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안의 그녀.24

니뿡간지 작성일 07.01.09 18: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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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선욱은 그 생각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자살행위.
이 병원에 오래 있는 것은 자살행위다.

하지만?
병원을 나간다고 해서 뭐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시 레스토랑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것.
그것이다.
괜히 “Z" 와 연루시켜 폐를 끼칠 순 없다.

선욱은 머리가 아파왔다.
차라리 기억이 없었던 때가 그리웠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린다.
예리의 모습이 선욱의 눈 안에 들어왔다.

창밖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
기다란 머리카락이 더욱 거칠어져 보인다.
피가.... 엉켜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간을 죽여.
죽이고 죽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그녀.

하지만 이럴 때는 부럽다.
아무생각 없이.
행동만이 앞서는 그녀가.

“예리야..”

“응?”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선욱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인간들이 보고 있어.
개미 같아. 쪼꼬매.
게다가 무진장 많아”

“움. 그래? 설마 또. 그 사람들을 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아니지?”

선욱의 질문에 예리는 그만 정곡을 찔렸는지 눈에 보일정도로 찔끔거렸다.
그러더니 냅다 소리를 질르기 시작했다.

“아냐.!! 그냥 쳐다본 거야!!”

완전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꼴이었다.
선욱은 웃음이 나왔지만.
내색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완전 얼굴에 써 있구만.”

“얼굴에?? 웃기지마! 그런 거 쓴 적 없는데..??”

예리는 어이없게도 옷의 소매로 얼굴을 막 문지르기 시작했다.

“바...바보야...”

선욱은 웃기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어져서는 그만 이마를 짚어야 했다.

“쓸데없이 사람 죽이지 마”

“.................”

예리는 대답 없이 가만히 선욱을 응시했다.
선욱과 예리의 눈이 서로를 지그시 바라본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니.
내가 얼마나 슬펐는데.
내가 얼마나...

예리는 선욱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악몽 같은 며칠들이 떠올랐다.
바보같이 왠지 또 눈이 아른거린다.

“흥!!”

예리는 이런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 않아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그녀의 눈에 문득.
건물아래의 모습이 비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건물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급해 보였다.

빠져나가는 사람 중에는 환자 뿐 만아니라.
의사 간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예리가 눈치 채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그저 눈이 축축해 지는 것이 짜증날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지 않을거지?
라는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흥“ 이라니.
선욱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언제가 되야 알아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도리에서 신호가 왔다.

“예리야...”

“응?”

“화장실 좀 갖다 올 테니까...그대로 있어”

“뭐? 싫어! 같이 가”

예리는 손으로 눈을 한번 비비고는 선욱 에게 달려들러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화장실을 따라 오겠다는 거야?”

“응!”

너무나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뭐라 거절할 말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선욱은 할 수 없이 예리와 함께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화장실로 가려고 하였으나.
주위가 너무나 조용했다.
병원 최상층인 19층.
특실들만 있기 때문에 조용한건 당연하지만.
왠지 그것과는 달랐다.
사람하나 없는 것 같은 쥐죽은 듯한 조용함.
선욱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예리가 물었다.

“왜 그래? 화장실 간다며?”

“아니...그게...”

“그게..?”

“예리야. 미안한데. 병원복도를 한번 빙 둘러보고 와줄래?
다른 사람이 있나 없나만 봐 주면 돼.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어째서?”

“상처 때문에 내가 직접 돌아다니는 건 힘들어서 그래.
자세한 이유는 이따 설명해 줄 테니까...”

“알았어. 여기에 있어야 돼. 딴 데 가면 죽어”

“알았어.”

예리는 선욱에게 엄포를 놓고는 반대편 복도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그러는 도중에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선욱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왠지 선욱에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사랑스러운. 그런. 오묘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병원의 이상한 분위기는 그런 선욱의 마음을 분해시킨다.

