노력과 고민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독해 방법에서부터 소비 이후의 존재 형태에 이르기까지 서로 완벽하게 다른 매체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서의 성공적인 스토리텔링이나 연출상의 완성도가 다른 한쪽에서 역시 유효하리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원작에 대한 입체적 이해와 매체의 전환에 따른 콘텐츠 변용에 있어 각각의 사례에 걸맞는 확고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 매체를 이동했을 때 발생하는 이야기 부재 혹은 과잉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또 기존 팬들에게 기시감을 넘어서는 새로운 즐거움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일런트 힐>은 그간 실패를 거듭해온 게임소재 영화시장에서 <레지던트 이블>과 함께 긍정적인 벤치마킹 사례가 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사일런트 힐>이 대중호러장르의 화법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추이를 보였듯, 잘 만들어진 게임영화는 영화 콘텐츠 본연의 미학적, 장르적 완성도를 자연스레 획득한다. 사일런트 힐에서 벌어진 이 불운한 디스토피아 비극은 대책 없이 파괴적인 감수성과 염세주의에도 불구하고 현실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셈이다. 허지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