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석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의 손가락 끝을 지문 인식기에 대자마자. 정가희라는 이름과 나이 등의 간단한 정보가 뜨고는. 곧바로 접수가 되었다. 그녀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선욱은 얼마 후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은 그녀를 입원실이 꽉 찼다는 매몰찬 소리와 함께 다시 업어들고 나와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옥탑방에 잘 눕혀주고. 레스토랑으로 내려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예?”
연석이 선욱에게 말을 걸었다.
“아. 길가다가.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요”
“하아...요즘 세상에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면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하지만.”
“뭐 이미 치료비까지 낸 거야?”
"예...“
“그럼 깨어나거든 치료비를 받아내서 보내라고”
“그렇지만...”
“그렇게 해.”
“알겠습니다. 가족이나. 데려갈 사람을 물어보고. 보낼게요. 좀만 참아 주세요”
선욱은 매몰차게 말하는 연석이 조금 못마땅했지만. 대충 그의 말에 승낙 하는 척 했다.
일을 끝내고 선욱이 다시 옥탑방 으로 올라갔을 때 가희는 어느새 깨어나.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들어온 선욱을 발견하고는 혼자 일어나려고 하다가.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으로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선욱은 그런 그녀 앞에 주저앉았다.
“깨어 나셨어요?”
선욱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가희는 반대로 날카롭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보면 알잖아?. 대체 치료한 이유가 뭐지??“
“그냥...일단 구하려고 한 것뿐인데요?”
“웃기지마! 너는 나를 증오할 텐데? 마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말이야. 뻔히 알고 있는데. 지금 이건 뭐하는 걸까나?!!“
“기억이....나지 않으니까요”
“..............”
“너. 정말로 기억을 잃은 거냐? 하. 어이가 없어서”
“예. 그러니까. 일단 몸이나 추스르세요. 낳고 나서 어떻게 하든 그건 당신 맘이니까”
“우..웃기지마! 이내가. 너 따위 쓰레기한테 빚을 만들 것 같냐?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러니까...일단 몸이 낳고나서. 제가 안 보는데서 죽어 버리는 건 상관안할테니까.”
“이...!!”
가희가 당장 덤벼들 기세로 선욱을 쏘아붙였지만. 선욱은 태연하게 받아 넘기며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행동으로 보건데. 서로 원한이 맺혀있는 사이 같았다.
“에휴...”
대체 무슨 사이 였던거지? 원수지간?? 선욱은 괜히 나오는 한숨을 뒤로하고 레스토랑 쪽으로 내려갔다. 아무리 기억을 잃기 전에 원수지간 이었더라도. 그녀의 몸이 나을 때까지 정성껏 간호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것으로 맺혀있는 원한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령 무슨 원한이던지 간에. 폭력이 아닌 대화로 풀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으니까.
레스토랑으로 내려온 선욱은. 연석에게 부탁해서 잠시 주방을 빌려 그녀에게 줄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기억을 잃었어도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지식들 까지 잃은것은 아니었으므로. 자취생활로 익혀두었던 노련한 솜씨로 죽을 끓여 옥탑방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저기...?”
가희는 벽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선욱은 죽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건드리며 다시 한번 불렀다.
“저기요....?”
그제야 선욱이 돌아온 것을 알았는지 가희는 벽을 바라보던 얼굴을 돌렸다.
“뭐야??”
“죽좀 끓여 왔으니까...”
선욱은 그렇게 말하며 죽그릇을 그녀의 앞에 놓았다.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솔솔 풍겨 올라 왔지만. 가희는 냉담했다.
“네가 주는 걸 왜 먹어야 되지?”
“먹지 않으면. 몸이 버텨내지 못하니...”
선욱은 그의 무릎에 죽 그릇을 올려놓고. 한 숟가락을 떠서 그녀에게 가져가며 말했지만. 미쳐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한쪽팔로 선욱을 손을 뿌리쳐 밀어버렸다. 그 결과 선욱은 균형을 잃어 넘어졌고, 죽그릇도 땅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웃기는 선심 쓰지 말고. 그냥 죽이던가. 기억을 잃었다면 제발 내눈앞에서 사라져 줄래? 차라리 다시 길바닥에 대려다 노라구..!!”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버렸다. 선욱은 하는 수없이 엎어진 죽 그릇을 치우고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얼마후 선욱은 다시 새로 죽을 끓여서 가지고 들어왔다.
