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글은 egloos에서 활동중인 wideawake님의 블로그 ordinary story에서 발췌한 글임을 밝힙니다.
논산 훈련소에 비가 내린다. 저 땅끝 어딘가부터 스멀스멀 땅거미가 기어오고, 점차 검어지는 하늘 자락 너머로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그 지리한 매일의 막바지에서, 나는 앞섶에 품은 편지 한 장을 문득 떠올린다. 한달이란 훈련 기간은 짧되, 사회서 떨어진 이*일간의 유배는 너무도 길기만 하다. 아, 정말이지 나는, 이젠 참기 힘들다 하리만치 오래 영화와 떨어져 있었다. 그저 나는 죽었소 복창하기엔 충분하도록 길고 더럭 생각의 끈을 놓아버리기엔 조바심나게 짧은 기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상상하고 또 상상해보는 일 뿐. 내무실 창문 밖으로 어둠을 덧칠하는 빗소리 가운데서, 그저 고맙기만 한 이들이 편지에 띄워준 영화 잡지의 조각조각을 끼워맞춘다. 와이드스크린 위에서 상영될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를 떠올리고,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신작을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을 억누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적인 흥분으로 기다려왔던 잭 스나이더의 '300' 속 전장의 풍경을 그려본다. 지금으로선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스크린 속의 황홀경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결코 올 것 같지 않던 4월이 왔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휙휙 지나쳐가는 바깥 세상은 잠시도 멈춰서 기다려주지 않았고, 나는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그리고 '파운틴'을 극장에서 볼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아아 비정한 사회여, 안타까운 시간이여. 진정 울려고 내가 나왔더란 말이냐.
하지만 여기서 잠시, 눈물을 거두고 돌아보자니, 오호라, 아직도 '300' 만은, 잭 스나이더의 전사 300인은 여전히도 박스오피스 정상에 우뚝 선 채 뒤늦게 도착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 옛날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그랬던 것처럼, 죽음도 물러세울 수 없는 기세를 드높인 채. 그 흩날리는 핏빛 망토 자락이, 서슬 푸른 창날 빛이 문득 아찔하게 눈을 찔러든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신화를 아직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황홀할 뿐.
'300'을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에 한발 늦게 와 닿으면서 가장 먼저 당황했던 사실은, 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혹은 무의식중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서구 우월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페르시아는 당시 유럽 국가들보다 월등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고,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과 일그러진 괴물들로 그려진 그들의 이미지는 백인 우월주의의 투영에 다름아니라는 것, 또 약자를 외면하는 불평등과 철저한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스파르타의 싸움은 어리석은 파시즘일 뿐 자유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분명 '300'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에는 그러한 면들이 있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300'의 시선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지 모른다. 거기에다 그러한 거친 면들을 순화시키기엔 시나리오는 단순무식하기 짝이 없으며, 대사들은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극을 지배하는 논리는 편협하기 그지없다. 아마 우리가 아는 어느 다른 감독이 다른 식의 이야기로 이 소재를 풀어냈다면 모든 이가 받아들이기에 좀더 껄끄럽지 않은 작품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편으로 옮겨와 말하자면, 오히려 그러하기에 잭 스나이더의 '300'은, 역설적이게도 비로소 이 모든 논쟁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뮤직 비디오계에서 잔뼈가 굵어온 신예 '영화' 감독 잭 스나이더, 그는 데뷔작 '시체들의 새벽' 리메이크판에서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했다. 스스로가 충분하도록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써먹을 수 있는 영상을 다루는 기술을, 최대한의 재미를 위해 써먹는다. 거기에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이유 따위는 필요없다. 그저 관객들을 스크린 속으로 단숨에 빠뜨리는 것. 