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어라? 이거 쪽지가 있는데요?”
답답이는 브로치 안에 보관되어있는 쪽지를 꺼내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참...... 대단한 족속이다. ‘라스알하게 인들은 눈에 보이는건 모조리 기록하고, 수납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라스알하게인들이 알뜰살뜰한 살림솜씨를 가진 것은 대륙에도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런 장식품에도 수납공간을 만들어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보자고.”
“으음...... 뭔가 중요한 물건인 것 같은데, 남의 편지를 무작정 읽는건 실례가 아닐까요?”
“어차피 까치가 훔친 물건이고, 주인을 찾아주려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실례를 하는게 정 걸린다면...... 읽은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되는 거고.”
논리적인 내 말에 답답이는 ‘이건 생각 못했네.’라는 깨달음을 얻었을까? 답답이는 내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이는 쪽지를 조심스레 열었고, 그리고......
“으음...... 이것도 라스알하게 문자로 되어있어서 도저히 읽을 수가 없겠는데요?”
답답이의 말 대로 종이는 라스알하게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참...... 이럴 줄 알았다면 IATP연수 선택과목에서 ‘라스알하게 어’를 수강할 걸 그랬다. 신청기간동안 펜릴 녀석이 우리 방에 붙여두었던 선택과목 안내공고를 찢어 가버리는 장난을 치는 바람에 수강신청에 실패를 했었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남은 과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남은 과목은 ‘라스알하게어’와 ‘교육 사회학’이었지. 그때의 나는 ‘교육사회학’을 선택했었다. 임무수행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변두리 지방 언어를 배우는 것 보다는 덜 지겨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선택을 하고나서 시간이 흘러 내 생에 라스알하게에 와서 라스알하게어를 몰라 헤매는 일이 벌어지다니.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란 건 만고불변의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럼 뭐 별 수가 없겠는 걸? 버리는 수밖에.”
“네? 이걸 그냥 버린다고요?”
“어차피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무슨 수로 주인을 찾겠어? 인연이 닿는다면, 브로치의 주인이 여기까지 발걸음을 할 지도 모르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여기다 두고 가면 까치가 다시 물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 주인과 브로치가 인연이 아닌 모양이지.”
“.......”
내 말에 답답이는 이를 앙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뭐...... 이해는 된다. 자신의 ‘상식’에는 어긋나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박을 하자니 딱히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겠지. 가끔은 내 스스로도 이런 논리적인 면모가 소름끼치는데 답답이는 어쩌겠는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답답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더니, 내 손에 든 쪽지를 빼앗아 브로치 안에 집어넣었다.
“어휴 진짜 답답해 죽겠네. 우리가 주인을 못 찾는다고 그걸 그대로 두고 가자는 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정 못 찾겠으면 저기 식당에다가 맡기면 되는 거잖아요. 사람이 왜 이리 답답해요?”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Channel 2. 아이리스
저희가 다시 가게로 찾아오자, 종업원은 두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희를 바라보았습니다.
“어서옵.......에? 여그는 또 어쩐 일이여? 뭐 놓고 간 거라도 있슈?”
“그건 아니구요. 분실물 하나를 주웠거든요.”
“분실물?”
종업원은 ‘이걸 왜 우리에게 찾아오고 난리야?’라는 얼굴로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저는 주눅이 들었지만, 로키군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어주었어요.
“원래대로라면 이곳의 분실물 센터에 가져다주어야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이곳의 사정엔 어둡기도 하고, 우리 나름의 일정이 있어서 한가하게 분실물이나 찾아주러 다니긴 곤란하거든. 보아하니, 이곳은 어차피 사람이 많이 찾기도 하는 것 같으니 이곳이라면 주인도 쉽게 찾지 않을까 해서 여길 온거다.”
로키군의 말은 송곳 하나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정론이었던지라, 종업원은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쌤통이라는 나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삼 말하지만, 프로하기온이야 이웃간에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는데 외면할 정도로 박정한 동네도 아닐테고.......”
