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과 연 3. 인연일지도 모르는 것.두가지 상황

똥광의영광 작성일 07.01.21 01: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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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일지도 모르는 것]

1.


“뭐?!”

이게 미쳤나. 어제부터 왜 모두들 나한테 아저씨래.

“이봐요. 아가씨, 말..”

피씨방 아르바이트생의 아저씨라는 말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주위의 눈도 있고 이 이상 다퉈봤자 나한테 이득 될 것이 없으니 참기로 한다.

“계속 말씀하세요.”

내가 중간에 일부러 말을 끊었는지 모르는 저 여자.

“아..아.. 됐어요. 그만하죠. 계산하고 나가면 되죠?”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피씨방을 빠져나가는 것. 10분도 채 하지 않은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오늘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카드를 집는다.

“그러시든가요.”

아르바이트생의 목적을 잊었는지, 아니면 내가 정말 재수가 없는지 알 수 없는 저 빈정대는 말투. 싸대기라도 한 대 후려갈겼으면 하는 마음이 일지만 마음속으로 꾹꾹 억누른다.

“카드 여기있어요.”

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피씨방 카드를 건낸다.

“어차피 사용시간도 별로 안 된 것 같은데 그냥 가세요. 빨리 나가주셨으면 하네요.”

끝까지 저 여자는 나에게 벌레를 보는듯한 표정과 쌀쌀맞기 그지없는 말투를 보여준다.

“아..후.. 씨발.”

마지못해 욕이라도 하고 가야 시원하겠지만 보통의 성격 이상을 가지고 있는 저 여자에게 욕해도 득 될 것이 없는 것을 아는 나는, 조용히 중얼거리고 카운터를 통해 입구로 간다.
카운터 안쪽의 의자위에 놓여있는 가방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옆의 의자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책을 무심결에 쳐다본다.

문을 열고, 나간다.

아까 피려다 만 담배에 다시 불을 붙힌다.

한 모금 빨면서, 일층으로 내려온다.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간에 다툼이 있고나서 지고나면 억울해서 몇날 몇일이든, 화가 풀릴때 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군대를 가서, 생활하면서, 이 지랄 같은 성격은 많이 나아졌지만 방금 같은 상황에 도착하게 되면 머리로는 참을 수 있는데도 입이 먼저 튀어 나가버린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사과한 다음에 나왔으면 저 아르바이트 생이 나를 벌레 보듯 하지는 않았을텐데..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걸어오다 보니 벌써 집 앞의 신호등에 당도 해 있다.

거의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끈다.

반대편의 적색신호등을 물끄러미 보면서 다시 생각에 잠긴다.


방금 전 피씨방 에서의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후회를 해봤자 남는 건 근심뿐이므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문을 나오기 전 카운터의자에 놓여져 있던 책이 생각난다. 냉정과 열정사이..

로쏘인지 블루인지 조명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똑똑히 보였다.


냉정과 열정사이...

군대에 있을 때 병장이 되면서부터 소설류를 많이 읽기 시작했는데 제일 감명 깊게 본 책중의 하나가 냉정과 열정사이였다.

처음에는 에쿠니 가오리가 쓴 로쏘를 보았다가 나에게는 왠지, 맞지 않는 것 같아 대충 한번 훑어 읽고 말았는데, 츠지 히토나리가 쓴 블루는 3번 이상 읽었었다.

누군가 지나간다.
내 옆의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간다.
신호등이 청색으로 변해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천천히 풀고 나서 신호등을 건너간다.

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오셨을 테지만.. 오늘은 일이 없어서 일찍 왔다고 말씀드리고 쉬기로 마음먹는다.

예상대로 할아버지는 집에 와 계셨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아까 정한대로 말씀드리고 내방에 들어가 자켓을 한쪽구석에다가 벗어놓고 이불을 등받이 삼아 눕는다.


2.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이유없이 무엇엔가 잠겨버린 나의 머릿속 문제를 풀기위해.

주위의 잡음들은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생각의 흐름에 나는, 위치한다.


냉정과 열정사이 블루는 내가 3번이상 읽었었던 책이다. 그때의 기억을 살리기 위해 내용하나하나를 꼼꼼히 끄집어서 되뇌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래된 시간에 기억들은 사라진듯 싶다.

대충 기억나는 부분이라면..


-쥰세이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두오모에서 아오이와 수년전에 정했었던 시간에 약속대로 맞춰나온다. 아오이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그녀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잠겨버린다. 다행이도 비록 시간은 늦었지만 약속을 잊지 않은 아오이는 쥰세이와 재회를 하게 되고 짧은 시간동안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다시.

아오이는 떠나가려 마음먹는다.

쥰세이는 아오이를 영원히 놓치지 않으려 마음먹는다.

아오이의 냉정과 쥰세이의 열정이 블루와 로소 두 권의 책 마지막부분에 제일 잘 나타 나있
다. -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뿐이다.-

그래서 제목이 냉정과 열정사이 아닐까.

생각의 흐름, 그 틀에서 벗어나오기 시작한다.

눈을 뜬다. 이제야 잠겼던 머릿속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우연찮게 본 한권의 책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피씨방 아르바이트생, 아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책에서 표현되는 것과 성질의 부류는 차원이 다르지만 어찌됐든, 냉정이라는 표현이 그녀를 말해주기에는 더 없이 적당하다.

이게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두 가지 상황]


1.


시간이 6시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피씨방의 손님들은 점점 많아져간다.

오후에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 아저씨가 먼저 나가주었기에 신경 안쓰게 되어 편하다.


남자라는 성을 가지고 여자를 깔보듯 보는 사람들, 무시하고, 그 위에 존재하려는 새끼들을 보면 한없이 역겹지만, 무섭지는 않다. 이것 역시 군인이었던 아빠의 피를 받아서일까.


