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87

갑과을 작성일 19.07.09 00: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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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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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다고 한다면 한없이 길었을 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녀석은 녀석대로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갔고, 나 역시 나대로 열심히 하루를 살아갔다. 오늘 역시 그러했다. 천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깃들어 사는 이 도시는 불야성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단 한 순간도 고요한 순간이 없다고 단언하는건 오만함의 발로일 것이다. 지금 나와 리겔은 24시간을 헤아리는 하루 중에서 이곳 라스알게티가 고요 속에 잠기는 지극히 짧은 시간에 왕도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루 내내 이 도시 위로 켜켜이 쌓여온 욕망의 흔적들을 정리하는 청소부들과, 하룻 동안 대륙을 흔들어놓은, 그리고 앞으로 대륙의 시선을 사로잡을 소식들을 전달할 배달부들만이 도시 속 바둑판 선 위로 걸어다니는 이 시각에, 나와 리겔도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 절대적으로 볼 때는 온난했음에도,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오매, 그려두 새벽이라고 춥긴 춥다잉?”

 

가슴팍을 후비는 쌀쌀함에 리겔이 몸을 떨며 옷깃을 여몄다. 숙소를 나설 때만 하더라도 내가 입은 옷을 보면서 여름에 뭔 염병이냐?’라고 비웃었지만,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지. 녀석의 얕고 좁은 시야를 비웃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계재가 아니다. 나는 메모지에 적힌 주소와, 블록을 엉성하게 쌓아 올린 것 같은 따개비 집들에 걸린 주소를 비교해 가면서 메모지의 주소를 찾아나갔다. 하아...... 진짜 야맹증은 내 평생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야야, 그쪽이 아녀. 여그 아니냐?”

?”

쩌그는 아이언 마운트 쪽이제. 하이고...... 몇 번을 오는디 여적꺼정 길 하나를 못 찾아브냐.”

내가 야맹증 때문에 그런다고 몇 번을 말했던 거 같은데. 한 식구끼리 서로 존중 좀 해줍시다?”

존중을 받고 싶음...... 받게 좀 허시든가요.”

 

리겔은 내가 가려는 곳과 반대편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까딱였고, 나는 더는 군소리 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근디 오늘은 좀 빨리 나왔다? 왜 그러는 거여?”

급하게 연락이 왔어. 다른 사람들 시선 안 받고 싶다던데.”

작것이 미쳐가지고 그럴 거 같지는 않구...... 뭔가 껀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인자사 지대로 허네잉.”

 

리겔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녀석의 집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흐음. 녀석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 정말 리겔의 말마따나 작것이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걸까? 일단 도착은 했으니 기다려보기로 하지만...... 문 너머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느낌이 좀 쌔한데?

 

씨벌것이 사람을 불렀으면 지가 나와서 기다려야 할 거 아녀? 아조 약 몇 번 주워 묵드마는 우리를 일개 짱깨로 아는 갑구만.”

잠깐만 기다려보지.”

기다리긴 뭘? 시간이 금인거 몰러? 저런 것은 저잣거리에 거꾸로 매달아서 아조 개망신을 줘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리겔이 대문을 걷어차려는 차에, 뭔가를 발견한 듯 제자리에서 멈춰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가 무엇을 발견했나 싶어 후다닥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게.......”

사람 시선을 받고 싶지 않다더니,..... 이걸 주려고 했나보군.”

 

초인종 아래에 조그만한 메모지가 접혀있었다. 리겔은 내게 그것을 흔들어보였다.

 

뭐라고 적혀있냐?”

쪼깐만 기다려봐라잉 나도 어두워가꼬 보기가 쪼깐 곤란한께....... ...........장소는.....? 오매, 요것이 회합장소를 알려줄라는 갑소?”

더 읽어봐.”

아따 성격 징허게 급하네. 안 그래도 읽을 라니까 그만 좀 볶아봐라잉. 긍께 회합 장소가...... 어디여 이거?”

어딘데?”

스톤메이슨이 어디냐?”

스톤메이슨이면...... 도시 밖인데?”

그려?”

. 라스알게티 북쪽에 무르짐 산맥이라고 있거든. 그쪽에 석수장이들이 모여 사는 촌락 같은 게 있다.”

석수장이덜 있는데믄 사람도 쩍겄다. 산중이믄 째기도 편하겄다...... 고것들이 나름 짱구를 굴렸구먼?”

