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번째 만남
3-1. 난 너와 빨리 사귀고 싶다.
승아씨의 만나자는 답문을 받고 난 이틀 후, 여느때처럼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선 차를 몰고 S커피숍으로 향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9시 30분. 그녀도 일 때문에 그렇게 일찍 만날 순 없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일 때문에 너무 이른 오후에는 시간이 되질 않았다.
내 몸에는 파코라반 - 울트라 바이올렛 포 맨을 쓰고 머리는 왁스로 단정하게 꾸몄다. 그때와는 달리 조금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세미 케쥬얼 정장과 청바지를 입었다.
난 커피 숍 건물 밖에 차를 댄 뒤, 차에 내려 입구까지 걸어간다. 오늘은 다른 날씨보다 더 춥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 곁에 누군가가 없어서 인 듯하다. 그녀가 내 것이 되었을때, 내 곁에 누군가가 생겼을때, 난 비로소 온전한 행복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빼곡하게 찬 여러 커플들이 앉아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마주보고 있는 커플들도 있고, 같이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하는 커플들도 보인다. 개중에는 나처럼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면서 이성관계를 확립하고 싶어 하는 남녀들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오른손에 차있는 세이코 시계를 바라보며 중간에 빈 라운드 테이블의 의자에 앉는다. 주문은 승아씨가 왔을때 같이 시키기로 마음먹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기다린다.
10분 정도가 지나서야 그녀는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전과는 다른 차분한 스타일의 룩, 베이지색 코트에 청록색이 감도는 스키니 진과 따뜻해 보이는 힐을 신고 나에게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지상씨, 너무 늦었죠. 미안해요 히힛.“
전과 다른 살짝 가벼워진 말투. 오늘은 소개 이후 처음으로 만난 자리기에 조금더 편안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그녀가 내 앞에 앉은 순간, 전의 그 발랄한 향수 향기는 그대로 전해져 왔고, 그와 동시에 그 전까지 있었던 모든 폭발 적이고 찌릿했던 감정들은 차차 진정이 되기 시작하면서 차분하게 그녀에게 웃으며 말한다.
“오, 오늘은 저하고 비슷한 컨셉 이세요. 역시나 옷 스타일은 제대로 이신 걸요?”
“음, 그럼 제 얼굴은요?”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히 최고죠. 후훗.”
서로간의 외형에 대한 칭찬의 연속. 그녀는 뜨거운 무설탕 아메리카노 커피를 시켰고, 나는 카푸치노를 시킨다.
“음, 승아씨 뭐 따로 드실거 있으세요? 역시 몸 관리 하셔서 없어도 괜찮으시려나?”
“아니에요. 지금은 약간 배가 고파요. 달지 않은 치즈 케익 한조각 정도는 괜찮겠네요.”
그 말에 나는 추가로 치즈 케익과 와플을 시켰다. 5분 정도가 지나니 차임벨에서 띠링거리는 신호와 진동이 왔고, 나는 일어서서 주문한 메뉴를 가져오려고 했다.
“제가 갔다 올게요. 앉아 계세요.”
내가 일어서는 것을 말리며 승아씨가 일어난다. 그리고는 도도하게 걸어서 메뉴들을 가져 온다. 난 그녀가 가져 온 메뉴를 정돈하고 살며시 말을 꺼내본다. 나의 마음, 지금의 현재 상태, 앞으로의 일들, 우리가 가지게 될 만남들, 난 너와 사귀고 싶다 등등.
“저기 승아씨.”
“네. 지상씨.”
“이제부터 솔직하고 남자답게 이야기 할게요.”
살며시 말을 꺼낸 다는게, 점점 솔직해져 간다. 갑자기 치성이 핀잔주면서 말했던 ‘들이 대버려, 솔직해져’ 그 두 음절이 생각난다. 난 승아씨 당신과 빨리 사귀고 싶다.
3-2. 밀고 당기기
‘약간 호흡이 거칠어 보이는 지상씨. 내가 그렇게도 보고 싶었나 보구나. 음, 조금 애타게 만드는 것은 역시 효과가 있어.’