“고놈의 인심좀 고만 팔아유! 어쨌거나 줘봐유. 어떤 물건인지는 봐야 할거 아녀유.”
로키군의 페이스에 말려드는게 짜증이 났던지, 종업원은 짜증을 내며 저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지체없이 그녀에게 저희가 주운 브로치를 건넸지요.
“어......? 요거는 녹림......”
“녹림 뭐?”
“아녀유. 생김새가 이쁘다고. 잉. 이쁘다고.”
종업원은 얼버무리며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듯 보였지만, 저는 그 눈빛과 태도를 익히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제가 ‘암살자’들과 함께 기거하는 동안, ‘비정한 마음’에 대해 물었을 때, 관리인 아주머니가 보였던 것과 똑같았어요. 요컨대, 저 종업원분은...... 이 브로치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는 거겠지요. 저는 로키군을 바라보았습니다. 로키군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에요. 그는 제게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하고는, 그녀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쟁반을 손으로 툭 쳐버렸어요. 그 바람에 쟁반이 쏟아지면서 그 위에 있던 그릇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에그머니나! 이게 뭐람!”
“아이고, 괜찮아요? 어머나, 옷에 국물이 죄다 튀어버렸네.”
“아녀라 괜찮아유. 주막에서 일하는디 이런거는 일상사 다반....... 오매매 뭐여유!”
“뜨거운 국물이 튀었는데 괜찮을 리가 있나. 이보 주인장, 우리 실수 때문에 종업원이 다쳤으니, 우리가 이이를 잠깐 데리고 가도 되겠지? 하다 못해 세탁비라도 물어주어야 할 것 같군.”
종업원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저희는 종업원을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하, 이렇게 안 좋은 쪽으로 쿵짝이 잘 맞을 줄이야...... 이래서 악이 선보다 발이 더 빠르다라고 하는가 봐요. 저도 참 많이 바뀌었어요. 어쨌거나, 저희는 종업원을 업다시피 하며 인적이 드문 곳으로 그녀를 끌고 갔습니다.
“이......이거 놔유! 사람 살!!”
“쉿.”
“일단 뜨거운 물에 데인건 사실이니...... 잠시 만요.”
저는 아주머니의 옷을 찢어 그녀의 상처를 살핀 뒤에, 그 위에 손을 올려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놀란 그녀는 ‘오매매 뭐당가유 시방.’이라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그녀의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걸 보더니 말과 태도가 점차 누그러졌습니다.
“괜찮아졌어요?”
“잉...... 아까보단 괜찮지 싶네유. 고마워유.”
“아깐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로트 클라우드라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뭐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저흰 아주머님이 아까 보여주신 반응을 가만히 묵과할 수가 없더라고요. 아시다시피 이곳에는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작은 실마리라도 있으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라도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아이고 천천히 야그하슈. 나도 쩌그....... 그 쪽 말은 영판 서툴다니께.”
“아...... 죄송해요. 그러니까, 아주머님이 아까 브로치를 보고 하신 반응이...... 그대로 무시하기엔 너무 의미심장해서. 왠지 이 브로치가 로트 클라우드 씨랑 연관이 되어있을 것 같다는 거니 그 브로치에 대해서 알려달라는 거에요.”
“아따 로트 클라우드라는 사람은 나는 잘 모른다니께 몇 번을 말혀유.”
“그럼 녹림......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알려줄 수는 있는가?”
“.......”
로키군의 말에 종업원은 움찔했습니다. 녹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는걸 보면, 암살자들에게 있어선 ‘비정한 마음’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녹림당은 말여...... 내 입으로는 말 못혀유. 그걸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클나니께...... 정이 그게 궁금하믄 광장으로 함 가보드라고. 오늘 그거랑 관련 되가지고 뭔가를 헌다 안허요.”
