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취기가 도는 지 졸음을 떨치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달과 6펜스’ 라는 소설에 스트뢰브라는 케릭터가 나옵니다. 병에 걸린 화가를 자기집에 들여서 정성으로 회복시켜 주었는데, 그치한테 마누라를 빼앗겨 버리죠. 마누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이 친구는 작중 화자인 주인공 및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슬픔과 비탄을 토로하고 다니지만, 그가 얻는 건 조롱뿐이었습니다. 그가 처해있는 깊은 절망과 너무도 대비되는 이 친구의 희극성에 주인공은 조물주의 아이러니를 느끼죠. 어릴 때 이 책을 읽고 어쩜 저렇게 나랑 똑같은 케릭터를 묘사해 낼 수 있는지 하고 생각하며 깜짝놀랐었죠. 흐흐흐.”
“하하하. 선생님에게 희극적인 측면이 있다는건 제가 몇 차례나 드린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을 의미한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웃긴 케릭터라고 해서 바보인건 아니니까요. 일찌감치 깨달은거죠. 나의 고통은 남의 동정을 일으키는게 아니라 웃음을 일으킨다는걸 말이죠. 그래서 나의 비참함을 남에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참는 법을 어릴때부터 익히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게 마치 제2의 천성처럼 되더군요.”
“그것 참 쿨~하게 들리는데요?”
“고통을 정말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건 쿨한거죠. 하지만 아프지 않은게 아니에요.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다보면 맹수들이 먹잇감을 습격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잖아요? 그때 잡아먹히는 동물들을 보면요, 피를 철철 흘리면서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더라구요. 북극에서 썰매를 끄는 개들은 어떤지 아세요? 약한 기색을 보이면 주인이 말릴 틈도 없이 다른 개들이 달려들어 물어 죽인데요. 그래서 썰매를 끌다 지치면 한계까지 달리다 그냥 죽어버리죠. 이게 쿨한가요? 어떤 격투기 선수가 있어요. 거인병 증상이 있어서 체격이 아주 큰 친구죠. 그런데 이 친구가 텔레비전 프로에 나와서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아가씨들을 만나면, 그녀들은 꼭 자기를 주먹으로 때리면서 ‘안아프죠? 안아프죠?’ 하고 물어본데요. 하지만 자기도 사람인지라 남들과 다름없이 아픔을 느끼고, 그래서 그녀들한테 너무 화가 난데요.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요.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듯 보이는 그런 사람도 아픔을 느낀데요. 흐흐흐. 고등학교때 내가 친구들한테 자주 듣던 말이 뭔지 아세요? 내가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게 너무 화가난데요. 자기는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들게 공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하지도 않고 힘들어 하지도 않는 나보다 성적이 않좋으니 화가 난다는거에요. 흐흐흐. 그런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열심히 하니까 잘하는거죠. 하지만 그 친구들한테 아무리 설명을 해도 통하지가 않아요. 내가 자기보다 얼마나 더 열심히,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줘도 듣지를 않는다구요. 열심히 하는것도 힘든것도 티가 않나는 케릭터니까요. 대학 졸업할때는 이런 일도 있었죠. 제가 학점이 많이 안좋다보니 취업이 안돼서 힘들었거든요. 하루는 후배들과 같이 밥을 먹다가 지원서를 써도 소식이 없어서 좀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한 후배가 깜짝 놀라면서 그러더라구요. 형은 그런 세속적인 종류의 일 따위에는 전혀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인줄 알았데요. 흐흐흐.”
“아...생각이 짧았네요.”
“첫 직장에서는 어땠는지 아세요? 일년차, 이년차 선배가 하나씩 있었어요. 얼마나 치사하고 비열하게 구는지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반년도 안돼서 그만둘 뻔 했었죠. 술자리에서 저한테 이런 얘기 하더라구요. 둘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너는 여기 아니어도 다른데서 잘 할 수 있지만, 나한테는 여기밖에 없어. 라구요. 흐흐흐.”
“아이고 그건 좀 심했네요.”
“세상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하하....세상 얘기를 하시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래도 그런 불만은 저기 메이저쪽 에다가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와 신사는 잠시 동안 유쾌한 듯 웃었다. 하지만 이내 웃음이 멈추고 둘은 다시 먼 바다를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아, 이제 진짜 소원 빌어야죠.”
“결정을 끝내셨나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모래들을 털어내었다. 그리고는 나무에 걸어놓은 양복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옷을 모두 갖추어 입은 남자는 신사에게 넥타이를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거울이 없어서 이거 못 매겠네요. 예쁘게 좀 매주세요. 이제 집에 가야하니까.”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어요?”
남자는 신사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저씨, 제가 처음에 빌었던게 뭔지 기억나세요?”
“아....리셋 버튼이 필요하다 하셨었죠. 하지만 그건 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네. 괜찮습니다. 상관없어요. 그래도 파워버튼은 가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