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이제는 경제의 중심에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 그 중심에 서 있다.
사람이 유쾌하고 즐겁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위하여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신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하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의 탐욕을 위해 존재하며,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부리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미국의 금권을 거머 쥔 월가에서 '보너스 상한제 제한' 문제로 또 한번 도덕적 해이 논란이 일고 있는 모양이다. 상품 내역 속에 전문적으로 프로그래밍화 되어 있는 첨단자료들로 각각 사람들의 질병과 평균적 수명 등이 상세히 DB화 되고, 고도로 산술화되어 보험금 지급과 수납이 차등적으로 적용되는 특수 프로그램들이 개발되고 있다고 한다. 결국 더 많이 내고 더 적게 지불하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이에 대한 도덕적 해이 문제를 를 지적하며 천문학적으로 높은 보험사들의 보너스 지급문제를 동시에 거론하자, 월가의 반응은 능청스러울 정도로 어이가 없다. 이러한 지적을 가리켜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망언을 내뱉은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포기한 것은 사실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윤리의식인 것이고, 노블리스 오블리주인 것이며, 그들이 선택한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조화된 매트릭스이고,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금권과 탐욕의 이미 승자가 정해진 게임의 룰인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은 피와도 같다. 이것은 마치 신체에 흐르는 혈액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두뇌처럼 피를 더 많이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 또한 심장처럼 피를 더 많이 공급하는 기관도 있다. 핵심은 경제의 패가 마치 우리 몸의 혈액처럼 잘 순환될 때, 그 몸은, 그 국가는 가장 건강한 것이고, 그 국민은 가장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피가 한쪽에 몰리기 시작하거나, 혈관에 기름이 끼면 마치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처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처럼 그 패에 심각한 문제점들을 깨닫게 되면 수정 보완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수정하고 고치지 않으면 몸 전체가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자신들의 탐욕이 전혀 문제가 없으니 너희들은 계속 수탈을 당해야 하고, 자신들은 더 많은 피를 필요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당위성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정의인 것이다. 이것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다리 걷어차기'의 현실적 단면을 입증한 사례일 것이다.
과연 유태인들 아니 유태자본마저도 역사의 피해자들이었을까? 난 가끔씩 그들의 말과 그들이 제작하는 수 많은 영화들과 책들, 여러가지 주지적 관념들에서, 끊임없이 유태인들이 피해자라로만 등장하는 일들에 회의가 일곤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몇 년 살다가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도, 그것이 비단 일부라 할지라도, 가끔씩 동조하는 평균적인 사람들의 의견은 지극히 배타적이며, 타민족을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들의 집단적 극우적인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유태인들의 피해망상의 왜곡된 애정일지도 모르며, 이것이 빚어낸 탐욕의 바벨탑으로써, 월가를 통해 하나의 상징처럼 분출되고, 왜곡되이 정의내어져버린 자본지상주의, 탐욕만능주의의 일그러진 우상일지도 모른다.
전 세계는 지금 유대투기자본과 수 많은 다국적 기업들, 이러한 모델을 따르고 있는, 정글자본주의와 탐욕적 금권의 결탁 아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두려워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하여 이리저리 찾고, 헤매고, 이동하며, 죽지않기 위하여, 돈을 벌기 위하여, 매일매일 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러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져 가는 브레이크 없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수렁에 빠뜨릴 수 밖에 없는 위험한 구조로 이어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전세계 1%가 99%의 부를 축척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죽게 될 것이다.
때문에 한정된 자원 아래 월가의 '보너스 상한제'는 지극히 옳은 것이고, 전세계 금융시장에도 매우 상징적인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력해야 하는 것이지, 이에 대한 반발은 그들의 비인간적 탐욕만능주의를 입증할 뿐이다. 겉 껍데기는 자본주의의 옷을 입고 있으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영주와 농노처럼, 신봉건주의체제로 회귀할 수 밖에 없으며, 거의 반 이상은 이미 신봉건주의 체제로 보여진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뺏고 빼앗는 구조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더 많이 가진자와 못가진자, 더 많이 아는자와 알지 못하는 자, 더 똑똑한자와 똑똑하지 못한 자간의 소유의 차이가 발생한다. 이러한 비대칭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공공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자신들의 무책임한 탐욕으로 인해 타인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를 오히려 즐기고, 당연시 여기는 월가의 모럴 해저드와 가끔씩 내뱉는 집단적 망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마치 거대한 물결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간이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 찬 괴물이 되어가기를 요구하거나, 이를 마치 성공의 미덕처럼 당연시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그들은 언제쯤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언제쯤 탐욕에서 벗어나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가끔씩 거울을 본다. 이율 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우리는...과연 인간일까? 아니면 나도..우리도.. 그들을 따라가고 있고, 두려움에 짓눌려 따라갈 수 밖에 없는...그러다 점점 더 괴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은 내가 괴물처럼 보인다.
나는 괴물같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지 않고, 나보다 더한 괴물을 낳아 기르고, 가르치고, 1등이 되라 교육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으며, 인간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것이 진정 바라는 자유지만, 그 자유를 누릴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 나와 우리의 가장 큰 딜레마일 것이고, 저들과 같이 괴물이 되기를 바라고, 길들여지기를 종용하는, 우리가 갇혀버린 매트릭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