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사람이 사랑하는 법..[12]

그어떤날 작성일 07.01.06 03: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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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하는 사랑..>


혼자하는 사랑엔 두가지의 종류가 있다.

외사랑과 짝사랑.

흔히들 짝사랑과 외사랑의 차이점이 뭐냐고 묻는다.

그럼 나는 대답한다.

짝사랑과 외사랑은 이미 말에서 부터 그 범주가 확연히 다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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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리스마스다. 실연을 당한 사람들이 난 이날이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날 중에 하나다.

내가 내 친구를 무시하고 사랑을 택했다면, 어쩌면 정말 행복했을지도 모르는 날이다.

이상하게도 지금쯤 연주와 성민오빠가 뭘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슬픔에 잠겨있을 나인데,

연극표를 손에쥐고 약속장소에 제시간에 맞춰가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나를 보며

이상하게도 피식, 하며 웃음이 나왔다.

사람에게 할일이 생긴다는 것은 신께서 내려주신 한가지의 치유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일이 한가지 생겼다는 것에 나는 상처를 뒤로 미뤄두는 시간을 손에 얻은것이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이것은 단순한 연극표가 아니라, 하나의 도피처인 셈이다.

그리고 나에게 그 도피처를 마련해준 김현준씨가 더이상은 낯선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목적지가 있는 역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자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난 내 발로 걸어 나왔다기 보다는 그 사람들에 의해 떠밀려나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인가 보다.

아직 약속시간까지 약간 널널해서 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갈때 까지 기다렸다 가기로 하고 계단 옆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숙이니 내가 신고있는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성민오빠를 좋아한다고 연주에게 털어놓던 시절 장만했던 비즈장식이 예쁜 카키색 구두였다.

오늘이 지나면 성민오빠와 연주에 관련된 일들을 모두잊고 버리려고 신고나왔다.

이 구두를 샀을 때, 발에도 꼭 맞았던 게 어디든 성민오빠가 있는 곳이라면 이 구두가 날 그곳으로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공상이자 착각이었다.

사람의 맘은 언제나 반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간 것 같아 나는 천천히 걸어 개찰구를 통과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연극 시간은 7시인데 입장은 6시 반 부터 라고 적혀있었다. 지정좌석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미리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그사람을 기다릴까 하다가 나도 혼자 서있기 뭐했던 지라 줄을 서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먼저 서있는 사람들을 지나처 그 줄의 끝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잘 못봤.."


"..수영아.."


성민오빠였다.


"..네..안녕하세요.."


"연극..보러 온거야?"


"네..연주..는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오빠, 하며 연주가 뒤따라와 오빠의 팔짱을 끼고선 나를 발견했다.


"..수영이네?"


"어..연극보러왔구나.."


"응. 잘지내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었다. 지금 나 놀리는거야? 잘지내냐니...


"어..."


"그래? 아~ 하긴, 못지낼껀 또 뭐야. 그치??"


이 순간에서 날 비웃는 연주의 뺨이라도 멋지게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난 또 바보같이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잊으려고 이곳에 왔다. 성민오빠와 연주의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피하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난 또 그날의 끔찍한 기억과 마주하게 되었다.


"수영씨, 뭐해요. 줄서야죠. 이 사람들 누구에요?"


그 순간 김현준씨가 나타나서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난 깜짝놀라 현준씨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아는 사람들이에요?"


하고 물으며 내 어깨에 올려진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불안했던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입을 꽉 다물어 속으로 기합을 한번 외친 후 대답했다.


"아니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입장하기 시작하네요. 얼른 들어가요. 많이 춥죠?^^"



뒤로 돌아서 걷는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공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걷는 몇 걸음이 천리를 걷는 것 보다

많게 느껴졌고, 내 뒷머리로 느껴지는 시선을 뒤돌아 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김현준씨가 내 어깨를 잡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연장 안에서 나와 현준씨는 오른쪽 자리에, 뒤늦게 따라 들어온 연주와 성민오빠는 왼쪽 윗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윗쪽자리에 앉을 껄 그랬나.