지상씨가 보내는 문자들, 난 그걸 그냥 무심하게 보고, 무심하게 답장한다. 그 이유야 뻔히 알고있는 이성간의 심리. 솔직하게 말한다는 건, 역시나 오늘 어떤 방법으로 던지 결론을 내리자는 거겠죠. 하지만, 난 그렇게 급하게 당신한테 다가가고 싶진 않아요. 조금 더 천천히. 지상씨 당신이 빠른 템포의 삼바춤을 추고 싶다면 나는 느린 템포의 블루스를 추고 싶어요.
“네, 솔직하고 남자답게 말하세요.”
난, 마지막의 ‘말하세요’ 라는 음절 부분을 툭 끊어서 말한다. 순진해 보이는 지상씨의 얼굴에서는 뻔히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알고 있다.
처음에는, 성격관 이야기. ‘나는 원래 성격이 자기 중심적이라 이성을 맞춰주는 것이 맞지 않는 것 같아요.’부터 시작해서 ‘그러나 승아씨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제 성격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계속 당신에게 끌려 다니고 있죠.’ 라는 말. 나 또한 마찬가지로 지상씨 당신처럼 누구한테 맞추는 성격이 아니라 미안하지만, 다른 여자들과는 조금 더 특별하게 나만을 바라보게 하고 싶어요.
“승아씨는 너무 바쁜 것 같아요. 만나기도 힘들고..”
지상씨는 컵에든 카푸치노를 홀짝 거리면서 말한다. 난 그렇게 바쁘게 지내지 않는다. 센터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너도 아니고 상대방의 시간에 맞추는 홈 트레이닝을 하기 때문에 같은 나이또래의 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시간도 많이 남는다. 하지만, 내 시간이 많이 남고,할 것이 없는 걸 오늘 두 번째 만나는 지상씨 에게 보여 지기라도 한다면, 쉬운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깐.
“제가 가지고 있는 회원들이 많아서, 조금 시간내기가 힘들었어요. 미안해요 매일같이 바쁜 모습만 보여드려서요.”
“아, 아뇨 미안하다뇨. 제가 오히려 바쁜 일에 매일같이 문자 보내고 만나자고 한게 오히려 더 미안한걸요.”
같은 반응, 지상씨 스스로가 중심적인 남자라고 해도 어쩔수 없는 대답. 전에 만났던 남자들과 같은 반응에, 조금씩 질려간다. 조금은 당신페이스에 맞춰 줄까요?
“음, 저도 지상씨 보고 싶었어요. 이따가 드라이브 시켜주세요.”
“아! 그럼요. 당연하죠.”
화색이 도는 얼굴, 높은 어조의 감탄사. 내가 조종하는 로봇같은 사람. 언제까지 나를 맞춰 줄 수 있는지 한 번 볼게요.
커피숍 안에서 나는 지상씨와 2시간 가까이 성격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냥 괜찮은 느낌의 남자라는 것은 변치 않지만, 무언가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끔 해주는 것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조금은 아쉽네?
지상씨, 이것만은 변치 않을 것 같아요. 빠르게 달려오는 황소처럼 나에게 다가온다면, 난 투우사가 되어 당신을 찌를 거에요. 그리곤 멈추게 만들겠죠. 난 그럴 수 있어요.
3-3. 급한 스킨쉽, 그리고 딥 키스.
승아씨가 조금씩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간만의 긍정적 대답.
‘저도 보고 싶었어요. 이따가 드라이브 시켜주세요’
두 번째 만남을 가지기 까지 기다려온,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던 이틀 동안 마음 고생했던 것이 이 말 하나로 풀어지게 된다. 너무나 행복 한 이기분에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고, 이제부터 그녀가 나한테 조금씩 맞춰 들어오는 것이 기쁘다. 그 후 약 2시간동안 나는 그녀를 더 알아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눈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빠져드는 몽환의 늪처럼, 깊게, 더욱 깊게 그 늪으로 빠져든다.
