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무룩하게 어두워지는 심연속으로 빨려들어간지 한참이 지났을까, 아니, 이런 어둠속에 있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거라면, 나는 지금 한참을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허위허위 손을 저으며 공포에 찬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대도 추락이 끝이 나지 않자, 나는 더 이상 비명을 지르는걸 포기했다. 비명을 그만두니, 내 머릿속에 가득찼던 차가운 공포감이 쑥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내 머릿속에서 방을 뺐다.
하지만 여전히 추락은 계속되었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이 추락의 한가운데에서 자리를 고쳐잡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질문에 도움을 줄만한 시각적 정보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여기는 심연이기에. 손을 뻗어보았지만, 바람한점도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촉각적 정보도 내게 차단이 된 모양이다. 참으로 이상한 심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추락은 계속되었다. 나는 이번에 앉아있던 자세를 바로 잡아 일어 서 보았다. ‘서 있다’라는 느낌은 없었다. 애초에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는 구분도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와불’처럼 옆으로 누워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추락을 하고 있는걸까? 나는 왜 추락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걸까? 그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근거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추락은 계속되었다. 이상한 말로 들려도 상관이 없다. 아무런 오성적인 근거를 들이댈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추락하고 있다. 그건 확실하다.
그리고 어디서 새어나왔는지 모를 빛이 내 눈거풀을 찔러대서 매우 짜증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낯선 감각의 정체는 벽에 덩그라니 뚫려있는 손바닥만한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키가 크려나......?”
나는 남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소리를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손으로 땅을 짚으려고 해도 내가 손이라고 느끼는 신체의 부위가 말을 듣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목이라고 느끼는 그 부위도, 손처럼 아무런 호응을 해주질 않았다. 뭐지......? 이 상황은?
신체가 정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 나아가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것 이 세가지는 내 머릿속이 앞서 심연에서의 추락 때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공포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대체...... 왜? 내 몸이 사고로 인해 마비라도 된 건가? 그 말로만 듣던 식물인간이 된 건가? 빌어먹을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거지? 열차에 치인 것도 아니었다. 내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열차는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저 쓰레기를 수거하는 할머니를 도와드린 것 밖에.......
“일어났어요?”
생각이 여기에 다다랐을 때, 답답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모르게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그래, 사지가 마비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내가 어떻게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이겠는가? 나는 내가 지금 깨어있노라고, 너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걸 알려주기 위해 내 온몸의 힘을 모두 끌어내 보았지만, 원망스럽게도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깨어났어도 움직이지 못할거래요. 그 사람들이 그랬어요.”
“.......”
답답이는 한숨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천잠사는 절대 끊을 수가 없다고요.”
“.......”
천잠사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라스알하게식으로 ‘천잠’이라고 불리는 산누에나방의 고치에서 뽑아낸 천잠사는 물과 불에 대한 내구성 뿐 만 아니라, 강철로 된 절삭기로도 쉽사리 자를 수 없는 실이다. 산누에나방은 양잠을 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 생산량이 가잠사에 비해 턱없이 낮아, 일반에서는 쉽게 구할 수가 없는 물건이다. 이런 천잠사로 사람을 완벽하게 구속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을 비축한 곳이라면 내가 아는 한, 단 한 곳 뿐이다.
누군가가 내 머리를 억센 빗으로 빗어 내리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나는 분명 떨었다. 몸이 오그라들었고, 결코 펴질 일이 없을 것이다. 기어코....... 잡혀버린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가 올 때꺼정 여기에 짱 박혀 있어라잉.”
저를 데리고 온 요원.......? 분은 거칠게 저를 방안으로 밀쳐놓고,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저는 와들와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아가면서 구석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방안은 문패에 써 있던 ‘구속실’이라는 이름답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벽돌이 맞물려있는 딱딱한 바닥, 책상과 의자, 그게 전부였어요. 벽에는 손바닥 만한 창문이 있어, 그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줄 뿐, 그 외에는 이렇다할 특징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장소였습니다.
“로키군은...... 어떻게 됬을까?”
