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 기쁨을 주는,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조영래
[인권변호사 조영래]
1947년 대구출생 경기고등학교 3학년 재학중 전국에 모든 고등학생들을
집결시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동한 이유로 정학처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시절 삼성재벌밀수 규탄,6.8부정선거규탄.
3선개헌 반대.교련반대 등을 위한 학생운동 주도
1971년 사법연수원에 있을때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
1년 6개월 복역 후 민청학련사건과 관련 6년동안 피신 .
이 기간동안 전태일평전 집필 (부제: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1980년 3월 수배가 해제되면서 9년만에 사법연수원으로 재입학 .
1982년 변호사 활동 시작 .
1984년 망원동 수재사건의 집단소송 .
1986년 이경숙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
1987년 박길래 사건 (상봉동 진폐증사건) . 장미숙 사건
노동.빈민.공해.학생관련사건등 인권변호에 선구자 . 힘이 없고 돈이 없어
제대로 변호조차 못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변호 .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평전의 에필로그]
한때 우리는 모두 이상주의자였다.
열정과 이상 때문에 목청 돋우어 외쳤고 가슴을 치고 울었다.
걸핏하면 죽음을 생각했고, 시시로 세상의 종말을 들먹거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의 염원 중 극히 일부분만 이루어진다손 치더라도
역사는 엄연히 진보하는 것이 아닌가.
수없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는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고 앞으로
더욱 크게 진보할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 없이도 우리는 살아왔고,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다.
오늘 우리가 먼저 떠난 그의 삶을 아련한 그리움 속에 되새길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일생]
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 당시 고교 3학년인 그는 처녀작 ‘선언문’을 작성하고
국회 앞까지 진출했다. 이 시위 이후 그는 정학당한다.
그는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삼성 재벌의 사카린 밀수, 6·7 부정선거, 박정희의 3선 개헌,학내 교련 실시 등
주요 사태때마다 그는 시위를 주도했다.
70년 11월13일의 전태일 분신은 그의 양심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요란한 산업화의 후미진 뒤안길에서 스스로 불타죽는 극한적 수단 이외에는
신문의 1단 기사로도 관심을 끌 수 없었던 노동 현실...
71년 4월 대선에서 이긴 박정희는 10월15일 전국 대학 서클 해체, 문제학생 1,800명 연행,
300여명에 대한 강제 입영 등을 조치를 취하였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해 있던 조영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주모자로 장기표·심재권·이신범 등과 함께 관제재판을 받고
18개월간 투옥된다.
출옥후 그는 바로 유신 통치의 서슬 푸른 긴급조치와 만난다.
민청학련 주모자로 분류된 그는 기나긴 잠행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도망자의 신분으로 이후 6년을 보낸다.
이때 그는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고 그 철학적·정치적 의미를 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전태일의 수기에 적힌 대로 전태일의 삶을 경험한다.
허리를 펼 수 없는 평화시장 다락방 작업대, 미성년 여성 노동자와의 만남과 대화,
평화시장에서 쌍문동까지의 도보 귀가 등 노동자의 궁핍했던 삶과
그는 점차 일체화되어갔다.
3년 만에 ‘전태일 평전’은 완성됐다.
하지만 이 원고는 출판사를 잡지 못한 채 일본을 떠돌다가 83년에야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출간됐다.
지은이를 밝히지 않은 이 책은 변혁을 꿈꾸는 수많은 이들의 지침서가 됐다.
유신을 구국의 통치로 교육받은 새내기 대학생들의 순결한 양심을 뒤흔들었으며
자신의 몸을 낮추어 스스로 노동현장으로 달려간 ‘80년대 현상’의 나침반이 됐다.
조영래는 죽음 직전까지도 자신이 이 책의 저자임을 밝히지 않았다.
77년 11월 전태일 7주기를 기해 발표된 장시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바친 헌사였다.
당시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이 구속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활동공간인 ‘노동교실’이
강제 폐쇄되는 등 고난의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서림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당국의 용공조작과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김지하가 재수감돼
사형 위기에 빠지자 조영래는 감옥 안의 김지하로 변신, 그의 이름으로 양심선언문을 쓴다.
후에 국제사회의 지식인들이 김지하 구명운동에 나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명문은 조영래 사후에야 그의 작품으로 밝혀졌다.
80년 서울의 봄과 동시에 복권된 조영래는 수배생활 내내 그의 곁을 지킨 이옥경과
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83년부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든다.
그는 점점 ‘인권변호사’로서의 이름이 올라갔고, 주로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에 대한 무료변론을 포함한 인권변호에 주력하였다.
