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 양세봉과 함께 우리나라 쓰리봉이라 불리는 약산 김원봉 열사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다음으로 가장 긴 활동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여 "독립은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는게 아니다"라는 말로 폭렬투쟁을 하여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 은행 습격 의거등등 수많은 업적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인들에는 염라대왕이라 불리고 우는 아이도 김원봉 이름을 들으면 울음을 멈춘다는 말까지 생겨납니다.
이 때문에 일제는 그를 1급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려 체포 1순위로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의 창단을 하여 더욱 더 폭력투쟁에 앞서 나가게 됩니다. 훗날 이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대한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가 되고, 충칭으로 임시정부가 옴겨졌을때 1942년 4월 대한광복군과 합쳐져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과 제1지대장 을 겸하고, 의용대는 제1지대에 편입되게 됩니다. 이것은 흔히 우파라 불리
는 김구 선생의 세력과 좌파로 불리는 김원봉의 세력이 합쳐져 좌우 민족주의의 합작이라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지만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소외시켰고 해방 이후 한국에 오는데 2진으로 편성되어 뒤 늦게 독립된 땅을 밟게 됩니
다. 이 일은 임시정부의 일인자 = 김구라는 인식을 민중들에게 각인 시켰고 김원봉은 서열 2위 라고 해도 무방하나
4인자로 소개하는등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그 후 그는 좌우합작 통일을 무시하고 미군정에 협조하는 임시정부를
좌우합작 통일을 위해 탈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운명의 1947년... 그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총독부 악질 친일
파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체포되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합니다. 그는 "내가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
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며 통곡했다 하고 억울하여
이백의 시 만분사를 내세워 친일파의 세상이 된 상황을 조롱하다가 친일파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큰 결단을
하고 월북하게 됩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6.25전쟁때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
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해야 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죽게 되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후 이듬해 9월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져 그의 죽음에 대해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했다는 설과 은퇴설, 자살설등 많은 설들중에 숙청설에 가장 무개가 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독립 공신 등급에서 유일하게 김일성과 함께 머리를 나란히 해 1등급에 올려 그의 독립투쟁 만큼은 인
정하였지만 남한 정부에서는 그를 빨갱이로 매도해 그의 공적을 철저히 가리다 이제야 그를 연구하고 조금씩 교과서
에서 학생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북에서도 남에서도 환영받지 못한그를 우리가 이제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출처 : I Love Soccer - 孔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