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사랑합니다 - 7

지금은짝사랑 작성일 11.01.30 20: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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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조그마하게 보이는 하늘은 붉게 물든 구름으로 가득차더니 곧 그 구름 사이로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어갔다. 만향과 제갈군을 제외한 조장들은 조금씩 어두워 지는 밀림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숲이 짙어지는 어둠에 완전히 몸을 맡길때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주제는 과거의 무용담이 대부분이었다. 설담은 별로 대단하지 않은 조장들의 이야기에도 과장되게 웃으면서 맞장구를 치고있었다. 하지만 비어진 술병이 늘어나고 어느새 꺼내놓을 추억이 모두 동이났을때 정적이 찾아왔다. 모두가 말없이 술잔을 들고 마시기를 반복할때 설담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던 만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대장, 남만으로 온 이유가 여자 입니까?”

 

뜻밖에도 설담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만향은 호기심이 더욱 짙어진 얼굴을 하고서는 물었다.

 

"그 여자와 대장,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설담은 만향이 따라준 술을 입에 털어 넣더니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굳게 닫혀진 입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그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입은 미소만 지을 뿐, 결국 열리지 않았다. 기묘한 눈빛으로 설담을 응시하던 만향은 설담의 입이 열리지 않자 코를 찡긋 거리더니 고개를 틀었다. 어색해진 술자리, 현호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바꾸었다.

 

“난 솔직히 설담 대장의 과거보다, 명원형님의 과거가 더 궁금합니다.”

 

현호의 말에 고개를 틀며 다른 곳을 보던 만향도 관심이 있는지 고개를 틀어 명원을 쳐다보았다.

 

“명원형님이야 말로 청룡대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닙니까? 무림에서 화산신룡이라 불리었던 후기지수가 남만까지 오게 된 연유가 무엇 입니까?”

 

명원은 설담에서 자신에게로 술자리의 화제가 돌려지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의 눈물에 취해 이곳에 오게 되었지.”

 

“이상한 소리로 매번 대답을 피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 만향 이번엔 꼭 그 사연 들어야겠습니다.”

 

만향이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이번엔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현호를 거들었다. 명원은 이 둘을 무시하며 술잔을 들어 밤하늘을 향해 들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잔을 부딪히더니 입안으로 털어 놓으면서 말했다.

 

“겨울을 모르는 새는 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네, 달처럼 아름다운 처녀여, 그대의 눈물은 마치 빛나는 별과 같구나.”

 

자신들을 무시하며 뜻 모를 소리를 해대는 명원을 보며 만향과 현호는 연신 투덜거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명원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때, 제갈군이 언짢은 표정으로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곧 중요한 전투가 시작될 건데 조장들이 술판이나 벌이고 있고, 조원들 보기 창피하지 않어?”

 

“어, 내 잔.”

 

제갈군은 어느새 현호의 잔을 들어 술을 따르고는 한 번에 들이 키고 있었다. 술을 다 마신 제갈군은 잔을 탁 내려놓고는 화난표정으로 설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설대장, 왜 우를 도발하신 겁니까? ‘그녀’때문 입니까? 아니면 단순한 변덕 입니까?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만, 만약 우와의 협상이 깨졌다면, 아니, 그 자리에서 칼부림이라도 일어났다면 꽤나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냥 무작정 행동하는 사람이야 근심 걱정이 없겠지만 그 뒤에서 수습하는 사람은 그 괴로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설대장은 한 무리의 수장으로써 자각이 부족합니다. 그것도 매우!”

 

제갈군은 평소에 쌓아뒀던 울분을 한 번에 터뜨리려고 작정한 듯 매우 큰 소리로 설담에게 따졌다. 분노를 삭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갈군의 어깨가 연달아 아래로 들썩거렸다. 그런 제갈군에게 설담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아래로 깔고는 마치 경극의 대사를 하는 듯이 말했다.

 

“무인들은 결국 피를 통해 대화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파국을 부르든 간에.”

 

“아, 만향이 주워들은 헛소리의 발원지는 역시 당신이었군요.”

