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상과 치성
2-1. 애타는 마음
"이제, 문자도 주고받고 연락도 하는 거야?"
"흐흐, 어. 왜 이리 귀여워 죽겠는지 모르겠다."
지상이 2틀 전에 피씨방을 봐준 덕분에 그 만남은 편하게 이루어졌고, 그것을 계기로 서로 문자를 주고받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승아를 보고 싶지만, 그게 뜻대로 안돼 답답하기만 하다.
"잘 됐네, 이제 사귀면 되겠다 야."
"야, 근데 문제가 좀 있어."
"뭔데?"
하루에도 몇 십번씩 문자를 주고 싶지만, 승아는 먼저 나한테 문자를 보내지 않는다. 계속 문자를 보내는 건 내 쪽이다. 다행인건 문자를 보낼 때마다 답문이 온다는 것이지만,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라든지, 시시콜콜한 일상에 대한 문자는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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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아씨 뭐해요?'
'밥먹고 있어요.'
'뭐 먹고 있는데요?'
'컵라면 이요.'
'트레이너가 컵라면 먹고 되겠어요? 살찌지 않아요?'
'오늘은 이것만 먹고 아무것도 안 먹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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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 하면 어! 하고 오는게 있어야 하는데, 내가 질문형 문자를 보내면 그녀는 단답형 문자를 보낸다. 난 승아의 이런 답문에 대해 치성에게 이야기 한다.
"야, 너가 문자를 너무 많이 보내는 거 아니냐? 좀 귀찮아 할 거 같은데?"
"그런가?"
"아니, 뭔 문자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 너 완전 여자 가지고 놀잖아. 근데 왜 이리 안절부절 못하
는 건데?"
"그게.. 걔가 그렇게 나를 만드네.."
"와, 지상. 너 완전히 걔한테 빠졌구나. 진짜 이런 건 처음 본다."
"그렇지? 너도 이런 모습 처음보지?"
"당연하지. 내가 너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네 성격을 모르겠냐."
그래서 미 치 겠 다. 너도 내 성격을 알지만, 내 성격은 내가 더 잘 알잖냐. 내 뜻대로 하지 못해 미 치 겠 고, 너무 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미 치 겠 다.
"야, 그럼 내일 만나자고 할까?"
"뭔, 뜬구름 잡는 소리야. 너무 급한거 아니야? 좀 천천히 만나."
"니가 내 마음을 알랑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한참 모르지. 담배나 하나 줘."
난 담배 한 개피를 치성에게 건내어 준다. 쳇, 거리는 치성의 모습을 보면서도 머리 위로는 승아의 얼굴이 아른 거린다. 그때의 그 향수 향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또 심장은 벌렁거리고 가슴은 콩닥 뛴다. 한숨 두 숨이 가빠지면서 승아가 보고 싶어 죽을것만 같다.
"너, 상사병 걸린거 아니야? 왜이리 얼굴이 빨개보이냐?"
"어?"
2-2. 잘 돼었으면 하는 바램.
지상이 건네어 준 담배 한 개피를 받고 입에 문 다음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깊게 빤다. 그리고 지상의 얼굴을 바라본다. 지상의 얼굴 좌우 뺨에는 '승 아' 라는 이름이 박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와, 진짜 빠져 버렸구나. 도대체 어떤 애 이길래 이렇게도 친구의 마음을 뺏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가 없다. 내가 인정하는 '여자 킬러'였던 지상이 아니었던가.
과거부터 시작해 최근까지 지상이 만난 여자들은 몇 일 안가 모두 차버리길 반복하고 무조건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느니, 나한테 맞춰야 한다느니 나불거리면서 지냈던 놈이었지.
그러고 보면 지상 이놈아도 가끔가다 정신 나간 짓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2달전인가 들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난다. 난 그 이야기를 듣고 '이거 제대로 미쳤구만' 하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었냐면 지상이 20대 초반 여자애 한명을 만났었는데, 사귄 시점으로부터 1주일 정도 지나서 자기 오피스텔에서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와인이 약간 독했는지 취기가 돌면서 뜬금없이 그 여자애한테 '우리 애 몇 낳을까?' 라는 아주 기가 막힌 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자애는 기겁을 하면서 도망치듯 지상의 집을 나왔고 그 이후로 연락이 안 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내게 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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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지금 나이가 29살 이잖냐.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너랑 6살 차이 나는 35살짜리 여자랑 사귀게 됐어. 근데, 그 여자가 너랑 사귀면서 첫 잠자리 하자마자 너한테 '우리 애 몇 낳을까?'그랬어. 그럼 너 어떻게 할건데?"
