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지부장은 천천히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어찌나 그것을 꼼꼼이 읽던지, 그가 마지막 장을 읽고서 한숨을 내쉬었을 때에는 찻잔속의 차가 4분지 1 정도가 사라질 정도였다. 나와 토라는 잠자코 그를 지켜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티 나지 않게 몰래몰래 손가락이며 발가락이며 꼼지락거리다가, 곁눈질로 서로를 보며 눈치를 살피기도 하다가, 그의 반응이 별다를 것이 없자 종당에는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등 대담한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했다.
하지만 지부장은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코털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눈을 종이에 쳐 박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갓 글자를 떼기 시작한 어린 아이가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되었거나, 지부장실에는 엉겁과 같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흥미로운 내용이구먼. 그런 점에서.”
지부장은 문서를 훌훌 넘기며 맨 앞장을 꺼내보았다. 맨 앞장에는 ‘판오디콘 습격 계획’이라는 표제 밑에 ‘파티 플래너’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 대단한 미친년이야.”
“그녀 말고는 이런 생각을 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토라는 ‘그녀 말고는’이라는 부분에서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아마, 이런 식으로 강조를 한다면 지부장에게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리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뭐....... 심리적으로 괜찮은 접근 방법이라고 인정한다만
“무릎을 탁 칠만한 생각인건 인정해. 하지만....... 너희는 성공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내가 볼 때는 그닥 현실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성공만 한다면 이 도시에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난.”
토라가 어물어물 딴 소리를 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지부장은 찻잔을 기울이다 말고 눈을 치켜떴다.
“성공할 가능성에 대해서 물었다.”
토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질렀다. 인간학 개론에는 ‘사람이 판단을 내릴 때는 의외로 이성적, 합리적인 기준에 의거하기 보다는, 감성 혹은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아마 토라가 접근한 방식은 이 명제에 근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부장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과연 일반적인 사람들이 내리는 방식으로 판단을 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지부장이라면 직관, 감성적 요인보다는 성공 가능성과 같은 합리적인 기준에 의거해 판단을 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라스알게티 지부를 어께에 얹어놓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지. 그의 선택에 따라 지부의 운명, 명운이 결정된다. 나는 최근의 사건을 통해 ‘선택권자가 내리는 결정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뼈가 저리도록 깨달았다. 일개 크로스인 내가 이렇게 뼈가 저릴 정도 느낄 정도라면, 하나의 지부를 맡는 지부장이라면 말해 무엇 할까.
그러기에 토라는 특정 어구에 힘을 주기 보다는 실제적인 수치를 가지고 승부를 냈어야 했다. 그걸 녀석도 뒤 늦게 나마 깨달았는지, 토라는 말을 잃고 고개를 떨궜다.
“어때? 로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선요원이 건재한 상황이었다면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겁니다. 하지만, 선요원 조직이 사실상 궤멸된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지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희박이라........”
지부장은 소파에서 자리를 고쳐 잡으며 ‘끄응’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는 내 이야기가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다는 걸 깨닫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꼭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보였다. 아마 그는 거짓말이라도 ‘나쁘지 않습니다.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은연중에 바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아직 내 말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그럼....... 포기하는 게 답이겠지?”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희박하다며?”
“성공 가능성이 낮으면....... 높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지부장은 내 말을 곱씹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이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 거지?’라고 스스로 자문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론은 아직 제시하지 않았다. 진짜 승부수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어떻게 높일 생각이지?”
“간단합니다.”
내 말에 지부장은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내 말에 호기심을 느끼는 한편으로 ‘무슨 허황된 소리를 지껄이려는 거지?’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모양이다. 일단 의구심까지 같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에서는 승부가 반쯤 성공한 것 같다. 이제 남은 절반을 따낼 차례다.
“선요원이 없기에 확률이 희박하다면, 선요원을 재건하면 되는 겁니다.”
“.........”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그걸 누가 모르냐?’라는 힐난의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나는 마스터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다. 마스터는 내가 곤란함을 겪을 때 마다 조언들을 해 주었고, 그것들은 내가 중대한 기로에 설 때 마다 그것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돼주곤 했다. 지금의 상황에 맞는 조언이라면.......‘큰 변화는 당연한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라는 것이다.
“찰리 녀석이 11.17 사태 이후로 우리에 대한 협조를 끊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협조를 안 한다고 하면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다시 한 번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던가, 그를 대체할 새로운 사람을 찾거나.”
“........”
지부장은 내 말에 딴지를 거는 대신,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한참 동안을 정지화면 같이 그렇게 굳어있던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얼굴로 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운이나 떼어보자고.”
Channel 2. 아이리스
“지금 뭐 하는 일 있니?”
“아뇨. 없어요.”
“그럼........킥킥.”
“.......왜요?”
