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1. 로키
얼떨결에 내지른...... 일종의 애드립 이었겠지만, 주설의 말은 꽤나 대단한 파급을 몰고 와서, 노파는 괜찮다는 우리를 끌다시피 하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민티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에게 ‘너는 얼른 집 좀 정리해라.’라고 일갈하고는, 그녀는 서둘러 부엌에 들어가 한상 거하게 차려나왔다. 허리가 하도 굽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울 것 같은 노인에게 아들의 소식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것이다.
“어따가 취직혔는지 아시는거 같은디, 소상히 좀 야그혀 주시오.”
“어...... 그러니께.......”
주설은 애드립이 다 떨어졌는지 난감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지만, 나라고 딱히 녀석을 구해줄 튜브를 가지고 있는건 아니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쳐했을 때, 적절한 처세술은 잘 알고 있지. ‘현자의 머리는 세상을 담고 있지만, 겉모습은 어리석은 바보와 같다.’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나는 최대한 바보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무역회사에요. 도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영업직이죠.”
“영업직이여라?”
“잉 그렇쥬. 근자에 라스알하게 가가꼬 비단을...... 아시쥬?”
내가 바보스러운 표정을 짓는 동안, 답답이가 기가막힌 타이밍에 토스를 넣었다. 땅바닥에 쳐박힐 뻔한 우리의 연극은 녀석의 팔목을 맞고 공중으로 떠올랐고, 주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여자를 홀렸다. ‘비단’이라는 마법의 단어는 그녀들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오매, 느그 오래비가 단단이 출세혔는갑다. 시상에...... 울 아덜이 비단을 취급한단 말여?”
“예 그렇게 됐습니다. 워낙 책임감 있다보니, 고객님들도 리겔만 찾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마냥 바보 같은 표정만 짓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나도 거짓말에 거짓말을 하나 더 보탰다. 두 모녀, 특히 어머니 쪽에서는 ‘고객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묵직함에 현기증을 느꼈는지 무너지려는 머리를 가느다란 두 손으로 간신히 지탱했다. 딸은 어머니의 어께를 꽉 움켜쥐었다.
“아고고..... 어지럽소. 밖에 나가설랑 뻔질나게 사고만 치던 넘이 갑자기 베락 출세라니.......”
“그건 지두 마찬가지여라. 솔직히 말혀서, 지는 그 말들을 죄다 믿기는 힘들겄소.”
모친의 어께를 움켜쥔 딸의 눈은 모친의 그것과는 달리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로 우리의 말이 믿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네놈들 머리통 속을 꿰뚫어보고 있다.’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까놓고 말혀서, 울 오래비는 오래비라는 말도 갔다가 붙이기 아까운 사람이유. 나쁜 넘덜허구 어울려 댕기믄서 사고치구 댕기구, 넘덜 헌티 욕먹구 댕기는게 일상이제. 두 달 전인가? 어데서 쌈박질 허구 왔는지 얼굴이 곤죽이 되가지구 와설랑 즈그 식구 치료비 내노라고 집안 뒤집어 놓구 가버렸당께요. 아니 식구는 우린디 뭔 식구가 또 있다구 식구 치료비를 달라는 거여.”
“.......그건.”
“그런 인간이 갑자기 개과천선을 혀서 무역회사에 취직한다고? 차라리 여그가 초원이 된다 허는 게 더 믿을 만 허것소.”
“아따 니넌 잘 되가는 야그에 초를 치고 지랄이여 이 가시내야.”
“나가 뭘? 엄마두 웃기네잉. 내가 틀린 말 혔소? 오빠가 얼마 전에 집 엎어 논 건 기억도 안 나고?”
두 사람의 말다툼이 격화되기 전에, 주설은 모녀에게 돈다발을 쥐어주었다.
“실은 요것이 이번 달 뽀나슨디, 리겔이 월급 받구 좋다구 휭 가는 통에 주질 미처 못했어유. 사장님이 우덜헌티 가족헌티 드리라구 혀서 이렇게 챙겨왔어유.”
두 모녀는 자신들 앞에 놓여진 돈다발을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모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일단 모친 쪽은 확실히 우리 쪽으로 넘어온 듯 했다. 문제라면....... 저 동생 쪽이겠군.
Channel 2. 아이리스
주설씨의 뇌물작전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어서, 리겔의 어머니로부터 대접을 받고 문지방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절반의 실패가 우리 앞에 남아 있었지요.