참 우습죠? 제 신변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저는 로키군의 안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저를 데리고 온 요원분이 ‘로키의 신병을 확보했다.’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로키군도 이곳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걸까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죠?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긴장했지만, 어느새 저는 슬그머니 방을 둘러보기도 했고, 남의 안부를 걱정하기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다리도 이젠 더는 후들거리지 않는 것 같아, 저는 몸을 일으켜 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책상과 의자를 자세히 보니, 목조였지만, 마구리를 천으로 두껍게 덧대놓았어요. 아마, 이곳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놓은 것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즉, 이곳에 갇힌 이들은 자기 자신을 해할 정도로 엄청난 강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 분명해요. 그런 제 추측이 맞다고 하듯, 돌로 된 벽에는 희미하게 붉은 얼룩이 져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머리를 찧었던가, 손톱으로 벽을 긁어댔거나 했나봐요. 벽에 난 긁힌 자국은 제 추측에서 두 번째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끼이이이......”
좀 더 벽을 살펴보려는데 갑작스럽게 문이 열려, 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다고 이 방에 들어온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리는 없겠지마는, 저는 최대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했거든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두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꽤나 크고 무거워 보이는 짐을 끙끙대며 나르고 있었지요.
“여기쯤에다가 던져 놓으면 되것제?”
“그란 것 같은디?”
둘은 물건을 나르느라 꽤나 힘에 부쳤는지 아무렇게나 그것을 바닥에 던져놓았습니다. 그 물건은 하얀 붕대같은 천으로 꽁꽁 싸매져 있었습니다. 언 듯 보면, 미라처럼 사람의 시신을 싸 놓은 것 같이 보였...... 잠깐만, 저거 물건이 아니었는데요? 정말 사람을 천으로 꽁꽁 싸매놓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하는 아까의 생각따위는 잠깐 제쳐놓고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오, 이런....... 로키군이었습니다.
“로키군!”
“강하게 마취시켜놔서 불러도 대답이 웂을것이여. 오매, 저놈새끼 머리에 기스났는갑소. 대그빡에 피가 나는구마잉.”
“아따, 니가 막갔다가 던져놓으니께 이런거 아니냐. 일이 귀찮아 져브렀네.”
저는 둘이 티격태격 하는 동안, 로키군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다행이 기도를 읊어나가니 그의 머리에 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이야, 별것을 다 해버리는구만, 의사 해도 되겄소.”
“저기 죄송한데, 물수건 같은거 없을까요? 상처가 아물긴 했지만 피를 좀 닦아내야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하지만, 여긴 물이 금보다 더 귀허요. 어차피 피딱지야 툭툭 털면 되븐께, 임자가 알아서 하씨요.”
“아 그리고말이여, 저놈이 일어나도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것이네, 천잠사라고 하면 저놈도 이해할거시여. 그것이 워낙에 심이 좋아브러가지고 엥간하면 못 끊는당께로.”
본인들도 생각하기론 자신의 말이 냉정하다 싶었는지, 제게 도움이랍시고 몇 마디 말을 던져주고는 그대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들도 결국은...... 제 능력에 잠깐 호기심을 느꼈을 뿐, 딱 그 정도 까지였던 것입니다.
Channel 1. 로키
답답이는 천잠사를 끊어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것을 멈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몸이 천잠사로 구속된 지금으로서는 입도 뻥끗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랜 시간동안 답답이의 행동을 지켜보다보니, 문득 그녀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나름대로 유의미한 행동을 함으로서, 무의미함속에 던져지는 것에서 오는 공허감과 공포감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게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었다. ‘이 모든 건 결국 끝이 있게 마련이다.’고.
“잘 있었냐? 지낼 만 했제?”
문이 열리면서 구속실 안으로 마스터가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니캅으로 얼굴을 가린 부관이 따라왔지만, 그가 손을 젓자 문 밖으로 미끄러지듯이 사라졌다. 그의 등장에 답답이는 덜덜 떨면서 내게서 손을 떼었다. 누군지 말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답답이도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나를 자세히 바라볼 요량으로 다리를 쪼그려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모래색 눈이 위에서 아래로 나를 찬찬이 훑어내려갔다.
