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이 사랑하는 법..[11]

그어떤날 작성일 07.01.02 16:5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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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난 가만히 서서 무슨말을 먼저 할지 생각해봤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는데, 그럼 미안하단 말을 먼저 해야할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될까?

미안하면 뭐가 미안한걸까? 다짜고짜 전화해서 오게한 것? 아니면 집에까지 날 데려다주게 만든 것?

집에까지 날 데려다준건 고마워해야하는 일 아닌가?



"..왜그래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아뇨. 죄송해요."


"일단 타세요, 갈데가 있어요.."


"갈데요..?"


김현준씨는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시죠, 하고 말하듯이 손을 자리쪽으로 향하게 했다.

일부러 집 앞까지 와줬는데, 그리고 아직 머릿속에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정리도 안된 상태였으니까

일단은 그가 이끄는대로 조수석에 탔다.

문을 닫고 그가 운전석에 자리한다.

차는 시동이 걸리고 부드럽게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가로등이 밝히고, 차는 그런 가로등을 하나 둘 가볍게 지나쳐버린다.


"답답해요? 창문 좀 열어줄까요?"


"네..."


창문이 내려지고 밖의 차가운 공기는 일제히 차안으로 밀고 들어와 머리카락을 살랑 움직여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시원했다.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한껏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맘속의 무거운 바위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가 빨간색 신호를 받아서 잠깐 멈추어섰는데, 저 멀리 어딘가에서 캐롤송이 들렸다.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지..그제서야 거리 곳곳에 있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에 빨강, 파랑, 노랑, 초록..색색깔의 램프가 나뭇잎을 대신해서 반짝이고 있었다.


"밥은 먹었어요?"


"아뇨..입맛이 없어서요.."


"그래도 먹어야 되요, 거의 다 왔어요. 우리 해장이나 하러가요."


난 운전을 하는 그사람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가게에서 딱 두번 그를 봤을 뿐이었다.

내가 처음 그를 봤던 이미지대로 그사람의 눈에선 나쁜 마음이란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뒤로 하나씩 멀어지는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안경에서도 반짝였다 지나간다.

왜 나에게 이러는걸까? 내가 불쌍해보였을까?


"저기..."


"다왔어요. 내려요."



궁금한걸 물어보려고 말을 꺼냈는데 또 막혔다. 차에서 내려보니 도착한 곳은 약간 허름한 순대국집.

김현준씨는 차를 잠그고 미닫이 문을 씩씩하게 열고 들어갔다. 나도 천천히 따라서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엔 작아보였는데 실내는 꽤 테이블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 나이드신 분들 할 것 없이 삼삼오오

짝을지어 어느 테이블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어느테이블은 화기애애하게 웃고있었다.

우린 가게의 가장 안쪽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해장할땐 이런걸 먹어줘야 되요, 이모! 여기 국밥 두개 주세요~"


"저 이거 먹어본적이 없는데요.."


"아직도 이걸 먹어본적이 없어요? 잘됐어요. 여기가 보기엔 누추해보여도 맛하나는 기가 막히거든요^^"


이 가게에서 파는 메뉴는 오직 순대밖에 없는 것 같았다. 메뉴를 보니 순대전골, 순대국밥, 찰순대..

이런것들 뿐이다.

테이블로 물컵이 올려지고 우린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저기..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어제일.."


"신경쓰지마세요. 전 절 불러준게 고마운데요.^^"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에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가 예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사람의 진심을 알아보려면 웃는 얼굴을 봐야하는거라고.


'눈이 웃고있으면, 그사람은 너를 진심으로 대하는거야,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지않으면

그 사람은 믿음을 주기 어려운 사람이거든.'


난 그사람의 웃는 얼굴을 찬찬히 봤다. 부드러운 눈꼬리, 하얀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고 있는 그의 입.

진심인 것 같았다. 아직 어려서 사람보는 눈이 없는 나도 이 사람은 진실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들 들어요~"


"고맙습니다~ 수영씨, 먹어요."


하얗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헤치며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입맛이 없어서 음식냄새를 맡으면서도 먹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맛있게 순대국을 먹고 있는 김현준씨를 보고

있으니 그사람이 입을 열었다.


"하고싶은 말 많은거 알아요. 얘기는 나중에도 천천히 할 수 있으니까, 일단 속부터 풀어야죠^^

여기다 이렇게 들깨가루랑 새우젓을 넣어서 간을 맞춰먹는거에요. 먹어봐요."



내 숟가락으로 이것저것을 넣어서 한데 섞고는 다시 나에게 숟가락을 쥐어보라했다.

국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순대국이라 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조근조근 씹고 있으니까 김현준씨가 날 보고 웃으며 자기 국밥을 또 떠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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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으니 정말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젠 정말 뭔가 이야기를 해야했다. 아무리 이사람이 나에게 편하게 잘 대해준다고 해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마주앉아있기는 아무래도 어색했다.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었다.


"어제는..제가 실수를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구요."


"고맙고 미안한 마음 알아요. 이해해요. 힘들면 그럴수도 있죠."


"제가 다른 소리는...안했죠?"



그사람은 내 얼굴을 잠시 보고있더니 테이블에 올려진 물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저는요.."


"...?"


"저는 한달전에 5년을 사랑한 사람이랑 헤어졌어요. 시간이 긴만큼 아픔도 크죠.

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솔직하고 정직해요. 시간은 기다린 만큼 망각이라는 약을 줄꺼에요. "



그 말을 들으니, 더 이상 얘길 꺼낼 필요가 없단 걸 깨달았다.

내가 술김에 이사람에게 성민오빠와 연주 이야기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린 둘다 사랑이란 아픔을 시간이 주는 약으로 치료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가게를 나서서 우린 잠시 거리를 걸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고 듣기좋은 캐롤이 울려퍼지는 이 거리에, 우리를 지나가는 이 쌍쌍의 남녀들은

전부 연인인걸까?

아님 우리처럼 서로 사랑에 상처받아서 잊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지들일까?


"전 수영씨를 볼때부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아요. 동병상련일까요? 아픔은 아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혼자 하루를 아플거 옆에서 도와주변 반나절만 아플 수 있잖아요."


"절 도와주시게요?"


"더이상은 바보같이 혼자 안울래요. 수영씨도 울지 마세요. 우린 서로 도와가며 이겨낼 수 있을 거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연애를 하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서로 돕는거죠.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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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중학생 때 사회교과서에서 이런 구절을 본 기억이 난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비로소 진정한 사람이 된다.

사람에게서 상처받은 것은 사람으로 치료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방으로 들어와 스텐드를 키고 책상앞에 앉았다.


연극 티켓..


'이 연극 본적 있어요?'


'라이어네요. 아직 본적은 없어요'


'내일 저녁 시간으로 끊었어요. 같이 보러가요. 꼭 오란 말은 아니에요. 같이 보러갈 마음이 있으시면,

내일 연극하는 곳 앞으로 나와있어요.'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서로 줄기가 꺾여 아픈 해바라기들이다.

서로의 몸에 기대서 천천히 상처를 치유해 다시 넓은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올려다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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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용이 좀 짧은감이 있네요^^;

년초라서 조금 바쁜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조금더 보강해서 올릴게요-

오늘도 좋은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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