근데 그거 말고 더 없냐? 지들끼리 만나는 거라든지......”

그 이상은 없는디? 그 이상을 불어블믄 지 입장이 난처해 질거라 이건가?”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녀석의 메시지에 답을 주어야겠다 싶어, 리겔에게 쪽지를 받아들고 거기에 내가 가지고 다니던 붉은 리본을 매어놓았다. 혹시나 녀석이 나의 깊은 뜻을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기에, 나는 메모지에 메모를 추가했다. 회합에서 얼굴과 몸통이 분리되고 싶지 않다면, 리본을 매달고 회합에 참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녀석의 목숨을 붙들어 줄 구명줄이 될 것이다.

 

 

 

 

 

 

 

Channel 2.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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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로키군과 리겔이 돌아오고 난 뒤에 숙소 분위기가 사뭇 분주해졌습니다. 로키군과 리겔, 주설씨는 라스알게티 광역지도를 꺼내놓고 PBRC의 회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스톤메이슨이라...... 좀 아는 게 있는가?”

내가 아는 건 그곳에 석수장이들의 촌락이 있다는 거?”

석수장이들이믄....... 어디보자. 아무래도 대리석이 많겄구먼.”

? 주사장, 거그를 가봤소? 어찌 그리 생각허씨요?”

여그 건축물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된거 아녀. 근디 도시 근처에 석수장이덜 사는 곳이 있다믄, 암만혀두 대리석 산지일 가능성이 크겄지. 안그려?”

음마 주사장은 가끔 가다 보믄, 제법 총명헌 구석이 있당께로.”

사업허는디 그 정도는 혀야지.”

 

리겔과 주설은 쿵짝을 맞춰가며 낄낄대다가, 로키군의 주의에 이내 대화에 집중을 했습니다. 이쯤되면 로키군이 왜 이렇게 둘을 닦달하는지 궁금해 할 텐데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없다. 20분 뒤에 녀석이 올 거야.”

 

알샤인씨 때문이죠. 로키군이 저번에 제게 말했듯, 이 일은 알샤인씨가 모르게 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알샤인씨는 호위를 맡으면서 우리를 점점 의구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거든요. 경호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The Cloud는 평온했고, 오히려 갈등과 사고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거든요. 주설씨는 그에게 수비대의 경호 덕분에 그들이 얼씬도 못하는 것 같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사건이 터지는 곳들 또한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건 마찬가지였거든요. 만일 주설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고 해도 문제는 문제에요. 안전해졌으니, 수비대가 더이상 이곳을 지키고 있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일단은 행동을 따로 혀야것어. 난 알샤인의 시선을 잡아둘테니께, 로키허구 니는...... 스톤메이슨을 살펴봐봐. 그리고 아이리스씨는.......”

 

저를 바라보는 주설씨의 눈에서....... 주저함이 느껴졌습니다.

 

여그 좀 봐주실 수 있겄어유?”

“.......”

 

주설씨를 보노라니, ‘여부가 있겠어요? 마음 놓고 다녀와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제 혀에서 꺼내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들이 하려는 행동이 타인의 생명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게 분명해 보였거든요. 그래요. 우리들은 상당히 어색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이용하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저는 그것에 부역할 생각은 전혀 없었거든요. 평행선을 이루며 나아가는 우리의 관계는 대륙의 끝까지 가도 결코 가까워질 수가 없을거에요. 그나마 최소한의 합의를 했다면...... 그들의 행동을 고발할 때는 사전에 미리 통보하기로 한 정도? 사실 그것도 저로선 모험이에요. 물론 제 신변을 보호하기로 한다는 조건 하에서였지만......수단 방법 가릴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는 것 같은 그들로선 제가 고발을 감행한다면...... 실제로 제 안전을 보장해줄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아따 징허네. 야 이년아. 언제꺼지 성인군자 코스프레질을 할 참이여?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모른 척 해불면 될 거를 갔다가 기어코 강짜를 부려쌓네......”

그만혀.”

주사장도 주사장이요. 이 시건방진 년을 언제꺼지 보듬을 작정이요? 끌어안고 가는 것도 주판알 퉁겨가며 해야제 하한가를 열흘 넘게 쳐싸서 개잡주 다 된 년을 언제꺼정 손절 안하구 붙잡고 있을 참이여라?”

야 임마. 리겔!”

