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3년 11월 24일
“저기.....꼭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거에요? 그냥 정문으로 걸어 나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답답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수녀복을 건네주었다.
“만에 하나라는게 있어. 지금은 이곳에 전단지가 붙어있지 않지만, 네 식구중 하나가 그걸 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는게 아닌가?”
“만약에 제가 추궁을 당하더라도......”
“........네가 추궁을 당했을 때,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녀는 내 말에 말문이 막혀버려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내가 적지않게 원망스러운 모양인지, 입술을 앙 다문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 눈길에 조금은 마음이 찔려, 변명과 같은 군말을 늘어놓았다.
“........아직까진 말이야.”
나는 그녀가 건네준 수녀복으로 환복한 뒤에, 다른 여벌의 옷을 가끼가방에 쑤셔넣었다.
“그럼 5분 뒤에 보는 걸로 하자고. 얼른 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하고 문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 한 뒤에,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시각은 7시 43분, 5분 뒤에 그녀와 보기로 했으니, 그녀가 생활관을 완전히 벗어나기까지 걸릴 것이라 생각되는 3분 뒤에 움직일 것이다. 즉.......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약 2분여 가량이다.
일단 급한대로 수녀복에라도 내 소지품을 넣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수녀복 속의 주머니를 찾아보았다. 음...... 역시 수트와 달리 주머니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몇 있지도 않은 주머니는 크기가 크지 않았다. 이렇게 비 실용적인 복장을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다. 이런 옷에 부주의하게 단검을 넣어두었다가는....... 내 허벅지가 잘 저며진 회처럼 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남은 시간동안 방에서 손수건을 찾아내, 단검에 그것을 둘둘 감았다. 그렇다면 부상의 걱정은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다. 단검을 솜씨 좋게 포장한 나의 유려한 손재주에 스스로가 감탄을 하고 있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46분 즈음이 되었다. 나는 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시간엔 다들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누가 볼 새라 서둘러 층계참을 내려갔다. 5층에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게 허둥지둥 1층으로 내려왔고, 1층에서도 어느덧 현관에 다다랐다. 이제 저 너머로 생활관의 정문이 보인다.
“........흡!”
이대로 달려 나가려다가, 왠지 모르게 쌔한 느낌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숨을 참았다. 역시나 모퉁이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이런, 어떻게 해야 내 정체를 숨길 수 있지? 나는 급한 대로 코이프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모퉁이엔 두 수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낭패가 아닐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멘탈이 깨져 이상한 짓을 하는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침착해야 한다....... 누군가를 속이려면 최대한 뻔뻔해 져야 한다. 자연스럽고, 어찌보면 당당하게 말이다. 원래 진짜보단 가짜가 더 빛나는 법이다....... 나는 마스터가 전해준 금언을 곱씹으며, 오히려 어께를 쭉 뻗고, 여보란듯이 당당하게 문을 향해 걸어갔다.
미끈하다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두 사람과 스치듯이 지나갔다. 마스터의 말이 옳았을까? 그녀들은 내게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역시, 진짜보다는 가짜가 더 빛나는 법인 모양이다.
“저기요 자매님!”
이런 빌어먹을...... 나를 부르는 건가? 뒤를 돌아보아야 하나? 그래,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래야 한다. 하지만.....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되돌아 보자면, 내 얼굴은 결코 여자의 그것과 같이 곱상하거나, 여리여리한 편이 아니다. 그들은 열에 여덟의 확률로, 내 모습을 보며 의구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생각을 이어나갈수록, 내 손이 근질근질했다. 마침 내 주머니에 단검이 들려있던게 기억났다. 단검을 아주 살짝만 가볍게 휘두르면...... 아니다. 그런 행동이야 말로, 아까 내가 언급했던 ‘멘탈이 깨져 자포자기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녀들의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눈을 감는다.
‘뻔뻔해 지느냐, 양심있게 고백할 것인가,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이다.’
“네? 부르셨어요?”
...... 이런 양심없는 자식.
“식사는 하셨어요?”