“어차피 이렇게 잡혀 들어올 거 왜 그리 지랄을 한겨?”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마 내게 약간의 자유가 주어졌다면, 아마 온힘을 다해 그의 눈을 피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모래색의 눈은 나를 여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큰물에서 놀라고 왕도로 보내놨드마는 사고를 입이 떡 벌어지게 혀브렀어? 알 토란 같은 요원들이 체포당해브렀제, 지부는 수습하다 말고 내전을 벌이느라 홀라당 다 태워먹었제. 애는 사랑의 도피행각을 떠났제. 나가 알게디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겄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웂을 것이여. 그려도 부자간의 정이 있는디 울 아덜 맴은 개볍게 맹글어 줘야제라. 알게디 이눔 시키가 원했던 걸 갔다 다 들어줘야 면이라도 서니까잉. 라스알게티 지부는 특별히 갔다가 휠맨하고 히트맨을 하나로 혀주기로 혔다. 토라 고년이 잘 할거라고 야그가 나왔응께, 가시내가 거시기 헐 거여. 에바뽀레이터가 전해주기로는 니들 판오디콘을 조지기로 혔담서? 그거 총책임자까지 해먹기로 했으니께, 당간에 뭐라도 나오갔제.”
“.......”
마스터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내 입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나를 옥죄던 압박감이 한층 가벼워지자 입이 아려오면서, 내가 새삼 얼마나 꽁꽁 묶여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니 하나 웂다고 다 베려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제?”
“.......제가 그들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까 다행이구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스터는 내게 세 가지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첫째는 ‘내가 지부에 해악을 끼쳤다.’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해악은......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미비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나는 고작 그 정도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 물론 내가 지부에 해악을 미칠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몇 달전에 도로시년을 설득할 때 전제되었던 ‘나는 지부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라는 명제를 산산히 부숴버린 것이다. 그점은...... 솔직히 말해 씁쓸하군.
마스터는 내게서 고개를 돌려 답답이 쪽으로 다가갔다. 답답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와들와들 떨었다. 그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막아서고 싶지만, 나는 그러기는커녕 손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이런 내 자신이...... 심하게 무력하게 느껴졌다.
Channel 2. 아이리스
마스터라고 하던가요? 그러니까...... 자칭 ‘우리’의 수장이자, 타칭 ‘암살자의 아버지’라는 분은 로키군에게 이것저것을 이야기 한 뒤에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분명 입은 웃고 계셨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어요. 핏발이 선 흰자위와, 그걸 덮고 있는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그건 분명 그가 지독하게 화가 나있다는 걸 제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키군을 버려두고 제게 성큼성큼 다가왔습니다. 그가 한 걸음씩 제게 가까워 질 때마다, 저는 엄청난 한기가 제게 닥쳐왔습니다. 그 한기는 이곳이 사막이라는 걸...... 이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더운 곳이란 걸 잊게 만들 정도였어요. 기도문을 읊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지만, 반대로 몸은....... 부끄럽다 싶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암살자의 아버지가 제 앞에 떡 하니 서 있을 시점에는, 저는 이미 다리가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그는 그 특유의 충혈된 눈으로 저를 쏘아 보았어요.
“일단......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입장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저희의 내부 일에 휘말려버리게 만들었군요.”
“아....... 아닙니다.”
그는 로키군과 달리, 제게는 정확한 억양의 라스알게티 중심어를 구사했어요. 그 사실에 놀라워 할 동안, 암살자의 아버지는 제게 고개 숙여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충혈된 눈은 저를 향해 이글거리고 있었어요.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진심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의 말이 있는지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위압감과, 한기는 저로 하여금 항의를 하기는커녕,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더군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제 고개를 그대로 땅에 처박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음지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저희 사정이 있고, 본의가 아니겠지마는, 아이리스님이 저희의 라스알게티 지부에 피해를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대표된 입장으로선, 이대로 당신들을 내버려 둘 수만도 없군요.”
“.......”
“당신은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을 하더군요.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라고요.”
“네...... 그랬었습니다.”
“전 당신이 무의미한 말을 뱉을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우릴 모두 죽일 생각입니까?”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로키군은 저희의 대화에 끼어들어왔습니다. 암살자의 아버지는 로키군의 질문에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지요.
“그런식으로 조져봐야 화풀이밖에 더 되것냐. 그것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우리’의 거시기에도 안맞아브러.”