“먹지 않으면. 몸이 나을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정말로 그대로 죽을 셈이에요?”
선욱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수저로 죽을 떠서 그녀에게 가지고 갔다.
“하.... 차라리 죽는 게 낳거든요!!”
가희는 다시 뿌리쳐 버렸고. 죽 그릇은 무심하세도 다시 엎어져 버렸다.
“...............”
이쯤 되면 화를 낼만도 하건만. 선욱은 그러기는커녕. 다시 죽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다시 또 몇 분후. 선욱은 또 새죽을 끓여서 가지고 올라왔다.
“하...아??”
가희는 할 말을 잃었다. 자기에게 죽을 먹여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러는 건지 모를 일 이었다. 아니면 그 잘난 기억을 진짜로 잃고서는 진심으로 내가 낫기를 바라고 있다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너무 지극정성이었다.
이런 거... 가희에겐 처음이었다.
“너....너....!!”
“그러니까..먹을 때까지 새로 끓여 올껍니다. 잠시 원한 같은 건 잊고. 일단 먹는 게 어때요?”
“.....................”
선욱은 다시 죽을 떠서 가희의 입에 가지고 갔다. 뜨거운 죽을 식히느라 호호 부는 것 도 잊지 앉았다.
가희는 더 이상 거부했다가는 끝도 없이 되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입을 벌려버렸다.
덤으로 이렇게 까지 치욕스럽게 만든 눈앞의 선욱을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여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한 상태였다.
“안 뜨거워요??”
가희의 목안으로 부드러운 죽이 넘어갔다. 며칠동안 텅텅 비어있던 위에 음식물이 들어가자 머릿속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거부할 수 없이 죽을 삼켰다. 어느 사이에 죽 한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선욱은 그녀에게 물을 먹여주고 다시 그녀를 똑바로 눕힌 다음 그릇을 가져다 놓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
그런 그의 뒷모습에서 가희는 조금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창조적인 살인은.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그도 그렇게 죽여 버리겠다고 벽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다짐했었던가.
그러나 죽그릇을 가지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왠지 낯이 익었다... 누군가랑 겹쳐지는... 뭘까.. 이 기분은...
가희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쓰레기...흥!”
그리곤 애써 무시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선욱은 죽 그릇을 치우고 와서. 그녀와 한참 떨어진 반대편 벽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어느사이 가희는 깊이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싸움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고단한 일을 한 선욱이 피곤함에 꿈나라로 막 넘어가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가희가 내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욱은 놀라선 그녀에게 다가갔다. 유일하게 붕대가 안 감겨있는 얼굴위로 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호흡도 고르지 못한 것 같다. 급히 이마를 만져보니 불덩이였다.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라 감기 같은 것에 걸린 것 같았다. 선욱은 일단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 급한 대로 그녀의 이마위에 올려주었다.
차가운 느낌에 가희도 힘겹게 눈을 떴다. 그녀는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선욱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 놀라서 물었다.
“뭐...뭐야?”
“열이 심한 것 같은데 괜찮아요?”
“괘...괜차..찮아...저리가...! 저리..”
“상태가 안 좋잖아요... 약 좀 얻어가지고 올 테니까..”
선욱은 가희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아래층의 연석의 살림방으로 내려가. 감기약을 빌려서 돌아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정성스러운 것 아니냐는 계속되는 연석의 잔소리에 선욱은 기억을 잃기 전에 아는 사람 같다는 설명을 하고나서야 약을 빌릴 수 있었다.
“약이니까. 꿀꺽 삼키세요”
그대로 알약 한 알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
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욱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푹 주무세요...”