"깜짝 놀라겠지."
"그래, 그리곤 안 만날거지."
"어. 그럴거 같아."
"그러니깐 니 생각만 하지 말라고. 몇일이나 사귀었다고 파릇파릇하게 어린 여자애한테 '우리 애 몇 낳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꺼내? 니가 제 정신이냐?"
"음, 듣고 보니 그런거 같기도 하고.."
"야, 상황에 따라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하여튼. 뭐 이젠 끝났으니 어쩔 수 없네.내가 지금 너한테 이런 이야기나 할 처지냐? 이성 관계는 지상이 너가 나보다 훤히 꿰뚫고 있으면서 가끔씩 돌아이 짓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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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여자애한테 너무 빠져들어서 천천히 가야 될것 같은 이 상황을 너무 급하게 질러서 가려고 하는 느낌이 든다. 조금만 더 진정하고 천천히 만남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인데, 돌싱이 된지 오래여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 급해 보인다.
"너, 상사병 걸린거 아니야? 왜이리 얼굴이 빨개보이냐?"
"어?"
"너 얼굴도 빨개지고 호흡도 가빠지고, 아주 그냥 그 여자애한테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같은데 뭘, 걔 생각하면 잠도 안오지?"
"어, 맞아. 진짜 그래."
"에휴, 진짜 인생사는 돌고 도나 보다. 너가 나한테 많은 걸 알려줬어도, 반대로 되풀이하는구나."
뫼비우스의 띠. 절대로 끝나지 않는 무한대. 항상 나한테 인생을 살면서 충고와 독려를 해준 지상이 오늘따라 너무나 어린아이 같이 보인다. 내가 나아갈 수 있도록 인생의 조언을 해주었지만 오늘은 반대로 내가 조언을 해주고 있으니 이것 참. 신기하네. 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친구이면서도 헛 점은 왠만하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지상,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최고로 자기 중심적인 이 남자도 무너질 때가 다 있구나 생각한다. 그래도, 진정으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 조금만 더 천천히 다가가서 끌리게끔 만드는 사랑의 기술. 그 여자애에게 뺏긴 이성을 다시 되찾아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
2-3.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남자.
"야, 야 진정하고 걔도 너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으니까 답문도 하고 그러는것 아니겠어? 널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잖아. 한 번 만나고선 왜 이렇게 급하게 차지하려고 하는거야? 모든 사랑이 한 번에 이루어지면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싱글은 누가 있겠냐?"
그래, 그 말이 맞다. 이게 지금 상사병인가? 왜 이렇게 나는 급한거지? 계속 내 자신에게스스로 반문해본다. 치성이 진정하고 천천히 만나라고 할수록, 나의 마음은 더 급해지고 하루라도 빨리 승아를 만나고 싶다.
"오늘 만나자고 할까?"
"아우, 이 '병' 신, 아니 '븅' 신아. 그만 좀 해라."
"......"
치성이 계속 릴렉스, 릴렉스를 외쳐도, 내 마음은 릴렉스 되질 않는다. 오히려 치성이 진정 하라고 할수록 내 마음은 레이싱 경기장에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레이싱 선수처럼. 악셀을 순간 순간 밟으며 초록불이 켜지면 바로 튀어나가고 싶다. 1등을 하고 싶고, 골 라인에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치성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야, 그냥 들이 대버려. 차라리 그게 낫겠다. 모 아니면 도 아냐? 속전속결로 만나자고 해서이야기 나누고 네가 좋다고 해버려. 그냥 솔직하게 나가. 니가 꿇릴게 뭐가 있냐. 너 더 이상 그런 꼴 보기도 싫고 여기까지 와서 네 사랑이야기만 들어주느라 힘들다."
네 푸념을 들어주는데 지쳤는지 '모든 건 니 알아서 해' 라는 것처럼. 핀잔을 주는 치성의 그 말이 이상하게 힘이 된다. 그 말은 내가 가진 차의 휘발유가 되어 난 그 휘발유를 주유구 안으로 들이 붓는다. 엔진은 탄력을 받아 우렁찬 소리를 내고, 난 거기에 몸을 맡긴다. 핸드폰을 꺼내, 승아에게 문자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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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아씨 내일 뭐해요?'
'내일요? 내일은 친구 생일 있어요.'
'그럼 내일 모레는 시간 괜찮으시죠? 드라이브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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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쾅쿵쾅. 그녀의 답문이 제발 오케이길 빈다.
"결국 들이대기로 한 거구나. 이제 속이 좀 편하냐?"