나는 코이프 자락을 최대한 끌어내렸다. 레이스 너머로 보이는 수녀들의 얼굴에는 내가 걱정했던 것, 즉 위화감과 같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허허, 적어도 얼굴과 관련해서는 그럭저럭 잘 틀어막은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얼굴이야, 사람의 취향에 따라 나와같은 인물이 ‘여성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내 스스로가 반성 할 만큼 꽤나 걸쭉한 것 같다. 나는 수녀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그들도 나의 유려한 연기에 깜빡 속았는지, 나와 마주서서 합장을 했다. 인사를 끝낸 뒤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 밖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파아!...... 오호우!”
나는 그녀와 만나기로 한 담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비로소 크게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일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이제야 알아차린 바이지만, 수녀복 속에 내 등에는 식은땀이 마치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물줄기처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옷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바지의 천조각이 내 다리를 감싸는 그 기분이 제법 상쾌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받기를 기대하며, 둘둘 싸맨 수녀복 더미를 담장 너머로 집어던졌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걸 보니, 그녀가 받아든 것이 분명하다. 그런점에서 보면 이 답답이도 할때는 하는 모양이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담장을 올라탔다. 손바닥에는 돌담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리를 끌어올려, 균형을 잡고, 담장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조금 높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돌담 특성상 오르기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손을 짚을 여지가 많이 있었다.
그래, 최소한 담장에게는 유려한 연기를 펼칠 필요가 없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지 않을까?
차근차근 담장을 짚어 올라가, 마침내 나는 담장의 꼭대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담장 너머에는 이스트 민스터의 풍경이 두눈 가득히 펼쳐졌고, 건 듯 불어온 산들바람이 내 등을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담장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작고, 어리석어 보여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실소를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얼른 내려오지 않구 뭐해요!”
“어,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이젠...... 전적으로 그녀를 믿어야 할 시간이 왔다. 정말 미친짓이라고 그녀가 말릴까봐 그녀에게도 여기까지는 이야기 하지 않았다. 일전에도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니...... 해보는 수 밖에.
나는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심호흡을 한 두에....... 땅 대신에 하늘을 바라보며.......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거진 7~8미터의 담장에서 땅으로 고꾸라지기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 짧은 시간이....... 엉겁과 같이 길게 느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던 이스트민스터의 풍광이,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느리게 앞에 있던 건물에 가려졌다. 그리고, 엄청나게 작게 보여 그저 하나의 하얀 바닥으로만 보였던 이스트민스터의 길바닥이, 시나브로 자세히 보이기 시작하면서, 땅에 발이 닿기 직전에는 그것이 일정한 패턴을 가진 특정 도형들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워낙에 작게만 보여, 흰색과 검은색의 점점으로만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윤곽을 잡고, 형태를 이루어........ 조형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게 생겼다고 생각할 찰나에......
“윽!”
다리에 강한 충격이 들이닥쳐 무릎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말썽쟁이같은 감각은 고관절을 강타하더니, 나로하여금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버렸다.
“끄아아아악.......큭.”
“괜찮아요?”
“크흐흐흑.......”
괜찮겠냐고? 다리 뿐만 아니라 골반까지 나가버린 사람에게 괜찮냐고? 난 솔직히 그녀에게 내가 아는 한의 모든 욕을 쏟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실제로 그런 욕을 했다. 하지만, 엄청난 강도의 고통은 내 혀와 입술을 잔뜩 꼬아버려, 욕설을 신음소리로 둔갑시켜버렸다. 그녀는 처음에는 어쩔줄 몰라하다가.......내가 고통과 짜증으로 진저리를 치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 하반신에 자신의 손을 얹어두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아버님이다. 걱정 같은 것도 가슴에 담아두지 말아라. 나는 너의 구주가 될 것이다.”
“끄으으으윽.......거 좀 빨.......리.”
“너를 굳세게 할 것이며, 너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 모든게 가능한 이유는.......나는.....너의.”
“빨리좀 해!”
