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1624년 5월 26일
나와 답답이, 그리고 임꺽정과 이봉학은 무릉에서 가지고 온 짐을 가지고 지금 라스알하르게타 성문 앞에 서 있다. 성문 앞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우리가 처음 올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경비가 제법 삼엄해졌네요?”
“아무래두....... 민심이 제법 흉흉허지 않겄슈? 동니 애덜이 갑자기 어디서 배웠는지두 모를 노래를 불러 대는디.”
임꺽정은 앞에 놓여진 팻말에 붙은 전단지를 보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전단지에는 라스알하게의 언어로 무어라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대부분은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녀석에게 배운 단어들 몇 개를 조합해서 유추를 해보자면......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호패......? 아이구 이걸 워쪄유? 지가 장 슨다구 급하게 오다가 보니께 깜빡허구 집에다가 둬버리고 왔는디...... 한번만 봐주믄 안 되유?”
“총독님 명령이라 안 되유. 얼렁 집 가서 가지고 오셔유.”
“아니, 나가 집이서 여꺼정 오는디 반나절이 걸렸는디...... 워쩐다구 거까지 다시 갔다와유?”
우리 앞에 서 있던 노인은 호패라고 불리는 신분증의 문제로 경비와 실랑이를 벌였다. 노인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 하며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통사정도 해봤지만 경비원에게는 문자 그대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그 모든 시도 끝에 결국 노인은 풀이 죽은 채로 뒤돌아 서야했다. 흠...... 노래의 형식으로 유언비어가 돌다보니 이쪽에서도 꽤나 민감해진 모양이다.
“이거...... 우덜두 통과 못허는 거 아녀?”
“됐어...... 이런 잡동사니를 가지고 오는 마당인데 신경이나 쓰겠냐?”
“다음 분 오셔유.”
앞서의 노인이 당한 취급을 보고 겁을 먹었는지 이봉학이 우는 소리를 해댔지만, 나는 그런건 싹 무시하기로 하고 경비 앞으로 갔다. 그는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고, 나는 알키바에서 지급받은 가짜 신분증을 내보였다.
“잉...... 성함이 쬐깐 어렵네유. 산......냐신씨?”
“예. 제가 프로하기온 출신이라. 조금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이잉..... 아녀유. 긍께..... 여그로 오신 이유가......”
“자원 재활용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여긴 제 와이프고, 이 둘은 현지 노동자입니다. 지인하나 없는 이곳에선 이 둘이 없었다면 일이 꽤나 곤란했겠지요.”
나는 답답이와 청석골 일행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병사에게 나름 사교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잉..... 고물상이시구. 물건 좀 봐두 되유?”
“원하는 대로 보시죠.”
나는 병사를 데려다가 수레에 덮여있는 거적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보여주었다. 병사는 거적에 가려져있던 잡동사니를 보고 ‘이걸 어쩐다......?’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그래도 일은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잡동사니에 대해 물으며 하나하나 꼼꼼하게 장부에 기록을 했다. 물론 그 딴에는 ‘에휴, 이게 뭐라고 이렇게 꼼꼼이 적어야 하냐.’라는 기색이 역력해보였지만, 답답이와 청석골 식구들은 마치 점호시간에 청소검사를 받는 병사들 마냥 표정이 잔뜩 굳어져있었다. 답답이야 원체 그런 종류의 사람이니 그러려니 해도...... 저 둘은 예전에 라스알하게 전역을 시끄럽게 만들었다는 나름 큰 도적이었다는데도 저렇게 잔뜩 굳어있는걸 보니, 소문이란 것은 현실을 얼마나 과장되게 포장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렇게 담이 작은 위인들이 대체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뭐..... 알겄슈. 이제 들어가보셔유.”
병사는 우리에게 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지시를 했고, 그렇게 우리는 검문을 통과 했다. 시종일관 아무런 말도 못하던 임꺽정은 성문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씨벌...... 오줌 지리는 줄 알았네.”
“대체 청석골의 두령자리는 무슨 기준으로 뽑는지 의문이야. 간이 작은 순으로 뽑는건가?”
“암만혀두..... 그런 직종에 종사하다 보믄 육모 뱅맹이 든 넘덜이랑은 안 친하게 지내는 게 맞지.”