상황에 정말 맞지 않는 생각이라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각오하고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네요. 라스알게티 중심어와 프로하기온 지방어를 교묘하게 넘나드는 마스터라는 이의 폭넓은 언어 구사 능력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그가 한 말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했던 저희에게 ‘살 수도 있다.’라는 희망을 던져준 셈이니까요. 저는 로키군을 흘끗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지만, 빠꼼이 쳐들은 고개가, 그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알려주고 있었어요. 저는 로키군과 같은 심정으로 암살자의 아버지의 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그냥 살려주자니 저희 체면이 말이 아니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합니다. 내가 시키는 일을 무사히 잘 처리하면, 당신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해악을 없었던 일로 덮어주도록 하지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그 일이라는게 결코 쉽지 않은 것이겠구나.’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건 로키군도 마찬가지였는지, 빠꼼이 쳐들었던 그의 고개가 암살자의 아버지의 말에 천천이 땅바닥으로 내려앉았어요. 그는 저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서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신과 악마라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뭐...... 당신이 생각하는 신이라는 존재가 제가 믿고 있는 ‘아버님’과 같은 존재라면, 어느 정도는......”
“그럼 잘 됐군요. 저 녀석은 무신론자로 길러졌기 때문에, 아마 제가 설명하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녀석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 말과 함께, 암살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Channel 1. 로키
마스터의 장황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분량만큼이나 시작이 거창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에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어. 대륙이 라스알게티 시국을 중심으로 하나로 일통되고 약 100여년 뒤에 있었던 사건이다.”
나는 마스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IATP 인간사 연수를 들었던 가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 시기는 ‘통일 전쟁’이후 ‘대 팽창기’를 관통하던 시기다. 도시국가 수준으로 쪼개져있던 대륙을 ‘라스알게티’ 시국은 동맹이라는 형식으로 인근의 도시국가를 연합했고, 대규모 원정대를 보내 프로하기온과 그루미엄 지역을 정복했다. 라스알하게는 프로하기온을 둘러싼 알피르크 사막에 가로막혀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시절, 라스알게티 인들은 자신들이 알던 곳이 세상의 전부일 리가 없다며 소위 말하는 ‘테라 인코그니타.’를 멀리 밀어내기 위해, 세계를 탐험하고 나아가 정복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너희도 알겠지만, 그때 대륙은 ‘활기가 넘치던’시절이라고 하지, 늙은 제국의 젊은 시절이다. 탐험과 정복이 미덕이던 시절, 라스알게티의 방랑모험가들 중, 해가 지는 곳을 향해 여행하던 이들은 지금은 ‘아케르날’이라고 명명되는 곳을 발견했다고 하더군.”
“아케르날.......이요?”
“그래요. 아마 처음 듣는 이름일 겁니다. 역사를 깊이 공부하지 않고 공교육 수준에서 마친 사람이라면 알 턱이 없는 이름이지요.”
마스터는 아이리스의 질문에 빙긋 웃어보이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그곳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한 방랑모험가들은 동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을 여행한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발견을 했다고 하더군요. 동쪽에 펼쳐진 알피르크 사막과, 북쪽에 솟아있는 무르짐 산맥, 그리고 남쪽의 게르마 해안과 같이 인간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는 불모지와는 달리, 서쪽의 그곳에는 인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고대문명이겠죠.”
“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그루미엄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건.......”
“방랑 모험가들은 문명을 발견하곤 엄청난 호기심을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더불어서 사명감도요. 왜냐면, 고대문명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유적을 조사하다보니, 당시의 문명수준과 맞먹거나, 어느 측면에서는 그 이상의 것이 보였거든요. 그들은 자신의 발견이 라스알게티를 넘어서 대륙 전체를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진 모양입니다.”
지부장은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다. 그 웃음에는 ‘그래 니가 뭘 알겠냐?’라는 비아냥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물론 그가 하는 이야기의 반도 못 알아 들은 건 사실이지만, 그걸 굳이 이렇게 확신을 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더러워진 건 덤이었고......
“탐험이 계속될수록, 그들의 호기심은 의문으로 변했다. ‘이토록 위대한 문명이 대체 무슨 이유로 멸망을 했는가?’라는 거지. 그들은 1차 조사 이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멸망한 이유 말입니까?”