“아버님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저 답답이.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11월 24일
“저기.......꼭 이렇게 까지 해야하는거에요? 그냥 정문으로 걸어 나가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그가 생각한 계획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무모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세상에 왜 그런 황당한 생각을 하는 걸까요? 만약 암살자라는 자들이 모두 그와 같다면, 아마 귿르은 한 세기가 가기도 전에 모조리 도태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는게 있어...... 지금은 이곳에 현상 수배 벽보가 붙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 벽보를 보고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거 아니야?”
“만약 제가 추궁을 당하더라도......”
“당하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절 바라보는 이 은발머리의 표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 표정은...... 뭐랄까? ‘바늘로 찔러서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다.’라는 진부한 표현으로는 온전히 그 느낌을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는....... 주변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람 같습니다.
“나는 너라는 사람이 추궁을 당해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투와 표정, 그리고 그 내용...... 어느것 하나도 제 기분을 나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없었지만....... 철저히 사실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뱉어 놓고도, 그 말이 좀 심하다고 느꼈었는지, 조그마하게 뭐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아직까진 말이야.”
그는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자신의 마음속에 맺힌 죄책감을 털어내려는지, 거칠게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흔들고는, 제게 대뜸 손을 네밀었습니다.
“가지고 왔어? 그거?”
저는 처음에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최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멍 했다가. 그의 시선이 제 옷을 향하고 있다는걸 알아차리고 나서야, 그가 제게 어떤 부탁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하긴, 그걸 부탁했을 시점에서부터 그가 제정신이 아닐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네요.
“아......아! 그거요. 네 여기있어요.”
세상에...... 히트맨이, 그것도 남자가 수녀복을 입을 생각을 다 하다니, 아마 천년왕국이 도래할 때 까지 그와 함께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에 절반도 이해할 자신이 없을 것 같아요. 아니, 그것 하나는 알 것 같네요. 그는 지독히......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세탁실에서 챙겨온 수녀복을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대충 눈짐작으로 골라본 것이라, 그의 몸에 맞을 지는 영 자신이 없었어요. 그는 제가 그 자리에 있건 없건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복을 훌렁훌렁 벗어제꼈습니다. 참......뻔뻔한 남자죠. 그리고 속도 참 좋은 사람이지요.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로 떠 넘기고, 당신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할 수 있다니.......
결국, 그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고스란이 떠 안은 저는 황급히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으며 잔뜩 요동치는 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부단히 애를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 그럼 5분 뒤였지? 약속한 장소에서 보자구.”
방을 나서기 직전에, 문을 닫으면서 그가 수녀복을 입은 모습을 슬쩍 보았는데....... 아이고 맙소사. 차라리 목에 칼이 들어올 걸 각오하고라도 그에게 ‘수녀복 만큼은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말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아니 세상에....... 지금 그가 저 옷을 입는다는건, 절대 ‘위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꼬락서니를 본 사람을 웃겨서 죽여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어요.
저는 결국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제 자신의 옆구리를 두들기며, 층계참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다행이 식사시간 즈음이라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어요. 만약 누군가가 제 모습을 보았다면.......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고, 가끔 어께가 움찔거리며, 계속해서 옆구리를 쳐 가면서 내려가는 기묘한 여자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만 봤을게 분명해 보입니다.
1층 현관을 지나, 정문으로 향할 때 즈음 돼서야, 저는 간신이 웃음을 추스를 수가 있었어요. 문 앞에는 주무관님이 화단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저는 태연스럽게 인사를 하고서, 수녀원을 온전히 빠져나왔답니다.
휴! 그와중에 긴장을 했었나봐요.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고, 그저 평소와 같이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리 이마에 땀이 흘러내리니 말입니다. 제가 그러할 진대, 은발머리 본인은 얼마나 애간장을 녹여야 할까요? 혹시 그가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듭니다.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를 믿어보는 수 밖에요. 제게는 그를 믿어보는 것 외엔 달리 선택할 것도 없는걸요.
