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존말코비치를 이해하기 위한 힌트는 소통의 단절성인것 같습니다. 이미 영화 바벨에서도 경험한적 있듯이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도 세상과의 교묘한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존쿠삭의 인형극과 카메론디아즈의 동물에 대한 애착, 캐서린의 이해타산적인 성격과 성도착증에 빠진 박사....심지어 존말코비치마저 그의 유명세로 인해 그는 사람들과 제한된 대화와 생활밖에 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잘못된 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정의해 볼 수 도 있겠지요.
이것들은 단순한 소통의 상실뿐만이 아니라 남을 해치고자 하는 공격성으로까지의 발전. 타인의 시각을 차지하고자 하는 엿보기의 심리에서 일그러진 동성애로의 집착, 숨겨진 폭력성과 광기, 이 영화는 인간의 많은 어두운 면을 은근히 들이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느낌은 참으로 어둡고 우울했습니다. 아마 소통의 상실은 이 모든 것들을 발견하게 하는 어떤 지독한 영감과 같은가 봅니다.
이 모든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 관객들을 농락하는(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는 화려함과 추악함이 동시에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예술이기보다는 스스로의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사적인 도주의 예술. 하지만 도주하고 외면할 수록 그 모든 것이 얼룩지고 퇴폐해 가는 것은 그것은 스스로의 예술의 원천이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과나무의 뿌리에서 사과가 나고 무화과 나무의 뿌리에서 무화과가 나듯이 절망의 뿌리에선 추악한 욕망의 냄새가 날뿐입니다. 찰리카우프만의 또다른 각본작 이터널선샤인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의 존재가 없었습니다.
유명인(존말코비치)이 되고 싶어하는 또한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가두고 사랑받는 존재(존쿠삭이 들어간 말코비치)가 되고자 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한 세상에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밤에 별이 흐르고 어둠이 흐릅니다. 오늘도 절망과 광기의 세상을 덮으고 세상이 잠을 자는것 같습니다. 그 안에 다른 사람의 생명에 기생하고자 하는 수많은 귀신이 살고 있습니다. 내가 내가 될 수 없는 존재적 모순에 휩싸여 우리 현대인들은 누군가의 모습이 되기 위해 나의 모습을 잊어만 갑니다.
지금 우주에서 빛나는 21세기 지구의 빛은 아마도 검은 욕망이 들끓고 있는 존재의 상실의 빛깔이 아닐까 싶네요. 어쩌면 아무 빛도 없는 공허함일지도....유명한 책 제목이 생각나네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책은 읽어보지 않아서 내용까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_-) 거기에 존말코비치되기라는 영화가 욕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것 같네요. 그 위에 전
이렇게 덧붙이고 싶네요. 이렇게 살아선 안되지 않을까....그리고 고 정다빈씨의 미니홈피에 있던 일촌평을 붙여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욕망과 상실의 시대. 이렇게 살아선 안되지 않을까. (힘들어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