선욱은 손으로 가희의 눈꺼풀을 내려주며 말했고. 가희는 비몽사몽간에 선욱의 손길을 느끼며. 약 기운에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어느 사이에 아침. 가희는 왠지 무거운 눈을 떴다. 눈을 떠보았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으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선욱이 꾸부린 자세로 앉아있었다. 상태를 보니 잠든 것 같았는데. 그의 옆에는 물이든 바가지에. 여러 개의 수건이 젖은 체 걸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희는 이마에 수건이 얹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밤새 차가운 물로. 수건을 적셔가며 간호한 건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욱의 옆에 있는 여러 가지의 흔적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다면 나에 대해 전혀 모를 텐데. 어째서 모르는 사람한테 이렇게 까지 해줄 수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자식...
“으...응?”
선욱도 얕은 잠에서 깨어났는지 부스스한 눈으로 가희를 바라보았다.
“아..! 이제 괜찮아요?” 그렇게 물으며 가희의 이마위에 수건을 치우고는 손을 얹는다.
“열은 내렸네...”
“너....”
“예...?‘
“어째서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아. 그래야 빨리 건강해질 것 아니에요”
“웃기지마!!”
“뭐..저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조금이라도 그 원한이 풀렸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모두 밝게 살 수 있으면 좋잖아요?“
“하아...밝게 산다는 게 뭐가 좋다는 거지?”
“그래서....죽으시려구요?”
“....................”
가희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희는 솔직히 죽을 마음은 없었다. 왜 죽어야 하지? 그래서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시끄러!!”
할 말이 없자 괜히 화를 내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는 것이 두려웠다.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딴 건.
“너 말이야. 너도 기억을 잊어버리기 전에, 나를 엄청 싫어했던 거 알아?”
“예??...뭐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라니. 네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거 이상으로 나를 증오했어. 네가 기억을 찾는다면 분명히 무지 후회할걸..?”
“후회...요?”
“그래...”
가희의 말에 선욱은 잠시 생각에 빠졌으나 곧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설령 제가 얼마나 당신을 싫어했던지 간에. 사람을 구한 걸 후회할리는 없어요”
“글쌔...후회 할꺼라니까...”
“뭐...맘대로 생각하세요”
“흥...!!”
가희는 코웃음을 쳤고. 선욱은 그런 가희를 내버려 두고 방 안에서 나와 버렸다. 옥상위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가희가 말한 후회라는 단어가 계속 맘속에 맴돌았다.
후회?
후회해야 하나? 사람을 구한 것을? 왜?
아니야...후회하지 않아. 다친 사람을 구한 거 가지고 후회하지는....않아.
하지만 나와 그녀는 대체 무슨 관계였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하아...”
원수라. 증오라.
선욱이 지금 현재 가희에게 품고 있는 생각은 별거 아니다.. 그저 심하게 다친 환자. 원한 같은건 그 다음일 이었다. 게다가 간호해줌으로써 그 원한이 대화로 풀어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정도밖에는 하고 있지 않다.
그런 그의 마음에 나오는 은근한 다정함이 가희의 태도를 조금이나마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선욱이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저 일하러 내려갈 테니까. 몸이 안 좋으면 아래층으로 전화주세요”
선욱은 레스토랑과 통해있는 전화기를 그녀의 손앞에다 가져다 놓은 뒤 일을 하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가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웃기는 놈....”
하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저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다정함이 그 감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00367의 마음까지 움직였다는 것을.
어째서 인간을 벌레같이 여기는 00367이 선욱에게는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는지 궁금했던 의문의 대답을..
그리고....나도....그 다정함에...
“아냐..!!”
가희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언니!!”
그런게 혼자 중얼거리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꼭 정신병자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공간에서 텔레포트를 해서 나타났다. 선미였다. 가희를 찾아 전국을 해매고 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거의 포기상태에 빠진 그녀였으나. 얼마 전 가희가 병원을 이용한 기록을 보고받은 후에서야 겨우 가희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서..선미야?”
“맞아요”
“........”
“언니??”
“으..응..”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선미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가희에게 안겨들었다. 가희는 고통스러운 표정 지으며 선미를 때어냈다.