니는 새끼야. 깜빡이 켜지 말고 아가리 싸물고 있어라잉. 설득시켜 델고 오라고 해놨드만 뭔 짓거리를 해놨는지 야가 가을철 전어맹키로 독기가 탱탱하게 올라있게 맹그냐. 사태 좆같이 맹근거는 팔 할이 니 지분이여.”

“......”

 

두 사람의 입에 꿀을 발라버린 리겔은 이제는 네 차례다.’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작정한 듯이 제게 악다구니를 쏟아냈어요.

 

성당이 좆같음 수녀가 떠나면 될 일이제, 니는 여그에 뭘 뜯어먹을게 있다고 남아있냐? ? 앉아서 가만히 밥이나 축내는 년이 꼬라지는 꼬라지대로 존나게 부려싸 아조. 니가 갑이냐? 갑이여? 밥이나 축내지 말라고 할 일 떡하니 맹글어주믄 고맙다고 절은 못할망정 도끼눈 뜨고 째리고 앉았네. 아야, 고러게 째리믄 누가 쫄거 같냐? 아조 내가 가만히 있으니께, 좆으로 보이제? 나가 지금은 니들 덕분에 어거지로 갖다가 손 씻었다지만 샤울라 패밀리에서......”

 

이상한 일이지만...... 리겔의 폭언을 듣다보면 차라리 이게 더 마음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못한 두 사람에 비해 이 프로하기온 출신의 억센 양아치는 저에 대한 증오심을 정말 뜨겁게 표현하고 있잖아요. 어색하게 변죽만 울리다 매너리즘이라는 바닷속에 서서히 가라앉는 것보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단 한 번이라도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 노골적인 증오심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갑이냐고? 갑이지! 주식회사엔 주주가 갑 아니야? 내가 이곳에 뭘 뜯어먹으려고 남아있냐고? 배당 뜯어먹으려고 남아있다 이 새끼야! 막말로 너는 삼민상단에 지분이 한 푼이라도 있기나 하냐? 우리 지분으로 월급이나 받아먹는 새끼가 도끼눈? 째려?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여기에 내 전 재산을 투자한 줄 알아? 꺼지라고? 꺼질꺼면 니나 꺼져 이 새끼야!”

 

제 악다구니에 리겔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연신 씩씩거렸지만, 더 뭐라 하지는 못했어요. 거칠게 있으면 그대로 밀어버릴 것 같은 이 남자가 제 말에 꼼짝도 못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며칠 전에 주설씨에게서 경제 공부 좀 하라는 말을 듣고 며칠 관련 서적을 뒤적거리더니,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은 이해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아득바득 애를 써 왔던 것 같지만.......

 

씨벌련이...... 헐거면 그냥 허겠다고 말이나 허지는.......”

 

아까의 악다구니로 리겔은 멘탈에 상당한 손상이 간 듯 했다. The Cloud를 나서기 직전까지 사뭇 의연한 자세로 멀쩡해온 녀석은, Cloud 대문을 나서자마자 먼지덩어리가 내려앉듯 폭삭 무너져버렸다. 그는 뭐만 하면 재채기 하듯 연신 씨벌련이......’라는 말로 화두를 떼었다.

 

그렇게 억울하면 너도 주주나 하던가.”

돈 버는 족족 가족헌티로 보내부는디 뭔 돈으로 주식을 사겄냐.”

그래도 너 살 돈은 남겨둘 거 아냐. 그 돈 아껴서 사야지 뭐 별수 있냐?”

그래봐야 동전 주 밖이 못 사는디 어느 천 년에.”

동전주도 잘 뒤져보면 대박 터뜨릴 아이템이 하나 정도는 나올걸?”

 

리겔은 내 대답에 화가 났는지 뭐라고 하려다가...... 됐다고 손사래를 쳤다. 세상에...... 리겔 녀석이 이토록 의기소침해진 건 처음 본다. ‘돈이 깡패다.’라는 조상들의 금언은 이 얼마나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의 산물인 것인가.

 

됐고, 지도나 잘 표시혀라.”

안 그래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걱정은 말고.”

 

나는 리겔과 함께 스톤메이슨의 지형을 살펴보고 있었다. ...... 지형 살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저렇게 닦달이냐, 답답이와의 대거리가 그렇게 리겔을 민감하게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절반은 맞다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이 민감해진건...... 그것만이 아니었거든. 모르긴 몰라도 나머지 절반 중 상당비율은 우리의 작업 진척이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감정을 조절당하는 나조차도 고역일 정도로 이 작업은 상당히 짜증스러운 요소로 점철되어 있었거든.