Channel 1. 로키
종업원의 말에 따라서, 우리는 광장으로 갔다. 여느 광장과 마찬가지로 그곳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양상은 일반적인 것과는 동 떨어져있었다. 일반적인 번화가는 사람들이 각자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곳을 향해 가는 ‘길이 같은 이들의 거대한 흐름’의 양상을 보이는 반면, 이곳의 양상은 이 장소가 사람들의 목적지가 되어, 이곳으로 모여드는 양상을 보였다. 조금 이상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먹잇감을 향해 모여드는 개미’와 같았다.
“엿이요 엿! 한놈이 먹으면 둘이 죽어도 모르고, 두놈이 먹으면 세놈이 죽어 나자빠져도 모르는 엿이요!‘
엿장수는 간만의 대목인지 신나게 가위를 잘그락잘그락 거리며 호객행위를 했고, 그 옆에는 양산을 팔고 있는 이도 있었다. ‘떡’이라고 부르는 라스알하게 특유의 간식거리를 파는 이도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일반적인 시장의 풍경과 다를바가 없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수많은 사람들의 모임은 ‘물건을 매매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제 3의 목적이 있어서 모인 것 같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그에 따르는 부수물과 같이 여겨졌다.
“로키군, 저기 봐봐요. 저기......”
답답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사람들을 이곳에 모이게 하는 동력을 찾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그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뭐지? 저건?”
지푸라기로 만든 카페트 위에 한 남자가 포박이 된 채로 앉아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해야겠군, 행색을 보아하니 죄인인 듯싶은데, 꽤나 지독한 대접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잔뜩 풀어헤쳐져 있었고, 잔뜩 얻어맞았는지 그의 얼굴은 멍이 든 채로 퉁퉁 불어있었거든. 얼굴이 그 모양이니 의복은 말할 것도 없었다. 피가 묻은 옷은 넝마가 형님이라고 할 정도로 잔뜩 찢겨져 있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딱지도 앉지 않은 상처들이 보였다.
우리는 그의 몰골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그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지근거리에서 본 사내의 모습은 더욱 참담해서, 그의 한쪽 눈은 보이는게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부풀어 올라있었다.
“저......사람 무슨 이유로 여길 있는거에요?”
“아줌마 글 못 읽어유? 저 사람 옆에 팻말 보면 다 나오잖아유.”
“우린 라스알하게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하지만 좀 읽어줬으면 좋겠군.”
내 말에 꼬마는 ‘세상에 글도 못 읽는 무지렁이가 다 있네.’라며 투덜대고는 팻말에 있는 글을 읽어주었다. 그 꼬맹이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릇되게 읽은 게 아니라면 이 남자는 사형수였다. 사내는 금지 사상인 동양 평화론을 신봉하는 자로, ‘녹림당’에서 활동을 했고 척식회사에 테러를 가했으며, 그중에서도 ‘긍정파’의 거두인 ‘미부히로’를 저격 · 사살한 중죄인이라는 것이었다.
미부히로가 죽었다는 이야기에서는 나도 적잖이 놀랐다. 그는 라스알하게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거든, 그는 ‘라스알하게 인들은 왕도를 위시하는 대륙 문화권에 합류하여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라는 발언과, ‘무지몽매하고 미개한 라스알하게인들이 대륙 문화의 혜택을 받아 그 삶이 날로 윤택해지고 있다.’라는 발언으로 의회에서 박수갈채를 받은바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기사를 보면서 ‘모든 라스알하게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긴 했는데...... 그가 저격당해 죽었다는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나는 미부히로를 죽였다는 사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그는 비록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고개는 빳빳이 들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터럭만큼의 후회도 없는 이가 보이는 당당함의 발로인 것인지, 아니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의 발로인지 솔직히 알 도리는 없었다.
“어어, 저기 사형집행인 인가 봐요.”