“아...앗. 나 환자라고. 웬만하면 비켜주지 그래..?”
“아..예...”
그제야 선미는 가희가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겨우 찾았어요.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래..”
“이런데서 뭐하는 거에요? 언니. 몸도 못 움직일 정도 인거에요? 걸을 수 있을 정도면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아...그게...”
“일단 우리 돌아가서 말해요”
“잠깐!!”
선미는 가희를 잡아끌고 막 공간이동을 하려고 하였으나. 가희가 선미의 손을 뿌리쳤다.
“언니??”
“내가...내가 알아서 돌아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처리할 일이 있어서...”
“예??? 하..하지만...”
“부탁해. 선미야. 그분께도. 곧 돌아갈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전해줘”
“그렇지만...”
“선미야!!”
가희의 단호한 표정에 선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럼...일단 대장님께 보고할 테니까.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세요. 지금 사정이 좋지 않거든요... 언니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래. 알았어”
선미는 아쉬운 눈동자로. 가희를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지금 돌아가야 했다. 선미를 따라서 지금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왠지 그냥 가버리기에는 마음속이 너무 꺼림칙했다.
“......돌아가야 돼...그..그렇지만...”
가희는 천장을 바라보며 혼자 수없이 중얼 거렸다.
어느덧 저녁. 선욱은 일을 마치고 평소보다 일찍 방으로 올라왔다. 가희는 여전히 누워있었다.
“좀 어때요??”
“......................”
“움직일 수 있어”
“아...! 정말요??”
사실 가희의 몸은 아침정도에는 혼자 일어설 수 있었고. 현재는 조금 힘겹겠지만 걸을 수도 있는 상태로 호전되어 있었다. 고로 그녀의 주특기인 텔레포트로 언제라도 본부로 돌아 갈수 있었다.
가희는 그가 돌아오면 갈등스런 마음을 끊어버리기 위해. 그의 면전 앞에서 몇 마디 증오의 말을 퍼붓고는 본부로 돌아 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져 버렸다. 며칠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아니!! 움직일 수 없어..”
무슨 생각인지 가희는 급히 말을 바꿔 버렸다.
“예?”
“움직일 수 없다니까!”
“아...그럼 저녁 좀 해올게요”
괜히 짜증을 내는 가희에게 선욱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다시 죽을 끓여와 그녀에게 먹여주었다. 어제와는 달리 가희는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받아먹었다.
“저기....”
“저기..?? 내 이름은 가희야. 가희라고 불러”
“네?? 그래도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어떻게”
“괜찮으니까...어차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날도 별로 없을 거야”
“예???”
“아...아냐..”
가희의 묘하게 여운을 남기는 말에 선욱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넘겨 버렸다.
점점 밤은 깊어갔고. 둘은 잠자리에 들었다. 선욱은 쌓인 피로에 금세 잠에 빠져 버렸지만. 가희는 아니었다.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키고는 반대쪽에 있는 선욱을 지그시 응시했다.
너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를 구한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네가 기억을 찾는다면. 가희라고 부를 일 따위는 없겠지? 너가 기억을 찾는다면. 당연히 내가 싫어 질 테니까... 하지만 나도 전처럼 너를 쓰레기 취급하며 대할 수 있을까...? 그게 두려워...
“..............”
선욱에게 하는 말인지. 자기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생각을 웅얼거리고는 가희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또다시 아침.
선욱은 가희를 깨워놓고 간단한 아침밥을 먹은 뒤 일을 하러 내려갔다. 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다가.
“푸아아악!”
문득 아래층. 즉 레스토랑에서 굉장히 큰소리가. 뭔가가 터지는 소리인데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는 다르게 기분이 좀 더 나쁜 소리가 난 것에 놀라서 벽을 잡고 일어섰다.
설마 “Z"인가? 기다리지 못한 다니르가 직접 온건가?? 가희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절룩거리며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한편 막 가게를 열 준비를 하던 선욱과 연석은 입구 쪽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기에 달려가 보았다. 그곳의 광경을 본 선욱과 연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인출신인 연석조차도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우욱...”