“돈으로 울 엄니를 뭔 생각으로 구워 삶을라는 지는 정확히는 모르겄는디, 대충 짐작은 허고 있으니, 허튼 생각은 마시오.”
“짐작이라...... 의견 한 번 들어봐도 되겄슈?”
주설씨의 물음에 리겔의 동생은 우리를 세모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전번 참에 온 넘덜이랑은 쪼깐 다르구마잉. 그넘덜은 이쯤 되야서는 본색을 드러내든디.”
“전번 참에 온......? 누굴 말하는 겨?”
“아따 고것을 내입으로 말하게 혀야 쓰겄소? 전번에 와가지고 넘덜 앞에서 노조 욕하는 말 혀라고 하지 않았소.”
“노......조?”
우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는지, 그녀는 가슴을 탕탕 치면서 답답해 했습니다. 그녀의 눈은 처음 우리를 보았을 때 가득찼던 의심과 경계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에 증오심을 채워넣고 있었어요. 그 기세가 얼마나 매서웠는지, 저는 물론이고 로키군 조차도 입을 함부로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노조’라는 두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분명해 보였지요.
“뭔가 오해가 있는거 같은디. 우덜은 그런 사정 같은 거는 잘 몰르는 입장이유. 그냥 사람이 성실해 보였구, 그려서 어울린게 다여유. 그리구 우리가 소개한 곳에 취직을 혔다......”
“취직은 지미.”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주설씨가 나서서 해명을 해보려 했지만, 짧고 굵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녀 역시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히...... 둘이 남매가 맞긴 한 것 같아요. 오빠와 동생...... 둘은 사정이 전혀 달라보였지만, 그 껍데기속의 본질은...... 더없이 똑같았어요.
“친구라면 한번 물어나 봅시다. 지금 울 오래비 어디있소?”
“어...... 그건.”
“거봐 구라를 치려면 지대로 치기나 하든가.”
“......”
“일단 울 엄니랑 달리 나넌 댁덜을 믿을 생각이 솜털 맨치도 없지마는, 정 울 오래비랑 아는 사이라믄 말이나 하나 전해줘 보쇼.”
“어...... 그래 한 번 말해 보세요.”
“낼이 울 아부지 기일이요. 사람 새끼라믄....... 한번은 들리라구 혀요.”
“아버지 기일?”
“오래비랑 친구라믄서 그런것도 모르요? .......허기사 그 넘이 그런걸 입에 올릴 리가 없겄구먼, 올리믄 호로자석이나 다를 바가 웂으니께.”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습니다. 담배곽에서는 피웠다 껐다를 반복했는지 잔뜩 닳아진 꽁초들만 가득했어요. 저는 주머니에서 얼른 담배를 꺼내 그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고맙다고 주억거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어요.
“여허튼 가족사니께, 몰른다구 허믄 굳이 묻지는 않았으면 싶소잉. 시상 사는디 넘덜헌티 말 못할 사연 하나썩은 다덜 가지고 있는거 아니겄는가.”
Channel 1. 로키
1624년 7월 17일
우리는 리겔에게 동생의 전언을 전해주지 않았다. 동생이 표현한 대로 ‘호로 자식’이라면, 우리가 말해보았자 콧방귀도 뀌지 않을 지도 모르고, 반대로 가족사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녀석이라면, 우리의 말을 듣고 탈옥이라도 했다가는 일이 뜻하지 않게 복잡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조금 늦게나마 리겔의 부친의 묘소에 찾아가기로 했다. 뭐...... 나로서는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지만, 답답이는 ‘도의상 그래야 할 것 같다.’라고 주장했고, 주설은 ‘그넘에 대해서 알라믄 작은 단서라두 놓치믄 안 되겄지.’라고 생각했다. 꿍꿍이는 달라도 의견이 합치된 이상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리겔의 부친이 묻혀있는 곳은 수소문을 해보지 않더라도 뻔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어지간하면 고인의 시신을 ‘버기스 서지’에 묻거든, ‘버기스 서지’는 이 도시의 서문을 나가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고원지역이다. 뭐 나름의 특별한 사후 관에 의해서 거기에 묻는 건 아니고, 단지 도시와 적당히 떨어져 있고, 고원지역이라 사막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모래에 파묻혀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는 난감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답답이의 고향인 라스알게티와는 달리, 종교의 영향력이 그리 큰 곳은 아니다. 그래도 생전에 자신을 옥죄었던 고단한 삶의 족쇄에 죽고 난 뒤에는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보편적인 사후관 정도는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버기스 서지 추모공원’이라고 명패를 지나, 우리는 안내센터로 갔다. 우리는 안내원에게 ‘리겔’이 상주로 있는 무덤을 수소문 했고, 안내원은 우리를 추모공원에서도 구석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여그요.”