뒤에서 저 커플이 연극에 집중할지라도 시선을 약간만 돌리면 내가 보일게 분명했다. 이런 답답한 공기가 싫었다.

연극이 재밌는지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끊이지 않았지만, 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의 말소리도

중간중간 나오는 음향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불편한 나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김현준씨가 입을 열었다.


"아, 수영씨 기분 풀어주려고 재밌는 연극으로 사람들한테 물어봐서 예매했는데 다 뻥이네!

하나도 재미없어요. 수영씨도 재미없죠? 우리 나가요."


"연극..안끝났잖아요."


"괜찮아요. 우리 나가서 다른 거 해요!"


김현준씨는 내 손을 이끌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우린 말없이 캐롤이 흘러나오는 거리만 걷고 있었다.


"미안해요. 괜히 저때문에.."


"아니에요, 아까 그 사람들..수영씨 아프게 했던 사람들 맞죠?"


난 말없이 그냥 피식 웃어보였다.


"잘했어요. 그래도 한방 먹였네! 속이 다 시원하다! 그쵸? 오늘 멋지게 행동한 수영씨 위해서

한잔 하러가요! 소주 어때요?"



이 사람은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게 천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편안했다.

세상엔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새삼느끼며 이렇게 힘들 때 내가 이사람을 만났다는 게

고맙게 느껴졌다.

길거리에 있는 한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나는

고개를 숙여 무거운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다.

김현준씨는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주고는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나는 잔에 담겨있는 깨끗한 그 술을 반쯤 입에 털어넣고 말했다.


"현준씨.."


"네?"


"현준씨는 헤어진 그 사람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죠? 그렇다면 현준씨는 행복했네요. 나는 그 오빠를 사랑

하면서 한번도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어요.

현준씨 생각엔 짝사랑이 더 좋은거 같아요, 외사랑이 더 좋은거 같아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아니요, 짝사랑과 외사랑은 둘 다 혼자하는 사랑이지만 짝사랑은 행복해요, 그치만 외사랑은 비극이죠.

짝사랑은 상대가 자길 좋아해줄지 아닐지 희망을 가질 수 있잖아요. 외사랑은 상대가 내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주지 않아 일말의 희망도 없죠. 그래서 외사랑은 더 아프고 힘든거에요."



대답하지 않고 그 사람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나는요, 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땐 짝사랑이었어요. 그 사람이 애인이 있다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사람은 애인이 있고 그게 내 친구더라구요. 그때부터 난 이미 욕먹을 짓을 했나봐요.

외사랑이라 안된다는거 알면서, 그사람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이 구두를 샀거든요.

내친구 말대로 난 친구 애인을 뺏을 생각을 하고 있었나 봐요..웃기죠?"



평소엔 그렇게 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던 그 구두가 오늘은 날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젠 다 끝났는데, 이제와서 날 그사람에게 보내준 이유가 뭘까. 원망스럽다.

커다랗고 평화로운 꽃밭을 찾아 기나긴 터널을 건너다가 막상 터널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지옥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울지마세요. 제가 새 구두 선물해 줄게요. 그거 신고 자유로워지는 거에요."


김현준씨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날 위로해 주는 이 사람에게 더욱더 친근감이 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난 오늘까지만 울고, 더이상은 우는 소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만 너무 이사람에게 크나큰 따뜻함을 받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이제는 내가 그사람을 보듬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는 비록 이렇게 보내지만, 내일부턴 좀 더 편안해 질거에요^^"


나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그 사람에게 나는 활짝 웃어보였다.

내가 웃는게 신기했나..잠시 주춤한 그사람이 크게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오늘은 저한테는 특별한 날이네요. 전 수영씨가 웃는게 좋아요. 많이 많이 웃어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해맑게 웃으며 우린 잔에 남아있던 술을 마저 마시고 새로

잔을 채웠다.

그리고 우린 서로 알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아픈 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걸, 그리고 이 만남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걸.

눈보다 깨끗한 술과 내 앞에 앉은 이 사람의 따뜻한 미소를 즐기며 난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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