긴 대화가 끝나고선, 같이 커피숍을 나와 차를 탔다. 그리곤, 강변이 보이는 도로로 가 그곳에 차를 대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는다.
신나는 음악, 쿵쿵 울리는 우퍼, 그 소리가 싫지 않아 보이는 승아씨. 씨디에서 한곡 한곡이 끝날 때 마다, 음악은 점점 스무스 해지고, 차안의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차를 몰고 한강 고수부지로 가면서 난 변속기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그녀의 왼손에 살짝 갖다 대었다.
거부 하지 않는 승아의 조그마한 손. 한 치 꺼끌림 없는 말랑한 살결. 따뜻한 온기. 조금 더 꼬옥 그녀의 손을 잡아 본다.
“굉장히 따뜻해요.”
“지상씨 손은 약간 차가워요. 제가 따뜻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조금 나지막한 목소리는, 나를 떨리고 흥분되게 만든다. 승아씨는 나머지 오른손으로 내 손을 감싸 안는다.
“저기 승아씨, 이제부터 말 놓고 편하게 지낼까요?”
“그럼요. 이제 지상 오빠라고 부를게요.”
“그래, 승아야.”
가벼운 스킨쉽, 서로 터 놓는 말. 나는 이제야 조금씩 그녀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는 걸 느끼면서, 운전을 한다. 조금 안 있어 한강변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 놓고 한강변을 바라보며 승아와 이야기 한다.
“승아야, 나를 어떻게 생각해?”
어느 정도 승아의 생각을 읽어보기 위한 직설적인 멘트. 조금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교차점.
“으음.”
천천히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난 그 입술을 바라본다. ‘좋아요’라는 말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지만, 조금만 더 진정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려보자.
“괜찮은 오빠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말끝을 흐리는 승아. 갑작스런 나의 이 질문이 그녀를 황당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불편해 하지 마. 별 뜻이 있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기, 지상오빠.”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표정. 난 살짝 굳어지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저는, 너무 급하게 만나는 만남은 싫어요. 천천히 만났으면 해요. 근데, 오빠가 싫지는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죠? 급한 만남은 급하게 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굳이 한걸음씩 세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인 것을 한꺼번에 세 걸음을 내딛을 필요가 있나요.”
“?!”
아무런 연관 없는 서로 다른 모양의 팬던트. 순차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음계의 불협화음.
나는 아첼레란도. 너는 리타르단도. 중간은 없는 너와 나의 만남. 나는 아첼레란도로 승아 너에게 다가간다. 너의 입술로. 끌려들어간다. 그리고, 키스한다.
3-4. 난 아직까지 당신에게 마음을 줄 수 없어요.
오빠의 거칠지 않은 입술사이로 혀의 감촉이 느껴진다. 순간의 망설임은 없어진 채로 나는 눈을 감는다. 혀끝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상오빠, 당신을 받아들이는 징표가 아니에요.’
짧은 순간의 딥-키스 서로간의 혀의 놀림. 조금 더 가까워지려는 나의 신호. 그러나 조금은 천천히.
지상오빠의 얼굴이 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오빠가 말한다.
“저기..”
나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는다. 오빠는 너무 급했어.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며 물끄러미 강변을 바라본다.
“내가 너무 급했지.”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을 거야. 말 그대로에요, 나는 오랜 만남을 가지고 싶어요. 이 모든 것은 오빠가 자초한 것이에요. 당분간은 오빠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에요.
“저 이만 집에 갈게요. 불편하시면 택시타고 갈게요.”
황당하게 쳐다보는 오빠. 자기는 그저 분위기에 따라 행동했다는 표정. 나를 배려해 주지 않은 잠시간의 과정들. 싫지는 않아. 그러나 지금 내 모든 것을 오빠에게 줄 순 없다는 말이에요.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아니야. 내가 데려다 줄게.”
지상오빠는 세워놓았던 차를 몰고 내 집으로 바래다준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쳐다보며 사물들이 지나쳐가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차안의 음악 이외 소리는 들리지 않는 정적. 차단된 대화. 지금 상태는 지상오빠의 탓.