“아니, 이 고대의 문명을 전반적으로 훑어보기엔 자신들의 규모가 턱없이 작았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1차 조사 이후 왕도로 돌아가 왕에게 서쪽에 있는 문명의 흔적에 대해 보고하고, 증원을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그 왕의 이름은 피안트로프였다.”
“피안트로프 1세 말인가요?”
“네. 잘 알고 있군요.”
“그....... 제가 아는 그 피안트로프 1세가 맞는 건가요?”
내가 다른 건 잘 못 알아들어도, 왜 답답이가 마스터에게 저 질문을 두 번이나 묻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대 팽창기’로 알려진 제국의 젊은 시절을 끝장낸 무능한 왕으로 알려져 있었거든. 하지만 그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른바 ‘활기가 넘치는’ 시절을 끝내고 폐쇄적으로 대륙을 고립시켰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IATP연수에서도 설명해주지 않았었다. 아마 마스터가 말하려는 건 바로 피안트로프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 대한 것이겠지.
“피안트로프는 대륙의 팽창기를 보낸 왕답게, 자신감이 넘쳐있었고, 그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1차 모험가들의 요청대로 인원을 늘린 2차 조사단을 꾸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2차 조사단은 자신감이 넘쳤고, 그 자신감보다 더 큰 호기심과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2차 조사단은 그렇게 부와 지식을 위해 고대문명을 살펴나갔고, 그들의 발걸음은 어느덧 아케르날의 중심까지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엄청난 재앙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하는 마스터의 얼굴은 꽤나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모양이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아케르날의 중심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고, 그곳에는 무언가가 잠들어있었던 모양입니다. 2차 조사단은 그것을 발견했지요. ‘우리는 엄청난 흥분에 휩싸였다.’라고 조사단장이 그날의 심경에 대해 그렇게 기록을 했다는군요.”
엄청난 성취감이 느껴지는 서술과는 달리, 그것을 읊는 ‘암살자의 아버지’의 표정은 퍽 어두워 보였습니다. 그는 할 수 만 있다면 그걸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잠들어있던 그것을 조사하던 중에, 우연히 그것이 깨어났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을 뜨자마자 아케르날 일대에는 엄청난 재앙이 닥쳤고요.”
“재앙이라면.......”
“구체적으론 기록된 바가 없습니다. 조사단장의 일기에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어요. 그냥 ‘재앙’이라는 단어 하나만 적혀있을 뿐이죠. 하지만 그 단어가 기록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워낙 끔찍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의도적인 ‘해리’를 한게 아닐까 해요. 덮어버리고, 더는 기억하지 않는 거죠.”
“.......”
‘암살자의 아버지’는 먼지를 털어버리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좌 우로 흔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에요, 그가 말하는 사건은 약 1500년 전의 것이 분명한데, 왜 그걸 지금 17세기를 살아가는 이 노인에게는 어제 겪은 것 같이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노인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결코 1500살 이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재앙 때문에 그곳은 지금도 금제로 묶여있고, 끝없이 밀려나가는 것 같던 테라 인코그니아는 둑을 만난 물처럼 거기에서 멈춰졌다. 약 500년 동안 말이야. 전공서적에서는 ‘조사단의 일부가 유적에서 발견한 보화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그걸 독점하려 했고, 그걸 막고자하는 세력과 대립을 벌이면서 조사단이 와해되었다.’라고 적혀있고, 피안트로프는 자신을 기망한 이들을 잡지도 못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팽창 정책’을 철회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저는 암살자의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로키군을 쳐다봤습니다. 그의 머리가 들려있는 것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에요. ‘암살자의 아버지’가 말한 저희 둘이 해야 하는 일이 그 ‘금제’라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려. 일단 그들은 분열하지 않았어. 재앙이후에 살아남은 이들은 오히려 연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과를 공유하고, 후임자들에게 이를 계승하기로 약속했다. 다만....... 피안트로프에게 그걸 보고하지 않은 건 사실이야. 피안트로프는 알려진 것처럼 멍청한 위인이었으니. 그래도, 이해할 여지는 있지, 정말 자신이 기망 당한 게 화가 났을 테니까.”
“.......”