 

제갈군은 허탈한 듯 설담을 외면하고는 술병을 잡고 입안으로 붓기 시작했다. 설담은 그 모습에 킥킥거리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하하하, 제갈, 물론 그녀의 흔적을 느껴서 우를 도발한 것은 아니야. 그리고 내말이 허튼 소리인 것 같지만, 무인을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건 그 자가 펼치는 무공의 색(色)이야. 그 예로, 조장들 중 제갈군과 만향은 익힌 무공과 자신들의 성격이 맞지 않아 애를 먹는 경우야. 제갈군은 제갈세가의 제왕검결을 익혔지만 그 꼼꼼한 성격 과 좌수검인 탓에 제왕검결의 오의 ‘군림’을 살리지 못해. 그나마 타고난 재능 때문에 어느 정도의 성취를 얻었겠지만 아마 그것도 곧 한계에 달했을 거야. 그리고 만향, 이 녀석은 본래 소심한 성격인 탓에 수비적인 초식의 운용이 뛰어난 녀석이야, 하지만 본래 익힌 무공은 패도적인 성격을 가졌을 거야. 당연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성취가 매우 느렸을 거야. 맞지?”

 

설담의 말이 맞는지 만향이 과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현호는 자신의 성격과 궁합이 잘 맞는 무공을 익혀서 놀라운 성취를 얻은 경우야. 물론 현호야 그 이능력과 성격에 맞는 무공을 손수 가르쳐준 내 덕이지. 명원의 경우는 사부의 수완이 꽤나 좋았어. 명원과 검을 맞대보면 알 수 있지. 검을 휘두르면 제갈군이나 만향처럼 자신만의 색을 무의식적으로 발현하는 것이 보통이야. 그런데 명원은 마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검을 휘둘러. 무공 익히는 것 자체에 흥미가 없었을거야. 이런 녀석을 화산신룡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키워냈다니, 아마 명원의 사부는 고생이 참 많았을 거야.”

 

“설대장은 마치 나와 검을 섞어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명원은 자신을 어린아이와 비유하는 것에 기분이 나빠져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설담은 그런 명원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전 청룡대에 접수하고 돌아오는 밤길이었지. 한 야행복을 입은 얼간이가 내게 다짜고짜 살수를 펼쳤어. 그 녀석도 참 멍청한 것이, 은은히 빛나는 자색검기는 누가보아도 화산파의 무공임이 분명한데 딴에는 정체를 감추겠다고 그 더운 여름날 야행복을 입고 설쳐 되는 거야. 그래도 그 얼간이의 검은 꽤나 정교했지. 이 몸의 옷자락을 취했으니. 그런데 기가막힌 건 그때 그 녀석이 내 옷자락을 자르고 나서 한 말인데....”

 

“하하하, 그러고 보니 사부님은 나를 제자로 얻으신 후부터 한숨을 쉬시는 일이 느셨지. 나는 원래 무공을 익히는데 꽤나 소극적이었거든. 이거 설담 대장님의 안목이 대단한걸. 하하하하.”

 

명원은 누가봐도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설담의 말을 급히 끊고는 설담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설담은 그런 명원을 장난스럽게 바라보았다. 주위의 다른 조장들은 그런 명원과 설담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설담은 명원이 따라준 술을 마신 후 크윽 소리를 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렇게 한 무인이 펼치는 무공은 꽤나 많은 것을 적에게 알려줘. 우가 익힌 은가창법은 단 한수로 생과 사를 결정짓는 무공. 그런 무공을 익혔고, 적은 나이에 비해 꽤나 좋은 성취를 얻었다는 것은, 우가 상당히 외골수적인 성격이라는 거야. 그런 사람은 남의 뒤통수 까는 짓을 천성적으로 못해. 우가 했던 말들이 거진 진실일 확률이 높지.”

 

조장들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설담의 진지한 말에 이 사람이 그래도 어느정도는 진지한 구석이 있구나라는 눈빛으로 설담을 쳐다보았고 설담은 그 눈빛에 쑥스러운지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설담 대장의 그 말 꽤나 정확 하네요. 제왕검결을 익힐 때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무공이라고 늘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익힐 수 밖에 없었죠. 더구나 왼손으로 휘두르는 제왕검결 이라니.”