돌담길을 따라, 약 300미터 쯤을 걸어가니, 이쯤되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한게 아닐까 싶어, 저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헛웃음이 나오네요. ‘이쯤되면’이라, 새삼 그가 얼마나 허술하게 계획을 짰는지,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그가 나타나기로 한 시각까지 조금 시간이 비기도 하여, 저는 망을 보기도 할겸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접때 보았던 나이트 클럽의 찌라시도 여전히 보이는군요. 그 너덜너덜하면서도 나름 조형미를 갖춘 찌라시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이 사회를 바꾸어보겠노라고 당차게 수녀원을 나섰던 것 같았는데......... 이제와 그때를 떠올려보니, 제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얼마나 치기 어리고 위험한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릴없이 찌라시를 만지작 거리는데....... 옆에 새로운 찌라시가 붙어있다는걸 알아차렸습니다. 아하! 지명수배 전단이었네요. 마침 거기에는 은발머리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초상화 한 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로키였군요. 로키는 재난과 장난, 그리고 거짓말의 신으로 어렸을 때, 어른들이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에서 종종 등장하곤 했었지요. 그가 장난꾸러기인지, 그리고 거짓말쟁이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재난과는 관련이 깊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초상화 이야기가 나오니 말인데요. 그가 처신을 잘 한 것인지, 아니면 초상화가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인지는 몰라도, 단언컨대, 그 그림만으로는 결코 그를 잡을수도, 아니 심지어 알아볼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게 (어째, 이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있어서, 저는 그걸 떼어서 쓰레기 더미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하하, 이걸로 그는 제게 또 하나의 빚을 진 셈이 되었군요.
“톡!”
“.......응?”
돌맹이 하나가 또르르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습니다. 소리가 난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지요. 제가 혹시 잘못 들은게 아닐까 싶어서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길거리엔 조약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하는 생각이 들어 위쪽을 보니, 높다란 담장의 꼭대기에, 살색의 작은 무언가가가 어른거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본 순간, 제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 하나였지만, 그것은 이내 길쭉한 팔이 되어, 담장을 움켜쥐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팔이 솟아났지요. 몇 달 전 제가 땅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떠올랐던 생각을 이리저리 주절댔던 것, 기억이 나시려나 모르겠어요. 그때 전 붉은 태양을 보며 상념에 잠겼었다면, 이번에 제가 보는 것은 은빛의........
“.......쿵!”
그는 제가 뭐라고 할 새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뛰어내려버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눈을 감아버린 덕분에, 그 다음순간에 일어날 일을 보지 않을 수 있었지만....... 눈을 떴을 때 제 눈앞에 보일 참상이 어떨지 두려워,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크흐흐흑.......이런 빌어먹을.”
그는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신음소리를 간신히 삼키려고 무던히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전 결국 실눈이나마 뜨고, 그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지요. 그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 보는 즉시 눈을 돌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두 다리는 ‘부러졌다’기 보다는 ‘짖이겨졌다’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고, 어께도 빠졌는지, 그의 몸통에 아슬아슬하게 나마 대롱대롱 매달려있었습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의 고통에 갇혀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큽.......커헉!”
그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라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왜 이다지도 무식한 짓을 한 걸까요? 지금 당장 그에게 그 이유를 캐묻고 싶었지만, 그가 고통에 시달려 정신을 놓기 직전인 지금으로선, 제가 아무리 시도를 해 보아도, 제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어듣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저는 실눈으로 그의 다리를 더듬어 그것을 쭉 펴고, 그 위에 손을 얹고서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그녀는 내 무릎위에 손을 얹고, 차분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하지만 아까의 추락으로 무릎뼈가 완전히 으스러진 탓에, 그녀의 손이 내 무릎에 닿는 순간, 내 입에서는 의지와 상관이 없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내 반응에 놀라, 손을 떼었다가....... 입술을 조금 깨문 뒤에, 내 무릎에 다시한번 손을 얹고 기도문을 마저 읊어나갔다.
내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눈을 감고 그녀가 읊는 기도문을 잠자코 듣는 것 뿐이었다. 아무래도 할 일이 없는 탓인지, 그녀가 읊는 기도문을 듣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았는데, 꽤나 흥미로웠다.