“잉 고맙네유. 그럼 일 보셔유.”
안내원이 가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무덤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비석은 소박했지만, 최근에 유족의 손을 타서인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문에는 생몰년도 아래 ‘모든 고단한 아버지들을 위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 앞에 포개어진 꽃들을 보면서 어제 망자의 유족들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추모공원 앞에서 산 꽃바구니를 꽃들 옆에 놓아두었다. 답답이는 묘비 앞에 서서 망자에게 비는 기도문을 읊었고, 주설은 향에 불을 붙인 뒤 세 번 원을 그린 뒤에 고개 숙여 묵념을 하는 것으로 나름의 예를 갖추었다. 나는 어떻게 했냐고? 딱히 귀의할 만한 종교도, 그리고 망자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도 없던 나는 꽃바구니를 놓아둔 뒤에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해서 그들이 예를 갖추는 동안 그들이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주변의 무덤을 쓱 훑어보았다. 고원의 꼭대기를 중심으로, 갖가지 무덤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무덤에 놓여진 꽃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고된 노동에 몸이 힘겨워졌는지, 남자는 허리를 뒤로 젖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을 느꼈는지 수거하던 꽃들을 놓아두고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리겔은 안 왔소?”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습니까?”
“알다 뿐이겄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와서 술을 진탕 처묵다 가는디? 가족들 보기 쪽실린다믄서 말여...... 여하간에 해마다 이맘 때 쯤에 아침 댓바람부터 와가꼬 무덤 앞에서 병나발을 부는 넘을 못 알아보는 것이 이상허제.”
노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화환을 챙겼다.
“허는 작태가 망종의 후레자식이여...... 그리고 그 애비는 천하의 호구새끼고.”
“리겔 아버지를 아셔유?”
주설은 예를 갖추다 말고 눈이 번쩍 띄였는지, 노인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리겔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노인은 멋쩍은 표정만 지었다. 이 부분에서는 나와 답답이가 나서서 그의 손에 들린 화환을 챙긴 뒤에 그를 데리고 무덤가 정자로 자리를 옮겼다.
“아따 진즉에 썩어 문드러진 놈을 알아서 뭣허요?”
노인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댔지만, 그의 팔을 꼭 안고 있던 주설이 그의 손아귀에 50파운드 지폐를 쥐어주자, 그의 감정선은 재빠르게 ‘당황’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주설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노인에게 ‘요걸로 손주들 간식 한번 사 믹여아쥬.’라고 속삭였고, 노인은 헛기침을 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50파운드 지폐는 물을 만난 설탕 꼴이 났다.
“어디서 부텀 시작을 혀야 쓸 것인지...... 쪼깐 막막 허네잉.”
자신 없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이내 푸른 산을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리겔의 아버지 ‘베텔기오’는 프로하기온 역사 차적장의 노동자였다고 한다. 자식을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고, 베텔기오도 힘이 장사인 축에 들었다. 거기에 아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른바 ‘의협심’이라는 것 까지 갖춘 이 남자는 자연스럽게 차적장 노동자들을 대변하게 되었다.
베텔기오는 알닐람, 알니탁이라는 쌍둥이 형제들과 친구로 지냈는데, 평생 일만할 줄 알았던 그 친구들이 별안간 대학교라는 곳을 갔다고 했다. 거기에서 인연이 끝날 줄로만 알았는데...... 그 둘은 방학이 되어서는 천연덕스럽게 다시 차적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다만...... 낮에는 일을 한 뒤에, 밤에는 이전엔 절대로 하지 않았던 요상스러운 일을 벌였다. 다름 아닌, 창고에 교실을 연 것이다. 동료 노동자들이 참가하고, 베텔기오에게도 참가할 것을 권하던 터라, 별 생각 없이 참가한 그는 그곳에서 ‘노동법’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 멍충구는 그곳에서 보지 말아야 헐 것을 보고, 듣지 말어야 할 것을 들어브렀제.”
“무슨 말을 들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데요? 법정 노동시간과 최저 임금에 대해서 들은 거 아니에요?”