지금 한명의 손님이 문을 향해 들어오고 두 명의 손님이 카드를 건네면서 계산할 준비를 하고 있다.

“두분 같이 계산하실건가요?”

“네에. 같이 계산이요.”
바코드리더기에 카드를 대고 금액을 확인한다.

“4200원 나왔습니다.”

내가 금액을 말하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손님이 지갑을 꺼내어 5000원을 건내준다.

“여기요.”

그 돈을 받고 800원을 거슬러 준다.

“안녕히 가세요.”

“네에.”

내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 놓여져 있는 스웨이드 숄더백과 그 옆에 놓여 있는 책을 바라본다. 아쉽게도 오늘은 예상외로 손님이 많아 여유롭게 책을 볼 시간이 별로 없다.


파트체인지 시간이 거의 다가온다. 나는 컴퓨터로 대충의 금액 정산과 손님내역을 확인하고 A4용지에 적어서 동식군 에게 줄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내가 가기전의 마지막일인 마무리 청소를 시작한다.


주변 테이블의 정리와 휴식대의 정리를 끝내고 마침 들어온 동식군 에게 전해준다.
동식군은 그걸 받아들고 현금내역과 손님내역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이상이 없으리라 믿고 나는, 스웨이드 숄더백에 책을 집어넣고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고친다.


화장을 다 고치고, 동식군 에게 인사를 하고 문을 통해 이미 어두워진 밖으로 나온다. 볼품이 없는 거리여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은 빛을 발하며 볼품없는 거리의 어둠을 밝혀준다.

나는 팔에 걸치고 나온 베이지색 후드목도리를 정돈하여 목에 감아주고, 집에 갈지 사람들을 만날지 고민한다.

아까 몇 건의 문자가 오긴 했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아서 답장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이 만나자고 했으면 당장 거부하는 답장을 주겠지만,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는 문자여서 약간의 고민을 하게 된다.

핸드폰을 꺼내려 백을 만진다.

왼쪽 어깨에 매어진 백,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책, 책이라..


문득,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떠오른다. 어차피 친구들을 만나봤자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즐기게 될테니, 집에 가서 따뜻한 카푸치노 와 함께 조용히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버스 안 중간의 빈 좌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꺼내고, 문자를 보낸다.


-미안~ 오늘 못 갈것 같아 다음에 꼭 갈게 ^^;-

몇 분 안 있어서 답장이 왔다.

-이 기집애는 맨날 못 온데,--;
돼써 오지마.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거니까!!
베에~-ㅠ- -


친구의 귀여운 문자에, 나는 살며시 미소가 번진다.


2.


깜빡 잠이 들은 듯 싶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잠이 들어버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눈을 뜨고 창문을 바라보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아직 중간쯤 밖에 오질 않았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차밖의 여유로운 풍경과는 달리 차안은 뭔지 모를 소란이 일어난 듯 보인다.


"이 여편네야 자식관리 어떻게 하는 거야?“

내 앞쪽에 서있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소리친다.


“아니, 당신이 내 자식 관리를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여자도 보통성깔이 아닌 듯, 남자에게 쇳소리로 윽박지른다.


여자 뒷 자석 에는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가 울고 있다.

“이 여편네가 미쳤나. 당신이 그러니깐 자식새끼가 이 모양 아니야. 지금! 가만히 가고 있는 사람한테 물총 뿌리는게 제 정신이야? 지금 내 바지 보여 안보여? 그러고도 그딴 소리나 찍찍 내뱉어? 부모가 이 모양이니깐 자식새끼도 이 모양이지.”

남자는 얼굴이 벌개 진채로 흥분해서 소리 지른다. 큰 싸움이 날수도 있겠지만 지켜본다.


“그래!! 이 새꺄!! 내 자식 내가 잘 키우고 있는데 어디서 지랄육갑이야! 애가 장난 칠수도 있는 거지! 응?!”

여자는 매우 흥분한 듯이 헉헉거리며 남자에게 대든다. 뒤에서 꼬마는 계속 울고 있고 버스기사는 남자한테 어서 나가시라고 권유조로 말한다.


남자는 여자의 기가 막힌 행동을 보고 할 말을 잃었는지, 출구의 자동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한마디 한다.

“자식새끼 관리 좀 똑바로 하쇼! 에이! 더러워서 참 내.”


그리고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을 보면서 앉아있고, 꼬마는 언제 울었냐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다.

다행히, 시끄러운 사태로 번질 수 있었던 일이 남자가 중간에 그만둬버려 종결 되어 버렸다.


버스는 출발하고 나는 그 상황으로 인해, 잠이 다 깬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차창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집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린다.


3.
엄마가 아직 안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내방으로 들어가 숄더백을 침대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백 안에 있는 책을 꺼내어 책상위에 놓는다.


샤워를 하고 간단히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샤워하기 전 커피메이커에 달여 놓은 카푸치노를 커피잔에다 적당히 따른다. 그 다음, 내 방으로 들어가 비스켓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기 시작한다.

‘냉정과 열정사이 로쏘’, 에쿠니가오리의 청아하면서도 우아한 문체가 나를 깊이 빠져들게 한다.


20분정도 지났을까, 글 안에서의 어떤 단어로 인해 우연찮게 버스 안 에서 일어났던 상황과, 오후에 피씨방 에서 직접 겪었던 상황이 순간 믹스되어 생각의 노선에 표출되었다.

아까의 두 가지 일이, 강하게 이미지화되어 기억 속에 남게 된 것일까.


심려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으려 해도 이미 표출 되어 버린, 두 가지의 상황이 나의 옷깃을 잡아서 놓질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듯이.



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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