그에게 영상은 그 자체로 목적일 뿐, 그 어떤 수단이 아니다. 간혹 어느 식자들인가 로메로가 일구어낸 좀비의 메타포를 정신없는 속도 속에 함몰시켰다 비난했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의미란 결국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후대 사람들이 붙이는 것. 내 생각에 그는 그저 로메로의 헤모글로빈 난무하는 좀비 세계가 미치도록 즐거웠던 것 뿐이다. 자기 식대로 재창조한 그 세계가 지금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마찬가지로 '300'의 세계 속에 들어선 그에게 이 세계를 둘러싼 그 어떤 정치적인 논쟁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속에 들끓는 하드보일드한 정서를, 300명의 전사들의 신화를 스크린에 옮겨 놓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그가 청소년기부터 사랑해 마지않았다는, 또 '시체들의 새벽' 이전부터 영화화를 꿈꾸어 왔다는 '300'의 전장 위에서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우직하다.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극의 매무새를 손보기보다는, 원작 그대로를 밀고 나간다. 영화화를 위해 원작에 없는 요소를 덧붙이는 데 있어, 그는 딱 할 만큼만 한다. 이 신화를 품기에 걸맞는 두 시간 가량의 러닝 타임, 정확히 그 정도만큼만 이야기의 살을 불려둔다. 너무나 '그래도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어?' 라는 식의, 성의없어 보일 정도의 툭 던지고 빠지기. 그래, 그리고 그 나머지는? 당연히도, 오로지 이 전장의 풍경을 전시하는데 그대로 쏟아붓는다. 페르시아 대군과 맞선 300인의 스파르타 전사들, 잭 스나이더의 카메라가 춤추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창날과 검끝이 충돌하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친다. 뼈가 바수어지고 살점이 썰려나가며 핏줄기가 사위를 물들인다. 죽음과 영광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칠 것 없이 뻗어나가는 검무 위로 지축을 뒤흔드는 헤비메틀의 굉음과 끝을 모르는 카메라 워킹.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을 황홀한 비주얼의 전시, 보이는가. 프랭크 밀러가 종이 위에 그려냈던 세계가, 그 흥분 그대로 스크린 위에서 살아 움직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300'은 결코 잘 만들어진 서사시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그 어느 감독이 '300'을 다른 의도로, 어떤 종류의 또 다른 철학을 담아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역사 속에서 자유를 위해 싸운 전사들을 말하는 좀더 근사한 서사극이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그 극의 화법이 매끄러울수록, 그 속에서 자유니 영광이니 하는 이름이 영리하게 포장될수록, 그 때에야 비로소 '300'은 정말이지 가증스런 서구 우월주의를 가득 담은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거야말로 프랭크 밀러의 '300'이 아닌. 그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리라. 나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300'의 한국어판을 발견한 서점에서 선 자리 그대로 그 책을 읽어치웠다. 그 넓은 프레임에 가득 펼쳐진 정서란 것은 적어도 그 어떤 편가르기가 아닌, 단지 검 한자루에 영광을 걸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내들이 토해내는 숨소리였다. 단 300명의 전사들이 수백만 대군을 상대로 그들이 믿는 바를 한치도 굽히지 않는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정서, 그건 우리가 영웅담과 서사시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쾌감이다. 거기에 그 어떤 종류의 우월주의가 있는가? 편협합이라 부를 것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있는가? 나는 거기에 그런 것은 없다 라고 말하겠다. '300'의 지나치도록 단순한 선악구분이 역겨운가? 그대는 왜 그토록 명쾌한 구분이 환기시키는 그토록 명징한 감정은 보지 못하는가. 잭 스나이더가 최고의 비주얼과 동시에 정치적으로 공정해지길 바라는가. 그건 흡사 켄 로치에게 왜 그런 시선을 지녔으면서 흥행영화를 찍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그건 이미 잭 스나이더의 영화가, '300'이 아니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엔딩 크레딧의 거친 아트웍처럼, 잭 스나이더가 '300'을 통해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은 간명할 뿐이다. 흙먼지 자욱한 거칠은 땅 위에 솟구치는 핏방울의 뜨거움을, 검과 방패를 들어올린 전사들의 팽창된 근육을, 죽음과 맞닿는 순간에도 영광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외치는, 죽어가는 사내들의 한껏 폭발하는 하드보일드를 즐겨라. '300'의 전장은 단지 그러한 곳으로 충분하다. 이곳은 그럴 준비가 된, 그대를 위한 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