“잉...... 잘 알고 있구마잉. 그라지, 그 호구헌티는 주 48시간 밖에 일을 안하믄서, 돈은 배로 번다는 것이 사기꾼 사탕발림 겉이 들렸을 것이여. 그려서 뻥치지 말라구 악다구니 치믄서 그 자리를 째브렀소.”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7월 17일
묘지기 할아버지의 회상을 듣다보니, 문득 사건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메이데이였어요. 1556~1597이라는 생몰년도를 봐도 대충 맞아떨어집니다. 완전히 단언 짓는 데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장소, 그리고 묘지기 할아버지의 증언은...... 메이데이를 가리키고 있으니, 이게 마냥 추측이라고 하기에는 명확한 편이겠지요.
교과서에서 배운 메이데이는...... ‘하이마켓’광장에서 경찰과 노동자간의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그걸 추모하기 위해 5월에 기념일을 만들었다 정도였습니다. 저도 시험을 위해서 년도를 외우지 않았다면 그냥 완전히 넘어가버릴 뻔했을 정도니까요.
아는척 한마디 보태고 싶었지만, 사건을 직접 경험한 것으로 보이는 이 노인 앞에서 개념적인 단어를 구사해보았자 번데기 앞에서 미간에 주름잡는 것 밖에 되지 않겠지요. 저는 묘지기가 말하는 것을 더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결국 그넘은 야학을 듣기로 혔제. 뭐...... 노동 운동에 뜻을 두기로 혔다기 보담은, 지 빼구 다덜 들으러 가니께 별수없이 들었던거 같어. 그려두 한지에 먹이 스미듯이 거서 배우면 배울수록 갸는 뭔가 가심팍이 답답해짐을 느꼈지....... 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왜 지가 있는 차적장은 이 모냥 이 따구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혔거든.”
노인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현실과, 그것을 규정하는 법 사이에 괴리에 이상함을 느끼던 남자는, 법을 구름속의 상아탑에서 꺼내 현실에 불러내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에요. 여기엔 그의 알량한 의협심이 크게 작용했겠죠. 저도 그 단체의 이름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로는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스튜핏즈’였어요.
“스튜핏즈라...... 기가 맥히는 이름 아니요? 지 스스로 바보 머저리 병.신새끼임을 자인한거니께. 말이야 맞는 소리지. 병.신 머저리제. 계란으로 바위를 쳐뿌수겠다는 거 아녀? 그리고 그게 말같지도 않은 소리란거를....... 여적지꺼정 몰르고 산거 아녀. 만약 알았다믄...... 정말 뭐라고 말로 하덜 못하겄네.”
“거기서는 무슨 일을 했는데요?”
“말 혔잖어. 계란으로 바위를 뿌수는 일.”
묘지기의 비유적인 표현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해 보자면, 베텔기오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스튜핏즈는 지금의 ‘노동조합’인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바는 ‘하루 열 시간의 노동’, ‘격주 1일의 휴일 보장’, ‘노동자의 건강진단’, ‘비숙련 노동자 수당의 현실화’였다고 해요. 지금도 그렇지만 자그마치 30여 년 전에 그런 주장을 한다는 건...... 간덩이가 어지간히 붓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죠. 그런데 베텔기오라는 사람은 그걸 했다는 거에요. 라스알게티도 아닌 프로하기온에서 말이에요.
“근디 그 바보짓에 동참한 넘 덜이 꽤 많았다는 거이 문제라믄 문제겄제. 지금 생각해 블먼 암만혀두 베텔기오란 이름 때문이 아닌가 싶어. 베텔기오가 나선다니까 다덜 묻어갈라고 한거제. 어쨌거나 세력은 꽤나 커졌고, 기존의 물주조합헌티는 길바닥 짱돌맨치로 짱나는 새끼덜이 된거제. 갸가 사람덜 헌티, 5월 1일 날은 회사에 출근허지 말구, 시리우스서 모이자고 혔제. 거기서 총독헌티 청원을 허자구. 딴 넘도 아니구 베텔기오가 그러자구 허니께 다덜 그렇게 허기로 혔소. 하루하루 그날은 다가오니, 물주조합은 미치는 일인거라. 아예 날 잡구 대놓구 파업을 허겠다고 하는거 아녀? 안되겠다 싶었는지 회유를 해보고 위협도 혀봤지만 1도 안먹혔어라. 그래서 물주조합은 총파업을 하루 앞두고선, 베텔기오를 포함헌 대표덜헌티 최후 협상을 제안했제. 이만치 하믄 성공한거라 생각혔지. 인자까지는 물주조합이 나서서 말허자구 한 적이 없었거든. 스튜핏즈는 의기양양허게 협상장으로 들어갔어라.”