“그걸 변명이라 하는거냐?”
“뭐 각설허구. 어찌 어찌 성문 안으로 들어왔구먼...... 이제 아까츰에 말 헌대루 하믄 되는건가?”
“응. 지금 시간이 11시고, 공격은 3시간 뒤에 시작한다고 하니 얼른 시키는 일 하고 성 밖으로 나가면 된다.”
“근디...... 우덜이 하는게 꼴랑 그게 다여?”
“.......”
안심이 되고나서야 뒤늦게 본전생각이 났는지, 이봉학이나 임꺽정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더 할 일이 없냐는 투로 물어댔다. 경비 앞에서 오줌을 지릴 뻔한 그 한심한 작태에 대해서 날카롭게 파고들어가 볼까 했지만...... 그런 말을 해 보았자, 녀석들의 기분만 더러워질 뿐, 실효적인 이익이 없을 거란 생각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대신에 녀석들과 작전에 나서면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겠군.
“어차피 이 작전의 핵심은 이 녀석과 나야. 니들은 그냥 니들이 할 수 있는 일만 해주면 되. 그것만 해도 작전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
“쩝...... 알갔슈.”
임꺽정과 이봉학은 수레에서 페인트통과 아이스박스를 꺼내 황룡사방향으로 사라졌고, 이젠 나와 답답이만 남았다. 답답이는 수레의 물건을 보며 알 수 없는 노릇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체 이걸로 뭘 어쩌려고 하는거에요?”
“지켜보면 곧 알게 될 거야.”
Channel 2. 아이리스
고물상으로 분장한 우리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로키군은 검은색 엿가위를 쩔그럭 거리며 ‘고물 삽니다.’라고 외쳤고, 저는 엿판을 이면서 그를 따라갔습니다. 인가에서는 몇몇 개구쟁이들이 몰려와 집안에 있던 놋쇠그릇이며, 짚신을 가지고 나왔고 우리는 고물을 엿으로 바꿔주면서 길을 쏘다녔어요. 언 듯 본다면 고물상이 동네를 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가위질 소리와 함께 서서히 라스알하르게타의 내성으로 다가갔어요.
“처음에 왔을 때 보다 사람들이 더 많네요?”
“아무래도 소개령이 내려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라스알하르게타에는 저희가 처음 올 때 보다 더 많은 인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리 밑에는 천막으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임시 거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로키군의 지적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 곧 닥칠 전란을 피하기 위해 인근 촌락에서 온 피난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면 우리가 활동하기 불편할 것 같은데......”
“물리적으론 그럴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론 더 편할 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혼란에 빠진다면 우리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테니까.”
우리가 엿을 파는 동안, 장난꾸러기가 아닌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엿 하나만 줘.’라고 보채댔고,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에게 엿을 하나씩 사갔습니다. 우리는 그냥 엿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어머니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이들에게 우리가 퍼뜨린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지요.
이들은 터지기 직전의 풍선과 같아보였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그들의 이성은 가느다란 끈과 같아보였어요. 아주 조그마한 변화, 아주 조그마한 사건에도 그들은 언제라도 놀랄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거 보아하니 외국분들 겉은디...... 여긴 워쩐다구 왔대유? 여그에 혁명군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이 파다헌디.....”
“뭐, 전쟁이 나기야 하겠어요?”
“안 나긴 뭘 안나? 야그 못들었슈? 엇 저녁에...... 황룡사 불상이 피눈물을 흘린다구 허드만......”
“불상에서 피눈물이요?”
“잉...... 황룡사 불상에서 피눈물이 나구, 청계천이 뻘겋게 물들어 버리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당께유.”
“허허 참. 별 일이 다 있네요. 불상에서 피눈물이 난다니.”
“아무튼간에 말여...... 처자나 총각이나 여그는 얼렁 뜨는게 질이유. 머뭇머뭇 거리다가는 여서 탈출도 못허구...... 고대로 독박 쓸지도 몰러.”
우리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그것도 모르냐’라는 투로 말하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다가......꾹 참았습니다. 하 참...... 이 어머니에게 ‘우리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요? 그건 우리가 낸 소문이라구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한 달 가까이 공을 들여온 일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걸요. 그리고 무엇보다...... 로키군이 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것도 한몫 했지만 말이에요.