“아......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사환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솔직히 저도 모르게 실소를 할 정도로 칠성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꾀죄죄한 얼굴에는 마치 수염이라도 돋아난 것처럼 입가에 김 가루가 잔뜩 묻어있었거든요. 바다에서 건져온 그 수염들은 칠성이가 입을 움직일 때 마다 물결치듯이 사환아이의 얼굴에서 잔뜩 춤을 추어댔었습니다. 세상에나, 저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고 먹어댈 줄이야. 저는 속으로 아버님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사환아이의 입가에 묻은 김 가루를 닦아주었습니다.
“아...... 진작에 말씀하시지.”
칠성이는 그제서야 깨달은 자신의 몰골이 퍽 부끄러워졌는지, 제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아이 힘이 별 수 있나요? 사환아이는 별 수 없이 얼굴이 깨끗해 질 때 까지, 제 손에 꽉 붙들려 있어야 했었습니다. 이렇게 발버둥치는 녀석을 보노라니, 이제야 제 나이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내심 흐뭇한 생각이 들었어요.
“자, 세수 끝!”
“고맙.......습니다.”
사환아이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고맙다는 말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흘려보내고는 아무것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습니다. 아, 세상에 이다지도 귀여운 아이가 또 있을까요? 저는 아이를 폭 안아주고 싶은 기분을 장난스럽게 칠성이의 볼을 꼬집어주는 걸로 대신하고, 사환아이를 데리고 연못으로 갔습니다. 1월의 강추위 탓에, 연못의 수면은 하얗게 얼어붙어있었습니다.
“칠성아,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음....... 이곳에는 무슨 이유로 오게 된거야?”
“........”
제 질문이 사환아이의 아픈 구석을 찔렀던 걸까요? 칠성이는 제 질문을 듣자마자,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얼어붙은 연못을 바라보았습니다. 음...... 고작 한 달 본 것으로는 입을 열기가 쉽지 않은 화제였던 걸까요? 어쩌면 제가 성급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의 구성원 몇몇과 좀 친해진 것 같아서, 모두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거라고 제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던걸지도 모르겠어요. 아직 저와 흉금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놓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래요. 확실히 제가 성급했습니다.
“아.......음. 이야기하기 어려운 내용이면 말 안 해도 돼. 내가 너무........”
“왔다기보단........ 팔려갔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거에요.”
“.......팔려오다니? 무슨 말이니?”
“제가...... 한 4년 전쯤이었을까요? 그때 아빠 손에 이끌려서 이곳에 왔었거든요. 그때 저희 집이 엄청 가난해서....... 밥 굶는 건 거의 숨 쉬는 것 보다 더 자연스러웠던 것 같아요.”
얼음을 보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지만, 그 내용은 참....... 뭐라 말을 해야 할지....... 그 나이 대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잔혹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환아이가 풀어놓은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가난에 허덕거리던 칠성이네 가족은 ‘내일은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와 같은 미래의 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오히려, ‘오늘 아침을 어떻게 해야 하지?’와 같이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이야기를 나눈 끝에, ‘입 하나 더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라는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에요. 그 다음날 부로 칠성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되었거든요. 실은 사환아이도 어느 정도 각오를 했던 것이, 아버지가 그날 아침에 어두운 얼굴로 ‘우리 칠성이도 굶는 거 싫지?’라고 물어보았다나봐요.
각오하고서 아버지 손을 잡고 갔지만, 그곳이 바로 여기 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암살자의 딜러와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 뒤에, 칠성이의 손을 그 사람에게 어거지로 쥐어주었다고 해요. 가족과의 이별이....... 그렇게 순식간에 끝나버린거지요. 칠성이는 눈꺼풀을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다가....... 차라리 눈물에 가려 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봐버렸다고 해요. 그건 바로........
“아버지의 손에 동전 몇 닢이 쥐어졌을 때, 저는 제가 딱 그 정도 값어치밖에 안 된다는 걸 절절히 실감했어요.”
“........아니야. 너는.”
“뭐....... 지금은 그것보단 낫겠지만, 당시엔 저는 딱 그 정도였겠죠. 그래도 그 푼돈은 우리 가족의 몇 끼 식사를 해결하는데는 충분한 값어치가 됐나봐요. 딜러에게 그 돈을 받으면서 저희 아버지가 어찌나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가며 인사를 하시던지....... 얼굴로 온 동네 땅바닥을 쓸고 다니려는 줄 알았다니까요.”
“.......”
“아....... 진짜 그 때만 생각하면.”
칠성이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지만....... 저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칠성이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썹은 찡그려 있었고....... 눈가는 빨개진 채로 떨리고 있었거든요. 저는 사환아이를 보면서 문득 ‘로키군이 웃는다면, 저렇게 웃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