“.......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군요.”
여기서부터는 묘지기의 입을 직접 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는 사무치는 분노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긴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입에서는 욕을 끊임없이 내뱉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차마 그걸 직접 전달할 수는 없어요. 어쨌거나, 제가 묘지기의 설명을 대신 전달하자면, 스튜핏즈가 협상장에 들어간 직후에, 마피아들이 조합원들을 덮쳤다고 해요.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진 테러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합니다. 모두들 흠씬 두들겨 맞았을 뿐 만 아니라, 더러는 맞아죽기도 했대요. 모두들 수뇌부를 찾았지만...... 협상장에 들어간 수뇌부는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겠지요.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는지, 노인은 허허 웃으면서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올렸습니다. 머리칼에 가려진 이마에는...... 깊게 패인 상처가 삐죽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만족할 만한 협상안을 들고 왔겄지만...... 그들을 기다리는건 아까츰에 말혔던 참극이여. 조합원들은 갸들이 지들을 버렸다고 생각혔제. 그려서 수뇌부와 조합원 사이에는 메우기 힘든 골이 생겨버렸어야. 스튜핏즈는 그렇게 해산혀브렀어. 낮도깨비 겉이 말여.”
“....... 안타까운 일이구먼유.”
“거기에, 베텔기오는 신고를 당해브렀어야. 협상장서 물주조합원 덜을 협박혔다는거여. 글씨....... 나야 거기 사정은 잘 몰르겄지마는, 워낙에 쫄보새끼덜이라, 노동자덜이 물 마실라고 물잔 들어올린 거를 갖고 쫄아브렀나 혔제.”
노인은 킬킬거리면서 웃었습니다.
“어쨌거나, 수배자가 되어브렀고...... 수사망은 좁혀지니 뭐 어쩌겄어. 좆된거지.”
“그래서 체포되었나요?”
“아니, 괜히 스튜핏즈겄는가? 그거 혀가지구 호구새끼라고 허겄어? 남자가 칼을 뽑았으믄, 얌이라두 썰어야 한담서, 좆같은 일을 하나 벌려버린거여.”
묘지기의 말에 따르면, 베텔기오는 그날 자수를 하기로 했지만 그 전에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근로기준법전에 휘발유를 붓고, 그걸 불사르기로 한거죠.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베텔기오는 근로기준법전에만 휘발유를 붓는게 아니라, 자신의 몸에도 기름을 부어버렸고, 사람들이 어어어 하는 사이에 몸에 불을 붙여버렸다고 해요.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에는 쉬게 해라.’, ‘노동자들을 더 이상 혹사시키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 그려 딴건 다 인정혀. 그거는 줄창 혀오던 말이었으니께. 근디.....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라.’고? 염병 좆까는 소리허고 있네. 그렇게 지 죽는 거이 아까우면, 그렇게 혀서라도 노동자덜을 한데 모타놓고 시상을 바까놓고 싶으믄, 지가 할 것이지 왜 씨벌 남헌티 떠넘기고 지랄이여? 그렇게 허믄 남덜이 뭣을 알아준다고? 끝까지 호구새끼여 그넘은......”
“......”
“애비는 호구새끼지만, 아덜넘은 호로새끼여. 즈그 애비가 가는 길허고는 정 반대로 간거 아녀? 반골도 그런 반골도 없어야. 온몸의 뼈다구가 죄다 반대로 돋아난건지...... 아무리 목구녕이 포도청이라구 혀도 말여 엉? 사람이믄 할 일 안할 일은 구분을 혀아 할것인디 그넘 새끼는......”
묘지기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려는 찰나에, 그의 가슴팍이 더는 견디질 못하겠는지 묘지기는 고개를 숙이고 토해내듯이 기침을 했습니다. 한참동안 기침을 토해낸 그는 손바닥에 묻은 가래를 툭툭 털고 난 뒤에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아따, 병풍뒤에서 흠향헐 날 만 기다리구 있는 노인장이 간만에 피가 끓어버렸구만. 나가 올만에 신이 나가지구 젊은이들 발목을 존나게 잡아브렀네. 인자 일들 보소.”