“뎅! 뎅! 뎅!”
멀리서 묵직한 종소리가 들려왔고, 아주머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조사한 바에 따른다면, 저 종소리는 ‘경종’이라고 시에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울리는 것이라고 해요. 예를 들자면 신임 총독이 오거나, 중대한 사람이 이곳을 방문 했을 때, 그리고......
“워매매...... 기어코 일이 나는가 보구마잉. 아야 칠성아 얼른 들어가자잉. 지금 뭔 일이 났나 보구만.”
아주머니는 엿을 빨아먹고 있는 당신의 아이를 보듬어 허둥지둥 천막으로 달음박질을 쳤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공세가 시작된 모양이에요.
“가자.”
우리는 진동한동 내달리는 피난민들 사이로 수레를 끌고 지나갔습니다. 몇몇 성질 급한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고, 그걸 가지고 싸우는 등 슬슬 혼란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이곳저곳에서 의미 없는 주먹다짐이 나오고, 그러다가 사람들 몇이 이 수레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습니다. 로키군의 말대로, 물리적으로는 힘들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운신의 폭이 더 커진 셈이지요.
“피난민들은 얼렁 정해진 쉘터로 들어오셔유. 녹림당 넘덜이 이곳을 공격허기 시작혔다고 혀유!”
관리로 보이는 이가 다리 밑으로 와서 피난민들에게 소개령을 포고했고, 피난민들에게 쉘터로 안내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따라 가다가...... 관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슬쩍 골목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때가 된 거에요.
Channel 1. 로키
라스알하게의 민족은 스스로를 가리켜 삼민이라고 부른다. 창을 주로 사용하는 한족, 칼을 주로 사용하는 왜족,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활을 주로 사용하는 웅족이 각자의 생활영역에서 서로 다른 역사를 만들어왔거든. 라스알하게가 라스알게티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에는 이들은 스스로를 같은 민족으로 여겨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스알게티의 지배자들은 그런 사정따윈 고려할 리가 없었고, 그들을 ‘라스알하게’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버렸지. 그들이 스스로를 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대한 반발이자, 스스로의 민족성을 지키려는 반작용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대외적으론 라스알하게인이라고 부르는 이들 중에서, 대외적인 이미지에 가장 잘 부합하는 민족은 수가 가장 적은 웅족이었다. 그들이 활을 다루는 솜씨는 검과 갑주가 지배하는 대륙에선 상당히 이채적이었거든. 멀리서 상대가 다가오기 전에 목숨을 끊어버리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이겠는가.
그런데..... 뜬금없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으윽.....! 팔이..... 떨어질 거 같아요. 로키군!”
“떨어질 것 같아도 안 떨어지는 게 사람 팔뚝이야. 대신에 지금 팔을 내리는 순간 네 머리에 바람구멍이 뚫릴 거다. 무조건 버텨!”
우리 둘은 조잡한 나무판자를 방패삼아, 하늘 위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화살의 비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거든. 어찌나 그 수가 많던지, 화살이 하늘 위로 떠오를 때는, 그것들이 해를 가려 잠시나마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정도였다.
“한 번 더 쏟아진다. 꽉 잡아!”
“으......으윽!”
화살비가 다시 한 번 우수수 쏟아졌고, 답답이는 판자에 박히는 화살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었는지 무릎이 푹하고 꺾였다. 나는 팔에 구멍이 날 각오를 하고 녀석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다행이 내 팔에는 바람구멍이 나지 않았고, 녀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내게 기댔다.
“이쯤 되면...... 우리가 굳이 나설 것도 없는 거 아니에요?”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계속해서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쏟아내는걸 방관만 하고 있다가는, 네가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벌어질게 분명하지 않겠냐?”
“그건...... 알았어요. 얼른 가보죠.”
우리는 허접한 나무판자를 앞세워 대중없이 쏟아지는 화살비를 뚫고 내달렸다. 나만해도 어께가 욱씬거리는 판국인데, 녀석은 오죽할까 싶었다.
“이거 좀 뜬금없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럼 하지 마요!”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선 안 되는 것 세 가지가 뭐뭐뭐 인 것 같냐?”
“내 말 듣기는 한 거에요? 으아아!”