분명히 복도의 가운데에는 간호사들이 대기하는 센트럴 룸이 있을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예리가 돌아왔다.

“어때?”

선욱이 급하게 물었지만.
예리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전혀 당연하지 않은 상황을 대답해 주었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없다니......

“쿠우우우웅”

그때였다.
갑자기 건물전체가 흔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선욱은 당황하며 다시 병실로 들어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이 이미 군인들에게 포위당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젠장!!”

“왜 그래?”

선욱은 화를 내며 방탄유리이기 때문에 깨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애꿎은 유리만 쾅쾅 두들겼다.
지켜보던 예리가 머리에 물음표를 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 “Z"가 온 것 같아”

“Z?"

"응“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건가..... 그녀는.....”

선욱은 예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물론 그 중얼거림이 향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가희였다.

“엣취”

“언니 왜 그래요?”

“아니...갑자기 기침이 나와서”

“움..그건 그렇고 역시 언니는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와요”

“시끄러...”

가희와 선미는 선욱이 입원해 있는 병원 앞에 서있었다.
다니르에게 00367를 병원 안에 거의 가둬놓다 시피 했다고 말해주자마자.
호들갑스럽게 ECP의 남은 전 병력을 동원해서,
그리고 이용할 수 있는 공권력을 모두 이용해서 거의 순식간에 일을 진행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르에게는 아마도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희의 말대로라면 절호의 찬스다.
다니르는 조금이라도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병원에서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워낙에 겁이 많기 때문일까.
가희는 그런 다니르가 대체 어떻게 ECP의 대장이 된 건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대장이 저러니 "Z"내부에서는 ECP가 단지 쓰레기 처리반 정도로만 인식될 뿐이겠지.

“신속하게 병원전체에 폭탄을 설치해”

“언니..아예 건물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생각이세요? 이정도의 폭탄을..”

“당연하지. 잿더미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00367을 죽여?”

“그런가요...”

“어차피 그년은 빠져나오지 못해. 혼자가 아니거든. 하하하하 ”

가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으나.
그녀의 마음이 선욱을 만나기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대로라면...죽겠지...그놈도...”

“치...이이익...각조, 진행상황을 보고해라”

그런 가희의 옆에서 선미가 무전기를 들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1층. 전 구획 설치 완료, ”

“2층 전 구획 설치 완료”

“3층...”

지시라기보다는 이런 식의 보고를 받는 것이 전부였지만....

“19층(예리와 선욱이 있는)을 제외하고는 전부 완료했답니다. 언니”

열심히 무전기와 말을 하던 선미가 가희에게 완료사실을 보고했다.

“좋아. 일단 즐겨볼까?”

“예??”

“넌.... 내가 그냥 폭파만 시키고 끝낼 거라고 생각했어?"

"아..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일단 일층의 폭탄하나만 터뜨려”

“하지만 하나를 터뜨리면 그 여압으로 나머지도...”

“괜찮으니까 어서”

“예..!!”

선미는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가희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 토를 달지 않고 바로 지시를 내렸다.

“콰앙!!”

1층의 폭탄 하나가 터지자 곧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19층에 병력을 투입시켜”

“네?? ”

선미가 또 가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가희는 조금 신경질이 낫는지.
아니면 마음속에 걸리는 어떤 사실 때문인지- 소리를 질렀다.

“폭탄이 안 설치된 그 년놈이 있는 19층 말고.
폭탄이 깔려있는 아래층으로 유인시키란 말이야!”

“아....예!!”

가희는 황급히 지시를 내리는 선미를 한번 바라본 뒤
다시 건물의 꼭대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

괜히 애꿎은 창문을 내리치던 선욱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Z가 왔다고?”

“그래”

“그럼..다 죽이면 되는 거지 왜 그렇게 화를 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닌 거 같아.
이미 건물 안의 다른 민간인을 모두 피난시킨 거 같은데...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쩌려고 하는 건지...“

“무슨 소리야..?”