화환을 챙겨들고 서서히 멀어지는 노인을 보면서, 주설씨는 혀를 찼습니다. 로키군은 무감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어요.
“아주 멍청한 짓이야.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뭘 바꿔보겠다고 그런 식으로 나대냔 말이다. 평가하자면, 오히려 아비에 비해 아들은 현명한 축인거 같군. 적당히 강한 자에겐 굴복하고, 적당히 약한 놈을 지배하면서 사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자연스럽다고 해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건 그거대로...... 틀린 말은 아니구먼.”
Channel 1. 로키
당초에는 성묘를 마친 뒤에 며칠 말미를 두고 리겔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주설은 묘지기와의 대담 이후에 생각이 달라졌는지 곧바로 수비대 청사로 가자고 말했다. 그녀의 즉흥적인 성향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였다...... 하긴 생각해보니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즉흥적인’이라는 말을 앞서서 해놓고서 그 까닭을 묻다니 말이다. 어쨌거나 주설이 생각을 바꾼 까닭을 묻는 것은, 북쪽으로 부는 바람에게 너는 왜 북쪽으로 부냐고 묻는 거랑 진배없다.
내 포지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대목이다. 나는 바람의 일부인 걸까, 아니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과 같은 것인가. 이제까지 살아온 패턴을 생각해보면...... 나는 바람보단 낙엽 쪽이었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건 나와는 맞지 않았다. 어쨋거나 수비대 청사를 들어가는 거북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지나고, 우리는 담당 형사에게 리겔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취조실이 아니라 별도의 장소에서 면회가 이루어졌다.
“맞은 넘은 잠 잘 자고, 때린 넘은 발 뻗고 잠도 못잔다던디, 옛말 하나 틀린거 하나도 없구마잉. 뭣이 찜찜하다고 또 온거여? 나 몰래 주머니에 뭐 넣어놨었냐?”
“피해자인척 하진 마시죠. 깜방은 원래 잘못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에요.”
느긋한 인사치레로 기선을 잡아보려다가 답답이에게 생각지도 못한 기습공격을 당한 리겔은 순간 당황해서 입만 벌리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뒤에 성난 얼굴로 답답이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에는 ‘니가 뭔데 여기에 껴들고 난리냐?’라는 불쾌한 의문문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하지만 답답이도 이 대목에선 작정을 했는지, 리겔의 시선에도 눈을 떨구지 않고 끝까지 그의 눈을 응시했다. 나로서는 답답이가 평소답지 않게 왜 그에게 강한 태도로 일관하는지 의문이었는데, 아마....... 리겔과 우리 사이에 물리적으로 부수기 어려울 정도로 두꺼운 유리 창문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랬지 않았을까라고 추측을 했다. 리겔은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눈을 감고 심호흡을 수차례 한 뒤에, 주설에게 으르렁거리듯이 물었다.
“그래서 나럴 찾아온 이유가 뭐시여?”
“뭐...... 별건 아니구, 물어볼 것이...... 하나 있어서 그렇구먼.”
“뭔디?”
“만약에 말여...... 우덜이 닐 풀어주믄...... 넌 우덜헌티 뭘 혀줄 수 있겄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주설의 질문에 리겔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코웃음을 쳤다. 탁구라고 하던가? 테이블에 네트를 쳐놓고 밥주걱으로 공을 치면서 서로 주고받는 놀이 말이다. 주설의 질문에 곧바로 웃음이 터진 그를 보니, 왠지 그 경기가 떠올랐다.
“왜그냐? 기세 좋게 사람 갖다가 쳐 집어 너어블고? 뒷감당 걱정이 슬슬 되는거시여? 아니믄 뭐...... 고새 정이라도 들었냐?”
“미운정도 정이니께...... 굳이 정의하자믄 뭐...... 그럴 수도 있겄지? 근디 실은 우덜이 오늘 니네 아부지 산소를 댕겨 오는 길이거든. 거서 니네 아부지 야그를 갖다가 쪼깐 들었는디......”
“...... 뭐여 시벌?”
