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아왔다. 어릴 때, 실험체로 잡혀 들어온 "Z“ 라는 기관 나는 그곳에서 세상을 배웠다.
그래. 순종적이라는 것. 타협한다는 것.
이런 것들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 말이다.
나또한 지금쯤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여느 실험체와 다르지 않았을 운명.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들의 중심으로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다.
“언니?”
한참 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그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언니? 왜 그러세요? 아직 몸이 안 좋은....”
몸이라. 확실히 좋지 않다. 그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상처야 회복되었지만. 체력은 엉망이다. 아니 마음까지 엉망진창이다.
괜히 떠올리고 싶지도 않는 과거의 회상을 하게 만들다니. 그 자식.
“아니야,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고”
나는 나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눈치 채게 하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 상황은 어때?”
나는 이 병원이라는 고층건물의 맨 위층을 바라보면서 질문했다. 병원이라는 곳은 별로 마음에 드는 장소는 아니다.
“그들을 아래층에 고립 시키는 데에 성공 했어요. 총공격을 명령할까요. 아니면 건물 전체를 폭파시킬까요?“
어떻게 하냐고? 나도 모르겠다. 나한테 묻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사실은 그 녀석 에게 조금 더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짜증이 났다.
내가 왜 00367과 노닥거릴 그 녀석에게 자비를 배풀어야 하지?
그럴 순 없었다.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자. 나는 바로 움직여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제 와서 후회 하지 않는다. 그냥 죽이면 된다. 그러면 된다. 하지만 선미의 질문에 나는 선뜻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냥 죽이면 된다며?
“잠시만 기다려”
결국 나는 내가 생각해도 되지도 않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선미의 얼굴 표정은 잔뜩 뚱해져선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 하지만, 완전히 쥐구멍에 몰아넣었는데...”
“기다려!!”
나는 괜히 소리를 질렀다. 딱히 설명할 이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소리라도 질러야지.
“기다려... 상황을 보고 올테니”
“네?... 어.. 언니!!”
난 당황스러워 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텔레포트를 해버렸다. 장소야 뻔하다. 그들이 있을 병원의 18층.
“콜록, 콜록”
바로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불길이 상상이상으로 거세다.
“바보 같아... 콜록..”
나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곤 그들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연기가 심해서인지 앞뒤 분간이 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걸어봤지만, 역시 시야가 흐리다.
“꺄악...”
“콰당”
뭔가에 걸렸다. 넘어졌다.
제길. 아파.....
“미치겠네....”
나는 아픈 무릎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누구!!”
그때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계신가요?”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아마, 넘어질 때 단발마의 비명을 지른 것이 들렸나 보다.
게다가 이 멍청한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 자식 이었다. 목소리는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곳을 향해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나마 불길이 아직 덜 번진 그곳에 있는 건. 그와 00367 이었다.
“누구.........!!”
그가 나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나도 그들을 발견했다.
바보같이 부둥켜안고 뭐하는 거지. 이 년놈들은?
“넌....!!”
00367도 나를 봤는지. 눈이 시뻘게 져서는 나를 쳐다보았다.
저 눈은 위험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여기서, 바보같이, 터져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부둥켜안고 있는 그 꼴이, 너무나 기분이 더러웠다.
감정이 억눌려서, 답답하고 짜증나는, 이상한 기분이다.
“후회할 거라고 그랬지?”
나는 선욱을 향해 대뜸 질문했다. 00367과 붙어 있는 꼴을 보건데. 아마도 기억이 되돌아 온 것 같았다.
“예리야, 가만히 있어. 죽이면 안돼.”
그는 그 상황에서도, 00367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더니. 그렇게 속삭였다.
“뭐? 당장 죽일...”
“제발!!”
00367은 날 죽이지 말라는 선욱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왜...!! 대체 저년이랑 무슨 관계야!!”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 제발...”
선욱은 00367을 그런 식으로 타이르며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후회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치 않던 대답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선,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어째서?”
