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김대중..감동적인 최후진술..ㅠㅠ

체게발아 작성일 09.08.23 00: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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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846880_6000296800_20090822.JPG»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 나와 후광 선생 사이에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사형수 후광의 모습이다. 그가 사형 구형을 받고 최후 진술을 하던 모습을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침착했다. 너무나 어엿하고 우아했다.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기 쉬운 그 순간, 그는 박해받던 초대 교회 스데반과 같은 여유를 지니고 이렇게 진술했다.

“정치보복 안돼, 검찰에도 감사”…감동받아 법정서 애국가 불러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계신 피고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완상 박사가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사명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를 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서 민주 회복을 통한 사회 구원, 민족 구원을 생각했습니다. 재판부, 국선·사선 변호인, 교도소 관계자, 내외신 기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검찰부에서 한 노고, 그 자체에는 감사드립니다.”

1980년 가을, 당시 이 최후 진술은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이 떨렸을 뿐 아니라 역사 자체가 진동하는 듯했다. 우리는 감격에 겨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목소리로 힘차게 애국가를 불렀다. 군사 법정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역사의 울림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이때 후광의 모습은 결코 한 사람의 정객이나 정치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아하고 결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그러나 당당하게 후배들과 역사를 향해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경륜가요 사상가였다.

두 번째 후광 선생과 잊을 수 없는 일은 1983년 미국에서 있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피고인 중 미국행이 가능했던 사람은 후광 선생과 나뿐이었다. 당시 뉴욕에 있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선생을 뵈러 워싱턴에 가서 국내외 현안을 논의했다. 이때 여러 번 선생께 이렇게 권했다. “선생님, 지금은 간디 같은 삶을 사셔야 합니다. 네루 같은 행동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간디같이 높이 올라가면 후일 네루가 될 수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네루같이 처신하면 위험합니다. 아직 한국 정치 풍토에는 힘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간디처럼 인권, 평화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의 스승, 인류의 스승이 되셔야 합니다.”

당시 선후배 중에 군 실세가 여럿 있어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그렇게 조언했던 것인데, 몇 차례 이야기를 듣던 후광 선생이 하루는 퍽 언짢아하셨다. “한 박사, 당신은 학자니까 자꾸 그런 말을 하는데, 나는 현실 정치인임을 잊지 마세요.” 그때 나는 내 뜻을 이해해주지 않는 듯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후 나는 1984년에 복권·복직되어 귀국했고, 그 다음해에는 후광 선생이 귀국하여 1987년 후반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때 나는 후보단일화를 적극 지지했다. 그렇게 해야만 군사권위주의를 종식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열했고,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우여곡절 끝에 거산에 이어 후광이 대통령이 되었다. 두 민주 투사가 연이어 대통령이 되었으니 시대의 과제이자 민족의 소망인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를 함께 추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만일 실수하게 되면 끔찍한 역사 역류 현상이 생길 거란 생각에 염려되기도 했다. 문민정부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시대 초기에도 남북관계는 다소 주춤거렸다. 그러나 2000년 6·15 선언 이후 햇볕정책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세계는 그것을 올바른 정책 브랜드로 인정해주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존 F. 케네디의 뉴프런티어와 같이 햇볕정책은 DJ의 상징이 되었다.

식은 죽 먹듯 변절하는 정치인이 많고 지식인마저 변신을 거듭하는 상황에서 퇴임한 후광은 예전보다 더 꼿꼿하게 국가와 민족에 필요한 화두를 던졌다. 특히 지난 일 년 반 동안에는 ‘행동하는 양심’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했다. 평화는 더욱 멀어지고 자유는 더욱 후퇴하는 신권위주의 상황에서 그는 광야의 요한처럼, 미국의 킹 목사처럼, 남아공의 만델라처럼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그는 더욱 간디처럼 기억될 것이다.

 

 

 

눈물이 앞뒤를 가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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