한 차례 화살비가 쏟아졌고, 나와 답답이는 무릎을 꿇어가며 화살비를 막아냈다. 답답이의 나무판자는 어찌나 촘촘하게 화살이 꽂혔는지, 더 이상 꽂힐 곳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분전환 삼는다고 치고 생각 해봐.”
“음...... 믿음, 소망, 사랑?”
“....... 뭔 놈의 생각이 이렇게 두서가 없냐?”
우리 둘은 화살비가 드문드문해진 사이에 건물의 처마 밑으로 숨어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나무판자에 박힌 화살들을 떼어냈다. 떼어내는 건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화살 하나하나의 무게는 그닥 크지 않았지만, 그것이 모이다보니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었거든,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나무조각을 들어 올리는 데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화살을 다 떼고 나니 깃털을 든 것처럼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의식주잖아.”
“...... 그건 나도 알고 있었어요.”
“뭐...... 그래 백보 양보해서 알고 있다고 하자고.”
Channel 2. 아이리스
“라스알게티 표준 군수품 관리규정에 따라서 라스알게티 군은 자신들의 군수품을 10종으로 분류를 해서 보관을 하고있어. 우리는 그중에 3개를 무력화 시킬 거다. 단 한방에 말이지.”
“그거면...... 저쪽에서 전의를 상실하기는 충분할 것 같네요...... 그런데...... 저 잡동사니들로요?”
“이게 뭐 어때서?”
로키군은 ‘정말 왜 이런 쓸모없는 질문을 하는 거지?’라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저는 그의 표정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괴감을 느낄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상당히 상식에 가깝다는 생각을 해요. 그가 자신 있게 꺼내든 것은...... 저질 휘발유와 벤젠이 든 통, 그리고 스티로폴이 들어있는 마대자루였거든요. 그런 잡동사니들로 군대를 무력화 시킨다고 말한다면 그걸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허언증 도졌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에 가깝지 않을까요?
“남의 집 선산에 굴러다니는 모난 돌이 어쩌면 우리 집에 있는 옥돌을 가는데 쓰일 수 있는 거 아니야?”
“모난 돌도 모난 돌 나름이 아닐까요?”
제 지적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공병을 꺼내, 휘발유와 벤젠, 그리고 스티로폴을 그 안에 일정비율로 집어넣고 섞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병의 주둥이에 휴지를 집어넣어 심지를 만들었지요.
“이걸로 뭘 하려는 거에요?”
“보면 알게 될 걸? 그리고...... 일단 한번 보여줬으니, 시간을 절약하려면 너도 얼른 만드는 걸 돕는 게 좋을 거다.”
“뭐..... 알았어요.”
저는 상당히 지독한 장난에 놀아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로키군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해서 더는 지적을 하지 않고 그가 하는 대로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간신히 서 있기도 벅찬 처마 밑에서 만든 것 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 만들어졌어요.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이걸 저기 앞까지 가져가자고. 방패 꽉 잡아. 이젠 니가 나를 엄호해야 돼.”
로키군은 턱으로 철조망을 가리켰습니다. 화살비를 피하느라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는 제8군단의 사령부에 가까이 와 있었습니다. 건물의 모양을 보니...... 창고인 것 같아요. 로키군은 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심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첫 번째 병에 불을 붙이고, 그걸로 두 번째 병에...... 제가 화살을 막는 동안, 그는 모든 병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이 상황에서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병에 불을 붙이고 난 뒤에 로키군은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달리기 잘해?”
“라스알게티 때 기억 안나요?”
“음...... 그때 잘 뛰었나? 좋아 뭐...... 잘 뛴다고 치자고. 그러면, 달리면서 기도를 해본 적은?”
“그걸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로키군은 제 말에 고개를 몇 차례 주억거리다가...... 무슨 생각인지, 별안간 우리가 만들었던 병을 창고로 집어던졌습니다.
“이젠 해야 할 걸?”
Channel 1. 로키
기세 좋게 병을 집어던지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집어던지는 이 와중에도, 일이 생각처럼 되어줄 지는 반신반의했던 것 같다. 병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타자에게 전달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면, 녀석은 아마 내게......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거지?’라고 물었을 지도 모르겠다.
“히익!”