아버지라는 단어에 그의 눈썹 사이로 내 천자 주름이 잡혔다. 아까 그가 보인 코웃음을 탁구에 비유를 했었는데, 이번에도 그것에 비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음...... 아까 것은 서브라면, 이번 것은...... 엇박자 공격 같은 그런 느낌? 주설에게는 이런 분석을 이야기 해보았자 이해할리도, 설령 이해를 시킨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 불 보듯 뻔한 것 같아.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은 자유니, 마음 가는 대로 훈수를 둬보자면, 주설은 적어도 이때만큼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 상대에게서 공격이 들어오면, 수비적으로 막아내고 인내하면서 자신에게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전술적으로 적절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주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아부지 생각혀서라두 인자는...... 손 씻고 일신 떳떳하게 세금 내면서 사는게 어뗘? 원한다고 하믄 나가 니를 물심양면으로 돠줄 수도 있구......”
“씨벌! 니덜이 거긴 왜갔어!”
역시나 공격에는 공격으로 맞받아치는건 싸움으로 가는 첩경이라는 것은 시간을 관통하는 진리임이 분명했다. 작게는 애들 싸움, 크게는 나라와 나라간의 전쟁이 다 그런 것에서 비롯된 거지 뭐. 주설은 리겔의 스탠스를 헤아릴 생각 없이 자신의 말만을 이어갔고, 그것이 결국 리겔을 폭발하게 만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겔이 폭발하자 주설은 고기를 문 듯 입을 싹 다물었고, 그게 리겔에게는 잔인한 승리감으로 이어져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했다. 리겔은 두꺼운 유리창을 주먹으로 탕탕 치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집어 들고 유리창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간수들이 나타나 리겔을 제지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자는 망해도 삼년을 간다고, 그 부실한 교도소 밥을 먹고도 녀석의 우락부락한 몸은 여전했거든. 결국 간수 다섯 명이 나선 끝에서야 간신히 제지할 수 있었다. 녀석은 꼴사납게 바닥에 쳐 박혔다.
“으아아!! 노라고!! 이 씨.....빨!!”
“거 지나치게 흥분한 거 같은데. 잘 생각해보라고, 너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닐걸?”
“......뭘 해 줄 거냐고 혔제? 솔직히 아까츰에는 뭘 해줘야 쓸까 고민혔었는디, 인자는 확실해구만. 딴건 몰러두, 요거 하나는 확실히 약속혀 줄 것이여....... 살려는 드릴게.”
Channel 2. 아이리스
리겔과의 면회는 저번과는 훨씬 더 좋지 않은 결말로 끝이 났습니다. 음...... 문학에선 이런걸 파국이라고 하겠지요? 어떤 일이나 사태가 잘못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게 파국의 정의이고, 리겔이라는 사람이 주설씨에게 포섭될 수가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 셈이니, 제 단어 선택이 잘못 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함께 수비대 청사를 나서는 주설씨의 얼굴은....... 파국을 맞이한 인물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 저놈 새끼 지독하게 앙칼지네. 안그려유?”
“앙칼지다고요?”
“뭐, 저런 앙칼진 맛이 있어야, 길들이는 재미도 있겄쥬?”
“....... 길들인다고요?”
주설씨의 얼굴에는 묘한 흥분감으로 밝게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첫눈에 이상형을 만난 수줍은 소녀의 모습을 상상했다면....... 미안하지만 그런 장르는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런 사례가 있다고?’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마치 난해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전교 1등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어요. 그녀에게 있어 리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인 것 같았습니다.
“로키.”
“어.”
“며칠 동안 여서 대기 좀 허고 있어야것다.”
“왜?”
“며칠 뒤에 리겔이 나올 예정이니께. 갸가 나오믄 은밀하게 뒤를 밟아줬으면 좋겄구먼.”
“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지?”
“나가 나오게 할라니께 그렇지.”
“......?”
“일단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래두 생각보담 걸리진 않을 거여.”
“그럼 그동안 너네는?”
“밑밥 좀 깔아 놀라고.”
“밑밥이라...... 뭐, 사장님이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로키군은 그녀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주설씨는 그에게 돈을 쥐어주었습니다. 돈을 받아든 로키군은 휘적휘적 인파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제 이곳에는 저와 주설씨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인자 바빠 지겄구먼유. 가볼까유?”
“그런데 주설씨. 밑밥을 깐다는게 무슨 말이에요?”
“아...... 리겔이 우리 헌티 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거쥬.”
“그게 가능할까요?”
“뭐...... 혀봐야 알겄지마는 안 될 거는 없는거 같은디유? 가보자구유.”