답답이가 말한 것처럼, 사형집행인이 나타났다. 그는 등장하면서 작은 기사를 행했는데, 여유라곤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이 모여 있던 광장이었건만, 그가 나타나자 그의 주위로 둥그렇게 빈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철가루를 뿌린 유리판에 자석을 가져다 대자 철가루가 기이한 모양을 그려내는 것과 같았다. 그가 오른쪽으로 가면 빈 공간은 그를 따라 졸졸졸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그가 왼쪽으로 가면 공간은 왼쪽으로 움직였다. 지켜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는 내심 이런 현상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사형집행인은 작은 여흥을 즐긴 뒤에, 지푸라기 카펫트 위로 올라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호리병이 들려있었다. 그는 호리병을 들어 그 안에 들어있는 술을 마시더니 그걸 자신의 칼 위로 뿜었다. 탁한 흰색을 띈 액체는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몇 번 더 칼날을 축축히 적신 그는 남은 술을 모두 마시고는 천천이 춤을 추었다.
사형집행인을 일컬어 망나니라고 주변사람들이 부르니, 편의상 그렇게 부르도록 하지. 망나니라는 이름을 가진 그 자는 칼을 쥔 채로 이리저리 나빌렀다. 공중에 붕 뜬 채로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기도 하고, 칼을 손에 쥔 채로 덤블링을 하기도 했다. 그가 고난이도의 동작을 보일 때면 사람들의 입에선 탄성이 흘러나왔다. 관중의 리액션이 성에 차지 않으면 망나니는 손을 귀에다가 가져다대는 액션을 취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환호로 답했다. 만족할 만한 환호가 나온 뒤에야 그는 새로운 동작을 선보이곤 했다.
망나니가 춤을 추는 동안,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응시했다. 자신이 곳 가게될 장소라고 여기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지만, 인간사회의 내세관에서 보이는 보편성이 떠올랐다. 선과 악,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천국과 지옥. 그 이원론 말이다. 착한 이는 하늘로 올라가고, 악한 이는 땅거죽 아래로 떨어진다는 생각..... 아마 이 남자는 자신이 천국이라는 곳에 가리라고 강한 확신을 가진 모양인가보다.
망나니의 춤이 멎었다. 그는 칼을 질질 끌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망나니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는 눈짓을 하고, 좌중을 바라보았다. 망나니는 사내에게 고개를 끄덕하고는 칼에 몸을 기대 그에게 유언을 남길 시간을 주었다. 아마 그것이 사형집행인으로서 그가 해왔었을 것이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최후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지는 민족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녹림당과 더불어 3년 동안 바람 속에서 먹고, 이슬을 맞으며 잠을 자왔슈.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뜻을 완성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게 되네유. 나는 비록 여서 죽지만서두, 우리 2천만의 성제 자매님덜은 모두 분발하시구 열심히 학문을 닦으시구, 이곳의 경제를 발전시켜 가다가 지가 가졌던 뜻을 이어받아 자유 독립을 허면, 지금 이 죽는 나도 남는 한이 없겄소.”
남자는 자신의 유언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였고, 망나니는 칼을 크게 휘둘렀다. 남자는 그렇게 죽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사형의 집행이 끝난 뒤에 망나니는 칼을 버리고 휘적휘적 가버렸고, 광장의 사람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 집으로 가는 관객들처럼 어어어 하는 사이에 빠르게 흩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목을 잃은 시체의 옆을 지키는건 저와 로키군 뿐이었어요. 유족도 보이지 않는 쓸쓸한 죽음...... 한 사람의 생애 마지막 모습이라고 하기엔 가슴이 미어지도록 쓸쓸했습니다.
“우리라도 수습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음...... 함부로 만지지 않는게 좋을걸?”
로키군은 턱으로 관리들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판자로 조잡하게 만들어진 달구지를 끌고 시신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나름 대륙에서 거물급으로 인정받는 정치인을 죽였는데, 라스알하게 총독부가 저 이의 시신을 곱게 수습하게 둘 리가 없지 않겠어?”
“시신을요? 유족에게 돌려줘야 하는 거잖아요.”
“돌려주기야 하겠지...... 다만 돌려주기 전에 화풀이를 하지 않겠어? 뭐. 예를 들자면 저자거리에 걸어둔다거나.”
“...... 너무 잔인한 처사인데요?”
“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명분만 주어진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야.”
