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
새해가 되자 집세도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마저 올랐지만 일당은 여전히 그대로다.
좋아하는 것들이 비싸지는 세상에서 포기한 건 단 하나, 바로 ‘집’.
집만 없을 뿐 일도 사랑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가 시작된다!
'또?'라는 말이 절로 나올지도 모르겠다. 재벌&금수저들의 갑질만큼이나 88만원 세대들의 고충도 미디어에 자주 다뤄지고 있다. 큰 고민없이 악랄하게만 그려지는 스테레오 타입의 재벌 악역들에게 질린만큼, 해답없이 불쌍하게만 다루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시선도 이젠 좀 식상해진 게 사실이다. 물론 작년의 '7호실'이나 얼마 전 개봉한 '염력'처럼 을을 둘러싼 이야기를 뒤튼 블랙 코미디들도 있었으나 대중들의 외면을 받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나온 '소공녀'는 그래서 반갑다. 근래 만난 한국 블랙 코미디들 중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사랑스러우며, 가장 씁쓸하기도 하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소설 '소공녀'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녀 '새라'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 또한 그러하다. 5만원의 월세 때문에 방을 뺄지라도, 한 모금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 남자친구 한솔이만 있으면 행복하다. 이런 미소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하다. 그녀가 돌아가며 잠을 청하는 밴드 멤버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친구 한솔이도 그렇다. 모두들 현재를 살아가기도 벅찬데, 미소는 언제나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집도 없이 매일 밤을 전전하면서도 담배와 위스키를 즐기는 미소의 모습은 때로는 답답해보이기도 하고 한심해보이기도 한다. 극 중 표현에 따르면 염치가 없어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정작 영화 속에서 가장 행복해보이는 인물도 아이러니하게 미소다. 미소는 삶의 우선 순위가 확실하다. 그래서 온전히 행복하고, 늘 미소를 짓는다. 정작 그녀를 걱정하는 친구들은 어딘가 결핍되어 보인다. 쉬는 시간에 포도당 주사를 맞아야할만큼 업무에 시달리고, 시부모의 등쌀에 지치고, 이혼의 아픔에 몸부림치고, 부유하지만 억압적인 삶을 산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가진 사람은 미소 밖에 없어 보인다. 당장 잘 곳이 없을지라도, 그녀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현실의 잣대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던 미소는 남자친구인 한솔이의 결심에 흔들린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한솔이를 미소는 끝내 말리지 않는다. 그녀의 삶의 축 하나가 통째로 빠져나갈지라도, 그것 또한 사랑하는 한솔이의 삶이니까 말이다. 미소는 잘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잘 아는 것 같다. 자신에게 3가지면 충분하듯이, 한솔이에겐 인정받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준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미소는 비굴해보이지도 않고, 궁핍해보이지도 않는다. 굳이 가난을 자극적으로 그려내지도, 그렇다고 어설프게 공감하려 들거나 가르치려 들지도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누리고 산다' 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을 미소의 한 모금 담배 연기로 말없이 대신할 뿐이다.
'소공녀'는 미소가 보낸 며칠밤의 여정을 통해 삶에 대한 질문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던져본다. 행복은 각자의 선택이고 각자의 인생이다. 미소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려도, 눈붙일 방 한 칸 없어도 한 모금의 담배와 한 잔의 위스키를 택했다. 그래서 미소의 이상은 지금 현실에서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기에, 영화는 사랑스러우면서도 씁쓸하다. 미소처럼 미소짓는 방법은 누구나 알지만, 그녀의 선택을 따르기에는 망설여지는 게 현실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미소를 생각하며 미소짓는 밴드 멤버들처럼 현실의 무게감은 잠시 내려놓고 이 영화와 미소의 미소를 떠올린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이솜의 미소, 미소의 이 미소는 따스하게 토닥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