내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확인한 치성의 한 숨 섞인 목소리. 에휴, 오늘만 날이 아닌데 아닌데 하며 쯧쯧 거린다. 핸드폰을 계속 쳐다보게 된다. 1분 2분이 지나는게 눈으로 보인다. 어떤 형식으로든 빨리 답장이 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내 몸 전체를 지배한다.
'메시지가 도착 했습니다'
오, 하느님 제발. 나는 핸드폰의 화면을 켜고 아주 조심스레 문자를 확인해 본다. 마치 수능생이 대학 합격여부를 확인하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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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내일 모레 만나요. 몇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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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광. 롤러코스터가 하강하기 직전의 정점에서 바로 내다 꽂는 짜릿한 순간. 표현할 수 있는 한계점. 그 이상의 기분. '미' '치' '겠' '다'
"와! 치성아. 내일 모레 만나잔다!"
"오,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다행이네.."
약간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 치성이 말끝을 흐리는게 보인다.
2-4. 씁쓸한 기분.
난 솔직히 그렇다. 지상이 저래 호들갑을 떨면서 그 기운을 계속 내게 전파하는데, 계속되는 그 여자애의 찬양에 대해 조금씩 지친다. 너무 급하면 될 일도 안 되듯이,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말도 있듯이, 조금만 호흡을 가다듬고 릴렉스 하면 잘 될 것 같은데,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만나고 싶어 할까라는 생각. 내 자신이 너무 오래 싱글이 되는 바람에 이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버린 건가?
역시 차가 있고, 자기 사업을 하는 놈이니. 성격만 고치면 안 따라올 여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상, 네가 말하는 그 정도의 여자면, 너의 스펙은 그렇게 중요치 않게 생각할 것 아냐?
난 치성의 그런 급한 모습을 보면서도 친구로써 동감해주는 척을 한다.
"오, 결국 이렇게 되는구만. 다행이네.."
"왜? 표정이 안 좋아 진다?"
"잘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꼬치꼬치 말해줘도 네 스스로 판단하는 결정이니 더 이상 노코멘트."
"그럼 어떻게 하냐, 미치겠는걸."
"에휴, 진짜로. 더 이상 노코멘트고 이렇게 까지 하는데 못 사귀면 넌 천하의 상 '병'신이다."
"크크크, 욕이냐 칭찬이냐. 하여튼 기원해줘라."
그래, 기원하마. 제발 좀 쓸데없는 이성이야기 이제 그만 좀 해라. 잘 돼었으면 해요 하는 기원이빨리 깨져라 하는 저주로 바뀔 것 같다. 아무리 주위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도움을 주고 조언을 해줘도, 그것에 대한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이말 저말에 끌려 다니고 혹 하다가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넌 적어도 그것이 옳은 판단이든 나쁜 판단이든 네 말에 흔들리지 않고 결정했으니, 더 이상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야 담배하나만 더 줘. 이거 피고 갈게."
"왜? 게임이라도 하고 가."
"여기가 내 직장이냐? 허구헌날 여기 있어서 뭐하냐. 태양 빛도 좀 쐬고 해야지. 비타민D가
필요해."
"그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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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건. 지상이 전에 만났던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무덤덤하게 반응 하고, 내가 궁금해 해도 잘 알려주질 않았다. 내가 '걔는 어때?' 그러면 지상은 '그냥 그래.' 라는 정도. 더군다나, 성격까지 변한 것 같다. 왔다 갔다 하는 성격은, 갔다 하는 성격으로..
내가 예전에 농담으로 넌 초악마야 새꺄. 라고 한 적이 있었다. 지상이 왜? 라고 물어보길래.나는 넌 기분 좋으면 천사가 되다가도 살짝 기분 나빠지면 악마가 되잖아. 라고 대답했다.
'어떤 경우에?'
'음, 예를 들어 니가 나 필요해서 한 두시간 피씨방 봐줄때 처음에는 음료도 주고 과자도 주면서 고맙다, 고마워 라고 하잖아?'
'어, 근데?'
'근데, 내가 이쪽으로 전문적으로 일해 본 것도 아닌데, 실수하면 되게 뭐라고 그러잖아 완전 무표정한 표정으로 똥벌레 쳐다보듯이 왜 그러냐? 하는 식으로 말이지. 조금만 더 내 입장 생각하면 이해해주면서 수고했어. 라고 말해줄 수 있는데 말이지?'
나의 그 말에 지상은 맞다고 동의하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웃었었다.
'그래, 치성 네 말이 맞네, 나 이중인격자인가봐.'
'맞아, 너 이중인격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