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늘을 뒤덮은 나무들로 인해 달빛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남만의 밤이 찾아왔다. 난폭한 바람만이 나무 사이를 해집으며 마구잡이로 쏘다니고 있었다. 주위의 나무들을 흔들며 불어대는 바람소리는 흡사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짐승들조차 짖지 않는 남만의 밤을 걷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만향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는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나직히 말했다.
“끝이 아닐지도 모르지. 만향은 꽤나 낙천적이야."
명원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전쟁이 곧 끝날거라고 생각합니다만은."
만향이 웃음을 참듯이 입을 오물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딘가 연극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소극적인 만향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에 명원이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만향을 쳐다보았다.
"5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의 밤은 여전히 적응이 안되네요.”
현호가 명원과 현호사이에 끼어들더니 손을 내밀어 어둠을 낚아채려는 듯 휘두르며 말했다. 현호의 목소리에 명원과 설담 사이의 기묘한 긴장감이 흐트러졌다. 둘의 시선이 현호에게 모아지자 현호가 겸연 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설담 대장님은 아직 인가?”
제갈군의 목소리에는 어느덧 짜증이 번져나왔다.
“아 저기 나오시네요.”
현호가 손가락으로 설담의 막사를 가리켰다. 설담은 자신을 기다리며 꽤 오랜 시간 서있었던 청룡대원들의 불만을 느끼지 못하는지 태평한 얼굴로 하품을 하며 막사에서 나오고 있었다. 제갈군의 짧은 한숨을 바람소리가 삼켜버린다. 설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비비며 청룡대원들이 서있는 곳으로 걸어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모두들 조장들에게 들었을 거야. 이번이 남만에서 우리 청룡대의 마지막 전투가 될 공산이 크다. 만약 패배한다면 이 곳 남만에서 뼈를 묻는 것이고, 승리한다면 수도로 금의환향할 수 있다. 그리고 저번 전투에서 내 등 뒤에서 칼침 먹이려고 했던 놈은 내가 기필코 잡아서 아작을 내 버릴 거야.”
길어지는 말에 불평을 하는 청룡대원들의 소리가 바람소리에 묻혀 설담에게 전달되지 않는지 그의 말은 계속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라는 말이 벌써 열 번이 넘었어요.”
현호가 명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원은 현호의 말 속에서 설담 대장을 말려보라는 뜻을 읽어 내고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더니 만향의 몸을 앞쪽으로 밀었다. 명원에 의해 갑작스레 앞으로 튀어나온 만향은 당황한 얼굴로 설담을 쳐다보았고 설담은 자신의 말을 끊게 만든 만향을 불만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만향, 뭐냐?”
“아, 대장님 그것이, 명원형님...”
“만향, 아무리 설대장의 말이 길다고는 하나 그렇게 불만을 표출해서야 되겠어. 쯧쯧.”
만향의 작은 목소리는 이어서 나온 명원의 목소리에 묻혀 설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만향은 자신을 향하는 설담의 살기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만향이 다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설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만향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명원을 째려보았다. 명원은 만향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는 웃으며 속삭였다.
“만향 네 덕분에 설담 대장이 말을 끝내려고 하는군. 고마워.”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분수를 지켜라. 줏대도 없이 상황에 들떠서는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저질러 목숨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 그럼 출발한다.”
설담의 말이 끝나자 청룡대원들은 5년의 전쟁 동안 지친 그림자를 끌며 홍하성으로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우거진 수풀속을 빠져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고독한 짐승처럼 보인다. 어느새 그들은 달리고 있었다. 평원이 아닌 험준한 밀림을 설담이 앞장서고 그들이 뒤따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가 풀어진다. 청룡대원들의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속에서 불이 타오를 때쯤 그들은 밀림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내들의 텁텁한 땀냄새가 바람을 타고 주변에 진동했다. 제갈군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호, 누차 말하지만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설담대장과 다른 조장들이 우를 도우는 척하면서 우와 각의 눈을 혼란시키는 동안, 너는 빠른 시간 내에 홍하성 중심으로 이동해. 그리고 남만왕의 목을 취해라. 남만왕의 목을 취하는 동시에 청룡대는 일시에 후퇴하고 본진으로 돌아온다.”
현호가 제갈군의 말에 긴장한 듯 굳어진 근육과 관절을 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불빛입니다.”