주설씨의 안내를 따라 간 곳은 다름 아닌 총독 관저였습니다. 관리인이 우리에게 용무를 물으러 왔다가, 주설씨를 알아보았어요. 하긴......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녀는 잊어버리기 힘든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몇 번 보지도 않은 사이임에도 금방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덕분에 총독님께 다이렉트로 연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인 것 같네요.
“아이고 주사장 왔는가. 안 그래도 한 번 밥 한 끼 먹자고 부르려고 했는데, 이렇게 알아서 찾아왔구먼. 식사는 했는가?”
“안직 안했습니다.”
“아 그래? 그럼 마침 잘되었구먼, 이봐 집사 여기 두 사람 분 식기도 준비하게.”
관리인은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올 때 만큼이나 홀연이 자리를 떴습니다. 뜻하지 않게 총독님과 독대를 하게 된 셈이네요. 총독님은 우리에게 식사를 권하셨고, 우리는 총독님이 첫 술을 뜬 뒤에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총독님은 우리에게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라며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아마 그가 이렇게 우리에게 호의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물건 보낸 거는 잘 받았네. 혹시나 해서 감정사에게 맡겨보니 진짜 천잠사라고 하더구먼. 그런 귀한 거는 어떻게 구한 건가?”
“저희 식구 중에 산꾼이 있습니다. 산누에나방이 사는 곳 뿐 만 아니라 산에 있는 각종 산물들은 죄다 그 사람 손바닥 위에 있는 거라고 보면 되는 거지요.”
“아아, 휴민트가 있었다라...... 뭐 나야 굿이나 보고 비단만 챙기면 되는 것이니 더는 묻지 않겠네.”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사업체를 ‘라거 하우스’에 두었다면서? 그래 거긴 사업하면서 불편한건 없나?”
주설씨는 아마 이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려 왔던 것 같아요. 그녀의 눈빛은 충족된 만족감으로 잔뜩 풀려있었지만, 그녀는 짐짓 괜찮다며 튕겼습니다. 하지만 총독님도 보통내기는 아니어서,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그녀를 채근했습니다. ‘라거 하우스’에서 장사하는데 아무 일도 없을 리가 없다‘라면서 말이죠. 주설씨는 총독님의 채근이 이어질수록 짐짓 손톱을 깨물며 망설이는 모습만 보여줄 뿐,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총독님은 안달이 날 지경이었지요.
“총독각하께서 이렇게 말씀을 허시니...... 정말 암 것도 없지마는, 한 번 굳이 하나를 언급혀 보겄습니다.”
“그래, 말해보게.”
“저희가 장사를 시작헌 ‘라거 하우스’말입니다. 지는 첨에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곳에 쪼금....... 트러블이 있었습니다.”
“트러블? 이렇게 내게 직접 말하는걸 보니 가벼운건 아닌 것 같구먼.”
“잉.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희 선에서 깔금허니 해결을 지었어야 했는데. 저희 능력이 모잘라서....... 송구합니다.”
주설씨의 말을 들으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그녀는 총독이라는 양지의 권력을 활용해, 마피아라는 음지의 권력에 칼을 들이댈 생각이었던 거에요. 그녀가 100만 시민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했던 것은 바로 이런 권력을 등에 업기 위해서였겠죠.
“우리 도시에서 말썽피우는 놈들이라면....... 아마 마피아겠군. 어디보자, ‘라거 하우스’라고 했었지? 이봐, 집사양반 ‘라거 하우스’쪽은 어느 패밀리가 장악하고 있나?”
“샤울라 패밀리입니다.”
“샤울라 패밀리...... 아, 두 달 전에 중앙역에서 깽판 친 그 양아치 새끼들 말이지? 그때 한 번 털고 나서 조용히 찌그러졌다고 하지 않았었나?”
“예. 집중 단속 이후에는 크게 말썽을 부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흠...... 그래놓고 뒷구멍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었다 이거지....... 알았네.”
총독님은 관리인에게 수비대장을 불러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산꼭대기에서 굴린 눈이 점점 세를 불려 산사태를 일으키는 것처럼, 일은 이젠 주설씨의 손을 떠나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제 3자인 저만 해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주설씨는 얼마나 불안하고 떨릴까요, 저는 주설씨의 모습을 슬쩍 살펴보았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아까와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어께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어요.
“흠...... 여기서 수비대장을 만나면 조금 껄끄러우려나? 일단, 내가 수비대장에게 잘 말해놓을 테니, 자네들은 가서 일들 보시게.”
“감사합니다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