로키군의 말에는 지독한...... 경멸의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문득 느끼는 거지만, 그는 가끔 자신을 ‘인간’과 다른 종으로 생각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발언을 하곤 했어요. 처음에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금 그가 발언을 하는 이 상황을 볼 때......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봐도...... 너무 추악했거든요.
우리는 관리들이 시신을 달구지에 싣는 걸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일을 하는 모습들을 이른바 ‘외국인’들이 구경하는 것이 퍽 불편했는지, 일부러 이쪽으로 시선을 외면하고 묵묵히 시신을 처리했습니다.
“어이, 이봐 말 하나만 묻지.”
“말씀 하셔유.”
“저 남자가 녹림당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뭐하는 단체인지 알려줄 수 있나?”
“그건 알아서 뭣하게유?”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면 보통 단체는 아닌거 같은데, 이곳 사람들은 영판 입에 올리는 걸 꺼려해서 말이야. 그냥 궁금해서 가볍게 물어보는데도 말이지.”
로키군의 질문에 관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옆구리를 찔러댔습니다. 대화 화제가 곤란한 것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꽤나 부담스러운 상황인 모양이에요. 하지만 여기서조차도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면 더는 방도를 찾을 도리가 없었기에, 저희는 인내심을 발휘해 그들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습니다.
“녹림당은...... 긍께, 반정부 단체요.”
“반정부 단체?”
“잉 기쥬. 아조 징헌 놈들이랑께유. 잊어버릴만 허믄 일짓거리를 혀서. 골칫거리유.”
“일 짓거리라면 무슨......?”
제 질문에 관리들은 ‘이런 말을 해도 되나’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저희는 그들이 입을 열 때 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거든요. 한참동안의 상의 끝에, 아까 입을 열었던 관리가 마저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이런 야그 헌다구 '라스알하게가 영판 사람 살 곳은 못되는 곳이구먼' 이라고 오해는 안했음 좋겄슈.”
“아 그럼요. 전 여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반했는걸요.”
“처자가 보는 눈은 있구먼. 야그를 계속 허자믄, 이놈 시키들은 산에서는 산적질, 도시에서는 깡패짓 강가에선 해적질 하여간 돈되는건 몽창 다허는 놈들이유. 그놈새끼덜 땜시 우리가 월매나 고생을 하는지 알믄 오늘 죽은 놈도 동정할 값어치도 웂다는걸 알게 될거유. 공물을 모타서 라스알하게역꺼정 날를라고 하믄 어서 알았는지 귀신겉이 나타나가지구 죄다 털어가지, 뜯기다 남은거 가지구선 창고에 놔뚤라고 하믄 창고에 불을 질러블지, 갱신히 건져가지고 열차에 실어 놓으믄 선로를 폭파시켜 버린당께유.”
“아이고 저런.”
제가 추임새를 붙여가며 당신의 말에 열중을 하는 모습을 보이니, 관리도 신이 났는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울분을 토로했습니다. 아까전만 하더라도 서로에게 떠넘기던 그 수줍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도리가 없을 지경이에요.
“아조 이놈 새끼덜 때문에 옷 벗은 식구도 한둘이 아녀. 울 총독도 첨엔 상황을 잘 몰라버리니까네 맨날 우리덜만 조졌는디 열차 사고 나고 부텀은 우리가 월매나 빡시게 구르는지 대충 알아 묵었는 갑서, 예전보담은 갈구능게 많이 줄었응께.”
“고생이 많았겠군요.”
“잉 기쥬. 이놈 잡고 나서는 한동안 척식회사랑 총독부가 축제 분위기였을 정돈께유. 오직하믄 척식회사 사장이 직원들헌티 성과금이라고 돈을 갔다가 턱턱 뿌려불고, 총독부에 소 열 마리를 잡아다가 시다덜 해믹이라구 보냈겄어유. 하여간 저놈 새끼 잡을라고 온 동네를 갔다가 이를 잡듯이 돌았당께유. 혀간 하루 빨리 주운을 잡아야 쓸텐디.”
