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와 요술램프5

gubo77 작성일 12.08.20 10: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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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의 말이 끝나자 남자는 윙크를 한번 해 보이고는 술병을 받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 오우. 이거 좋은데요.”

 

남자는 한 모금 더 홀짝인 후 술병을 신사에게 건넸다.

 

크크. 포켓술병으로 술도 다 마셔보네요. 이런 건 비행기에서 나누어주는 면세품 카달로그에서 멋진 수컷이 되라고 꼬득이는 배경 소품으로만 쓰이는 줄 알았는데.”

 

술병을 받아든 신사도 한 모금 들이키며 말을 받았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나름 운치 있고 좋은데요?”

 

? 그게 무슨.....! 하하. 그것도 저의 상상력인가요? 저도 참 클리쉐 같은 인간이네요.”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술병을 주고 받았다. 술이 모두 떨어진 듯 힙 플라스크가 모래사장에 아무렇지도 않게 처밖힌 후에도 한동안 바다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남자가 입을 연다.

 

아저씨

 

, 선생님

 

이제 마지막 소원도 빌어야 겠죠?”

 

기대하고 있습니다.”

 

, 진짜 모르겠다. 씨발. 뭐가 이렇게 좆같은지. 뭔가 희망이 있고 기대감이 있어야 소원도 있지. 그렇다고 번민이 없냐하면 그것도 아니니, 이건 그냥 생지옥이네.”

 

“......”

 

아저씨. 지옥이 여기보다 괴로울까요? 천국 가고 싶어서 신을 믿는다면 이해하겠는데, 지옥 무서워서 신을 믿는다는 인간들은 대체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있기에...”

 

선생님. 만약 다시 태어나신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투웰브 몽키즈. . 별거 있겠습니까? 또 한 삼십 몇 년 살고 나면, 어딘지도 모를 섬에 처밖혀서 술에 취해 헛소리나 하고 앉았겠죠.”

 

그래도 한 번 더 산다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것 같지 않은데요? 한 때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책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어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서점에서 그 책을 볼때마다 왠지 뭔가 불편했었죠. 괜히 사람 비뚤어지고 싶게 만드는 그런 거랄까?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누가 그러더라구요.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또 다른 문제들로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잖아요. 이번 실수에서 교훈을 얻었다고. 그 교훈을 실수하기 전에 미리 알고 있다면 실수를 피해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제가 대학 다닐때요, 한 선배가 쓴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절망은 그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반복에 있다.’ 정말 천재적이지 않습니까? 사람은 실수를 해서 후회를 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그런 사람이어서 후회를 하는 겁니다. 개구리와 전갈 얘기 아세요? 강을 건너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전갈을 보고서 개구리가 등에 태워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 한가운데서 전갈이 독침으로 개구리를 찌른 겁니다. 몸이 마비되어 서서히 가라앉으며 개구리가 물었죠. ‘내가 호의를 배풀어 너를 건네주고 있는데 왜 찌른거니?’ 그러자 전갈이 이렇게 대답하죠. ‘미안. 하지만 이게 내 본성인걸.’ 아시겠어요? 찌른게 후회스러운게 아니에요. 자기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구요. 아무리 그걸 반성한다 할지라도, 동일한 상황이 오면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그 본성! 무한한 반복!”

 

재밌는 얘기네요.”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주 평범한 부부였고, 대체로 행복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주변인까지 서서히 좀먹어 들어가는 질병으로 고생하지도 않았구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의 단 한 가지가 너무 마음에 안들었어요. 행복한 순간에는 분명이 같이 있어 더욱 행복했지만, 남자가 힘든 순간에 여자는 남자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죠. 여자는 남자의 고민이나 걱정을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아 했어요. 남자가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오히려 남자의 자존심을 뭉개어 놓기 일쑤 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그 고민과 걱정이란게 개인이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랗거나 운명적인 문제였다기보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마주치게 되는 선택의 순간 같은 거였을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그 순간이 지나가면 둘은 다시 정상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대체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은 아니에요. 남자는 그럴 때마다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으니까요. 상처입은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실망했고, 다음번에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기대했어요. 자기가 실망감을 표하면 여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스스로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깨달을 거라 생각한거죠. 하지만 틀렸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여자는 여지없이 같은 반응을 보였고, 남자는 또다시 상처입었습니다.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요. 그러다 어느순간 문득 알게 되죠. , 저 여자는 나에게 잘못하고 있는게 아니구나. 그래, 잘못하고 있는게 아냐.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인거야. 아무리 상처입고 실망감을 표현해 보여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실수는 바로잡을 수 있지만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그래서 그 남자는 결혼을 후회하나요?”

 

.....결혼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사랑해서 결혼한거고, 또 대체로 행복했으니까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을 지속해 나갈 거란 얘기도 아니에요. 여자에게 실망하고 있는 동안에는 비록 화는 날지언정,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죠. 하지만 그게 여자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화도 나지 않아요. 그저 남는 것은 절망 뿐이죠. 절망이요. 그 여자가 남자에게 안기는 상처가 너무 커서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그 상처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라는 그 사실이 너무도 절망스러운 겁니다.”

 

어려운 문제군요. 그래서 남자는 이혼을 한답니까?”

 

남자의 입가가 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아저씨. 흔히들 그러잖아요? 애가 있으면 이혼하기 힘들다고. 그런데 이혼을 힘들게 하는게 또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글쎄요? 정인가요?”

 

. 불황기의 부동산입니다. 채무까지 해서 재산의 120%를 차지하고 있는 집이 처분이 안되니까요. 이혼이란게 그렇더군요. 장기약정을 중간에 해지한다고나 할까요? 사는 동안에는 많은 혜택이 있지만, 중간에 해지하면 그걸 다 물어내야 하는거죠.”

 

그럼 결국 금전적인 부분이 문제인가요? 돈만 있으면 이혼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거 같은데...”

 

하하하. 아닙니다. 뭐랄까요, 오히려 금전적인 부분이 걸려서 다행이랄까요? 적어도 한동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소강상태라도 유지는 할테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답 없는 문제에 매달려 안달낼 만큼 어리지는 않으니까요. 뭐 바둑도 수가 높아지면 손빼고 다른 곳에 돌을 놓는 지혜가 생기듯이요.”

 

항상 여자가 문제군요.”

 

항상 여자가 문젭니다.”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No smile, either”

 

행복해 보이시네요.”

 

“헐~~행복이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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