기도문은 신앙자들이 ‘아버님’이라고 칭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간에게 말하는 부분 한 토막을 추린 것이었다. ‘내가 너를 지지하고 있으니, 걱정같은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그녀가 읊었던 기도문의 주요한 줄거리였다. 나는 종교를 가지지 않았고, 초자연적인 존재가 현존하고 있음을 믿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내게 그런 말로서 위로를 한다면, 꽤나 힘이 날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과는 한 발자국 떨어져있는 나 같은 이도 이러한 생각을 할 진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 말을 통해 얼마나 큰 안식을 찾았을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아버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깊이 빠져들었을까?
이래서, 종교를 가리켜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종교의 기능과 그 효과에 대한 짧은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다리의 통증이 제법 잦아들었다. 처음에는 불에 닿은 듯이 화끈거렸던 내 무릎도, 이젠 거기에 얹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도 이렇다 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기도문의 놀라운 효과에 대해 경탄을 하면서, 감았던 눈을 힐끔 떠 보니, 퉁퉁불어있던 다리가 정상적으로 가라앉아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기도를 그만하라고 손진하고, 내 발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고, 발목을 빙빙 돌려보아도 심지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 발을 굴러보아도, 불편함이나 위화감 같은 감각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새삼 느끼지만, 정말 신통방통한 노릇이다. 내가 이렇게 내 몸 상태를 살펴보며 놀라워하고 있을 동안, 그녀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아마, 그 기도문이란게, 그것을 읊는 자의 기력을 제법 잡아먹는 모양이다.
“........랫.......어.......”
“응?”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내게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을 뿐 만 아니라, 발음조차 완전히 뭉개져서 나는 도저히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을 도리가 없었다. 몇차례의 헛된 시도 끝에, 나는 결국 내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댈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뭐라고?”
“왜.......그.......요.”
“뭐?”
이쯤되면, 그녀도 그녀지만, 내 귀에도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하고 자아비판의 시간을 가질 무렵, 그녀는 답답했는지 자신의 가슴을 탕탕치며 쥐어짜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쏟아냈다.
“왜 그랬냐구요!”
Channel 2. 아이리스
그는 제 질문에 한참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딴청을 피우는 듯 발목을 빙빙 돌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보면 불손하다고 할 수 있는 그의 행태를 보노라니, 제 가슴속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아마 제가 본 것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는 딴청을 피웠다기 보단,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단어들이 넘실거리는 자아의 강가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절하게 설명 할 수 있는 최적의 단어를 골라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발목을 돌리는 그의 모습은......... 언뜻 본다면 땅을 파헤치며 조약돌을 고르는 소년의 모습과도 겹쳐 보이기도 했지요. 그는 한참 동안이나 단어의 강변을 파헤치다가, 드디어 마음에 드는 조약돌을 찾아냈는지,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목울대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침을 꼴딱 삼켰습니다.
“..........이렇게 해야, 네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만약에, 제가 당신을 버려두고 갔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한거에요?”
그는 제 질문에....... 적합한 단어를 찾기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마침내 적절하다고 생각한 말을 찾아냈는지, 사뭇 기분 좋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난 일단 당신을 믿었거든........ 내가 볼 때 넌, 적어도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모질지 못해.”
하하....... 믿기 위해서 일단 믿어보았다라........ 뭔가 논리적으로 크게 오류가 있는 대답이지마는, 이것이 그가 고르고 골라낸 최선이었다는 생각을 해보니, 전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상....... 때론 마음과 언어가 완전히 손바닥을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조금 어폐가 있는 말을 늘어놓기는 했다마는,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나름대로 합리성을 갖춘 판단을 했고, 그에따라 행동을 했습니다. 이러한 사고와 판단에 대해서, 그 사람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내부자적 공감을 이루지 못한 타인이 자신의 잣대로 판단을 하는건........ 너무 교만한 생각이 아닐까요?
그는 자신의 다리가 완전히 나았다는걸 확인한 뒤에,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눈썰미가 꽤 예민했던 걸까요? 그의 눈살은 옷을 살핀지 채 몇 분 되지도 않아 잔뜩 찌푸려졌습니다.
“이런 제기랄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