“주운이요?”
“잉. 녹림당의 대빵이쥬. 월매나 신출 귀몰헌지 지대로 된 몽타주 하나 웂다니께유. 언놈은 털 복싱이에 우락부락한 거구라고 허구, 쩌놈은 외소헌디 날래다구들 허구, 딴놈은 살집이 두둑한 돼지새끼 같은 놈이라구 하니께......듣기로는 한 장소에 두 시간 이상을 안있는다고 허니. 얼굴 지대로 아는 사람이나 있겄슈?”
“......”
주운이라...... 그들은 신이 나서 주운의 행적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왠지 그런 기이한 행적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지나가듯이 말했던 ‘주운’이라는 두 글자가 귀에 달라붙어 좀 체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어요. 왠지 그 이름이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주운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라도 있는건가?”
“뭐...... 개멋이 잔뜩 든 이름이쥬. 원래 자칭 ‘협객’이라고 허는 놈들이야 허세가 기본 옵션 아니겄소? 알려달라구 허니께 알려주자믄...... 붉을 주에 구름 운이니, 붉은 구름이요.”
“붉은 구름이라......”
저는 로키군과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드디어....... 찾은 것 같아요.
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6일
우리는 협객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협객이라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을 했는지, 영판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댔다. 그들의 ‘의견’이 담긴 이야기를 대충 걸러내고 ‘사실’을 주워섬겨서 우리가 알아낸 것을 이야기 하자면, 그들은 ‘라스알하게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는 세력이었다. 즉..... ‘부정파’라고 할 수 있겠군. 부정파 중에서도 꽤나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은, 폭력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라스알하게에 친화적인 인물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척식회사’라는 관권적 성향을 가진 기업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들을 잡기 위해 라스알하게 말로 ‘관군’이라고 하는 정규군이 여러 가지 작전을 실시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는데, 첫째로 이들은 민심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부정한 부’를 빼앗아 민중에게 나누어준다는 명분으로 척식회사 혹은 ‘긍정파’에 속한 인물들을 테러한 뒤에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인근의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앞서 말한 명분은, 그들의 문화권에서 종종 등장하는 이야기 소재인 모양이었다. 이야기란 본디 화자들의 염원이 담긴 것......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는 민중들에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척식회사와 ‘긍정파’가 일궈낸 부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행동을 ‘정의로운 것’으로 대비를 시킴으로써 꽤나 교묘하면서도 효과적인 프레임을 전파해냈다. 결국 이러한 프레임이 민중에게 먹히고 있다는 것이겠지.
둘째로, 이들은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스알게티는 총독을 파견한 식민지에 정규군을 상주시키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요즘은 프렌차이즈다 뭐다 해서 현지인들을 어느 정도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라스알게티 시민권자들이다.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훈련을 거쳐 표준화된 전력을 구성한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반대로 주둔 지역의 지리적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다. 반면 ‘녹림당’은 대부분, 아니 전부가 라스알하게 출신으로 구성되어있지. 중앙에서 파견 온 정규군과, 라스알하게인들로 구성된 녹림당...... 둘 중에 어느 쪽이 현지의 지리에 밝은지는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리적 정보의 양은 전략적 우위로 이어진다. 물론 양적으로는 정규군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들은 지리적 정보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상대를 타격하고, 자신들은 손실이 없이 빠져나가는 전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게릴라 전술이지. 게릴라 전술이란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지역을 거점으로 설정하고, 매복과 같은 방법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가한 뒤, 빠르게 산개하여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적에겐 피해를 가하되, 자신의 전력을 보존할 수 있지. 이러한 전략이 효과를 내려면, 안전한 곳을 파악하는 지리적 정보도 중요하지만, 그들을 숨겨줄 수 있는 조력자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그건 앞서 말했던 첫 번째 이유와 연결되기도 한다. 민심을 얻음으로써, 민중의 협조를 얻는 것...... 결국 그들은 두 번째 이유를 위해 첫 번째 이유가 되는 민심을 얻으려 애를 쓴 것이다.