예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여튼 나가자”

그런 그녀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선욱은 곧바로 예리의 손을 잡아끌고 병실 안에서 나왔다.

“두드드드드!!”

바로그때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가희가 옥상에서 19층으로 투입한 병력이었다.

“뭐야!!”

“예리야, 흥분하지 마. 일단...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래층??”

“그래, 여기서 싸우다가는 우리만 손해야. 상황도 파악이 안 되고 게다가 ...”

“그럼....방법이 있어”

예리가 눈까지 빛내면서,
아니 그 눈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선욱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그녀를 언제나 도와주었던 선욱을.
자신도 도와줄 수 있다는 그런 마음.

하지만 선욱은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어버렸다.

“보나마나.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자는 소리를 하려고 그러지?
소용없어, 너는 몰라도 난 이 높이에서 뛰어내렸다가는 미쳐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심장쇼크로 죽어버릴걸 그러니까 안돼!”

“어...어떻게 알았어!!??”

예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선욱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네가 생각하는 건 다 알고 있어. 바보야”

“뭐!!?!!”

예리는 서운한 기분에 괜히 발끈했지만
아무 의미 없는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손을 이끌고 곧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곧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반대편 쪽에서는 그렇게 총을 쏴대면서 왜 정작 계단 쪽에는 아무도 없는 건지..

당연히 이상했다.
너무나 이상해서.
지나가는 애도 이상하다는 걸 느낄 정도였다.

“예리야..조금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물어본 게 잘못이었다.
.
.
.
하여튼 선욱은 애써 의문을 짓누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상하다고 총알이 날라 다니는 곳에서 계속 있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예리는 얌전히 그를 졸졸 따라왔다.

하지만 선욱이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계단반대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뭐...."

곧 화염과 폭탄의 여압이 복도를 통해 전해왔고,
다른 폭탄도 마저 터져버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18층 전체가 불바다가 돼 버린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위력이 약한 폭탄만을 터뜨렸을 뿐.
정작 진짜는 아직 터지지도 않았다.

“뜨거워...”

선욱과 예리가 서 있는 곳 까지도 곧 불길이 번져왔기 때문에,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 졌다.

“젠장...본격적이시구먼..”

“본격적?”

“예리야?...”

“응??”

“너보고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도망가라고 하면 도망갈 거야?”

“웃기지마.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나도 배...”

선욱은 자신 있게 외치는 예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갑자기 그녀를 끌어안았다.

“에??”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거 같아. 완전 보기 좋게 호랑이 소굴에 갇혀 버렸다고 할까...”

“내가 다 죽여 줄 테니까”

“바보야. 죽일 사람이 있어야 죽이는 거지.
보이는 건 폭탄뿐인데...”

“그럼....”

“............,.......”

선욱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 졌다.
그 모습을 보곤 예리는 혼자 폭탄을 짊어지고 “Z"에게 돌진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야..또 혼자 죽으려고 했다가는...!!”

서글퍼 보이는 눈망울.
예리는 그런 모습으로.
소리쳤다.

“알았어..알았어, 안 그럴테니까....
하지만..콜록.,.콜록”

“왜 그래??..”

예리는 선욱이 숨쉬기가 매우 힘들다는 걸 몰랐다-
예리자신은 이런 불구덩이 속에서도 아무런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사이보그라는 말이 더 가까울 정도의 상태다.

“숨쉬기가...콜록...”

그러나 괴로워하는 선욱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왜 그렇게 괴로운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선욱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모성본능. 그것과 비슷한. 아니 조금은 다른....

“화르르륵”

그 순간에도 거센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예리의 긴 머리카락이 그을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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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시작된 2007년 잘 보내고 계시죠?
점점 글쓰기가 힘들어 지고 있습니다. ㅠ_ㅠ
이럴때 위로의 한마디라도 해주시면 도움이 될텐데..^__^::
그럼 즐독하시구요... 다음편에서 뵐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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