 

제갈군은 마치 남의 말을 하듯 감정 섞이지 않은 어투로 나직이 내뱉었다. 제갈군이 자신의 태생을 깨닫지 못했던 어린시절, 그에게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모두가 언제나 남처럼, 아니 남보다 더 낯설었다. 그들은 어린 제갈군에게 따뜻하게 애정 어린 눈길을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눈길에는 항상 차가움이 있었다. 제갈군은 가족들과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에 늘 가슴 아파했다. 그러던 어느날, 제갈군이 제왕검결을 처음 익혔을 때, 아버지는 처음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그 낯선 느낌에 제갈군은 놀랐다. 그 후부터 제왕검결은 아버지와 자신을 연결하는 선이었고 자신은 그 얇아서 끊어질듯 한 선을 부여잡기 위해 미친듯이 제왕검결을 익히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배다른 형과의 비무 중, 형의 검에 오른 손의 힘줄이 잘리자, 그 얇은 선은 결국 끊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제갈군을 찾지 않았다. 제갈군은 힘줄이 잘려 잘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손을 슬프게 쳐다보았다.

 

"오른손을 잃은 후 저는 아버지 또한 잃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저를 버렸다는 사실에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주위를 둘러싼 모든것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에 기쁨마저 느낄 정도였죠.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어떤 절대속에서 오직 검과 나만이 남게 되었을때 그제서야 전 절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예전과 같이 검을 펼치지 못한다는 절망감, 왼손으로 다시 검을 쥐었지만 그 절망감은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는군요."  

 

설담이 그런 제갈군의 어깨를 쥐면서 그를 위로했다.

 

“제갈군, 내 말이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수십년 동안 네 가문의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제왕검결의 오의를 네가 깨닫고 그들 위에서 군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너는 지금 오물을 뒤 짚어 쓴채 바닥을 기어가는 비참한 모양새이지만, 본래 군림 이란 건, 세상의 밑바닥에서 기어본 자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세상의 위에서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자란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지 않아. 제갈군, 지금 너를 막고 있는 그 벽을 너는 곧 깨뜨릴 수 있을 거다.”

 

“설대장,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명원이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하며 설담에게 물었다.

 

“넌, 그냥 접는게 좋을지도.”

 

설담은 귀찮다는 듯이 짧게 대답했다. 명원은 설담의 말에 인상을 쓰면서 대꾸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만향의 손이 명원의 입을 막고 있었다. 명원이 무슨 짓이냐는 눈으로 만향을 쳐다보자 만향이 눈짓으로 한 곳을 가리 켰다. 어느새 제갈군이 느린 걸음으로 어둠이 쏟아진 밀림사이를 걷고 있었다. 검게 물들어진 나무들은 바람에 몸을 흔들며 낙엽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낙엽이 바닥에 쓸리며 허공으로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제갈군이 자신의 검을 들었다. 처음, 그가 펼치는 모습 경극의 배우가 취하는 우스꽝스런 몸동작처럼 과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검은 야성만이 남아있는 듯 어둠 속에서 비치는 모든 풍경들을 거침없이 갈라갔다. 만향은 제갈군의 검 끝에서 아지런히 피어나는 빛을 바라보며 어째서인지 슬픔을 느꼈다. 어둠에 묻힌 제갈군의 눈빛을 만향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달빛에 반사되어 그의 얼굴 주위로 흩날리는 것들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건 빛과 물이구나라고 만향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허공을 선회하던 제갈군의 검이 멈추었을 때 그의 주위에 맴돌던 빛들이 조금씩 옅어지며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말없이 제갈군의 검무를 바라보던 명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군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 명원의 그런 행동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경건함이 느껴졌다. 제갈군을 향해 든 술잔을 거침없이 비우고는 명원은 한 무인의 성장을 축하했다.

 

“좋구나. 모든 것을 검정으로 물들여버리는 밤하늘 사이에 초연히 버티우는 한 무인의 검광이라. 무인의 성장은 항상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지지. 제갈군, 축하한다.”

 

제갈군은 명원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만향은 자신도 모르게 제갈군에게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치도 부족함 없이 꽉 찬 만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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