‘암살자의 아버지’의 말을 듣다보니, 역사의 뒤 꼭지에서 마저도 어리석다고 평해지는 피안트로프 1세가 조금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앙의 수준이 전 대륙을 덮을 정도였는데, 그게 아케르날이 있는 방향에서 벌어졌어. 그런데 그걸 조사하러 간 놈들은 일언반구 보고도 없이 잠적했어. 그렇다면 한 나라의 왕으로서 열 받을 수 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발견했다는 성과물은 마스터님께서 말씀하신 금제와 관련된 것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발견한 성과물을 챙겨서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갔고, 그걸 교묘하게 집단의 전통과 결부를 시켰습니다. 어찌나 교묘하던지 구성원의 대다수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를 정도니까요.”
“그렇......습니까?”
“응. 너도 ‘우리’가 무언가를 보관한다는 이야긴 방금 처음 들었을 거다.”
로키군은 고개를 끄덕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에요. 성모의 현신 유적지라던지, ‘아드님’의 시신을 싼 수의라던지 하는 성물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이른바 금제와 관련된 유물에 대해서는 ‘암살자의 아버지’에게서 처음 들은 것이니까요.
“‘우리’는 그걸 ‘유품’이라고 부릅니다. 뭐 다른 집단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어요. 내 알바가 아니기도 하고...... 여러 이름으로, 극히 일부의 인사들에게만 인식되는 것이지만,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희롱하는 거짓된 물건이라는 거죠.”
“......세계의 질서를 희롱한다.”
“대륙의 주인은 왕이고, 그의 권위에는 모두가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지만, 각자 나름의 지위와 자유를 갖는 집단은 존재했어. 그 대표적인 게 ‘길드’라는거지. 대륙에는 왕의 군림을 인정하되, 완전히 지배받지는 않는 자유 길드가 10여개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해. 하지만 그 깊숙한 속내에는 ‘유품’이 숨어있다.”
“그들이 그 유품이라는 것으로....... 재앙을 일으킨 그것을 수습한 건가요?”
“요컨대 정답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희롱하는 ‘가짜’일 뿐이기 때문에, 금제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그걸 다룬 이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어요. 거짓으로 잠재운 것이기에, 계속적인 갱신이 필요하다는 걸 말이죠. 게다가, 그들이 우연히 깨운 ‘그것’이 잠든 뒤에도 스스로 거짓된 잠에서 깨어나려고 애를 쓰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해서, 단지 잠에서 깨어나려고 뒤척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것 자체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거든요. ‘이적’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적......말입니까?”
“그래, 상식적으로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는 일. 그걸 목격하는 이에게 근원적인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이지. 최근에도 일어났어. 하늘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났었지?”
‘암살자의 아버지’의 말을 듣다보니, 불현 듯 머리에서 스쳐지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로키군과 함께 라스알게티에서 탈출하던 날, 요원들이 저희가 탄 열차를 잡기 직전에 벌어졌던 그일....... 바로 두 별의 충돌이었어요. 그 일 덕분에 저희가 무사히 탈출을 할 수 있었고, 저희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심 그 일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전혀 뜻밖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일은 상서롭기 보다는, 흉한 것. 흉조였던 거에요.
“내가 너희 둘에게 맡길 일은 그것과 관련된 거야. 아마 눈이 있는 이라면, 그날 하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겠지. 아마 다른 자유길드에서도 그날의 ‘기사’를 목격했을 것이고, 그에 맞춰 준비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지. 그 일을 바로 너희 둘이 했으면 좋겠구나.”
Channel 1. 로키
마스터의 말은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문자 그대로 듣자니 황당했다. 그건 답답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신’과, ‘악마’라는 개념을 아는 것을 넘어서 믿는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17세기이지 않은가? 그런 추상적인 개념을 ‘실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의 기술과 과학의 발전상이 인간의 의식에 가림막을 씌우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른바 ‘유품’이라는 물건의 존재는 마스터의 자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데 한 몫을 했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어떤 식으로라던지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 분명한데, 그의 입에서 유품이라는 존재를 듣기 전에는 유품의 ‘ㅇ’자 도 듣지 못했거든.
마스터는 나의 이런 생각을 읽었는지 한숨을 쉬었다.