“음...... 생각했던 것 보다 잘 타는데?”
창고에 떨어진 병은 그 작은 크기에 어울리지 않는 강한 화염을 만들어냈거든. 이만하면 성공인 것 같다. 나는 처음의 성공에 용기를 얻어, 내 발아래에 타고 있는 나머지 병들을 긁어모아 군수품 창고 이곳저곳에 던져 넣었다. 선두의 뒤를 따르는 후발주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큰 불을 만들어냈다.
“이..... 이렇게 던지면 되는거에요?”
“뭐...... 맞긴 한데, 떨어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아. 불이 너한테 옮겨 붙으면 우리 모두가 크게 곤란해질 거거든.”
답답이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병을 던졌고, 병이 깨지면서 화염이 터져나오자 기겁을 했지만...... 역시 사람은 적응에 동물이라고 하던가? 몇 차례 병을 집어던지고 나서 녀석은 이것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병이 만들어내는 화염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것 같았다. 섯부른 판단이 아니냐고? 글쎄.....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병을 던지는 녀석의 얼굴은 성취감으로 제법 상기되어 있었거든.
“와!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요.”
“네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오래 타는데요? 도저히 불이 붙을 것 같지 않은 벽에 붙어서도 잘만 타고......”
“그것만이 다가 아니야.”
“네? 또 다른 면이 있어요?”
“곧 알게 될 거다.”
모든 병을 창고로 집어던진 뒤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불이야!!!”
지금, 이곳에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불이야’라고 소리를 지른 뒤에, 녀석과 함께 몸을 숨겼다.
“응? 불을 내놓고 왜 그걸 알려주는 거에요?”
“판에게 제물을 바친 거라고 하자.”
“.......판이요?”
“응. 설마 판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모를리가요. 옛 이교도의 신중에 하나잖아요. 반인반수의 몸을 가진.......”
“잘 아네. 녀석은 군중의 신이야. 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모습을 본 다른 신들이 너는 인간과 짐승의 모습을 ‘모두’가지고 있구나. 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된 거라고도 하더군. 그리고 내가 판을 언급 한 이유는 군중의 신으로서의 면 뿐만이 아니야...... 군중의 지성은, 그것을 이루는 개인의 지성에 한참 뒤떨어지기 때문에......”
“으아악!! 이게 뭐야! 불이야!!”
내가 소리를 지른 덕분에, 병사들 몇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화염에 휩싸인 창고를 보고는 문자 그대로 패닉에 빠져들었다. 판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제물에게 털이 수북한 손을 네민 것이다.
“이제 출구 없는 혼돈이 저들의 머릿속을 지배할거다.”
“......?”
답답이는 나의 비유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굳이 녀석에게 부가적인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귀찮아서 그렇다기 보다는.......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해보라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군인들은 평소에 훈련받은 대로, 찰랑거리도록 물을 가득 받은 양동이를 받아와서는 타오르는 불길에 냅다 뿌려댔다. 그래...... 내가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불을 진압할 때는 물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녀석들이 상대해야 하는 불은...... 물로 대응해서는 결코 해결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거든....... 역시나 불길은 물을 만나자, 기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맹렬히 불타오르며 자신을 덮었던 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히익! 이게 뭐야? 왜 안 꺼지는 거야?”
“아악! 불이! 불! 왜...... 왜...... 으아악!”
선두쪽에서 물을 뿌리던 이에게 불이 붙은 물이 튀었다. 그의 몸은 빠르게 타들어갔고, 그는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동료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물을 끼얹었지만...... 오히려 불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 동료들의 몸에 찰싹 달라 붙어버렸다.
“으아악!! 이거 왜이래!!”
불은 순식간에 여러 군인들의 몸을 살라먹기 시작했고, 대다수의 희생자들은 자신들을 집어삼킨 불에 굴복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그중에도 예외는 있게 마련이었다. 동료들보다 기운이 센 몇몇 병사들은 자신의 몸에 붙은 불에 저항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몇몇은 혼란에 빠져 불이 붙은 채로 진동한동 내달렸다. 그중에 한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3종창고로 뛰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서 도망쳐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뛰어!”