“다 왔어. 내려.”
집에 오자. 무뚝뚝한 말투로 말하는 지상오빠. 무표정. 그런 말투와 표정의 무게는 오빠를 만나면서 처음 느껴본다. 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내린다. 그리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집으로 들어간다.
집안으로 들어온 나는 침대에 잠깐 앉아 생각에 잠긴다. 강하게 단절시켜버린 나의 행동이 혹, 오빠를 화나게 만든 건 아닌지. 라고.
그래도 아까의 키스는 너무 성급했어. 라고 생각하며, 나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야.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아.
“…….”
하지만, 조금씩 생기는 미안함.
“아까 너무 정색했나.”
오빠는 잘 들어가고 있는지. 화가 난 건지 아무런 문자나 전화도 오지 않는다. 난 핸드폰을 들어 오빠에게 전화한다. 10초정도 수화 음이 들리지만 오빠는 받지 않는다.
“이렇게 나오자는 거지. 흥,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조금 미안해졌던 마음은 점점 없어진다. 언제까지 그렇게 나오나 보자. 지상오빠, 알고 보니 당신도 꽤 까탈스러운 사람이군요. 성격이 좀 있네요. 하지만 주도권은 제가 잡고 있을 거에요.
3-5. 지상과 치성의 통화
난 여느때와 같이 일을 끝내고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 난데없는 지상의 전화.
오늘 그 여자애와 만나기로 한건 알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것일까.
“여보세요.”
“야, 짜증난다.”
뜬금없는 지상의 짜증. 워낙 변덕이 심한 놈이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준다.
“무슨 일 있었냐? 그 여자애랑?”
“아니, 그런것은 아닌데 그냥 짜증나.”
지상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
“무슨 일인데? 그만 만나자고 해??”
“정신 나갔냐. 오늘 키스까지 했어.”
난 그 말을 듣고 울컥한다.
“야, 근데 짜증이 왜나? 지금 염장 지르냐?”
지상의 나지막한 목소리.
“근데, 얘가 키스하고 나더니 정색하면서 집에 가겠다고 하더라? 집에 데려다 주긴 했는데
그게 너무 짜증나서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도 않고 그냥 내리라고 했지.“
“응,응 그런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한숨을 짓는 것이 들린다.
“휴, 근데 집에 가는 도중에 얘한테 전화가 왔어. 그때까지도 짜증나서 안 받았지.”
답답한 자식. 죽도록 좋다고 할 땐 언제더니.
“야 이 생 또라이야, 완전히 끝낼 거 아니면 전화를 받았어야지.”
“아, 그러게 말이다. 다시 전화 해 볼까?”
지상은 한숨을 푹푹 쉬며 목소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이 내게 전해져온다.
“쩝. 지금 많이 늦었는데 전화 받겠냐? 그래도 모르니 전화 해 봐. 혹시 모르니까 전화 안받으면 그 소개시켜준 친구한테 어떻게 됐는지 말해보고.”
“그래, 알았다. 근데 내일 저녁에 피씨방 올거지?”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 너희 피씨방만 가면 밤새도록 게임만해서 힘들다.
“꺼져. 내일 집에 있을 거야.”
“그래, 알았다.”
지상의 목소리가 힘이 없어 보인다. 나는 지상의 그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아무리 봐도 천천히 만나자고 하는 여자애를 들입다 대고 키스까지 해버렸으니 정색 할 만도 하지. 아니, 그런데 그 여자애도 싫지 않으니까 받아 준거 아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오래 만난 친구지만, 지상의 성격. 맞춰주기 힘들고 알기 힘들다. 자기 좋을 때는 한 없이 좋다가도 싫을 때는 한 없이 싫어지는 성격 때문에 여자애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두 번밖에 안 만난 남녀가 키스까지 전해졌다면 거의 끝난 것이라고 보겠지만, 곱씹어 보아도 지상의 마지막 그 행동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끝낼 거면 확실하게 끝내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전화는 왜 안받아가지고 마음을 졸일까.
나는 잠시간의 생각 후, 다시 게임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