하지만 게릴라 전술에도 맹점이 있으니, 그건 ‘수적인 우위에 의한 물량공세’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기량이 뛰어나도, ‘일당백’이라는 건 공염불에 가깝다. 결국 전쟁이라는건, 머릿수 싸움이거든. 정규군은 자신들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의 타격을 받으면 인내를 하지만, 그 이상의 타격을 받으면, 전략적 인내를 접고 불도저와 같이 밀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은 거점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수 밖에...... 처음에야 갈 곳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불리해질 수 밖에 없다. ‘초토화’라고 불리는 정규군의 작전은 민간인에게도 피해를 끼치거든...... 정규군에게 한번 피해를 입은 민간인은 정규군에 대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품지만, 그보다 더 큰 공포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녹림당을 도우면 피해를 입겠구나.’라는 거지. 이건 인간의 심리에 기초한 전술이기도 하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기 보단, 자신이 가진 걸 잃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거든. 따라서, 한번 초토화가 된 지역은 게릴라를 돕는데 망설일 수 밖에 없다. 그건 결국 ‘녹림당’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지.
오늘따라 유난히 머릿속의 수다쟁이가 말이 많았는데, 내가 녀석의 입을 틀어막지 않은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관리들은 우리에게 ‘이런 쌩고생도, 곧 끝이 난다.’라면서, 피해가 컸지만 결국 ‘녹림당’놈들을 지리산까지 몰아넣는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지리산은 험준하기로는 라스알하게 지역의 제일이지만, 산맥의 끝에 위치하고 있어, 막다른 골목에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즉, 이곳에 몰아넣은 뒤에 산을 둘러싸 포위하는 식으로 농성을 하면, ‘녹림당’은 추격과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전멸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물론 그건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희소식이겠지만, 로트 클라우드의 소재를 간신히 알아낸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임이 분명했다.
총 공세를 펼치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이때가, 우리에겐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5월 6일
로키군의 말을 듣고,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이곳에 도착을 했고, 지금은 한시가 바쁜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휴우...... 로키군 우리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한시라도 빨리 그들과 접촉해야 한다고.”
“그렇긴 한데......”
발이 부르터서 진짜 죽을 지경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사례가 드는 바람에 기침을 하느라 뒷말을 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어요. 작정을 하고 달려드는 이 남자의 추진력은 저로서는 따라잡는건 감히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여서, 저는 기침을 하는데도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렸지요. 저는 간신히 손을 뻗어 나무 줄기를 붙잡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만 쉬었다 가도록 하자.”
“하아..... 고마워요.”
저는 자리에 주저앉아 완전히 퍼져버렸고, 로키군은 제 옆에 앉아서 신발을 벗어 자신의 발 상태를 확인했습니다. 저도 어느정도 숨을 고른 뒤에 신발을 벗어보았습니다.
“아야!”
“발이 온통 물집 투성인데? 내가 발을 끌고 다니는 식으로 걷지 말랬잖아.”
“그러기가 쉽나요. 온몸이 천근만근인걸요.”
“일단 발 이리 내봐. 치유하기 전에 물집부터 빼야 되겠어.”
로키군은 제 발을 억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뒤에, 건빵주머니에서 간이 반짇고리를 꺼냈습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크기의 바늘이 들어있었지요.
“으으...... 아픈거 아니죠?”
“니가 발버둥만 안치면 이게 니 발을 찌르는 일은 없을 거다.”
그는 바늘 하나를 꺼내, 그 끝을 자신의 코에 대고 김을 불어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소독을 하기 위한 것 같은데..... 그냥 불에 지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무서우면 눈 감아. 괜히 눈뜨고 보다가 움찔하면 진짜로 니 발에 피어싱을 해버릴 지도 모르니까.”
“으으......아야! 아파요!”
“아직 찌르지도 않았어.”