만향이 평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래 암흑속에서 한 점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와 미리 맞춰 두었던 신호였다. 청룡대원들이 평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이 평원을 지나가니 꺼림칙하네.”
명원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불빛을 흔들고 있는 자는 예전 우와 함께 역관의 자격으로 왔던 권승이라는 자였다.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각의 부족들이 오늘 밤 갑자기 공격을 해왔습니다.”
횃불에 비치는 권승의 옷은 피가 흥건했다. 제갈군이 그런 권승의 모습을 살피고는 설담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용히 홍하성으로 침투하는 것은 힘들겠군요.”
“역시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군.”
설담의 마음을 대변하듯 온몸으로 시린 바람이 주변을 드나들고 있었다. 명원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저 자의 분위기를 보니 홍하성쪽이 심상치 않은 것 같군. 설대장 아직 돌아갈 기회는 있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어때?”
설담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겨우 다다른 전쟁의 끝자락이야.”
제갈군이 다급히 설담을 거들며 말했다.
“설담 대장님의 말이 맞습니다. 만약 우가 오늘 각에게 패한다면 저희에게 더 이상 이런 기회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와 각의 전투로 이 곳 평원의 감시가 소홀해졌을 겁니다. 더구나 권승 저자가 홍하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줄 터, 청룡대는 더욱 안전하게 평원을 지나칠 수 있습니다.”
“젠장, 어쩔 수 없군. 현호를 믿는 수밖에 없군. 우리는 평소 하던 대로 한바탕 날뛰기만 하면 돼.”
설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손과 눈은 일제히 홍하성 쪽을 가리켰다.
“자, 가자.”
청룡대원들은 어둠보다 깊은 침묵에 잠긴 채 권승의 뒤를 따라 홍하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열의 앞에 선 권승이 평원 곳곳에 설치된 함정들을 피하거나 혹은 제거하는 것을 지 켜 보던 명원이 쓴 웃음을 지었다. 3년 전 자신들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이 평원을 가로지르려고 했었다. 남만왕의 함정이 아니었다고 해도 꽤나 많은 목숨이 이 곳 평원에 묻혔을 것이다.
“형 이곳은 별이 많이 보이네. 이렇게 넓은 하늘은 오랜만이야.”
만향이 긴장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하늘을 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제갈군은 무심코 만향이 가리키는 별들을 훑었다. 별은 많을뿐더러 영롱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온전한 밤하늘을 쳐다보는 적이 언제 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만향, 지금 상황에 별이 눈에 보이냐?”
명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만향을 바라보았다. 명원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만향은 밤하늘 저편으로 짧은 섬광을 남기고 사라지는 별들을 보며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이 길이 끝나는 지점이 홍하성입니다.”
권승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어느새 평원이 끝나가고 거대한 나무들과 수풀에 둘러진 밀림이 청룡대를 반겼다.
“뭐야, 홍하성도 결국 밀림에 위치했던 거야?”
명원이 지긋지긋한 밀림을 또 거쳐야한다며 투덜 거렸다. 설담은 어두운 하늘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목들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만향의 침 삼키는 소리가 설담의 귀에까지 들렸다.
“더구나 이렇게 좁은 길이라니, 사냥꾼이 쳐놓은 교묘한 덫을 향해 조금씩 들어가는 기분이네요.”
현호가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는 듯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밀림은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려는 손님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청룡대가 주로 활동했던 밀림도 몇 년 동안을 고생하며 익숙해진 곳이었다.
“현호,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너의 그 이능력 지금 발동되었어?”
“조금 불길하긴 하지만, 그 손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불길 정도 인가? 어쩌겠어. 가자구.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어.”
설담이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모을 낮춘 뒤 앞서 걷기 시작했다. 청룡대의 발걸음이 지날때마다 풀들이 기절하 듯 차례차례 쓰러져 가며 착 소리를 내었다. 지금까지 청룡대가 지내온 곳과 다를 바가 없이 독초와 독충이 가득한 이 밀림에서는 걸음이 느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검은 나무들로 가득한 길이 한없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젖은 바지가 허벅지에 붙었다가 떨어지면서 싸늘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제갈군은 걱정이 되는지 만향을 자신의 뒤에 따라오게 한 후 나직히 말했다.
"만향,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나를 믿어라. 그 누구도 아닌 나를 말이야. 알았지?"
만향은 그런 제갈군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 항상 고마워."
"별 소릴."
제갈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