“이건....대체?”
연신 헛구역질을 해대는 연석과는 반대로 선욱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그 광경은 다름 아닌 사람이 터져버린 모습이었다. 레스토랑의 앞을 청소하려고 나간 알바 생이 레스토랑입구를 피로 도배를 하며 죽어있었다. 그리고 시체의 바로 앞에는 여자아이 한명이 서있었다. 무표정하면서도 차가운. 그러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한 여자가.
연석은 비린내 때문에 코를 막고는 시체 쪽으로 다가가며 서있는 여자에게 질문했다.
“대체 뭐야.. 설마 네가 이런 거냐? 너..넌 뭐야?”
“시끄러.”
그 여자는 연석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선욱도 연석의 옆으로 와. 여자를 쳐다보았다.
막 연석을 죽이려고 하던 여자는 무심결에 선욱의 눈과 마주치고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반사적으로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너....너??”
예리. 그녀였다. 선욱과 이별한 후 거의 반 폐인 상태로 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녀였다.
또 닮은 사람?? 예리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죽인 겁니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선욱은 그저 시체에 놀라서 예리에게 질문했다.
“..................”
예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들려왔다.
어째서?? 그는 죽었을 텐데...??
하지만 예리가 생각하기에도. 닮았다고 치기에는 너무나 똑같았다. 거기다 목소리까지. 변함없이 그의 다정스런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선욱군. 그 여자에게서 떨어져.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예???”
연석은 선욱을 잡고 뒤로 물러섰다. 전직군인의 직감일까. 예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예리는 연석이 선욱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서.....서..선욱?”
선욱과 연석이 물러설수록 예리는 한 발 한 벌 더 앞으로 다가갔다. 예리의 발걸음이 더 빨랐기 때문에. 선욱에게로 점점 더 가까워 졌다. 다가갈수록 세차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두근거리는...두근거리는..
“너...야?? 정말로...너야..??”
“예..?? 대체 무슨 소리인지..”
“너...야??”
선욱이 뭐라고 하던 예리는 눈앞의 선욱이. 진짜 선욱이라는 걸 확신하고는 그의 품안에 뛰어 들었다.
“저..저기??”
“살아 있었던 거야?....내가...내가 얼마나....”
예리는 선욱에게 안겨 나직이 중얼거렸지만. 정작 선욱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겨든 그녀를 억지로 때어낼 수 없는. 뭔가 익숙한 느낌이. 아까부터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선욱을 지배하고 있었다.
“저기..? 나를 알아??”
선욱은 안겨있는 예리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예리의 표정이 갑자기 사늘해지더니. 그에게서 떨어져 뒷걸음질 쳤다.
“왜?...왜? 모른 척 하는 거야? 내가...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살아있었으면서 이제야 나타나서는. 한다는 소리가 왜 그따구야!!..“
“뭐가 뭔지 잘...”
“무슨 일이야??”
바로 그때. 가희가 절룩거리며 옥탑방에서 내려와 끼어들었다. 선욱은 예리를 제쳐두고 비틀비틀 거리는 가희를 급하게 부축해 들었다.
그 순간 가희의 눈과 예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너.....!! ”Z"??!!"
"00367???"
서로 놀라서 소리쳤고. 가희를 보는 순간 예리의 눈이 심하게 검붉어 지는가 싶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살기가 풍겨져 나왔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거에요?“
하지만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선욱은. 예리의 살기조차 느끼지 못하고. 가희에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움직일 수..”
그때. 가희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선욱의 팔에 팔짱을 끼고는 예리를 쳐다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00367. 넌 이제 혼자거든?”
“뭐...뭐야? 어째서...어째서??”
가희를 노려보던 예리의 시선이 어느새 선욱에게로 향하더니 말했다.
“너...너가 어째서..”Z"와? 그런 거야? ,.,.,그래서 나를 모른 척 한거야??“
어느새 예리의 지독했던 살기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어깨까지 축 쳐져 버렸다.
“저기..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시끄러!! 너....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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