나는 답답이의 손을 잡아채, 창고의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이번엔 답답이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열심히 나의 뒤를 따랐다. 이거...... 약간 곤란해 졌는걸? 답답이 뿐만 아니라, 나도 불구경에 심취하느라 대피할 타이밍이 조금 늦어버린 것이다. 우리도 저 운이 없는 무리에 휘말리면 큰일일 텐데......
“쾅!”
지축을 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고, 뒤이어 엄청나게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끼쳐왔다. 우리는 쾅 터지는 소리에 움찔해서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 뒤를 따르는 바람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우리 둘은 바람에 날려 쳐 박히듯 넘어졌지만,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재빠르게 일어났다.
“괜찮냐?”
“주는 나의 목.......으아악! 자시니내게부족함이없으리로다. 나를쉴만한물가로데려가시고푸른초장으로.....으으..... 살려줘요!”
답답이는 혀에 쥐가 날 정도로 빠르게 기도문을 읊는 것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내 몸에 허파에 공기가 불규칙적으로 들고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걸 웃음이라고 하던가? 아무리 급박한 상황일지언정 이런 반응이 나올 법한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달리면서 기도문을 읊는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해내고 있지 않은가.
“좋아. 잘 하고 있어. 그대로 쭉 달리자고.”
우리는 사력을 다해 그곳에서 탈출을 했고, 우리의 등 뒤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음이 들려왔다. 폭발의 여파로 뜨거운 바람이 우리의 뒤에서 온몸을 쓸어내렸지만, 우리는 멈추기는커녕 뒤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뒤를 돌아볼 시간에 한걸음이라도 더 떼는 것이 우리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조심해요!”
하지만...... 뛰어보았자 벼룩이고, 날아보았자 파리이던가. 사령부 내의 거의 모든 창고를 초토화 시키는 거대한 폭발은 우리의 발보다 훨씬 더 빨랐고, 바람을 따라 날아오는 쇄설물들이 우리의 등을 두드려댔다. 대다수의 것은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지만...... 몇몇은 그게 아니었던게 문제였지.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답답이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답답이가...... 나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야! 뭐 하는거...... 으악!”
우리 둘은 서로의 몸에 엉켜버린 채로 폭발에 휩쓸려 그대로 쓰레기 더미로 쳐 박혀버렸다. 으윽...... 온몸이 멍석말이를 당한 것 마냥 지독하게 욱씬거렸다. 이 녀석...... 무슨 이유로 달리다 말고 나를 덮친 거지?
“크윽.....아파.....”
“괜찮냐?”
“그걸 말이라고 해요? 엄마? 이게 뭐야! 으아...... 나죽네......”
답답이의 팔에는 구불거리는 쇳덩이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대관절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니...... 이런 제기랄 철조망의 파편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창고가 성대하게 터지면서 철조망까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그 잔재물이 녀석을 덮쳐버린 것이 분명했다.
“로키군......나..... 너무 아파요......”
“흐음...... 차라리 나한테 박혔으면 일이 더 수월했을 텐데......”
일단 어느 정도 폭발에서 멀어지기도 했겠다. 나는 답답이를 안전한 골목으로 끌고 갔다. 녀석의 상처를 살펴보니...... 녀석의 기준으로는 환부가 제법 심각한 편이었다. 다른 요원들이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바로 뽑아버리겠지만...... 극한의 상황에 놓여본 적이 없는 이 여자에게는...... 철조각을 뽑아버리는 순간 정신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다. 상황에 따라 생사의 여부가 갈리는 이 판국에 녀석이 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생존 가능성은 0에 수렴하게 될 것이다.
“일단...... 상황이 상황이니. 미안하게 됐다.”
“응? 뭐라고요?”
나는 답답이의 목에 고농도의 해시시를 주사했다. 경동맥의 빠른 혈류에 해시시가 섞여 들어가면서, 녀석의 얼굴은 빠르게 평온해졌다. 나는 녀석이 해시시에 취해 헤롱거리는 동안, 녀석의 팔을 꽉 움켜쥐고, 그것에 박혀있던 쇳조각을 뽑아냈다.
“아악!”