그의 지적에 엄청나게 부끄러워져서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세상에 제가 이렇게 엄살이 심한 사람인줄은 전혀 몰랐어요. 새삼 이스트민스터에 적을 둘 적에 빈민들을 위해 의료 사역을 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개중에는 육신의 굶주림 뿐 만 아니라, 마음의 허기에 허덕거리는 이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저희가 손만 대도 새된 비명을 질러대며 아프다고 죽는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는 그이의 아픈 데를 되려 꾹꾹 눌러가며 ‘엄살 좀 그만 피워요.’라며 퉁박을 놓곤 했습니다. 우리들 사이에선 ‘관종’이라고 소리죽여 비아냥 거렸는데......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분에게 잘 해줄걸 그랬습니다.
“다 됐어. 이제 너 알아서 치유를 하면 될 것 같아.”
“벌써요?”
“그럼, 이런 것 쯤이야 껌이지.”
저는 그가 더 비아냥거리기 전에 후다닥 발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최대한 빠르게 읊었고, 말끔하게 치유된 발을 얼른 양말 속에 우겨넣었습니다. 제가 발을 치유할 동안, 로키군은 어디서 캐왔는지 칡뿌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건 물이 많은 녀석이니 씹다보면 갈증도 많이 없어질거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발이 많이 부었던데, 다음에는 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바로 말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나도 그걸 깜빡한 것 같군.”
저와 로키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저 걸음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건넨 칡뿌리는 간간이 흙맛이 나서 그렇지 꽤나 먹을 만 했습니다.
“그나저나 나타날 때가 됐는데도 아직도 보이질 않네요.”
“아마 우릴 지켜보고 있을거다. 우리가 탈이 없는 먹잇감인지 확신이 설 때 까지 지켜보자는 거겠지.”
“빨리 덮쳐줬으면 좋겠네요. 이 무거운 걸 언제까지 들고 다닐 수도 없구.”
저희는 지금 행상의 행색을 하고 이곳 지리산을 걷고 있습니다. 관리분들의 말이 맞다면, 그들은 산을 다니는 상인들을 털고 다닌다니, 우리가 이렇게 행상 행세를 하고 다닌다면 그쪽에서 알아서 우릴 만나러 올 거라는 생각에서였지요. 하지만 꽤나 오랜 시간동안 긴 거리를 누비고 다녔지만, 그들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어요. 이거 참..... 이렇게 값 비싸보이는 물건을 이렇게 허술한 인력으로 나르고 있는데 왜 그들은 이런 맛있는 먹잇감을 건드리지 않는 걸까요.
“나무는 군데군데 잘 꺾고 있지?”
“그럼요. 로키군도 그렇게 하고 있죠?”
산의 해는 일찍 진다는 이야기가 있어, 긴 시간을 오랫동안 산에서 마냥 보낼 수도 없는 지라(사람들 말로는 이곳에 호랑이가 산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름의 머리를 굴렸습니다. 일정 거리마다 산의 나뭇가지를 꺾는거에요. 비록 길을 헷갈려서 잃어버릴 지라도, 되짚어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죠. 물론 나무에 물이 한창 차오를 5월이라 가지를 꺾는데는 꽤나 많은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낯선 지역의 산속에서 길을 잃는 것 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에, 저희는 불평불만 하나 없이 열심히 나뭇가지를 꺾어댔습니다.
“어이! 이봐요 거기 스톱!”
익숙한 중앙어 억양이 들려 그쪽을 보니, 군인 두 명이 저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근방을 순찰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들을 무시했다가는 공연한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희는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아 예. 엘타닌 쪽으로 물건을 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여긴 군사 작전 지역입니다. 당분간 이곳으로 출입하는 걸 금지한다고 분명 공문이 게시가 되었을 텐데요?”
“예, 저희는 라스알게티에서 라스알하게로 온지 얼마 되질 않아서, 그쪽의 문자에 대해서는 영판 까막눈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라스알게티에서 오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저도 라스알게티 출신이거든요. 이곳에서 고향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군인은 저희의 말투를 들으며 반가웠는지 반색을 하며 저희에게 악수를 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