“모...모르나 본데? 지금 너하고 00367를 죽이려고 병원전체를 포위한 건, 바로 내가 지시한 거라는 걸 모르는 거야? 잠자코 나를 죽게 내버려 뒀으면 당분간 편히 살 수 있었겠지. 바보 아냐?“
울컥해서 쓸데없는 말까지 지껄인다. 바보 아냐? 라니. 내가 바보 같다.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도 없다. 나는 흘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는 것 같더니, 다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지시한 거란 건, 뻔히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구한 걸 후회 하냐고 묻는 다면 역시나 아니에요. 사람을 구한 걸 후회한다면, 전 예리에게 살인을 하지 말라고 다그칠 자격 따위 없을 꺼에요. 당신을 구하는 것이 그 당시의 최선의 선택이었고, 당신은 살아있으니 과거의 일을 자꾸 들먹여서 뭐해요? “
“뭐....뭐라고 하는 거야? 이제 나란히 죽을 텐데? 혹시 나를 구해줬다고 나한테 구해달라고 할 심산은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어림없어“
“당신이.... 구해달라고 해서 구해줄 사람이 아니잖아요? 우리를 어쩔 생각이죠?“
기가 막혔다.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 때문에 죽을 껄 알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제정신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녀석은.....
그럼... 나란히 죽여줄게. 아니다, 너는 살려서. 나를 살렸기 때문에, 00367을 죽게 만들었다는 그런 현실을 자각시키며 평생 괴롭혀 줄 테니까.
그럴 테니까!!
나는 공허한 마음에. 아니. 무언가 얹힌 짜증나는 기분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선미에게로 돌아가려 몸을 돌려 세웠다.
“위험해요!!”
그때였다. 그가 나를 밀쳐 낸 것은.
나는 앞으로 밀려 넘어졌고, 곧 내 눈 앞에 불길로 인해 약해진 천장의 시멘트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그리고 그는 나를 밀쳐낸 대가로 시멘트 아래에 깔려 버렸다.
. . . . 마음에 안 드는 인간. 이 세상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인간.
그 인간이 내 눈앞에 서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그 더러운 피를 사방으로 뿜어내게 만들 수 있다.
나는 힐끔 그를 올려 다 보았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
싫다. 나 아닌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지 마.
죽이고 싶다. 정말로 죽이고 싶다.
그러나 죽일 순 없다. 그가 하지 말라고 했다.
“누구세요?”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나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무 의미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무섭다. 그런 건.
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또 언제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 취급할지 모른다.
그런 건 싫다. 나는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끓어오르는 살의를 가까스로 참아 낸다. 그런 내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눈앞의 여자와 이야기 하면서,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따뜻하다. 그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때는 그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기 전에. 죽여 버리면 된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뒷모습.
그러던 그가, 갑자기 뛰어오르더니 그년을 밀쳐 버렸다.
뭐지? 가만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만 놀라 버렸다.
그러더니 그는 건물 덩어리에 깔려 버렸다.
치솟는 건 분노. 증오. 살의.
“괜찮아....?”
대답이 없다.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솟아오르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그년을 쳐다보았다.
“너....너..... 때문에...!!”
“00367.... 날 죽이고 싶어?”
그녀는 별 표정 없이 그렇게 물었다. 당연한 걸 묻는다. 그냥 죽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덩어리를 파괴시켜, 선욱을 구해 내야지. 그게 먼저다.
나는 온힘을 집중해서. 그의 위를 짓누르고 있는 건물조각을 폭발시켜 버렸다.
아주 산산조각. 아니, 거의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정도는 간단하다.
그리곤 그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나는 그의 볼을 쳐 보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축 늘어져 버렸다.
“비켜봐”
그년이 다가오더니 손을 그의 목 부분에 가져갔다.
“괜찮아, 살아있어. 정신을 잃었을 뿐이야“
그러더니 그년은 지그시 선욱을 바라보았다. 재수 없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넌, 그만 죽어버려!”
“잠깐만, 그를 죽일 셈이야?”
“뭐?”
“주위를 둘러봐, 모든 층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은 불길로 뒤덮여 있는데. 네가 그를 살릴 수 있을 거 같아?“
---------------------------------------------------------------------------------------------- 슬럼프의 조짐이 있어서 위로를 부탁했는데.... 몇분 안해주시던군요ㅠ_ㅠ: 덕분에 슬럼프에 허덕였습니다...; 그래도 어케 다시 돌아왔습니다. 즐독하세연..^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