“살고 싶으면, 비명을 지를 시간에 기도문 한 줄이라도 더 읊어.”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의 다소 거친 응급처치가 끝나고, 저는 제 팔을 움켜쥔 채로 기도문을 읊었습니다. 로키군의 말대로라면 해시시에 취해있는 상태라 고통이 덜하다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팔을 차라리 뜯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해시시는 제 몸이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템포를 느리게 만들었지만, 그에대한 반작용으로 저는 제 몸의 혈액이 박동하는 것 까지 느껴질 정도로 민감해 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이 팔에서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아버님이여 의.....의 호.....소를 들어주세요.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를 좀 들어달라고요! 씨팔”
고통과 환각이 뒤섞여 제가 무슨 생각으로 기도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반쯤은 욕설이 섞인 기도문이 제멋대로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지금 제 기분만 따지고 보면 아버님 멱살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지요. 그냥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 입은 ‘아버님’에 대한 찬미가 이어졌지만, 제 머릿속에서는 욕설이 샘처럼 펑펑 쏟아졌습니다.
“나.....나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아버님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내 앞에..... 나를 억업하는 악인들과......흐윽! 내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한테서...... 제발 날 좀 지켜줘요. 제발......”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기도문이 계속되면서, 다행이 제 팔을 실시간으로 난도질하던 고통도 서서히 누그러졌습니다. 제 핏속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해시시의 약기운도 시나브로 사라져갔지요. 저는 조금은 머쓱한 기분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입이 생각보다 걸어?”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뭐 어때? 내가 신이라면 그 편이 더 간절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뭐..... 그건 아버님의 품으로 돌아간 다음에 물어보는걸로 하자고요. 그런데 로키군.”
“응?”
“대체 뭘 만든거에요?”
“......네이팜.”
저는 그의 짤막한 대답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걸 만들었다고요? 그건...... 사다크비아와 3번째 전쟁 이후로, 적어도 민간인에게는 사용하지 않기로 조약을 맺을 정도로 잔인한 무기입니다. 오죽하면 그걸 만든 사람마저도 ‘이건 인류가 만든 무기 중에 단언컨대 최악일 것이다.’라고 말 할 정도니까요.
그의 말을 생각해보니 퍼즐이 맞춰지는 게,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린 군인들에게 오히려 불이 옮겨 붙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네이팜은 물로 꺼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었어요. 물과 만나면 더욱 맹렬하게 반응을 하니까요. 불을 끄려면 차라리 흙이나 천으로 덮는 것이 더 나았지요. 하지만 당황한 군인들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불을 끄려고 시도를 했었고...... 그 결과 그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고통 속에서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 모든건...... 로키군이 계획한 대로였겠지요.
네이팜이 무서운 이유는 그 뿐만이 아니에요. 운없게 그것이 몸에 붙는 날이면......
“으아아악!!”
근처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고, 저와 로키군은 부상자일거라는 생각에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으아아!! 뜨거워!! 살려줘요!!”
여자 한 명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오 이런...... 그녀의 팔은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처럼 폭발에 휩쓸린 모양이에요. 저는 운이 좋게도 철조망이 팔에 파고드는 걸로 끝났지만, 그녀는...... 정말 운이 없었어요.
“이거 곤란하게 됬는걸? 네이팜에 당한 모양이다.”
“으아아!!”
“어......어쩌죠? 이건......”
“그래, 물로도 못끄겠지. 물을 뿌렸던 군인이 무슨 꼴이 났는지 너도 봐서 알 거 아냐. 네이팜은 연소재가 모두 타버릴 때 까지 절대 꺼지지 않아.”
“.......”
“일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자고. 저 팔에 닿지않게 꽉 잡아.”
“으아아아!!”
말은 쉬웠지만, 행동으로 옮기는건 참 어려웠습니다. 고통에 이성을 잃어버린 그녀는 타들어가는 자신의 팔을 정신없이 휘둘러댔고, 저희는 그녀의 팔을 피해 가면서 그녀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습니다.
“어떻게 할거에요?”
“별 수 없지.......”
로키군은 그녀의 목에 해시시를 주사했고, 그녀가 약기운에 축 늘어진 사이에, 그녀의 어께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칼을 꺼냈습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아도 좋다.”
“......”
로키군은 칼로 그녀의 어께 아래를 잘라버렸습니다만...... 저는 눈을 감지 않고 그 모든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눈을 감아버리면 이 참상을...... 그와 저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