홍성우 변호사는 조 변호사를 가리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던 1세대 인권변호사 그룹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인권변호사 활동영역을 확대해 나간 운동가 출신 인권변호사의 적자”라고
하였다.
또한 조 변호사는 ‘한국의 랄프 네이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네이더는 미국의 탁월한 변호사로 처음에는 주로 소비자 보호운동을 전개하다가
점점 뜻있는 사람들과 단체를 만들어 공해문제, 도시환경문제, 핵문제, 약물피해문제 등
시민들의 공익에 미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노력한 법률가이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조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라고 뜻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 변호사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넘기지 않고
철저하게 접근하였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살까지만 직장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살까지는 일용잡급직 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혼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연령인
25세를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다.
조 변호사는 이경숙 씨 본인도 마다하는 것을 설득하여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 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다.
즉 항소심에서 ‘여성의 정년도 남성과 똑같이 55세’임을 확인받은
이경숙 사건은 우리 여성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주요 판결이었다.
그러나 조영래의 진면목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부천서 *사건 때였다.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도구화한다’는 정권과 관제 언론의 융단 폭격
앞에 그는 우선 고발장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국가란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할 때에만
그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는 경찰과 검찰, 사법부, 관제 언론이 한 순결한 여성에게 가한 온갖
비열한 박해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성(性)을 고문의 도구로 사용했던 공권력과 싸웠고,
성폭행을 당한 여성은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회통념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말보다 글을 잘 쓰는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에 객원논설위원으로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들을 실었고,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인권수호를 주장하는 힘있는 글들도 많이 발표하였다.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창설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 무렵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을 자원한 그는 이 사건의 모든 기록을 모아 변협 최초의
‘인권보고서’에 담았다. 대한변협의 사무실에도 안기부나 보안사 요원들이 상시로
출입하던 시절이라 그는 보고서조차 은밀히 쓰고 출간해야 했다
보고서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자,
그는 보고서의 후기를 이렇게 고쳐쓴다. “우리의 인권보고서는 할 말을 잃었다.
다만 치떨리는 분노로 이렇게 외칠 따름이다.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그는 90년 9월 폐암 진단을 받고 석달 뒤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다.
[전태일 동지 추모비에 새겨진 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임이 있어
여기 한덩이 돌을 일으켜 세우나니
아아 전태일.
우리 민중의 고난의 운명속에 피로 아로새겨진 불멸의 이름이여
1948년 8월 28일 대구의 한 가난한 노동자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낯선 도회지의 길거리를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다니며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리야카뒤밀이로 허기진 밑바닥 삶을 이어가다가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된 그는 거기에서 노동자의 청춘과 생명과 건강을
갉아먹는 지옥과 같은 노동현실을 보았다.
허리도 펼수 없는 비좁은 다락방의 먼지 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본 채
하루 열여섯시간을 기계처럼 혹사 당하는 어린 소녀들의 어두운 눈망울 앞에
절망과 분노로 몸서리치던 그는 뜻있는 재단사들을 삼동친목회로 묶어
작업시간 단축 건강진단실시 임금인상 다락방철폐 등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내세우고 싸우던 끝에 업주들과 경찰의 압도적인 폭력앞에 저지 당하자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길에서 "근로기준법화형식"을 거행하며
스스로 몸을 불살라 스물 두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 폭탄과 같은 죽음이 사람들의 억눌린 가슴가슴을 뒤흔들어
저 숨막히는 분단 독재의 형틀에 묶여 있는 노동운동의 오랜 침묵을 마침내 깨뜨렸고
굴종과 패배를 모르는 그의 불타는 넋은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하고 지켜낸 이 소선 어머니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폭압에 맞서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무한한
용기의 원천이 되었다.
아아, 저 스물 두 해의 아픈 삶을 결단하여 가진 자들의 야만과 횡포에
온 몸으로 부딪쳐 간 그의 피어린 발자취가 있었기에
오늘 이 땅에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사는 자주 민주 평화의 새 세상을 쟁취하려는
일천만 노동자와 사천만 민중의 우렁찬 해방의 함성이 있나니,
지나는 길손이여, 이 말없는 주검 앞에 눈물을 뿌리지 말라.
다만 기억하고 또 다짐하라.
불길 속에 휩싸이며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내 죽음을 헛되어 말라!" 하던 그 피맺힌 울부짖음을.
- 1988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와 청계피복노조가 일천만 노동자의 뜻을 모아
조영래의 글과 장일순의 글씨로 새기다. -
출처 : 다음 - 공돌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