 

나와 리겔은 석수장이들의 눈을 피해가며 일정거리를 두고 땅을 팠다.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만큼 시청공무원으로 보일만한 의상을 입고서 열심히 땅을 천공해갔다. 구멍이 뚫린 관을 땅에 슬쩍 박고, 깊이 박힐 때 까지 사정없이 헤머로 두들겨야 한다. 한참의 작업 뒤에 관을 꺼내는 거지. 관이 땅에 박혀 들어가면서, 지표면 아래의 지질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고된 작업이었지만, 나름 효과는 있어서, 지도는 근방의 지층에 대한 정보로 조금씩 조금씩 채워져 갔다. 주설의 예상대로 이 근방에는 엄청난 크기의 대리암 지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쯤되믄 시나브로 나올 만도 헌디....... 어라?”

너도 느꼈냐?”

. 니도 느껴붓냐?”

 

무슨 말인고 하면, 이전과는 달리 지금 이 시점에 관입을 할 때는, 순두부에 못질을 하는 것 같은 묘한 공허감이 들었다. 그렇단 이야기는....... 우리는 일단 관입 작업을 그만두고 후다닥 관을 꺼내보았다. 역시나...... 그래, 드디어 찾은 것 같다. 관의 바깥에 묻은 흙의 양과, 관 안쪽에 묻어있는 흙의 높이에 차이가 있었다. 이 시그널이 의미하는 바는......

 

찾은 거 같지 않냐?”

응 그런 것 같군. 이제 그럼 크기를 측정해 보자고.”

 

이 땅 아래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애타게 찾아온 우리로서는 마침내 성과를 냈다는 것을 의미했다.

 

 

 

 

 

 

 

Channel 2. 아이리스

 

인간은 신에 의해 던져진 돌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기는 하는데요. 수학을 필두로 정말 다양한 방면의 학문에 엄청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 한 말이에요. 그가 이 말을 하게 된 데는 철학과 신학의 오랜 주제인 왜 신은 완벽한데 악이라는 쓸데없는 것을 만들었는가. 그러니까 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자유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다보니...... 당위적인 것을 추구할 때도 있지만,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행동할 때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 ‘이라는 것은 아버님께서 인간을 만들기 전에 미리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과 같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또 그는 악과 약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독을 잘 관리하면 약이 되고, 반대로 약을 잘못 쓰면 독이 되듯이, 악이라고 하여 사람을 반드시 타락시키고 선에게서 등 돌리도록 만드는 것으로만 작용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극복했을 때, 찾아오는 미덕과 그로인한 행복감을 더욱 고양시키는 양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거에요.

사람이 돌을 집어던졌을 때, 돌은 하늘을 날며 나는 자유다!’라고 생각하듯, 인간 역시 에 의해 하늘로 집어던져졌고, 그 뜻에 따라 날아가면서 나는 자유다!’라고 외칠 수도 있는거에요. 그렇다면,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아버님의 의지와 대립되지 아니하고, 하나로 합일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말이 많이 장황했는데요, 적어도 이 상황은....... 주설씨의 자유의지가, ‘아버님의 의지와 충돌하는 현장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주설씨의 당초 계획은 알샤인씨의 시선을 자신이 붙들어두고, 그러는 사이에 로키군과 리겔이 스톤메이슨의 지형을 확인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사이에 제가 The Cloud를 돌보고요. 그 자체로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계획이었습니다만......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조금은 어그러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주설씨는 The Cloud를 나섰지만, 알샤인씨는 그녀를 뒤따라가지 않았어요. 대신, 자신의 동료 직원에게 그녀의 호위를 맡겼습니다. 덕분에...... 저는 그와 둘이서 상당히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아...... 이럴 줄 알았다면 주설씨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걸 그랬나 봐요.

 

식사는 하셨어요?”

네 잘 했습니다.”

....... 그러시구나......”

 

뻘쭘한 분위기를 깨보고자 간단한 화제를 꺼내보았지만, 그의 단답형 대답은 화채 썰 듯이 화제를 쓱 잘라버리더라구요. 이거..... 가만 보면 이 남자는 로키군의 캐릭터랑 조금은 겹쳐지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물이라도 조금 드실래요?”

