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 투톱’ 둔 야권 두려울 게 없다?
--시사인--
서울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이렇다 할 후보군조차 꼽기 힘들던 범야권에 돌연 인물이 뜨고 여론이 모인다. 철옹성 같던 오세훈 시장을 상대로 ‘이기는 카드’가 속속 나온다. ‘노무현의 유산’이다.
[91호] 2009년 06월 09일 (화) 15:48:38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유시민과 한명숙은 ‘노무현의 유산’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두 사람이 범야권의 대안으로 떠오른다. 지난해 2월 봉하마을 귀향 환영행사에서 당시 노 대통령과 손을 맞잡은 유시민 전 장관(왼쪽 사진 오른쪽). 2006년 당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국무회의장에 들어서는 한명숙 총리(오른쪽 사진 왼쪽).서울에 ‘노무현 후폭풍’이 상륙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가릴 것 없이 휩쓸어버릴 기세다. <시사in>과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가 공동으로 실시한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의 서울시장 예비 후보군 1, 2, 3위를 ‘친노 인사’가 싹쓸이했다. 그간 한손에 꼽기도 썰렁했던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군이 돌연 풍성해졌다.
현역인 오세훈 서울시장(한나라당)을 상대로 실시한 여섯 차례의 가상대결에서도 범야권 예비 후보 여섯 명 중 세 명이 오 시장을 꺾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한나라당의 최고 카드를 상대로 우세를 보이는 범야권 카드가 세 장이나 있다는 얘기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하던 결과다. 인지도에서 압도적이기 마련인 현직 자치단체장이 선거를 1년이나 앞두고 ‘3승3패’라는 위태로운 성적표를 받아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인물난을 겪는 민주당과의 본선보다 당내 경선을 더 신경 쓰던 오 시장도 이제는 재선 전략을 수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한나라당의 한 참모는 <시사in>이 가상대결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많이 따라잡혔겠지만 그래도 오 시장이 이기기는 할 것이다. 격차가 원체 컸다. 지금 시점에서는 현직이 크게 이겨야 본선에 가도 해볼 만한 거다”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노무현 후폭풍이 참모들의 예측 범위조차 벗어난다는 얘기다.
‘3승3패’ 오세훈 시장, 재선가도에 빨간불
우선은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누구를 선호하는지 물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정국에서 ‘친노의 적자’로 등극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9.2%의 지지를 받아 1위를 차지했다<표 1>. 민주당 지지층만을 따로 떼놓고 보면 48.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지지자 등 개혁 성향의 응답자들 역시 유 전 장관에게 지지를 몰아줬다. 전선이 선명히 그어진다면, ‘반mb’ 성향의 표가 유 전 장관으로 모이는 응집력이 대단할 것임을 짐작게 한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아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했던 한명숙 전 총리 역시 존재감이 확 달라졌다. 전체 응답자 중 20.6%의 지지로 선호도 2위를 차지했다.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는 23%가 한 전 총리를 택했다. 한 전 총리는 친노 핵심 인사이면서도 강성 이미지가 없고 보수 유권자들의 거부감도 적은 편이다. 한나라당·자유선진당 지지자들에게도 각각 19.4%, 35.1%의 후한 점수를 얻으며 유 전 장관에 비해 ‘안티층이 적다’는 장점이 다시 확인됐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섰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8.9%의 지지를 받아 뒤를 이었다. 1위부터 3위까지를 친노 인사가 독식한 셈이다. 특히 그간 서울시장 여론조사에서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던 유시민·한명숙 두 이름이 응답자의 절반을 싹쓸이한 것을 두고는 ‘노무현 후폭풍’ 외에 다른 해석이 쉽지 않다.
친노 이외의 민주당 인사로는 추미애 의원이 6.6%의 지지를 얻어 체면치레를 했다. 추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정동영 의원과 더불어 차기 후보감으로 치켜세울 만큼 인정받는 인물이었지만, 분당과 탄핵을 거치며 노 전 대통령과 척을 졌던 경력이 지금의 추모 정국에서는 부담이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범야권 잠재 후보군’으로 분류되는 정운찬 서울대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는 의외로 낮은 지지도에 머물렀다. 정 교수가 5.1%, 박 변호사는 3.9%의 지지를 얻어 고만고만하다. 기존 민주당 후보군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안을 갈구하던 여론이 노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친노 인사들에게 쏠리는 현상이 일어났는데, 그 와중에 정 교수와 박 변호사 같은 기존 ‘대체 후보군’이 여론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결과가 있다. 민주당 유력 후보를 묻는 조사에서 모름/무응답 비율이 21.1%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나라당 후보군을 상대로 한 같은 조사에서 모름/무응답 비율이 36.1%나 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전의 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인물난을 반영하듯 모름/무응답 비율이 한나라당보다 높게 나오곤 했는데, 이번 조사에서 그런 추세가 역전된 것이다. “탄핵과 17대 총선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에 장이 섰다. 인물이 뜨고 여론도 몰린다”라고 말하는 한 민주당 의원의 목소리에서 오랜만에 자신감이 느껴진다.
민주당 내 유력 인사와 ‘범야권 잠재 후보군’으로 자천타천 거론되는 인사 여섯 명을 추려 현직인 오세훈 시장, 사실상 서울시장 출마를 공언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와 3자 가상대결을 시켜봤다<표 2>. 유시민·한명숙 ‘친노 투톱’과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까지 세 명이 7~10%포인트 차이로 오 시장을 제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10~15%의 지지율을 가져가는데도 결과가 그랬다.