“믿기 힘든 건 알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이라는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믿으라고 명령을 하면 믿는 시늉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는 건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도 신앙이 제 직업의 본질이지만 17세기에 그런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기는 힘들 것 같네요.”
마스터는 나에게 다가와 내 몸을 옭아매던 천잠사를 완전히 잘라냈다. 이로서 내 몸은 온전히 자유를 찾게 되었다. 네 육신에 자유를 주었으니 내 말을 따르라는 것일까? 아니, 그는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마스터는 신호를 보내 부관을 부르더니, 그에게 ‘그것’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아드님이라고 부르죠? 당신네 종교의 교주 말입니다. 그 양반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3일 만에 부활했을 때, 그를 목격한 이들이 스승의 부활을 알리고 다닐 때, 토마스라는 제자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게 말이 되냐며, 내가 그의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담기 전에는 그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라고 공언을 했다고 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진정한 믿음은 눈의 증거를 쫒지 않고,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에피소드잖아요.”
“사실, 당신들이 내 말을 바로 믿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눈의 증거를 미리 마련해 두었지요.”
부관은 두 명의 에바포레이터와 방안으로 관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에서는 코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나로서는 ‘왜 이걸 가지고 오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관을 본 답답이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이의 시신이 들어있는 건가? 설마.......
“이건......”
“네 맞습니다.”
“이...... 개 자식아! 이걸 여기로 왜 가지고 온 거야!”
답답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마스터에게 달려드는 걸 가까스로 막았다. 내 품 속에서 발악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비로소 그 관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그녀의 양 어머니 원장수녀였다. 답답이는 자신을 붙잡은 내 팔을 거진 물어뜯다시피 하며 발악을 해댔고, 그에게 끝없는 저주의 말을 쏟아부었지만, 어째 그녀를 바라보는 마스터는 빙긋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녀를 도발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대체 그는 무슨 목적으로 답답이를 도발한 것일까?
“로키를 보느라 당신도 눈치를 챘겠지만, 우리는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그걸 느끼는 이를 휘두르거든요. 앞뒤 좌우 가리지 않고요. 그 극렬한 흐름에 의해 오른쪽으로 정신 없이 달려가다가도, 약간의 실마리가 주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반대방향으로 급격히 선회하기도 하는 게 감정이더군요. 매우 비효율적이며, 쓸데없는 것이죠. 이런 현학적인 말을 해서 이해가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말하자면,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그 당사자를 매우 민망하게 만들곤 하지요.”
마스터는 품안에서 풀을 꺼냈다. 책갈피 사이에 끼워둘 정도로 예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성들여 말린 것처럼 곱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건 아케르날의 외곽에서 찾아낸 거에요. 모습은 그냥 풀 때기지만, 실제론 그곳에서도 발견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희귀한 녀석입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거니 해서 간직해두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군요.”
마스터는 관을 열었다. 관의 안쪽에는 예상대로 원장수녀가 잠자고 있었다. 한창 자연의 순환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는지, 그녀의 몸엔 구더기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 참상에 답답이는 눈물을 흘리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녀를 붙잡던 내 손에 그녀의 침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스터는 풀을 그녀의 가슴위로 올리고 이렇게 속삭였다.
“달리다굼.”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암살자의 아버지’가 원장수녀님의 귀에 대고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을 때만 하더라도, 몸이 떨릴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던 나의 어머니를 죽이게 한 것도 모자라, 안식해야 할 시신을 꺼내오는 만행을 저질렀고, 거기에...... ‘아드님’이 생존했을 당시 사람을 구원하던 이적을 흉내 내기까지 했잖아요. 저로서는 그의 행동하나하나는 가증스러운 악마적인 행동으로 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의 말과 함께, 도저히 눈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뭐...... 뭐야?”
로키군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것만큼이나, 저도 놀라움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 풀잎이 시들더니, 원장수녀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거든요. 처음에는 원장수녀님의 살 위에서 꼬물거리던 구더기들이 원장수녀님에게서 떨어져나갔습니다. 그 뒤에는, 구더기가 파먹은 자국, 보라색으로 썩어들어가던 살들이 아물면서 누런 가죽같던 피부가 발갛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이건 누가 보아도 명백한......부활이었습니다. 저희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는 동안, 원장수녀님은 기지개를 켜며 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아으으윽! 뭐야, 벌써 깨우는 거야?”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볐고, 눈을 비비고 난 뒤에도 원장수녀님이 그대로라는 것에 놀랐고, 그런 저를 바라보는 원장수녀님께서
“많이 놀랐지 내 딸아?”