아닙니다. 아 그리고, 저를 너무 의식하시는 것 같은데, 그냥 편하게 계세요. 저는 신경쓰지 마시구요.”

....... 그러죠 뭐...... 그럴게요.”

 

세상에...... 저렇게 표리부동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사람을 잔뜩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는 편하게 있으라니...... 그의 이런 언행불일치에 대해선 참 해줄 말이 넘쳐흐르긴 하지만...... 별수 있나요.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선 망쳐놓아선 안될 일이니 그냥 참고 넘길 수밖에요.

 

저는 자리에 앉아서 알샤인씨의 행동을 흘긋흘긋 관찰하고, 알샤인씨 역시 가게를 보는 동안 저를 흘긋흘긋 지켜보는 듯 했습니다. 이런 눈치게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 음 날씨가 좋죠?”

그러게요. 이맘 때 쯤이면 쪄죽을 텐데. 비교적 시원한 편이네요. 요즘은.”

 

저는 마지막이다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시 한 번 화두를 던져보았어요. 그런데...... 천만 다행이게도, 그는 이번에는 제 화제를 받아주더라구요. 다행이다 싶어 저는 냉큼 여러 화제를 꺼내었습니다. PBRC이야기며, 주설씨에 대한 이야기며...... 그리고.

 

진짜 그 일 때문에 비상근무를 돌리느라 집에 못 들어간 지 몇 달 됐어요.”

허어...... 그럼 저희 호위를 마치고 나면......”

서로 돌아가서 수사상황을 공유 하죠.”

그 나쁜 놈을 하루 빨리 잡으셔야 할 텐데......”

그러게요. 그래도 저는 조금은 나은 편이에요. 호위 업무를 맡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탐문하러 다녔을 테니까요.”

 

몇 달 전부터 이 왕도를 시끄럽게 만든 가면 살인자이야기 까지 말이에요.

 

 

 

 

 

 

 

Channel 1. 로키

 

지도작업과 천공작업을 동시에 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우리는 해내고야 말았다. 리겔은 울먹거리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는....... 거대한 얼룩이 번진 잉크마냥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오매.......기어코 해냈네잉. 인자 좀 쉬자.”

고생했다.”

잉 니도 욕봤어야.”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천공 장비들을 내던져버리고 바닥에 드러누워버렸다. 곧 장마라더니, 확실히 그런 모양이다. 라스알게티 쪽으로 잔뜩 물을 머금은 먹장구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거든.

 

근디말여.”

응 뭐?”

작전대로 혀블믄, 아덜이 싹다 디져버리는거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갸덜이 살아있어야. 우리덜헌티 PBRC 넘덜이 앙심을 품을거 아녀.”

...... 그럼 폭탄을 살살 터뜨리면 몇몇은 살지 않겠어?”

왐마 이 새끼 근자에 개소리가 솔찬이 늘었다? 칼도 살살 쑤셔블먼 안 디진다랑 뭐가 다른거여?”

 

리겔은 내 말에 낄낄대며 웃어제꼈다. 리겔의 걱정은 충분히 그럴법 했다. 사람의 발 밑에서 폭탄을 터뜨려버리면 과연 몇이나 살아남겠는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이게 있으니까 괜찮을거다.”

 

나는 알기에바를 슬쩍 발동시켜서 그의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리겔은 천진스러운 얼굴로 알기에바의 촉수를 톡톡 건드렸다.

 

시상에나...... 요로코롬 신기헌게 다 있다잉. 너그 하샤신덜은 다들 요런거를 기본옵션으로 달고 댕기는거냐?”

기본 옵션은 아니지, 너도 눈치 챘겠지만, 내가 좀 특별한 편이잖아?”

츰에는 뭔 개좆밥새끼가 뭣헌다고 우덜 패밀리 나와바리서 객기를 부려쌓나 혔는디...... 믿는 구석이 있을 줄은 1도 몰랐제.”

인생무상이지. 마피아 패밀리가 목도리에 괴멸당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려도 인자 생각해불믄 차라리 잘됐제. 나라고 은제까지 고로코롬 살 수도 웂는 노릇인디...... 대장자리까지 혀묵는건 생각도 못한터라, 언젠가는 손 씻어야제 손씻어야제 하고 있었제라. 근디 뜻하지 않게 은퇴가 아니라 명퇴를 당할 줄이야.......”