선명한 유시민, 안티 없는 한명숙 ‘투톱’
유 전 장관을 집어넣은 3자 가상대결 결과는 과연 그의 캐릭터대로 선명했다. 호불호가 명확히 갈렸다. 유 전 장관은 45.9%의 지지를 얻어 가상대결을 한 범야권 예비 후보군 6명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노회찬 대표는 10.8%로 가상대결 6회 가운데 가장 저조했고, 모름/무응답도 5.2%에 불과해 가장 낮았다. 반면 오세훈 시장도 38.2%를 얻어 패배한 가상대결 세 번 중에서는 가장 높았다. 유 전 장관이 진보 진영과 부동층의 표를 흡수하는 데 가장 좋은 카드지만, 반대로 한나라당 지지층의 결집 역시 자극한다는 결과다.
한명숙 전 총리 역시 캐릭터대로 ‘부드럽게’ 오 시장을 눌렀다. 성별·연령별·직업별로 나눠보면, 한 전 총리는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 유 전 장관에 비해 고르게 지지를 얻었다. 전체적으로도 43.8%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오 시장을 33.8%까지 주저앉혔다. 오 시장의 이 지지율은 여섯 차례 가상대결 중 가장 낮다. 그 결과 한 전 총리는 오 시장을 10% 포인트라는 가장 큰 차이로 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여성 유권자에게 강세를 보여온 오 시장이지만, 한 총리와의 가상대결에서만은 여성 표를 상대로도 힘을 못 썼다. 여섯 차례 가상대결 중 오 시장의 여성 지지율이 남성 지지율보다 높지 않은 경우는 한 전 총리를 상대로 할 때가 유일하다(남성 33.8%, 여성 33.8%).
‘유·한 투톱’은 서거 정국의 직접 수혜자다. 현재의 지지율 역전 현상이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일시적·감정적 현상이라고 믿는 한나라당은 “추모 분위기가 가라앉은 1년 후에 치러지는 지자체 선거에서는 기존 구도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노무현 후폭풍과는 직접 연관이 없는 손석희 교수에게까지 패배한 것은 맥락이 다르다. 손 교수는 정치권의 제안을 거듭 고사해온 것으로 알려졌지만,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범야권 잠재 후보군의 대표주자로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린다.
손 교수의 ‘파괴력’을 증명한 이번 조사가 그 이유를 대변한다. 손 교수는 응답자 중 42.3%의 지지를 얻어 35.3%에 그친 오 시장을 7% 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출구를 찾고 있는 기층의 ‘반mb 정서’가 손석희라는 ‘맨파워’를 만나서 방향성 있는 여론으로 형성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손 교수와 함께 ‘잠재 후보군 3총사’로 꼽혀온 정운찬 서울대 교수와 박원순 변호사는 각각 오 시장에게 5.2% 포인트, 12.5% 포인트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모 정국 이전까지 민주당의 유력한 후보였던 추미애 의원은 오 시장에 12% 포인트 뒤졌다. ‘노무현 효과’가 범야권 전체에 동반 상승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친노 직계에게만 선별적으로 *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다. 2010년 지자체 선거일인 6월2일과 노 전 대통령 서거 일주기인 5월23일이 불과 열흘 차이라는 점도 친노 진영에 도움이 되는 변수다.
어떤 가상대결 결과를 봐도 오 시장은 ‘한나라당 고정 지지율’인 30%대 중반을 지켜냈다. ‘노무현 효과’는 한나라당 지지층을 끌어온 것이 아니라 부동층과 진보 진영을 흡수하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얘기다. 파괴력 있는 범야권 후보가 등장할 때 노회찬 대표의 지지율은 어김없이 10%대로 떨어졌고, 모름/무응답 비율은 7%를 넘지 않았다.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는 “모름/무응답 비율은 선거운동 기간이 돼야 10% 아래로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다. 모름/무응답률이 한 자릿수로 나온다는 건 유권자가 지금 사실상 선거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로 봐도 된다. 텔레비전 시청률도, 인터넷 사이트 방문자 수도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명하듯 치솟고 있다”라고 말했다.
때 아닌 ‘정치의 계절’이다. 선거가 없는 2009년을 국정 강공 드라이브의 마지막 기회로 생각했던 이명박 정부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문제는 연속성이다. 지금의 거센 여론 흐름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가 정치권의 관심사다. 이택수 대표는 “2006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지자체 선*세 도중 피습당한 사건을 보면, 감성을 자극하는 변수라 해도 2~3개월은 효과가 유지됐다. 일시적 현상인지 구조적 변화인지 고민하기보다는, 민주당에 ‘기회가 주어졌다’고 보는 게 옳다. 앞으로 2~3개월간 민주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지지율 변동이 일시적 현상일지 고착화될지가 갈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민주당, ‘뜨거운 감자’ 유시민을 어쩌나
그간 껄끄러운 관계였던 몇몇 친노 인사를 끌어안는 정치력을 보일 수 있을지가 민주당의 첫 시험대다. 그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하면, 민주당으로 모여든 ‘노무현의 선물’은 다시 부동층으로 날아가버릴 수 있다.
유시민 전 장관은 특히 뜨거운 감자다. 이번 <시사in> 여론조사에서 서울시장 민주당 예비 후보 선호도 1위를 기록하고,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박근혜 의원에 이어 16.1%의 선호도로 대선 후보 2위로까지 뛰어오른 유 전 장관은 정작 현재 민주당원이 아니다. 당 복귀를 두고도 서로 골이 깊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당으로서도 지도부가 선호하는 ‘한명숙 카드’가 있는 이상 유 전 장관에게 크게 집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유 전 장관과 한 전 총리의 ‘캐릭터’가 워낙 이질적이다보니,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동시 출격’을 해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편에서 나온다. 유 전 장관이 ‘친노의 적자’로 대중의 승인과 지지를 받을수록,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고민 역시 깊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