“어......원장수녀님.”
저를 향해 손을 네미는 모습을 보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원장수녀님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발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어요. 그동안 제가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그 무겁고 추한 감정과 마주해야 했거든요. 전....... 원장수녀님이 미웠어요. 로키군과 함께 다정 모습을 취하고 계셨던, 그래서 빌었어요. 원장수녀님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대가로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려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 비한다면 앞서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원장수녀님에게 전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그 말을 한다면 원장수녀님은 저를 향해 이렇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요?
“아이고 이 녀석......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이제 막 관 뚜껑을 연 이 어머니가 직접 움직이게 만들어야겠니?”
원장수녀님은 에바포레이터 요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관에서 내려와 조금은 서툴지만 직접 걸어서 제 앞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었어.”
“어.....엄마.”
죄를 고백하기는커녕, 생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했던 그 말을 하면서, 저는 원장수녀님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포근한 온기, 그리고 숨결......이 모든게 그대로에요. 저를 안아주는 이 팔, 그리고 제 이마로 흐르는 머릿결 모두 어머니의 것이에요. 원장수녀님..... 아니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는지, 제 이마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똑똑 떨어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잘못했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그래, 괜찮아.”
“나, 엄마한테 나쁜 생각을 품었어요. 로키군하고 친하게 지내는걸 보구 질투하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래.”
“음...... 저기. 기쁜 건 알겠지만, 잠시만 좀.”
저희 둘이 재회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 동안, ‘암살자의 아버지’는 눈치를 보다가, 더는 안 되겠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저희 둘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아야, 테펠리나야, 지옥 귀경은 잘 하다 왔는가?”
“뭐래? 천국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려놓고 지옥을 말해?”
원장수녀님은 ‘암살자들의 아버지’의 농담에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하고 나서, 그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그와 원장수녀님 사이에는 친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암살자들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원장수녀님은 그 손을 맞잡았습니다.
“애들에게 잘 말해줬지?”
“하모, 이제 니가 해야 할 차례구먼, 거시기는 어따가 둬브렀냐?”
“아케르날에 두고 왔어.”
“뭐시여? 거따가는 왜두고 온 거시여? 잃어블면 우짤라고.”
“니네랑 달리 우리는 그런게 전통이란 말이야. 힘들게 일해 놓고, 집에 와서 화형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매 대가리 터져블것네. 그런 중요헌 것을 왜 이제사 이야기 하는거시여.”
“말할 새도 없이 죽여놓고 뭘 따지냐?”
두 사람의 티격태격함이 주제와 상관없는 것으로 번져나가려는 걸 로키군이 적절하게 끼어들었어요.
“저기, 그건 그렇다 치고, 제 물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그것은 라스알게티에 있는 내 지인헌티 맽겨놨다. 그거슨 걱정 안해도 되야써.”
“음...... 그 물건을 찾고 난 다음에는요?”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미 이적은 일어났고, 각각의 자유길드에서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여, 아케르날로 가는 질이야 뻔할 뻔짜니께, 길목을 가는 곳마다 만나지 않겄냐?”
“뭔가...... 대책 없이 낙관적이기만 한 것 같은데요?”
“차차 때가 되면 알아서 만나게 될 거에요. 그리고 아케르날에 다다랐을 때는 결국 모두가 함께 할 겁니다.”
원장수녀님이 ‘암살자들의 아버지’의 말을 받아서 보충설명을 해주셨지만, 입맛이 개운치 않은 건 사실입니다. 너무 우연에 기대는 것 같아 대책이 없었거든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일을 이렇게 허술하게 다룬다는게 뭔가 뒤가 구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원장수녀님은 저를 바라보시다가,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걱정 말아라 딸아. 하늘을 나는 새가 자기 잠 잘 자리를 걱정하지 않고, 들에 핀 꽃이 찬바람을 견딜 의복을 걱정하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아버님’께서 너희를 굽어 살펴주실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