남이 손 씻겨주면 느낌이 어떠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구 모지리년하구 화해하믄 부탁한번 혀봐라.”

손 씻겨달라고? 미친놈이 또라이 소리하네.”

둘이서 그 정도 사이는 되는거 아녀?”

그만 해 이 새끼야.”

 

리겔과 아무 말 대잔치를 한 뒤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공장치를 챙겨 라스알게티로 내려가기로 했다. 지형 정찰은 이만하면 됐고, 아까 말했던 장비들을 사야지.

 

 

 

 

 

 

 

Channel 2. 아이리스

 

그냥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꺼낸 이야기였지만...... 생각보다 그가 꺼내놓는 이야기들 하나하나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내용들 뿐이어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래서요?”

공소권 없음으로 끝이 나버렸죠 뭘. 좀만 더 하면 잡아넣을 수도 있었을 텐데......”

...... 정말. 피해자들은 적잖이 원망했을 것 같아요.”

그게 또 다른게.......”

 

알샤인씨는 머뭇거리며 다음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지만, 이미 이야기에 빠져든 제 눈을 본 이상, 그러기는 쉽지 않을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알샤인씨는 은근이 수다쟁이 기질이 조금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점에서 저는 최고의 관객인 셈이겠지요. 그래도 그는 수다쟁이인 한편으로 공무원 이기도 했기에...... 한참동안 뜸을 들이며 계산기를 두드려 보더니, ‘이정도 까지는 이야기해도 되겠지라며 마저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피해자들 조합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더라구요. 죽여줘서 정말 고맙다고......”

?”

 

알샤인씨의 말을 잠깐 멈추고 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귀를 후벼팠습니다. 죽여줘서 고맙다니...... 그럼 그들이 떼인 돈은 어쩌구요?

 

사실...... 이건 법률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우리 나라에선 사기죄가 정말 많아요. 사기를 저지름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수익에 비해, 처벌은 정말 솜방망이 급이거든요. 그리고 사기로 인한 피해를 돌려받는 경우도 20% 남짓하구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피해자들도 자신의 돈을 되찾으리라는 건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는 거겠네요?”

그렇겠죠. 변호사들을 신물나도록 만나봤을 것이고, 검사들의 이야기도 들었을테니...... 사기죄로 잡혀봤자 아무리 오래 징역을 살아도 10년이고, 그나마도 항소를 하면 감형이 된다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겠죠.”

그러니 내 피 같은 돈 사기 친 사람을 법으로 제대로 처벌할 수 없다면.......”

그런 점에서 진짜 교묘한 놈 인거죠. 자신의 범죄행위를 사람들이 옹호하게 만드는 거니까요.”

...... 법을 어떻게 더 엄격하게 할 수는 없는거에요?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거나 다름이 없는 타격을 입는건데......”

이거 참......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아 더 말하기는 어렵네요.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형평성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사기범이 아무리 악랄해도 살인자만큼 나쁜 놈들은 또 아니잖아요. 잘못한 만큼 벌을 준다는 것이 법률의 대원칙인 이상 그보다 더 무거워지기는 사실상 어려운게 현실이에요.”

그러니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살인마도 출현하게 되는거겠구요.”

법이란 게 결국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보니...... 그래서 자주 개정되잖아요. 경전은 세월과 무관하게 변함이 없지만 법은 그에 비한다면 정말 자주 바뀌는 편이죠. 완벽하진 않다는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점진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거죠.”

이야기 들어보니까, 가면 살인자라는 말보다는 사기꾼 사냥꾼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아요.”

그래서, 언론들과는 달리, 우리들은 그놈을 사기꾼 슬레이어라고 불러요. 일종에...... 은어죠.”

 

알샤인씨는 씁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여론을 호도하는 범죄자....... 정의를 가장하여 정의 행세를 하는 살인마......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기사단으로서 얼마나 그 사람을 잡고싶어할지, 그 심정을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알샤인씨의 가방에 저렇게......

 

이건 증거품이에요?”

...... 네 뭐 그렇죠. 그놈이 현장에 두고 간 가면이에요. 조금 부끄럽긴 한데, 부적처럼 쓰고 있어요. 언젠간 그놈을 꼭 잡아서, 그 가면을 벗겨버리겠다는....... 그런 동기유발 장치라고나 할까요?”

 

가면살인마의 가면을 넣고 다니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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